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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대한민국의 오늘, 내일의 코리아

 

대선과 정치개혁의 큰 틀

나의 체험적 한국정치론

 

 

남재희 南載熙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역임. 저서로 『양파와 연꽃』 『일하는 사람들과 정책』 등이 있음.

 

 

1

 

강원용(姜元龍) 목사를 중심으로 한 작은 모임에서 최근 이홍구(李洪九) 박사가 ‘21세기를 여는 한국정치’라는 제목으로 짧은 연설을 했다. 그가 서울대 교수를 지낸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치학자 중의 한사람이고 통일원 장관, 국무총리, 여당 대표, 주미대사 등 실제정치의 경험도 많고 보니 그의 견해가 크게 참고가 될 것 같아 우선 소개해본다.

이박사는 그동안의 우리정치가 그렇게 형편없는 것은 아니어서 외국에서 본다면 그런대로 성공한 사례라고 말하면서, 인물보다는 제도를 바꾸어야 하는데 우선 제왕적 대통령이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책임총리제’를 단기적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현행 헌법은 내각책임제도 얼마간 절충한 것이어서 헌법대로라면 총리의 권한이 대단한 것인데 한번 헌법 그대로 총리 노릇을 해보게 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각료제청권의 행사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게 ‘책임총리제’이다. 그러고서 국가대표의 상징성과 국가 실질운영을 분리하자는 것인데, 예를 들어 독일과 같은 유럽의 제도가 좋겠다는 것이다. 내각책임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내각제에 거부감을 갖는 쪽은, 장면(張勉) 정권의 실패를 내세우기도 하고 미국에서 대통령제가 잘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박사는 미국에서는 권력분산, 견제와 균형이 잘되어 있어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박사는 또한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어느 후보도 다수표를 얻기 어려워 결국 연립·연대·타협의 정치를 해야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대통령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 하는 것은 대한민국 수립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참 끈질긴 쟁점이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내각책임제의 나라에서 민주정치가 성공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통계가 있다. 대통령중심제는 미국 정도가 성공사례인데 그것은 예외에 속한다고 흔히 말한다. “미국의 대통령제가 국경을 넘어서면 죽음의 키스를 만난다”란 말을 남긴 학자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를 이미 50여년간 실시해서 익숙해져 있고, 또한 1987년 여야 만장일치로 개정한 지금의 헌법을 다시 손질한 필요가 있겠느냐는 현행유지론도 강력하다.

이박사가 연설을 마친 다음 내가 첫 질문자로 나섰다.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우선 선거비용 문제만 보면, 대선후보자간의 TV토론이 활발해진 지난번 대선 때부터 선거비용이 대폭 줄어들었다. 그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이 탄생될 때에는 TV토론을 기피하여 선거운동조직들이 일일이 유권자를 상대하여 설득해야만 했고 거기에 유세동원비·회식비 등 엄청난 돈이 들었다. 그러나 지난번 선거에서는 후보들이 TV에 과잉 노출되다시피 하여 선거조직이 유권자를 상대로 새삼 후보를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선거비용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아마 10분의 1 정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금년 대선에서 TV토론은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선거비용도 5년 전보다도 덜 들 것이 거의 확실하다. 홍보비와 선거조직 유지비 정도지 유권자를 직접 상대로 한 비용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돈 안 드는 선거라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인데 내각책임제로 바꿔놓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회의원 선거가 정권을 결정짓게 되니까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다. 또 국회의원 선거는 TV선거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이제까지 국회의원 선거에 10억을 썼다 하면, 정권을 결정하는 선거니까 20〜30억씩을 뿌리는 타락선거가 될 것이고(국회의원의 선거비용은 법정선거운동 기간만이 아니고 준비기간까지 넣어 계산하여야 한다), 후보들은 더욱더 대기업에 손을 벌리게 되어 정치부패·정경유착은 심화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더욱 합리화·투명화되기까지는 이왕에 돈이 덜 들게 된 대통령중심제·직선제를 버리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는 이야기이다. 훗날에는 내각책임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말을 마치고 나니 대통령 비서실장과 주미대사를 지낸 김경원(金瓊元) 박사가 옆에서 “재벌당이 될까봐서 그러느냐”고 묻는다. “일본에서도 내각책임제를 한 초기에는, 그러니까 2차대전 전에는, 정당이 미쯔이(三井)계와 미쯔비시(三菱)계의 재벌계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답변했다.

두번째 질문에는 강원용 목사가 직접 나서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앞날은 낙관적이 못된다고 전제하고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사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자학의 영향으로 가부장제적 문화가 아직도 의연하여 역시 대통령중심제여야 하겠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풍토에는 신바람 문화라는 것이 있어 지도자가 국민들의 신바람을 살려주어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강목사가 말한 가부장제적 전통(현실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니 여성들의 오해 없기를)과 지도자가 이끌어낼 신바람을 나름대로 확대해석해보면, 대통령제에서는 약간의 표 차이로 당선되기도 하는 것이기에(5·16 후의 대선에서 박정희씨는 불과 15만여표 차이로 윤보선씨에 이겼고, 미국의 부시는 지난번 고어를 이긴 건지 진 건지 모를 정도의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이 되었다) 유권자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그들을 존중하는 정책을 취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래서 포퓰리즘 운운하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유권자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민주적이라 할지언정 포퓰리즘 운운하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반면 내각제의 경우 국회의원선거에서, 대통령선거에 비해 중심이 분산되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유권자의 뜻에 덜 예민하게 반응한다. 좀 과장한다면 대통령제는 개혁적이고, 내각제는 현상유지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요즘 내각제도 총선거를 총리후보 중심으로 치르고 있어 대통령선거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역시 정보혁명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최근의 독일 총선거는 총리후보인 사민당의 쉬뢰더(G. Schröder)와 기민당-기사당의 슈토이버(E. Stoiber) 간의 경쟁처럼 되었었다.

현행 헌법에 손댈 곳은 있다. 대통령중심제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4년·중임허용제로 하자는 이야기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그것도 요주의. 일단 개헌절차가 시작되면 마치 물이 그득 찬 댐을 무너뜨린 듯 일제히 홍수가 져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질 것이다. ‘병 속을 나온 지니’라고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현상 말이다. 그것이 개헌절차 개시 후의 역학이다.

이회창·노무현·정몽준 등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책임총리제’를 약속하고 있다. 노후보가 가장 분명하여 그는 국회다수당과 합의하여 국무총리를 임명하고, 총리의 각료제청권을 실질화하며, 총리가 국무회의를 주재토록 하겠다고 말한다. 2원집정부제 운운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될까? 대통령은 전국민의 여망을 모아 뽑는다. 그리고 총리는 비록 국회의 동의를 받는다고 하나 대통령이 임명하고 해임한다. 비록 선거에 앞서 이러쿵저러쿵하나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나 지금처럼 야당이 원내 과반수를 장악하고 있을 때는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야당 출신 총리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 정치 분위기와 상황이 관련되겠지만 경우에 따라 프랑스에 자주 등장하는 동거정부 비슷한 것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기가 급강하한 지금 한나라당이 고집을 부린다면 가능한 일이다. 다만 다가온 대선에서 득표에 어느 쪽이 유리한가 하는 계산이 작용하여 몇달을 기다리기로 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앞으로 우리정치가 양당제가 될지 다당제가 될지는 지역주의 문제가 걸려 있어 자신있게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은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넘겼지만 대부분의 선거에서 한 정당이 과반수를 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진보정당이 급성장할 것도 아니고 당분간 보수 양대정당에 더하여 보수 군소정당, 진보 군소정당의 구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홍구 박사 이야기대로 연립정치에 우리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책임총리제가 되었든, 연립정권이 되었든, 준 동거정부가 되었든 내각책임제 쪽으로 점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연립의 기술을 잘 발휘하고 헌정관행을 현명하게 축적해간다면 개헌이란 대작업 없이도 바람직한 권력분산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헌정관행을 이끌어간다면 강목사가 말하는 가부장적 권위가 있는 지도자인 대통령을 가짐과 동시에 권력분산형 내각책임제의 장점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2

 

오늘날의 한국정치 또는 한국상황에서 전쟁방지가 가장 중요하고도 화급한 문제다. 정전(停戰)상태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형편에서 남북은 항상 서로를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6·25를 경험했으니 그 경계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국민들의 느낌이나 판단으로는 미국 부시행정부의 초강경 일방주의가 문제다. 미국의 어느 학자는 ‘매파 대응정책’(hawk enganement)이라면서 강경한 으름장의 효과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연못 안 개구리 신세인 우리에게 어린이가 돌을 던지는 것도 무섭기만 하다. 전쟁이 난다면 그 참상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아프간의 경우는 차라리 선사시대의 일 같을 것이다. 남북한이 이빨까지 중무장한 한반도가 아닌가. 거기에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듯한 미국의 신무기가 아닌가.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에 이기고도 너무 희생이 커서 무의미해진 승리를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고 했다. 한반도의 경우는 아마도 “옛날 세상엔 이렇게 우매한 민족도 있었다”라는 팻말이 폐허 위에 남아 있을 것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방지에 나섰다. 우선 부시행정부의 자제를 호소하는 일이다. 강원용 목사와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등 많은 인사들은 「한반도 보고서–평화와 협력 그리고 통일을 위한 체계적 접근」이라는 짜임새있는 건의서를 미국측에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나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생애에 드물게 서명을 했다. 강목사는 정말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기독교 백인 유일 초강국인 미국이 이슬람인 아프간과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한반도에서 희석용으로 불질을 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미국이 거대한 ‘에비’로 새삼 떠올랐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문부식(文富軾)씨는 최근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그만큼 몸으로 치열하게 미국을 생각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미국 자체에 대한 생각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냉전 붕괴 후 유일 패권국가로서 미국이 보여주는 오만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이해하는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모든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는 방식은 좀 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 정상적인 국가체제라면 외국기지가 이 땅에 있을 필요가 없죠. 동북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이 뭔가 그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가, 철수를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가. 원론적으로는 철수를 주장하는 것이 맞지만 과정적으로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죠. 그것보다 일방적 방식의 주둔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그 형식을 고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월간 중앙』 2002년 9월호)

남로당의 경북도당 부장급으로 활동하다 미군정보기관의 도움으로 한국전쟁의 와중에 평양에 가서 이승엽(李承燁)을 만나 휴전을 호소했던 기구한 운명의 박진목(朴進穆)씨는 몇년 전에 해방 후의 일을 이런 요지로 말했다. “박헌영이 어리석었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싸워 승리하여 한국을 점령한 미군인데, 그 미군을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쫓아내려고 적대시만 해서 됐겠어. 미국을 적대시하지 말고 대화했어야지.”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를 막으려 한다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옛 글귀를 그는 떠올렸을 것이다.

이호재(李昊宰) 교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미국을 논할 적에 ‘좋은 미국’과 ‘나쁜 미국’을 나누어 이야기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따르는 미국은 얼마나 좋은 미국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나라인가. 그런데 람보식이고 카우보이식인 부시행정부의 초강경 일방주의는, 유럽의 대다수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듯,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최근에 읽으니 박명림(朴明林) 교수는 ‘미국의 범위’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한국의 행동범위가 미국이 정한 범위 안이라는 뜻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손오공이 뛰어보았자 부처님 손바닥 위’라는 것을 학술용어화한 것 같다. 너무도 진부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결코 돈끼호떼가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좋은 미국’ ‘나쁜 미국’을 가려서 실리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미국’은 협조하고 ‘나쁜 미국’은 거부하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개인의 도덕적 또는 양심적 판단과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국익판단이 같았으면 참 좋겠으나, 대개의 경우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3

 

젊을 때는 정치를 말하라면 민주주의와 복지만을 말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을 바로 보려면 민주주의를 대전제로 깔고 ‘경제성장·복지·사회안정’의 세 가지를 합쳐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 세 가지 축이 모두 충족되고 또 균형을 취해야 한다고 본다. 세 가지 축은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경제문제를 생각할 때 꼭 다룰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세계화의 문제이다. 이 물결은 불가피한 물결이고 우리가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나라가 세계경제에 밀접하게 엉켜 있다. 북한도 점차 발을 들이밀어 경제특구 구상을 펴고 있다. 다만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라는 그 문제의 전문가가 지적했듯이 ‘워싱턴 컨쎈서스’(Washington Consensus) 운운하며 약소국에 강요했던 IMF의 조치들이 실은 미국 월 스트리트(Wall Street)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들이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경제성장의 문제와 복지의 문제를 연관지어볼 때에 중요시할 것은 IMF 위기가 왔을 때 김대중 정부가 주도하여 이룩한 제1차 노사정합의라는 사회협약이다. IMF 위기도 있었고, 김대중 정부의 호기의 개혁의욕도 작용하여 제1기 노사정위원회는 훌륭한 사회협약을 이루어냈다. 당분간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거기에는 1 기업은 근로자의 참여증진에 노력 2 보유과세 강화, 변칙적인 상속·증여 과세 강화 3 금융소득 종합과세, 주식·채권 등 양도차익 종합과세 4 민영화 등 주요정책 수립시 공공부문 노사대표의 의견 적극 수렴 등등이 담겨 있다. 그 합의를 잘 발전시켰으면 참 좋을 뻔했다. 그런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사회협약은 조합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기도 한 것인데 오트스리아, 스웨덴 등에서 잘 이루어졌고 독일 등 기타의 많은 유럽나라에서 단속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미국서도 지난날 경제위기 때 경험한 바 있다.

요즘 후보들간에 노사정위원회 문제를 놓고 이견이 있음을 본다.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경제성장·복지·사회안정이란 차원에서 볼 때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문제라고 본다. 비록 노동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점차 약화되는 추세라지만, 노사정위원회는 사회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여기서 헌법 제119조를 생각하게 된다. 그 제2항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가끔 재계의 권위있는 학자들이 개폐하자고 주장하는 헌법 조항이 바로 이것이다. 미국에서도 로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때때로 위헌판결로 방해한 것이 보수적인 대법원이었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도 보수적이어서 그간 재산권에 관한 보수적인 결정을 내려왔다고 나는 본다. 왜 거기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이 없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 헌법 제119조 제2항을 후퇴시키면 아마 경제분야의 헌법소원이 잇따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발목을 잡힐 것이 틀림없다. 세계화로 정부의 권한이 점차 약화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부는 시장을 제어하면서 공공성을 지키고 시민의 복리를 증진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조항은 미국식으로 말하면 김종인(金鍾仁) 조항이다. 미국에서는 법안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학계나 언론계의 관례가 아닌가. 6·29선언 후 대통령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개정이 있을 때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종인 박사가 이 조항을 성안하고 그대로 관철시키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김박사는 독일 유학파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가능한 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사회정의와 사회보장 및 사회적 진보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장경제질서라고 정의하는데, 이 원리에 따라 독일의 경제는 성장했고 복지와 사회안정도 훌륭히 이룩했다. 김박사 이야기를 더하면 그는 서울대 총장이 된 경제학자 정운찬(鄭雲燦) 박사와 의기투합하고 있다. 정박사는 미국 유학파로 네오케인지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김·정 박사팀이 제시하는 모델과 정책방향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사회안정은 비교적 처방이 분명한 분야이다. 얼마 전 경제전문가로 명성이 있는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를 만났더니 그는 법치와 반부패를 당면한 중요과제로 말한다. 사회안정은 경제성장과 복지가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과 떼어놓고 말하면 법치와 반부패의 두 가지가 핵심이라 할 것이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조사가 훌륭한 참고가 된다. 그 기구서 매년 내는 부패지수를 보면 핀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덜 부패한 나라이고 싱가포르(5위), 캐나다(7위), 영국(7위), 미국(16위), 프랑스(25위), 이딸리아(31위) 등을 거쳐 한국은 40위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Economist)에 발표된 것을 보면 최하위는 102위인 방글라데시인데, 한국은 부패국가 중위권, 그러니까 매우 부패한 나라이다. 그 지수는 공직자들의 부정을 중심으로 측정한 것이다. 상식적으론 생각하여 정치인·기업인·관료의 세 기둥 가운데 정치인이 주범이라 할 것이다. 그 말에 이의가 있으면 전·노 두 대통령의 경우를 상기하기 바란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측근들도 부패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구 말처럼 정치는 정말 4류이다. 정치의 부패를 생각할 때 정경유착, 재벌, 패거리 자본주의 모두가 관련되어 있다. 정치적인 돈의 용도를 중심으로 보면 선거자금이 대종이고, 비대한 정당조직의 문제, 정치자금법의 허술함 등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참여연대, 경실련 등 NGO들이 그동안 열심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런데도 정치자금법을 입법자들이 깔아뭉개버렸다. 국제투명성기구라는 명칭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핵심은 모든 분야에 투명성을 높이는 일이다.

부패의 문제와 관련되어 생각되는 것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 문제다. 성숙된 현대적 시민의식의 요청 말이다. 에토스(ethos)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설명이 필요없이 우리 사회는 해방, 6·25, 연이은 정변, 급격한 산업화·도시화로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이다. 거기다가 세계에서도 많지 않은 다종교사회로 불교·유교·기독교가 정립하고 있고 샤머니즘이 밑바탕에 있다. 그러니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문제가 있고 사회는 사회대로 윤리적 바탕이 잡히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운동을 하고 있다. 윤리학자·사회학자들이 글을 쓰고 있다. 여기서 비전문가로 외람되게 한마디 한다면 나는 사람이 아닌 도구들이 이 문제해결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달리 운전에 따른 도구적 합리주의를 체득하고 있다. 자동차에 붙여진 “운전은 양보와 질서, 그리고 여유”라는 스티커를 보았다. 그거다. 지금 자동차가 얼마나 홍수를 이루었나. 핸드폰, 컴퓨터, 인터넷 등등의 도구들이 비슷한 도구적 합리주의의 훈련을 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어떻든 21세기적 에토스, 윤리가 생겨날 것이다.

 

 

4

 

좁은 의미의 정치차원에서는 독일모델을 생각해볼 수 있다. 권력구조 문제에서 내각책임제는 독일모델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가 좀더 발전한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자. 독일모델에서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의 선출방식이다. 지금까지 국회의원의 비례대표 배분방식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한정위헌 결정이 내려져 앞으론 후보와 정당에의 1인 2표 방식의 투표를 통해 정당득표수로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게 될 전망이다. 이미 시도의회 차원의 선거에서는 그렇게 시행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의원들이 그렇게 하여 진보정당에 기회를 주느니 차라리 국회의 비례대표제를 없애버리자는 주장을 하였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1인 2표로 하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선출한다는 것은 지금의 대세이다. 그때 비례대표의 비중을 과감하게 독일처럼 국회의석의 절반으로 하였으면 한다. “비례는 대표의 원리요, 다수는 결정의 원리”라는 격언이 있다. 결정을 할 때 의지할 최종수단은 다수결이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러나 대표를 선출할 때는 비례대표로 하는 것이 성원의 의견을 골고루 균형있게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의견이 너무 세분화되고 잡다한 세력들의 대립으로 혼란을 유발할까봐 진입장벽을 두고 있는데, 예를 들어 득표에 있어 유효투표자의 3〜5%를 못 얻었거나 지역당선 의원수가 3명을 넘지 않을 때는 비례대표 배분에서 제외한다는 규정과 같은 것은 납득할 수 있다고 본다. 비례대표가 될 경우 계급적·이념적 또는 지역적인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종교적인) 여러 세력들이 국회에 반영되어 연립의 정치를 펼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지역구 문제에서는 최근에 다른 의견이 제기되었다. 노무현 후보측에서 말한 중·대선거구제도이다. 물론 모든 제도에는 장단점이 있는 것이어서 중·대선거구제도도 논의할 수 있겠으나 결론을 말하면 1인 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로 하고 전체 의석수 가운데 그 배당몫을 지금보다 늘리는 방향이라면, 중·대선거구제는 의의를 많이 상실한다는 것이다. 독일모델도 그러하지만 비례대표를 확대한다면 유권자들이 지역대표를 직접 뽑았다는 분명한 느낌을 주게 하는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신을 신고 발바닥 긁기라는 말이 있다. 국회의원을 정당명부에 따른 비례대표로 반쯤 뽑고, 나머지 반은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뽑는다면, 유권자들은 신을 신고 발바닥 긁는 느낌으로 썩 후련하지 않을 것이다. 썩 후련한 1선거구 1인 당선의 소선거구제가 민심의 측면에도 맞을 것이다.

만약에 독일모델을 채택한다면 우리나라도 진보정당이 국회에 본격 진출하게 되고 비교적 알찬 수의 의석을 갖게 될 것이다. 독일의 녹색당은 금년 선거에서 정당투표 8.6%를 얻어 비례대표 55석을 배분받고 지역구 의석 1석을 합쳐 56석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번 지방선거에서 8.1%를 얻었는데 그 수준을 유지한다면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독일 연방하원은 598명이 정원인데 지난번 총선에서는, 지역구 당선자 수가 정당비례대표로 배정된 의석수보다 더 많을 경우 지역구 당선자 수는 그대로 인정된다는 계산상의 이유로 603석이 되었다.

지난번 지방선거가 있은 후 민주노동당의 기관지 『진보정치』의 부탁을 받고 다음과 같은 기고를 했다.

 

이번 정당지지율에서 자유민주연합을 앞지르고 제3위로 오른 데 대하여 모두들 축하를 보내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도 민주노동당의 한계를 말하는 의견도 들린다. 민주노동당에 애정을 가졌지만 피상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나로서는 우선 민주노동당이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창당 당시 대중정당적 방향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계급정당적 방향을 내세운 세력간에 대립이 있었고 전자의 주장을 한 일부는 이탈해나간 것으로 안다.

대중정당적 방향이 종당에는 맞는 것일지 몰라도 처음부터 그렇게 나가면 자칫 명망가 정당처럼 되고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유가 될지 몰라도 지난날의 민중당의 재판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계급정당적 색깔을 갖고 출발하여 정체성을 확립하고 뿌리를 확고히 내리게 된 것은 잘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정당의 발전에는 단계와 시기가 있는 법이다. 앞으로의 어느 단계, 어느 시기에서는 대중정당으로의 탈바꿈도 불가피할 것이다. 조직기술상 어떨지 몰라도 이중의 구조를 갖는 것을 연구해보았으면 한다. 마치 영국의 하원과 같은 권한을 갖는 기간조직과 그 위에 영국의 상원과 같은 명예를 갖는 명망가들의 집합 말이다.

(중략) 민주노동당이 국회에서 당당한 원내교섭단체가 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국제표준)에 맞다. 같은 이치로 민주노동당은 유럽 진보정당과 같은 국제표준을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진보정당의 진출은 우리 정치에서의 현상돌파라고 본다. 보수정당 일색이던 정치가 정상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층을 중심으로 한 소외세력들은 그동안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정당을 갖게 된다면 국민의 정치적 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진보정당이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니까 정책적 논의도 더욱 활발해지고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보수정당들이 진보정당의 정책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정책으로 삼아 정치를 발전시키는 일이 허다하다. 물론 진보정당이 보수정당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블레어 노동당 정권은 새처 보수당 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많이 받아들였다.) 감시자로서의 진보정당의 역할도 중요하다. 정경유착의 부패고리를 끊어 정치를 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하리라 본다.

유권자들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경우에도 사표 가능성을 생각하여 당선 가능한 다른 후보에 표를 던지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 사표 기피심리가 진보정당 성장에 큰 장애물이다. 진보정당에 던지는 표가 후보의 당락에 관계없이 당당한 의사표시로서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모진 바람을 맞고 있다. 이른바 ‘노풍(盧風)’이 그것이다. 노풍이 불기 시작한 초기에는 마치 폭풍처럼 몰아쳤다. 지지계층들에게 ‘노풍(盧風)’이냐, ‘노풍(勞風)’이냐는 난처한 고민을 안겼다. 지금은 시간도 지나 폭풍이 미풍이 되었지만 바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개혁과 통합을 위한 노동연대’의 주장은 간단히 말하여 노무현 후보가 다른 후보에 비해 개혁적이고 당선 가능성이 있으므로 노동세력은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권영길 후보를 밀지 말고 노후보 지지에 합류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후보측과 권후보측이 ‘대선을 향한 개혁연대’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부시 공화당 후보와 고어 민주당 후보의 대결에서 랠프 네이더(Ralph Nader) 녹색당 후보만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그 표가 고어한테 갈 것이므로 고어가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니냐는 설명이 설득력을 높이기도 한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노후보를 지지하라는 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대선 경쟁을 거처야만 다가올 국회의원선거에서 독일의 녹색당 정도의 성장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주장대로라면 앞으로 진보정당은 존립할 수 없다는 극단적 이야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선을 향한 개혁연대’가 무슨 뜻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정책협약 등을 통한 당 대 당의 협력이라면 구체적 제안을 기다려 민주노동당이 이해득실을 따질 일이다. 선례가 있는 일이다. 다만 1992년의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진보 재야세력과 정책연합을 한 결과 감표가 되었다고 후회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민주당측이 민노당에 당 대 당 정책협약을 제의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민주당 ‘노풍’측의 논자는 “영국의 노동당이 자유당과 선거연합을 함으로써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고 결국은 자유당을 눌러버렸다”며 ‘두꺼비가 독사에 잡아먹힘으로써 새끼를 낳는 격’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대전제가 다르다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닌가 한다. 영국이나 독일의 선거연합은 내각책임제하의 의원선거 이야기이지 대통령중심제에서의 대통령선거와는 다른 것이다.

몇년 전에 진보적인 학자로 이름이 있는 조희연(曺喜昖) 교수는 한국정치의 큰 문제점으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로 지역주의의 고착화. 군부세력의 지배전략이 작용했고 1987년 김영삼·김대중 양씨가 분열한 때문도 있다. 둘째로 부패의 폐쇄회로가 된 제도정치. 정치자금·뇌물 등에 여당만이 아니고 야당도 끼여들어 정경유착이 구조화되었다. 셋째로 제도정치의 이념적 폐쇄성. 사회갈등을 억압하여 이념적·정책적 스펙트럼이 제한되고 우경화하였으며, 그리하여 정치와 시민사회 사이의 괴리가 생기고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이 없게 되었다. 넷째로 정당운영의 비민주성. 보수중심으로 운영되고, 공천이 비민주적이며, 당 재정도 불투명하다. 독재타도를 외치며 투쟁한 정당도 일사불란이 체질화되어 여당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조교수는 진보정당의 진출, 재벌해체와 기업의 투명화, 시민운동의 활성화 등을 제안한 것으로 기억한다. 대체로 동감이다.

지역주의를 ‘지방색’ ‘지역대립’ ‘지역감정’ 등 여러가지로 표현하는데, 이 집요하고도 비극적인 난제는 이제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권의 탄생으로 소위 말하는 ‘한풀이’는 되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많은 사람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대립한 일을 되씹고 있다. 영남의 안티 김대중 정서는 그냥 한때 갖는 오기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부터 이 문제는 슬슬 달래서 가라앉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자꾸 거론하다보면 삭아가는 불을 되살리는 격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 교수와 상원의원을 지낸 패트릭 모이니핸(Patrick Moinihan)이 ‘관대한 묵살’(benign neglect)이라는 명구를 만들어 그후로 자주 인용되었는데 그런 자세와 상통한다. 다만 집권자들은 인사나 예산 배정에서 공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산술적 평등이 아니고, 또한 섣불리 지역쿼터 운운하는 것도 합리적이 아니다.) NGO 등도 감시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오늘날의 국민은 수준이 높고,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어 불공정한 처사를 즉각 알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시비가 많았고 지금도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언론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을 행정부·입법부·사법부에 이은 제4부라 불러왔지만 언론은 분명 권력이고 일부 언론은 그것의 행사에서 탈선을 일삼았고 오만했다. 금년에 남미의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 대통령의 정부를 전복하는 군사쿠데타가 있었고 그 기도는 며칠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 사태에서 베네수엘라의 우파 언론이 어떤 역할을 했고, 막후에서 미국이 어떠한 개입 의혹을 받고 있나 하는 것은 외국 언론에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베네수엘라가 아니더라도 언론이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종종 부당하게 미친다고 하는 것은 많이 연구되었고 상식이 되었다.

아주 오래 전에 미국의 언론자유위원회가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이라는 보고서를 냈는데, 허친스(Hutchins) 위원회로 알려진 위원회의 결론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언론 성원간에 활기찬 상호비판을 할 것을 권고한다. 언론 성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과오, 착오, 사기, 범죄가 언론의 다른 성원에 의해 묵과돼버리는 한, 언론의 전문적 수준은 달성되기 어려운 것이다. 언론의 일탈을 처벌하기 위해 정부권력이 발동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언론이 책임을 지는 것이 되려면(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언론 성원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수단, 즉 공개된 비판으로 상호규율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허친스 보고서가 말하는 상호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전에는 언론사끼리 동업 운운하는 납득할 수 없는 전근대적 의리로 서로를 감싸왔으나, 근래 특히 5〜6년 전부터는 상호간에 비판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 상호비판이 언론의 자체 정화작용이다. 오만하게 군림하는 매체를 견제하는 대항매체가 있어야 하며, 이미 많이 생겨나고 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서도 ‘언론의 자유시장’ ‘사상의 자유시장’을 정말 자유롭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언론개혁의 주요목표 가운데 편집권의 독립과 신문사의 소유지분 제한을 법제화하는 것이 있다. 둘 다 법제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편집권의 독립은 경영자와 기자들 간에 때로는 협의하고 때로는 싸우고 하여 자율적인 협약으로 이루어질 일이라고 본다. 선진 외국의 예도 많고, 우리나라에서 지금 사장을 선출하는 회사, 편집국장을 선출하거나 임명동의 투표를 하는 등의 방법을 따르는 회사가 많다. 그러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본다. 마치 노동운동의 역사처럼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노력을 통해 확립될 수 있는 편집권의 독립이란 목표를, 법제에 의해 일거에 해결하려 하는 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이고, 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성취하였다 하여도 부작용이 많을 것이다. 신문사 소유지분 제한의 법제화 문제도 어려운 일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러한 법제화가 헌법위반이라고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발표한 바 있는데, 방송사의 지분을 제한하는 현행 법제가 있고 보면 헌법위반 운운할 일은 아니다. 차라리 신문은 민간 것이므로 자유시장에 맡기고(공정거래만 정부 몫으로 하고) 방송 등 공공성이 강한 매체는 민간에 넘기기보다는 철저히 공익성을 담보하면서 공공의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