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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자료 | 띵 링의 편지

 

띵 링(丁玲)의 비극

 

 

역주 김해양 金海洋

1948년 인천 부평 출생. 『해란강아 말하라』 『20세기의 신화』의 작가 김학철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1950년 중국으로 감. 현재 중국 옌지(延吉)에 거주하며 옌뼨공회간부학교(延邊工會幹部學校) 교장으로 있음. haeyang@mail.jl.cn

 

 

띵 링의 첫번째 편지(1979년 6월 22일)

 

사랑하는 꼬마 해양.

1979년 6월 22일 편지

1979년 6월 22일 편지

너의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정말 한없는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어릴 때의 네 작고 동그란 얼굴을 형용해보고 또 너의 우스꽝스러운 목소리---조선말씨가 어린 중국말 “마오주석 만세” “김일성장군 만세”를 되새겨보았다. 지금쯤은 모든 것이 다 변했을 테지. 하지만 아직도 앳된 재미있는 얼굴 하나는 그대로일 테고, 다만 키가 덩실한 청년이 되었을 거야. 그렇지? 해양 동지.

너의 아버지 김학철은 우리가 줄곧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었어. 강제노동의 나날에도,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었지. 지난달 나는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太陽照在桑干河上)』 재판 서문을 썼는데 거기에서도 김학철 동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 책이 나오면 꼭 너에게 보내주마. 그는 원래 중국의 항일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불구자가 되었는데 어쩜 중국에서 또 감옥살이를 해야 하다니, 그것도 한권의 미발표 소설 때문에. 참 들을수록 사람을 격분시키고 참을 수 없게 만드는구나. 지금 비록 만기 출옥하였다지만 생활형편은 어떠한지, 참으로 내 마음에 걸려. 더군다나 네 편지에는 상세한 설명이 없으니 다음번엔 자세히 알려다오.

너의 어머니는 가장 훌륭한 여성이고 현숙한 여성이다. 지금은 이러한 아름다움이 유행되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중시도 받지 못한다. 바라건대 네가 그분들께 많이 효도하거라. 너는 형제자매가 또 있니? 비록 지금 너는 보통 노동자로 일하고 있지만, 괜찮아. 오로지 훌륭한 사람으로, 정직한 사람으로, 학문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생명을 올바르게 다룰 줄 아는 한 사람으로 되는 거야, 해양! 우리는 결국 우리의 인민을 사랑하고 진리를 믿으며, 자신을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한 참답게 일을 해야지.

요즘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래서 먼저 너에게 간단한 회답부터 한다. 너의 집 가족사진을 보내줘, 나도 사진을 보낼 테니. 참 서둘러 끝마치게 되네.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너, 가족 모두 건강을 빈다!

丁玲, 陳明 6월22일

 

70년대 말 짓궂은 비가 느닷없이 내리던 날 이 편지를 받았다. 특기할 것은 이 편지의 봉투에는 우표 외에 버젓이 띵 링의 지문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일부러인지 부주의해서인지 글씨가 마르기 전에 남긴 것이다.

 

띵 링의 두번째 편지(1979년 7월 14일)

꼬마 벗 해양에게.

편지 보았다. 꼬마꼬마해양(시월이)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말 옛날 그때의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다만 더욱 중국사람 같은걸.

우리 세대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세대야. 하지만 또한 투쟁의 세대이지. 고통스럽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자연히 가슴을 졸이며 고민할 때가 많았지. 왜냐하면 현실에 사람들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나는 중국인이고 중국공산당원이기에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지 않니. 나는 오직 살아갈 수밖에, 일을 해갈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천대받고 고생하는 민중 속에서 정신과 영양을 섭취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우리 인류는 사랑스럽고 희망이 있는 것 같아. 당(黨)도 잘못이 있었지, 유린당하였고. 그러나 그것이 오직 진정한 맑스사상의 당이라면, 천만명의 정직하고 당당한 동지들이 있고 진심으로 인민을 위하는 당이라면 그 당은 희망이 있을 것이고 영명 정확할 것이야. 투기분자들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살아나가려고 이왕 마음먹었으면 비관론자가 돼선 안되지. 꼬마 해양, 그런 거지?

1979년 7월 14일 편지

1979년 7월 14일 편지

나는 너의 아버지가 정말 그립다. 그가 유쾌하기를 바래. 내가 그에게 너무나 많은 옛 정이 있기 때문에 너도 알게 된 거고. 그러니 내가 어찌 너하고만 상대하고 그를 소홀히 할쏘냐. 하지만 그는 아직도 나에게 사진 한장 주려 하지 않는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 당연히 그에게 의견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가 건강하기를 바랄 뿐이지! 그때 이허위안(颐和園)에 있을 때, 외다리로 쿤밍호(昆明湖)를 헤엄쳐 건너듯이 말이야. 그가 정신적으로 젊기를 바라지, 나와 비기면 그래도 젊은 것이 아닌가. 네가 내 앞에선 영원히 꼬마 해양인 것같이, 그렇지? 이곳에서 옛친구 하나가 불쌍하게도 우울증에 걸렸어. 그래, 그들 쓰런빵(四人幇)이 가증스럽고 그 앞잡이들이 가증스럽지. 그러나 우리는 분발하고 생존하고 투쟁해나갈 것이다. 광명을 볼 줄 알고 타인을 생각하며 타인을 위하여 사는 거지. 그래야만 자신에게 충실히 할 수 있고 비로소 삶이 의의가 있는 것이야. 꼬마 해양, 그렇지 않아? 비바람을 맞지 않고, 그나마 적게 맞고, 포근한 나날만 보내려 한다면 그런 세상은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풀어놓아 대중 속에 들어가고 넓은 바다의 폭풍을 맛본다면 인간은 건강해질 것이다.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가족사진을 보낸다. 나와 쳔 밍(陳明)의 최근 사진도 한 장. 그럼 너의 온 가정이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丁玲 7월 14일

 

띵 링의 편지로 그의 자애로운 목소리는 또다시 우리의 귓전에 울렸다.

50년대 초기, 띵 링 부부와 우리집은 뻬이징(北京) 이허위안에서 이웃이었다. 띵 링은 윈쑹챠오(雲松巢)에 거주하고 우리(부모님과 나 세 식구)는 샤오워(卲窩)에 살았는데 부근에선 유일한 이웃이었다. (당시 중앙간부휴양소가 이허위안에 있었다.) 이허위안을 소개하는 자료에 이러한 글이 있다. “빠오윈까오(寶雲閣) 서남산머리에는 송(宋)나라 때 소강절(邵康節)의 거처가 있었는데 안러워(安樂窩)라 하였느니, 이름을 샤오워(卲窩)로 지음으로 안락의 뜻을 취했도다. 곡랑(曲廊, 벽이 없고 지붕만 있는 복도)이 서쪽으로 윈쑹챠오와 통하고 서켠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루시팅(綠畦亭)이라 하며 남쪽은 칭화쉬안(淸華軒)이다.” 당시 띵 링은 바로 이곳 윈쑹챠오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볼 때---샤오 예무(蕭也牧)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선친 김학철(金學鐵)은 당시 띵 링이 소장을 맡은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선친은 태항산 항일전투에서 총을 맞고 포로가 되어 일본 감옥에서 4년간 옥살이를 했다.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3년 반 동안 다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다가 결국은 한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항복 후 석방되어 조선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왔다. 이러한 경력과 성격 때문인지 띵 링은 이 굽힐 줄 모르는 학생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 또한 우리가 서로 이웃이 된 원인일 것이다.

당시 이허위안에서 자주 만난 분들로는 허 치팡(何其芳), 아이 칭(艾靑), 리 양(力揚) 등 시인들이 있다. 아이 칭은 이허위안에 거주했고 허 치팡과 리 양은 마례(馬列, 맑스·레닌주의의 준말)학원 울안에 계셨는데 마례학원은 이허위안의 바로 근처에 있었다. 때로는 그분들은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점심때가 되면 나의 어머니가 말도 안되는 솜씨로 짜장면을 만들어 대접했다. 그러면 띵 링은 “맛있어 맛있어” 하며 칭찬했다. 지금 그 일을 되돌아보면 어머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때는 이허위안에 관람객이 아주 드물었으므로 띵 링이 편지에서 이야기하듯이 선친은 한 다리로 쿤밍호를 헤엄치며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바로 그해(1951년) 7월의 어느날, 우리는 군인들이 띵 링의 집을 포위하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우리는 아직 경황실색 중 제정신을 못 차렸는데, 포위경계망이 풀리더니 띵 링이 히죽히죽 웃으며 곡랑을 거쳐 올라왔다. 그는 숨찬 목소리로 “마오주석과 러우 루이칭(羅瑞卿)이 오셨소. 어서 내려들 가보세요” 했다.

우리가 내려갔을 때는 마오 쩌뚱(毛澤東)은 이미 장랑(長廊)에 가 있었다. 당시 가까이에서 본 마오 쩌뚱은 위풍보다 겸손함이 더 많았다. 선친은 숭배하는 어조로 그에 대한 인상을 말했다. (그때 나는 아주 어렸다.) 그러나 역사는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십년도 채 안되어 수령은 띵 링과 나의 부친을 우파(右派)라는 낙인을 찍어 멀고도 지루한 유배, 감옥, 강제노동으로 내몰았다.

1955년과 1957년, 띵 링은 ‘띵 링-쳔 치샤(陳企霞) 반당집단’과 ‘띵 링-펑 쉬에펑(馮雪峰) 우파반당집단’이란 ‘월계관’을 선사받고 1957년 ‘재차 비판’을 받아 헤이룽쟝성(黑龍江省)의 뻬이따황(北大荒)으로 추방되었다. 양계장에서 인분을 퍼서 채소밭에다 주는 뻬이따황의 고역은 1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서, 1970년에는 아예 북경 친쳥(秦城) 감옥 독방에 5년 동안 수감되었다. 1975년 감옥에서 석방된 후 또다시 샨시(山西) 농촌으로 유배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난의 세월. 그가 누구더냐. 중국 현대사에 그 이름이 혁혁한 띵 링이 아니더냐.

1979년 천신만고 끝에 뻬이징으로 돌아온 것은 어언 22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었다. 떠날 때 띵 링은 53세의 한창 글 쓸 나이였으나 되돌아올 때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75세의 노인이었다.

띵 링 부부가 뻬이징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친께서는 나에게 ‘띵마마(丁媽媽, 띵 어머니)’ ‘쳔슈슈(陳叔叔, 쳔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셨다. (이허위안에 있을 때는 늘 이렇게 띵 링 부부를 불렀다.) 1979년 당시 선친께서도 마오 쩌뚱의 개인숭배와 대약진을 비판하는 20만자의 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쓰고 십년 문자옥(文字獄, 글쓴 죄로 감옥살이하는 것)을 치르고 만기 석방되어 나온 지 얼마 안되었다. 반혁명 감투도 벗지 못한 상태였다. 선친께서는 만기 석방분자가 22년의 수난 끝에 겨우 뻬이징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띵 링에게 누가 될까봐 친히 편지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띵마마’는 노염에 찬 어조로 “그(김학철)는 아직도 나에게 사진 한장 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정말 가슴이 아프다” “우리 이곳에도 옛친구가 불쌍하게 우울증에 걸렸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천만에, 선친께서는 너무나도 낙관적이고 너무나도 견강(堅强)해 도(度)에 넘을 정도였다. 이 점은 띵 링 자신도 훗날 알게 되었다.

1986년, 우리의 인자한 ‘띵마마’께서 별세한 후, 『띵 링 기념집』이란 문집이 출간되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선친의 기록이 있다.

 

쳔 밍(陳明) 동지

우리 모두 함께 고통을 나눕시다!

전세계 모든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그를 위해 슬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는 공정하다고 합니다. 그이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까? 이십여년 동안 가슴을 써늘하게 했던 학대, 그때가 바로 그이의 창작의 황금시절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류의 공동 문학재보가 뻬이따황의 황야에 묻혀버렸습니까. 선한 자에게는 선이 차려지고 악한 자에게는 악이 차려진다[善有善報, 惡有惡報]. 누가 말했던가요. 귀신이나 물어가라지요. 나는 루 쉰(魯迅)처럼 누구의 동정도 필요없고 또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를 위하여, 루 쉰의 전우들을 위하여, 비극이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모두 손잡고 끝까지 싸웁시다.

당신, 쳔 밍에게, 그리고 쭈 린(祖林)에게, 쭈 후이(祖惠)에게, 나는 무엇이라고 이 아픈 마음을 전하리오? 다만 멀리서 당신들의 손을 잡을 뿐입니다. 굳게!

김학철 86. 3. 13

 

이 글은 선친께서 우리글로 쓰고 내가 중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띵마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원고는 분실되고 부득이 중문을 다시 우리글로 번역하였다.) 

 

 

■편집자 주

띵 링은 1904년 후난성(湖南省) 린펀(臨汾)의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쟝 후이(蔣褘), 필명은 빈즈(彬芝)이다. 여성의 섬세한 심리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중국의 토지개혁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太陽照在桑干河上)』(1948)로 1951년 중국인으로서는 처음 스딸린상을 받았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는 우파분자로 지목되어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남편 쳔 밍(陳明)과 함께 헤이룽쟝성(黑龍江省)의 뻬이따황 개간농장으로 보내졌다. 1966년 문화대혁명 때에는 반당분자로 투옥되었다가 1979년 복권되었다.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을 지냈으며 1986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