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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불온성, 절규성, 역사성

신경림·정희성·이재무 시인을 중심으로

 

 

김춘식 金春植

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강사. 주요 평론으로 「조각난 시간」 「역사의 폭풍」 등이 있음. achron@hanafos.com

 

 

1. 혼돈의 숲

 

신경림(申庚林) 시인의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2002)과 정희성(鄭喜成) 시인의 『시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 2001)에는 각각 두 시인의 시론적 에쎄이가 실려 있다. 두 시집의 출간 시기가 일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두 시인 모두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이 에쎄이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어떤 문제의식의 공유를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정희성 시인의 글이 1997년에, 그리고 신경림 시인의 글이 2000년에 씌어졌으므로 약 3년여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두 산문은 90년대 이후 퇴조하기 시작한 ‘민중시’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적 전망에 대한 모색을 핵심적인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급변하는 시대환경과 시의 부조화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만들고 있다.

변덕스러운 시대정신에 의해서, ‘사회성’의 내포와 외연이 급격하게 변동하는 와중에, 이 두 시인에게 피부로 다가온 근본적인 문제의식 혹은 위기감은, ‘사회성’이라는 것의 절대적 기준이 무너졌을 때, 시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의 글이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고, 정희성 시인의 글이 “시를 찾아나서며”인 점이 이것을 잘 나타낸다. 이러한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실제로 ‘문학의 사회성’이라고 하는 단단한 공준(公準)의 붕괴와 약화과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문학에서 ‘사회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때 문학은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시인은 여전히 시인으로서의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두 시인은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고 있다.

정희성 시인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비평사 1991)의 후기에서, “일상을 그냥 일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한 거기에 시는 없다. 일상 속에서 심상치 않은 인생의 기미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맡겨진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외친다. 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지 않고 당신들의 당신들의 당신들의 가슴을 울리기를 기대하면서”(105면)라고 했고, 『시를 찾아서』에서는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우리의 낭만적인 환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인은 불가피하게 현실주의자가 되기는 하여도 본질적으로는 천진한 낭만주의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79면)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83면)라고 말한다. 이런 일련의 발언은 “말의 시끄러운 소란” “허울좋은 수사”로 전락해버리는 ‘자유’와 ‘민주’ 그리고 ‘시의 사회성’에 대한 ‘내면적 투쟁’을 암시하는 말로 여겨진다.1

그리고 가장 최근에 정희성은 “내가 내 땅에서 떨쳐버리지 못한 누더기를 인도라고 해서 버릴 곳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세계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은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불연속적인 몇개의 이미지」, 『시와 사람』 2002년 봄호 150~51면)라는 발언을 통해서, 그러한 내면적 성찰과 투쟁의 본질을 ‘사회성’이라는 틀 안에서 새롭게 확인한다. 이 발언 속에는 ‘자유’의 본질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의 간극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시에 관한 문제의식도, 이 두 시인에게는 존재의 자유와 사회라고 하는 환경이 근원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간극에 대한 고민에 다름아닐 것이다. 존재의 해방과 문학의 자율성,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공동체라는 가치율의 분열에 대하여 이 두 시인은 각각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 두 시집을 통해서 다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의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시의 사회성을 먼저 묻는 것이 아니라, 시의 본질과 기능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시와 시인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이 두 시인의 성찰은 그만큼 근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한국시는 내면화와 서정주의로의 지속적인 진행과정을 밟아왔다고 여겨진다.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세계화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과 함께 근대의 종착점을 알리고 있고, 이런 내외적인 상황이 개인의 존재형식과 생태환경에 대한 일련의 관심을 촉발시킨 결과가 최종적으로 한국시의 내면탐구와 서정주의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최근의 서정주의와 미학주의의 추세에 대해서는 몇몇 비판적인 논의가 있었고 그 비판이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2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역설적인 문제점은 동일하게 노출된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서 김수이(金壽伊)는 자연과 과거의 시간에 대한 경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배후와 맥락을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비판한다.3

2001년 이후 최근까지 간행된 나희덕·허수경·박형준·이홍섭·이재무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뛰어난 시집이 자연 혹은 내면과 과거의 시간을 부각시키는 기억의 화법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현상이 우려되는 ‘유행’이라기보다는 일정한 맥락과 배후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경림, 정희성 시인이 시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다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과 이들 젊은 시인들의 미적 성취 사이에는 시를 둘러싼 견해 차이와 간극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맥락과 배후는 하나의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의 사적 영역과 자율성, 그리고 사회성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가 아닐까. 오랜 동안 화해할 수 없이 양편 언덕에서 팽팽하게 대립되어 있던 두 개의 가치율 사이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 다리를 놓으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도전’의 과정에서,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는 또다른 혼란이다. 두 중견시인의 생각과 젊은 시인들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시의 공동체성과 사인성(私人性) 사이의 거리, 내면과 역사의 단절, 시의 자율성과 사회성 사이의 관념적 혼란이 시를 더욱 어려운 대상으로 만든다. 과연 불온성이란 무엇인가, 역사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성·절규성이란 무엇인가. 지나간 시간의 궤적들이 남긴, 고약하게 뒤엉킨 관념의 숲에서 과연 우리는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이 어려운 혼돈의 숲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2. 역사적 시간과 일상적 경험세계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그의 시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시간과 시가 서로 모순된다는 점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한다.

 

“시는 시인과 사회의 언어, 리듬, 신념 및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는 제한된 역사와 제한된 사회의 산물이지만, 시의 역사적인 존재방식은 그러한 방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반역사를 창조하는 것이 시인의 의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시는 반역사를 창조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시의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역행시키기도 하고 변형시키기도 한다. 시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모순되기도 하고 시간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바로크의 소네트나 대중 서사시나 우화를 언급할 때에, 그러한 것들에는 역사에서의 시간이나 또는 우리들이 실제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시간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와 시의 모순을 모든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현대에는 그러한 모순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시론: 진흙 속의 아이들』, 윤호병 옮김, 현대미학사 1995, 5~6면)

 

시와 역사적 시간의 모순에 대한 이런 진술은, 근대 이후의 시간관에 대한 그의 진술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시간의 주기적 반복과 영원회귀의 관념을 애초에 지니고 있지 않은 기독교적 우주관에서 배태된 근대적 시간은 ‘끊임없는 질주’ 그리고 ‘과거와의 결별’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런 과열된 시간의 질주는 각각의 계기적 시간들의 ‘타자성’ 즉 상호간의 차이와 분리를 강조한다.

이런 생각은 빠스뿐만 아니라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미적 현대에 관한 글에서도 종종 나타나곤 한다. 어제·오늘·내일은 계기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그 계기성은 끊임없는 분산과 분리, 결별의 과정일 뿐이다. 오늘은 과거로 회귀할 수 없으며, 미래는 현재로 섣불리 소환되지 않는다. 이런 불완전성과 유한성에 대한 한계의식이 다른 한편으로 시간의 통일성에 대한 신념을 불러오며, 그러한 신념의 구체적 형태가 미래적 시간에 대한 낙관과 기독교적 구원신앙에 바탕을 둔 ‘영원성’의 관념이다. 최후의 심판 혹은 죽음, 그리고 진보적 미래에 대한 역사주의적 낙관론의 기원이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반면, 시의 현대성은 언제나 이런 시간의 질주로부터 이탈되어 있었고 ‘충만한 현재’ 등의 개념을 통해서 시간의 타자성과 차별성을 무화하고자 한다. 낭만주의 이후의 시에서 우리는 이런 세속화된 기독교적 시간의 질주에 대한 불안과 그 차별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영원성에 대한 동경 그리고 ‘순간’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시간에 대한 부정은 현대성의 자체적 운동 속에서 저절로 형성된 감각세계의 독특한 경험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즉, 너무 빨리 질주하는 시간이 오히려 추방된 시간들의 차별성을 붕괴시킴으로써 모든 시간이 동시성 속에 융합되어버리는 현상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의 경험세계에서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명확한 구분점이 사라지고 있고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의 이분법이 소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이 『뿔』에서, “새롭지 않은 것은 오직,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이라고 말한 것은 이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아우라’의 소멸을 말했을 때, 현대 예술은 이미 ‘오리지낼러티’와 ‘개성’을 상실했다는 선언에 직면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매너리즘’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창조적 주체의 소멸’ ‘끊임없는 영향의 불안’은, 가속도의 시간 속에서 모든 차별성과 타자성이 역설적으로 무화되어버린 현대적 ‘생활세계’의 혼탁한 공기에 몸을 섞을 수밖에 없는 예술의 숙명을 잘 대변해준다.

역사적 시간과 일상적 경험세계의 시간, 그 틈새에 끼여 있는 불안한 동요의 시간이 곧 시적인 ‘시간’이다. 역사적 시간의 회귀 불가능성을 초월하려 하지만, 차이성을 무화하는 생활세계의 질주는 그런 초월의 의지를 ‘건조한 일상’ 속에 꼭 붙잡아두려고 한다. 예술의 일상에 대한 반란은, 그래서 “거부이고 바로 조금 전의 과거에 대한 비판이며 지속성에 대한 방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예술의 다른 반쪽은 역사적 시간의 끊임없는 차별성에 대한 반기로서 ‘영원성’과 ‘동경’ 그리고 ‘주기적 반복’을 앞세운다. 한정된 역사적 시간이 아닌 ‘무한한 시간’의 되풀이에 대한 이런 관념은, 낭만주의 이후 ‘아우라’, 즉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현대시의 모순성은 이런 역사적 시간에 대한 태도와 생활세계의 감각에 대한 부정 사이에서 주로 발견된다. 거부와 동경, 단절과 교감이라는 불안한 양면성이 현대시의 불안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아이러니’이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는 이 점에서 여러 가지로 시선을 끄는 작품이다.

 

이사할 적에는 새 바람 새 빛을 바랐나 보다.

그래서 나는 실망한다, 십칠년 만에 이사한 동네가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여서.

그래도 반가워서 이 언덕 저 골목 서성이는데

놀랍구나, 모든 게 이렇게 새롭다니.

 

아기들이 새롭다, 연립주택 낡은 문을 밀고 나오는.

젊은 엄마들이 새롭다, 뒤따라 나오는 헐렁한 옷 속의.

그루터기가 새롭다,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의.

간판이 새롭다, 새로 단장한 머리방의.

 

새롭지 않은 것은 오직,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전문

 

‘지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에 대한 반대명제를 앞세우고 있는 이 시의 제목은 그 자체로 현대성의 경험세계에 대한 ‘위반’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차이가 무화됨으로써 건조한 일상의 권태 속으로 함몰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시인은 ‘예외적 시선’으로 그러한  거짓된 시간의 융합, 차이의 융합을 순식간에 간파한다. 세계는 여전히 융합되지 않은 시간성 안에 있으며, 그것을 폭로하는 순간 감각세계의 흐릿한 이미지에 가려 있던 ‘역사적 시간’은 원래의 활기를 되찾게 되고 모든 것은 새로움의 시간으로 부활한다. “낡은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근대적인 시간의 속성이고 역사적인 시간의 관성이다. 이 점에서 신경림 시인은 이 시에서 여전히 역사적 시간의 위를 걷는 ‘근대인’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상적 경험세계의 반대편에서 “강물은 같은 곳을 두 번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엄연한 역사적 시간의 질주성과 과거와의 끊임없는 결별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과는 또 반대로 역사적 시간이 무화되고 오직 내면 속에서만 재구성된 미학적인 ‘순간’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작품도 눈에 띈다.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답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그 길은 아름답다」 전문

 

산벚꽃이 핀 그 길이 아름다운 것은, 넓은 세상으로 나가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런 구체적인 일상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길에 함축된 역사적인 흔적, 시간의 궤적이 이제는 지워졌기 때문이다. 오직 남은 것은 내면의 길, 즉 상징적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그 길’뿐이다. 물론, 이런 상징적인 ‘길’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역사적 전망에 대한 비관과 같은 역사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황량한 땅과 험준한 벼랑에 이를 것 같아 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역설은 ‘미학적인 가치’에 대한 명확한 자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아름다움이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을 무화함으로써, 이 시 안에는 분열과 결별의 순간들이 하나의 통일된 가치 안으로 집약된다. 미적 가치의 힘은 실제로 이런 ‘분열’에 대한 상상적인 극복을 통해 주로 이루어진다. 고향을 떠나는 길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역사적 시간의 행보 위로 뻗어 있던 상징적인 길이었다면, 지금 시인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그 길’은, 시적 시간의 행보 위로 흐릿하게 뻗어 있는 ‘영원성’과 무한한 시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길이다.

이처럼 역사적 시간과 일상적 감각세계 사이에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것이 시적 현현의 순간이며, 그것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의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내 망막에는 마침내/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실루엣만 남았다.//내게는 다시 이것이/세상의 전부가 되었다.”(「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라는 시 구절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역사적 시간의 다양성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기억과 시적 시간’ 안에서 새로운 가치와 통일성을 획득한다. 반면, 일상의 낡고 비루함은 그런 흐릿한 실루엣 안에서 어느덧 짙은 향수와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마법적인 세계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의 세계이고 미적인 시간의 속성이다.

신경림 시인은 이 점에서 역사적인 행보를 줄기차게 걷고 있으면서도, 그가 회귀하는 지점은 언제나 ‘시적 현현의 순간’인 보기 드문 시인이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라는 말처럼, 그에게 세계는 어느 순간엔 다시 시적 시간으로의 급격한 회귀가 가능한 그런 공간이다.

 

 

3. 불온성과 절규성

 

신경림 시인의 「시인이란 무엇인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찾는다는 일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우리 시가 한번 시도해볼 일이다.” (『뿔』 95면)

이 말은 공동체성과 개인성의 거리, 그리고 내면과 역사의 단절, 시의 사회성과 자율성 사의의 극복을 과제로 제시하는 동시에 90년대 시 전체에 대해 비판적인 일침을 가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절규성의 회복은, 90년대 시의 내면화가 개인성의 문제에만 집착한 나머지 사회성이나 역사성을 상실하고 왜소화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제시된 하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경림 시인의 지적은, 일정한 시적 성취를 거두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생각과는 거리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절규성’의 문제는 “사상이나 감정을 쉽고 보다 힘있게” 표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그러나 무엇인가를 ‘쉽고 힘있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감정과 사상에 대한 ‘인식’과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절규성’은 인식보다는 ‘표출’이 선행하는 본능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쉽고 힘있게’보다는 ‘어렵고 긴박하게’에 해당될 것이다. 본능적인 것이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심연과 상처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절규’는 ‘함성’이나 ‘부르짖음’과는 다른 것이다. 뭉크의 그림 「절규」처럼, 복잡한 외부세계와의 갈등 속에서 내면의 상처를 분출하는 방식을 ‘절규’라고 할 수 있다면, ‘절규성’의 문제는 90년대 이후 ‘침묵’과 ‘요설’의 언어를 통해서 자기의 내면을 표출하고 탐구하고자 했던 일련의 시적 작업을 배제하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창조적 내면과 그의 동시대의 인식론적인 총체, 그리고 사회와 역사가 서로 길항함으로써 엮어내는 역동적인 실체를 우리가 조망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시인들이 그것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언어’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역사주의와 모더니즘에 기반한 ‘불온성’ ‘역사성’ ‘사회성’의 개념 또한 현재의 한국 시단에서는 ‘선입견’이나 ‘편견’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현단계 한국시의 배후와 맥락을 간과한 ‘불온성 시비’는 종종 아방가르드와 순응주의적 서정시의 대립을 재생산할 뿐이기 때문이다.

“일단 자기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언어가 성숙해지면 사람들은 마치 먼 옛날부터 그런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언어를 연마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준 선구자의 노력은 잊어버리고 만다”(사나다 히로꼬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역락 2002, 232면)라는 한 외국인 연구자의 한국문학에 대한 발언을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시인들이 자신의 내면 속으로, 사상 속으로, 감정 속으로 파고들어가 지금도 ‘새로운 말’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이재무(李載武) 시인의 다음과 같은 작품은 시인의 남성적인 언어와 결합되어 ‘노동과 생태’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키고 발견하게 한다.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위대한 식사」 전문

 

인용한 시는 허수경·나희덕·박형준·이홍섭·문태준 등의 시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언어와 시를 개척하고 있는 시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루의 노동이 끝난 뒤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을 나누는 동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밤새 울음이 뛰어들고, “물김치 속으로” 별이 뜨고, 냉수사발에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새까맣게 몰려온다는 표현은 자연과 인간의 삶이 하나로 동화된 장관을 눈앞에 펼쳐준다. ‘식사’와 ‘식욕’이 본능적 욕망의 충족행위가 아니라, 우주라는 화음 속에 같이 박자를 맞추어 분주한 수저질과 달각이는 그릇소리로 신명을 돋우는 위대한 행위로 동시에 승화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가치의 재발견과 함께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알리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흥겨움과 소박한 어투를 타고 노동과 자연이 수식없이 지금 눈앞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성적이고 한편으로는 투박하기까지 한 그의 언어가 아니면, 이런 분주하고도 위대한 식사의 장관은 쉽사리 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섬세한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김으로써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시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재무 시인의 이런 성취는 시의 새로운 전망을 열기에 충분한 것이다.

자서를 통해서 싸리나무 꽃에 대해 그것이 “낭창낭창한 허리의 유연과 탄력의 곡선이 주는 아름다움”보다 “생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쓰고도 아픈 교훈의 매로 먼저 다가왔다”는 그의 표현은, 그의 시세계가 나아갈 수 있는 한 방향을 조용히 예고한다. 그렇듯 그의 시는 낭창낭창하기보다는 해학적이면서 어딘지 천진스럽다.

 

아마 여섯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불장난에 재미 붙여 열중했는데

놀이 지나쳐 그만 울 밖 돼지우리

다 태우고야 말았다 불과 연기에 덴 돼지

길길이 날뛰고 그 소리에 놀란 엄니, 아부지

그리고 이웃들 몰려와

누구 짓이냐 대관절 어느 후레아들놈 장난질이냐

호통 하도 지엄해서 경황이 없는지라

때마침 뽀얀 흙먼지 이는 신작로 멀리

절둑이며 마냥 하 세월로 걷고 있는 용천배기

눈에 뵈길래 저이여유, 저이가 동냥 왔다가

아무도 없다니께 부아김에 불질렀슈 지는

몰러유 울먹울먹 영악하게 잘도 둘러댔더니

저놈 잡아라, 저놈 때려잡아라

자꾸 미끄러지는 고무신 벗어 양손에 들고

고함은 수문 빠져나온 물살인 양 몰려나가고

그인 죄도 없는데 게으르게 누운 길 세워

잡아댕기며 줄행랑치는 거였다

그날 홧김에 아부진 다 죽어가는 돼지 잡고

덕분에 나도 주린 배 실컷 채운 뒤 배탈을 앓았다

죄스러워 부모님께 언젠가는 고백하리라

조막손을 꼭 쥐고 다짐했지만

그 약속 끝내 지키지 못했는데

삼십년도 더 지난, 괴롭고도 즐거웠던

그 일 나는 여직 잊히지 않는 것이냐

삼삼한 그리움으로만 떠오르는 것이냐

어쩌면 아부진 그날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어쩌면 이웃들도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날 이웃들도 아부지도 엄니도

어쩌면 내가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맛있게,

쩝쩝 소리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았을 리 없다

---「그 눈에 삼삼한 그리움」 전문

 

이재무 시인이 기억하고 있는 공동체적 삶속에서의 자연에는 ‘인정(人情)’적인 요소가 강하게 스며 있다. 인용한 시에서도 해학과 웃음이 깊이 느껴지는데, 이 작품에도 ‘인정적’ 요소는 어김없이 담겨 있다. 불에 탄 돼지우리 탓에 떠들썩해진 마을은 이미 ‘축제’의 분위기 속으로 접어들 준비를 끝냈다고 할 수 있다. 조용한 마을에 ‘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렇고, 결국 불에 덴 돼지가 때아닌 ‘잔치상’의 주인공이 될 거라는 사실도 어쩌면 마을사람들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잔치로 접어들기 위한 과정뿐이다.

거기에 시인이 적절하게 둘러댄 거짓말로 사람들은 졸지에 대낮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까지 벌인다. 죄도 없이 도망가는 용천배기의 줄행랑과 그 경황없음에 대한 웃음, 그리고 홧김에 돼지 잡아 잔치를 벌인다. 꼭, 잘 짜여진 축제의 각본 같은 이 이야기는 ‘삶’의 근원에 있는 ‘어떤 해학과 인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거짓말이 마음에 걸려 언젠가 고백하리라 다짐하지만, 죄스러움 때문에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거나 하는 법은 없다. 어쨌든 먹을 건 먹고 보는 것이다. 그것도 배탈을 앓을 만큼.

화자의 이런 천진한 태도만큼이나, 어른들의 태도도 해학적이기 그지없다. 어른이 된 화자가 “그날 이웃들도 아부지 엄니도/어쩌면 내가 고마웠는지 모른다/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맛있게/쩝쩝 소리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을 리 없다”고 말하듯이, 쩝쩝 소리를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내는 어른들에게 이미 이 사건은 ‘하나의 축제’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어떠한 악의도, 이기적 욕망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모두가 ‘쩝쩝’이는 소리만으로도 하늘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두 편의 시에서 보듯이 이재무 시인이 재현해낸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생태이고 조화적이다. 노동과 휴식이, 식욕과 자연이, 웃음과 호통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조화적이다. 이런 상호모순된 것의 조화 속에서, 우주를, 자연을, 생태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점에서 이재무 시인의 최근 시는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성과 공동체성, 시의 사회성과 자율성, 내면과 역사의 불균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무수한 혼돈의 숲을 지나 한국시를 둘러싼 대립적인 수많은 모순들을 하나씩 새롭게 정리해나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시인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탐구하고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시는 하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인들의 길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들이 지나간 숲이 아무리 어두운 혼돈뿐이라 해도,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들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가며 결국 그 숲을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인들은 여전히 모험가이고 개척자이다. 그들은 새로운 언어의 제작자이고 동시에 낡은 언어를 폐기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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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점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우바이」(『시와사람』 2002년 봄호)라는 글에서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시를 찾는 여정이란, ‘허울좋은 시’를 버리고 ‘역사와 진실’을 찾고자 했던 여정과 일종의 ‘가역반응’ 관계에 놓인다. 『시를 찾아서』가 정희성 시인의 80년대 시로부터의 회귀 혹은 선회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전혀 반대의 의미에서 ‘일관성’을 추진해나가는 작업으로 보이는 까닭도 이것 때문이다. ‘허울좋은 시’를 부정했듯이, ‘허울좋은(에피세트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새롭게 말을 배우고 시를 찾는 작업은 전도된 관계이지만 역시 동일한 ‘진실’을 포함한다. 시끄러운 소란이란, 말의 허울좋은 잔치에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가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형식적 수사와 매너리즘으로 전락해 역사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나, 허울좋은 자유가 ‘말의 순수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나 그 본질적 측면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그가 ‘시를 찾아서’ 나선 동기의 순수성을 추리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169면)
  2. 최근의 이런 비판으로 가장 대표적인 글은 김승희 「순수·초월의 서정시와 불순·대항의 열린 시」(『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를 꼽을 수 있다. 이 글의 이항대립적인 단순구도와 최근 시의 흐름에 대한 도식적인 견해에 대한 비판은 졸고 「불온한 정신, 순교의 언어」(『오늘의 문예비평』 2002년 여름호) 참조.
  3. 김수이 「시간의 원근법과 잔여물」,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