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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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정 愼兮姃

1978년 인천 출생. 2001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당선. shj815@hanmail.net

 

 

 

그믐밤

 

 

생리통의 밤

진통제 몇알로 그믐밤의 컴컴한 시간을 지날 때면

뭉텅뭉텅, 몸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것 같아

아이스크림을 먹곤 했어

그럴 때면 어머니

‘니 배고 아이스크림이 참 묵고 싶었다’ 하시며

그때 얘기를 해주셨거든

 

그 더운 여름밤 우리 아버지

아이스크림 사러 가신다며

통금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으셨다는데

좁은 골목길엔 가로등도 없어

컴컴한 그믐밤,

어머니 문밖에서 아버지 기다리는데

거나하게 술 취한 우리 아버지

검은 봉지에 들고 오신 아이스크림

‘묵으라’ 하시며 건네주시는데

한돈짜리 결혼반지가 보이지 않아

이미 녹은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눈물처럼 흘러내렸다는데

그 더웠던 여름밤,

어머니와 내가 그 눈물을 함께 먹었다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자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거든

냉장고 가득 아이스크림을 채우고

잠을 청하는데

생리가 시작되듯

몸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것 같아

 

나는 아이스크림에 숟가락 두 개 꽂아놓고

자궁 속 깊숙이 들어오실

우리 엄마 기다려보는데

 

 

 

어떤 봄날

 

 

너의 묘지 앞을 서성이는 검은 고양이 한마리

나는 그것을 잡아 모가지를 비틀어

배를 가르고 창자를 잘라내고

마지막까지 뛰던, 너의 심장 같은

고양이의 심장을 꺼내어

너를 위한 상을 차렸어

 

밤에, 머리만 남은 고양이가 찾아와

내 손을 물어뜯기 시작했어

잘려나간 살점들이

파닥파닥, 갓 잡은 생선처럼 뛰고 있었지

 

나는 고양이의 머리를 힘껏 내리쳐

너의 비석 옆에 두고

피 흘리는 손으로

차가운 심장을, 창자를, 뭉개진 머리통을

하나씩 먹어치웠어

 

창자 한줄이 목구멍에 걸려

조심스레 빼내는데

기억이 꾸물거리며 울컥,

창자더미들을 묘지 위에 쏟아놓고

밤새 기다렸어

무수한 고양이떼처럼 달빛이 너의 묘지 앞을 서성이던

네가 오지 않던 그 밤,

봄꽃은 달빛보다 더 환하게 폈는데

 

 

 

목련나무

 

 

청량리역 광장, 버려진 거울 앞에 여자가 서 있다 엉킨 수세미 같은 머리카락을 목덜미에 올려놓은 여자, 눈동자는 빛바랜 단추마냥 초점이 없다 여자가 거울 속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거울 속 행인에게도 말을 건넨다 이제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맨발의 그 여자 춤을 춘다 거울 속에서 여자의 하얀 치마가 꽃잎처럼 하늘거린다 언젠가 은밀한 욕망을 더듬었을 그녀의 손이 슬쩍 치마를 들출 때 새의 붉은 혀 같은 음순이 드러나, 기차가 떠나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여자를 흘끔거린다 여자가 거울 속으로 가지처럼 손을 뻗는다 거울 속 여자가 거울 밖 여자를 계속 밀어낸다 순간 그녀, 참을 수 없다는 듯 치마를 머리 위로 잡아 올려 뱅글뱅글 돌기 시작한다 뿌리털 같은 음모 위 젖무덤에 붉은 꽃이 피어나고, 거울 속 여자에게도 꽃이 핀다 두 여자가 부딪친다 거울이 깨진다 거울 속 여자 위에 거울 밖의 여자가 엎드려 있다 치마 위로, 붉은 꽃물이 번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