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평론

비평은 있다

신경숙·은희경·전경린과 관련하여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평론집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놋쇠하늘 아래서』 등이 있음. jkyoonjk@hotmail.com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얼마 전에 출간된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2)라는 도전적인 책에 촉발되어 씌어진 것이다. 이 책의 ‘도전’은 왜곡된 비평의 관행을 겨냥한 것이니, 필자를 포함하여 그 관행에 어떤 식으로든 한자락 걸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에 무연한 척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필자 자신이 이 시대 비평의 직무에 대해서 말하면서, ‘주례사에 버금가는 격려말씀’이 만연하고 있는 평단의 상황을 거론한 것도 꽤 오래 전 일이 되었지만(「현시기 비평의 기능」, 『창작과비평』 1995년 봄호), 실상 비평의 왜곡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책은 산발적으로 있어온 평단의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한꺼번에 종합해낸 점,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그릇된 비평풍토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 그간 있었던 문학권력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더 구체화하고 심화시키고자 했던 점 등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모두 고른 수준을 보이는 것은 아니고 문제의식의 깊이나 방향이 꼭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비평의 현단계와 그 문제점을 돌이켜보게 하고, 나아가서 비평의 왜곡을 넘어선 진정한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하게끔 한다.

‘주례사 비평’이란 말로 이 저자들이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대체로 평단에서 일반화되었다고 이들이 판단하는 과장되거나 편향된 해설투 및 상찬투의 모든 글들, 이 책 서문의 표현을 빌리면 “수사학 및 가치평가의 과잉이라는 현상”이다. 이 책에 직접 언표된 바는 없지만, 이 현상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같은 관행이 특히 90년대 들어와 팽창하면서 ‘주류화’되었고 그것이 특정 작품들의 해석을 제한하거나 왜곡시키는 역작용을 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을 꼭 90년대만이 아니라 한국비평의 일반화된 문제로 파악하고 그 구조와 인식론적 한계를 짚어내는 것이다. 전자가 첫머리에 실린 김명인(金明仁)의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주제라면, 후자는 김진석(金鎭奭)의 「초월적 서정주의에 스민 파시즘적 탐미주의」에서 가장 설득력있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김명인이 대상으로 한 작가가 90년대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신경숙인 이유도 있겠으되, 그를 비롯한 몇몇 논자들은 소위 ‘90년대 작가군’에 대한 비평적 담론의 왜곡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고, 여기에는 신세대 문학논쟁에서부터 최근의 문학권력 논쟁에 이르는 90년대 문학을 둘러싼 논점들이 두루 개입되어 있다. 필자가 이번 글에서 주로 관심있게 다루게 될 주제는 바로 이 부분으로, 특히 이 저자들의 비판대상이 된 세 여성작가 신경숙·은희경·전경린의 경우 과연 이들의 진단과 비판에 어느 정도의 적실성이 있는지, 또 그 여부와 관련하여 현시기 비평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려고 한다.

 

 

2. 비평의 빈말과 사심에 대해서

 

90년대 문학에 두어질 이 글의 촛점과는 어긋나게도 정작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비평의 문제에 대한 가장 인상적이고 의미있는 관찰을 전해준 것은 김진석의 글이다. 김진석은 ‘주례사 비평’이란 말은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서정주를 대상으로 하여 “문학 텍스트에 대한 비평가의 빈말이 그 텍스트의 ‘문학적’ 존재 자체”를 흐리고 있는 현상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가 말하는 ‘빈말’은 비평가들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공허한 상찬’으로, 특히 서정주에 대한 ‘미학주의적’ 찬사가 어떻게 텅 빈 수사를 통해 텍스트와 삶의 불가피한 관련성(그의 표현으로는 스밈, 혹은 꼬임과 얽힘)을 호도하고, 결국 “텍스트에 대한 존경을 빙자한 선정적 선동”으로 떨어지고 마는가를 파헤친다. 이같은 관점 자체는 흔하다면 흔한 것이지만,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기에 그만큼 비평의 이름에 값한다. ‘주례사 비평’이라는 문제의식과 관련짓자면, 문학텍스트가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맥락”에 존재하고 있음을 망각하거나 회피하는 비평언어들은 결국 거짓언사이자 선동의 언어, 즉 ‘주례사 비평’이 된다. 결국 단순히 해설이나 겉표지의 추천사에서 발견되는 의도적인 의미 사주기와 노골적이고 부정직한 편들기식 평과 같은, 워낙이 ‘주례적인’ 성격이 강한 글뿐만이 아니라, 본격평론을 목표삼은 ‘잘 쓰인’ 평문일지라도 ‘사회적 실천적 맥락’에 대한 의도적·비의도적 망각을 통해 빈말을 불러오고 비평의 허구를 만들어내는 활동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빈말의 수사학은 가령 서정주에 대한 경우가 그렇듯이 텍스트에 대한 ‘미학주의적’ 관점 속에 내재해 있다. 물론 미학주의와 상반되는 의미에서의 ‘정치주의적’ 관점에도 비평의 빈말이 스며들 위험은 상존하는 것이니, 여기서 빈말 아닌 비평의 본성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그러나 핵심적인 물음이 다시 떠오르게 된다.

의도적인 과잉해석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이 비평의 추문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비평이 김진석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빈말’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가는 또다른 문제다. 비평이 빈말 없는 단단함과 충일함을 지향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주례적인’ 측면이 사상된 상태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비평의 현실태라고 할 수 있다. 주례 없는 결혼식을 생각하기 어렵듯 관례적인 언사나 인사말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평문도 찾기 어려우며, 나아가서 주례의 인사와 격려부터가 모두 ‘빈말’이라고만 하기에도 어려운 구석이 있다. ‘주례사 비평’ 일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비평에서든 다른 영역에서든 이미 사회 내에 정착된 기제들은 타파되어야 할 관습으로 굳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관련과 구조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한 요소로 얽혀 있는 삶의 요건들이기도 하다. 비평이란 이 얽힘을 풀어내고 ‘빈말’의 요소를 끊임없이 걸러내는 물음과 성찰의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빈말’의 이같은 착잡한 기원은 단순한 비판이나 배격만으로 문제가 종식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소박하게 말해서 주례사가 하나의 사회적 관례로서 유의미한 만큼, 비평의 관례로 자리잡은 ‘빈말’들도 맥락을 고려하고 각각의 수준을 가려서 변별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 이러한 ‘빈말’의 기원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례사 비평’이란 말의 쓰임새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문학권력에 복속하여 이득을 누리고자 하는 비평가의 부정직한 영합이라는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출판자본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문화생산기제에 편입된 문학의 입지라는 구조적 차원에까지 걸쳐 있다. 개별적 기원과 구조적 기원이 혼란스럽게 나타난다는 점이 이 책의 문제의식의 소재를 불명확하게 만들고 있지만, 대체로 이 책이 파악하고 있는 빈말의 궁극적 기원은 이 두 영역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문학권력’이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문학부문에서 권력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한 대형출판사들과 그와 맺어진 비평가 및 문학그룹의 부정적 행태가 속출하는 빈말들의 산실이며, 특히 90년대 들어 “일상세계와 내면성의 탐구라는 흐름이 문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면서 90년대 작가와 비평가들은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일종의 연대의식으로 맺어져 비판보다는 상찬과 격려, 적극적 의미부여에 더 주력하는 양상”(김명인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주례사 비평’에 대한 이처럼 일반적인 관찰이 또다른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충실한 해석과 평가가 늘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또 비평활동이 텅 빈 공간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관련 속에서, 즉 ‘권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문학권력’을 빈말의 원천으로 보는 시각은, 좀더 세밀해지지 않으면 동어반복이 될 위험도 있다. 사회적 현실의 맥락 속에서 생성되고 존속되는 빈말들이 현실과 가지는 착잡한 연관관계는 손쉬운 양심의 결단만으로 사라지지 않는 끈질김과 그 나름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비평에서의 빈말이 크게 보면 사회현실과 텍스트의 삼투적인 관련성에 대한 마땅히 있어야 할 인식을 방기해온 오래된 비평 전통에 연결되어 있다는 김진석의 관찰이 유효한 것도 이 대목에서다.

주례사 비평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뜻은 책의 제목 그대로 결국 그것을 ‘넘어서’는 일, 즉 그 극복에 있을 터이다. 그러나 빈말의 기원과 존재조건에 대한 관찰이 일면적인 탓에 그 극복의 전망 또한 모호하다. ‘사심없고 공정한’ 비평을 지향한다는 목적은 주어진 셈이나, 그것이 어떻게 도달되는 것인가에 대한 모색과 질문은 허술한 것이다. ‘문학권력’을 근원으로 보는 시각은, 그 권력의 구조를 혁파하는 전망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비평가 개개인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추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사심이란 것은 단순히 개개인의 욕심과 타산을 지칭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같은 개인적 의식과 사회적 관례 혹은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체로 존재하며, 그런 점에서 ‘사심 없음’이라는 비평의 정신은 개인적인 차원만으로 온전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란 사적일 수만도 공적일 수만도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비평가 개인의 도덕적 결의나 목적의식이 확보된다거나 아니면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태도를 강조한다 해서 온전히 실현되기 어려운 어떤 경지인 것이다.

 

 

3. 작품의 비평력과 90년대 여성작가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의 주안점을 90년대 문학 흐름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책이 다루는 작가들이, 서정주와 황지우를 제외하면 앞의 세 여성작가와 『문학동네』의 신인상으로 등단한 신진작가(김형중)이며, 비평가(황종연·정과리)를 다룬 경우에도 각각 백민석과 유하 등 90년대에 부각된 작가 혹은 시인에 촛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신경숙·은희경·전경린이 주된 과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역시 비중에서나 특성에서나 이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90년대의 새로운 문학적 지형도를 그리는 데 핵심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대중성이야말로 해설이나 과잉상찬 등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판매고를 올리려는 출판자본의 책략을 가장 효과적으로 밝힐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으로 이 세 작가가 지금에 이르러 지난 연대의 문학적 성과의 중요한 부분이고, 또 지금도 그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세 여성작가의 한국문학에서의 위치를 새로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국면에 도달했다고 보는데, 방향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 점에서는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의 저자들의 관심사와 만나는 면도 있다. 이제 이 세 작가는 단순히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 보인, 그런 점에서 주목되어야 할 새로운 작가들이 아니라, 90년대 및 이후의 문학적 진로를 잡아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고려되고 평가되어야 할 주요작가 군(群)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일종의 문학사적 조망까지 감안하는 거시적인 시각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자리서 이 작가들 각각의 작품들을 일일이 논의할 여유는 없겠고,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의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이들의 문학적 성과를 재점검하는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겠다. 다만 그런 가운데, 과연 이 작가들이 과잉평가나 빈말의 수혜자 혹은 희생자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에 접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비평은 대개 창작에 대해서 행해지는 활동이라는 것이 상식이지만, 기본적으로 비평활동이 평론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창작행위 그 자체가 더 깊은 의미에서 ‘비평’활동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작품은 결국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질문이자 성찰이며, 문학작품의 깊이와 성과는 그같은 질문과 성찰이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다. 비평이 작품에 대한 판단인 이상, 그것은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그 자체의 비평력이 어떠한가에 대한 감각과 판단력 없이는 제대로 행해질 수 없다. 작품의 진정한 비평력을 몰라보는 비평이 제대로 된 비평일 수 없는 한편으로, 워낙 작품의 비평력이 떨어짐에도 그것을 오판하거나, 옳게 보면서도 의도적으로 과대포장하는 등 거짓증언을 하는 비평도 문제일 것이다. 빈말은 의식적인 거짓말이나 너스레인 경우도 있지만 단지 작품을 알아보는 능력과 훈련의 부족, 즉 비평적 감수성의 결핍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비평끼리의 이론적 쟁패나 해석을 둘러싼 싸움에서 잠시 벗어나, 창작 자체의 비평력이라는 쪽으로 생각을 돌릴 때, 즉 작품들에 대면하여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때, 작가들의 진정한 가치를 ‘사심 없이’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다. 이러할 때, 과연 신경숙·은희경·전경린 등이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있고 또 유능한 비평가라면 읽어낼 수 있을 그 비평력은 어떠하고 또 얼마나 큰 것인가? 그리고 이같은 비평력은 그들의 현재의 활동에서 축소되고 있는가 확대되고 있는가, 만약 축소되고 있다면 그 원인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비평의 왜곡에서 비롯하는 것인가? 이같은 질문들은 아주 투박해 보일지 몰라도 문학사적 평가의 대상으로 오를 만한 작가들에게 반드시 던져져야 할 질문이다. 물론 한두 사람이 해결할 문제는 아니며 당대 평단의 비평적 협동을 통해 해답이 모색되어야 할 그런 것이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이 세 작가에 대한 평가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다루어지는 방식도 달라서, 신경숙에 대해서는 그의 소설집이나 장편소설에 붙은 해설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그가 전체적으로 부당하게 ‘신화화’된 점, 그리고 그런 신화화의 결과 작가의 창조적 가능성을 오히려 제한하고 있는 점이 지적된 데 비해, 은희경의 경우는 『마이너리그』라는 장편이, 전경린의 경우는 『열정의 습관』이라는 장편이 주로 논의되면서, 이 두 작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례사적인’ 상찬이 쏟아지고 여기에 문학권력이 작용하여 올바른 비평을 실종케 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차이가 나는 이들의 논의를 일일이 따라가기는 어려운 일이니, 이 세 작가의 삶에 대한 비평력을 묻는 일의 일환으로 이 기회에 이들의 근작 장편들을 한번 간략하게나마 점검해보기로 한다.

삶의 비평이라는 관점에서 신경숙(申京淑)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에게 비평의 대상인 그 삶이란 것이 그다지 폭넓은 영역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삶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방식은 미세한 감각의 차원에서부터 대규모 사건과의 연루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에서 실현되지만, 크게 보아 삶이란 개별적인 것으로든 사회적인 것으로든 어느 일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양자의 결합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전체성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신경숙의 작업에서 삶의 모습은 개인적인 것으로 한없이 끌려들어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작가는 삶에 대한 감각적인 수용과 기억의 복원을 통해 그 삶을 재구성하려는 일에 몰두한다. 개인적인 것으로의 이러한 구심력이 사회적인 국면으로의 열림과 살아 있는 긴장관계를 이룰 때, 가령 『외딴방』(1995)에서와 같은 드문 성취가 발생한다. 그러나 대개 신경숙에게 있어 이같은 사회적 차원으로의 열림은 지극히 조심스럽고 억압되어 있어서, 거의 불가피하게 생동감의 결핍을 가져오고, 이것이 그의 삶의 비평력을 생기있고 힘찬 것이 아니라 어딘가 미약한 것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비교적 최근에 씌어진 두 장편 『기차는 7시에 떠나네』(1999)와 『바이올렛』(2001)을 보면 신경숙의 세계가 『외딴방』의 성취에서부터 퇴각하는 징후를 느끼게 된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대학시절 야학에 참여했다가 동료들을 버린 한 여자(하진)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과 사랑하는 이의 배신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고 자폐증에 걸린 그녀의 조카(미란)가 그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는 과정을 병치해, 두 상처입은 여자의 삶으로의 회복을 그려내고자 한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회복을 통해서 삶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인식이나 내용도 이룩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진은 결국 잃어버린 과거를 밝혀내고 그와 동시에 미란도 상처를 딛고 새출발하지만, 사회와의 관련에서든 자신의 삶과의 관련에서든 이같은 회복과정은 이미 존재하는 삶의 비극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얻는 안도감의 복원일 뿐, 삶이라는 수수께끼를 추궁하는 비평적 물음에는 한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이 작품이 읽힌다면 그것은 하진의 기억을 되살리는 방식, 말하자면 기억의 조각보를 짜맞추어나가는 추리소설적인 장치들이 진전없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덕분이다. 기억의 짜맞춤이라는 구성은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하는 소설적 장치이지만, 그 짜맞춤을 통해 드러난 진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즉 미란의 잃어버린 과거로 드러나는 노동운동의 기억은, 그 역사성과 현실성이 철저히 탈각된, 말하자면 삶의 상처를 준 어떤 것으로 대상화되어 있을 뿐, 삶과 관련된 성찰의 재료가 되지 못한 채 소설의 틀 속에 의미없이 방치된다.

근대소설에서 개성적인 인물들의 창조와 그들간의 살아 있는 관계의 양상은 근대적 삶의 인식에서 필수적인데,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인물들에서 이같은 특성은 구현되지 못한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미분화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하진과 미란 같은 주인공은 물론이고 그밖의 언니·부모·현피디 등 주요인물들 모두가 하나같이 동일한 정서와 감정상태에 머물고 있다. 거기에는 인간의 ‘고독함’의 힘과 매력이 늘 맴돌지만, 그같은 정조 속에서 삶은 일종의 유령처럼 덧없이 떠도는 어떤 것으로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 모든 인물들을 통해서 작가가 내보이는 삶에 대한 비평이란 삶의 불모성에 대한 새삼스럽게 되풀이되는 추인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지배하는 유령과 같은 삶의 양상은 『바이올렛』에서 더욱 현저해진다. 화원에서 일하는 한 내성적인 여자의 내면적 상처와 존재의 고독은, 분주하지만 공허하고 위험스러운 도시의 유령성과 조응한다. 그녀의 꺼질 듯 사라질 듯 아련한 영상이 도시의 삭막함과 대조되어 선명하게 드러나고, 도시와 맺어진 기계문명 속에서 마치 공사장의 바이올렛처럼 희생되어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 점에서 이 작품은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 비해서 삶의 비평에서의 내용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삶의 다면적이고 중층적인 양상은 개인의 의식 속으로 일차원화하면서 그 양감(量感)이 상실되고 만다. 내면적 고독의 존재학을 농촌에서 유년기의 원초적 상실감과 관련시킨 것 자체가 그 고독의 절대성을 말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그로써 고독의 문제에 들러붙어 있는 사회성에 대한 천착이 소실됨으로써 근대문명의 성격에 대한 성찰이라는 더 심도있는 과업은 이 작품에서 기대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바이올렛』에 여성의 억눌린 욕망과 그것의 발현이 맞닥뜨리게 되는 가혹한 징벌, 그리고 도시와 농촌 혹은 도시 속의 화원과 근교의 농원 등을 대립시키는 알레고리적 설정으로 근대사회의 훼손된 삶의 가치를 환기시키려고 한 점 등 삶의 복합성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바이올렛이라는 꽃이 표상하듯, 보잘것없는 삶의 존재태에 대한 연민과 버림받은 것들에 대한 자연스런 애정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같은 ‘환기’에서 더 나아가 삶의 사회적 연관관계를 파고드는 탐색과 질문의 기미는 역시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산견(散見)되는 사회적이거나 남성적인 폭력에 대한 묘사조차도 서정적인 환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 전체적으로 소멸의 미학이라고 칭할 만한 죽음에의 이끌림과 유령적 삶에 대한 숙명론적 암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90년대적 삶의 양태에 대한 논란을 통해 90년대 작가들이 의미부여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단자화라거나 개인의 발견이라는 담론이 성행했고 신경숙의 경우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신경숙이라는 이름이 떠올리는 미시적 삶의 양태에 대한 섬세하고 감각적인 관찰은, 「풍금이 있던 자리」나 「오래전 집을 떠날 때」를 비롯한 많은 탁월한 중단편들에서 뚜렷하다시피, 문학의 영역뿐 아니라 삶의 총체적인 이해에서도 어떤 새로움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적’이라는 수식어에서도 엿보이듯이,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80년대적’ 과잉 혹은 결핍에 대한 하나의 보충으로서의 의미일 뿐 그 자체로서 완결되고 충일한 삶의 비평을 이룩하는 원천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90년대도 과거가 된 지금, 이 문제는 새로운 성찰을 비평에 요구한다. 90년대를 넘기는 싯점에서 나온 신경숙의 두 장편소설이 도달한 삶의 비평이 이처럼 퇴보의 기미를 보인다면, 이것을 하나의 계기로 삼아 90년대적인 삶을 특권화하고 과잉의미를 부여해온 비평담론의 역작용을 반추해보는 것도 이 시대 비평의 책무라고 할 것이다.

은희경(殷熙耕)의 장편 『마이너리그』(2001)는 특히 ‘창비’라는 문학권력의 작용과 관련지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도 이 작품과 이 작품의 출판경위 및 그에 대한 평가에 상당히 긴 글(고명철 「메이저에서 상품화된 마이너들의 농담」)이 배당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이너리그』는 역사의식의 빈곤을 보여주는 실패작임에도, 작가의 명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문학권력의 비호에 의해 출판되고 이어서 과잉평가를 불러일으킨, 문학권력 행사의 한 나쁜 사례로 거명되고 있다. 이 소설의 작품으로서의 성취를 높이 보기 어렵다는 점에는 필자도 동의하고 ‘문학권력’일수록 상업주의를 경계해야 마땅하겠지만, 이같은 혹평이나 심지어 출간시비까지 불러올 정도로 이 작품이 떨어진다고도 보지 않는다. 다만 은희경의 경우에도 그가 누려온 90년대적 위광(威光)이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이며, 지금 단계에서 어떻게 갱신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확실히 은희경의 삶에 대한 비평은 신경숙에 비해서 훨씬 더 명백한 형태로 드러나고, 또 지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은희경이 신경숙과는 대조되게 의식적으로 서정성을 배격한 데서 비롯한다. 은희경이 주된 서술전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냉소적 관찰자의 시선 자체가 이러한 지적 거리를 발생시키고, 소설 속에 나타난 삶의 양상들은 이 관찰자적 시선에 붙잡힌 풍자의 대상으로 제공된다. 이같은 특성이 그의 소설들에서 ‘빈말’을 줄이는 비평적 생기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같은 전술이 가지는 한계는 그것대로 남는다. 즉 냉소를 통한 삶의 비평은 냉소적 시각이 가진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법이 없고, 그 냉소의 시각이 확고하면 할수록 작품이 삶에 대해 가지는 관련성의 폭과 깊이는 줄어드는 역설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찰자적 시선이 삶의 풍성한 내용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는 해학으로 꽃피지만, 냉소적인 의식의 지배가 두드러지는 순간 해학은 어느새 쓴웃음이나 실소로 떨어진다.

은희경이 『마이너리그』에 앞서 발표한 장편 중에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가 있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진희는 이른바 은희경적인 시선의 지배가 일관되게 관철되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관찰자적 의식을 통해 삶의 진상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날카로움이 동반되는데, 거기에는 가령 여관에서의 성행위 때 껌자국으로 생긴 벽의 반점들을 언급함이 그러하듯, 화자의 산만하고 사소한 의식을 전경화(前景化)하면서 세부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로 장면의 리얼리티를 살려내고 있다. 사랑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비웃고 깨뜨리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작가는 사랑이라는 체험에서도 ‘빈말’을 피하면서 삶의 하찮음과 삭막함에 대한 하나의 비평적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가 인간관계에 대해 보이는 삶의 비평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게임으로 관조하는 선에서 더 진전하지 못하고,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것의 환상에 대한 부정이라는 소극적인 대응에 자족하고 만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가 가리키는 바 인간의 삶이란, 관계의 가능성을 회의하고 그 관계의 성립에 대한 신화에 붙잡히지 않으려는 깨어 있지만 폐쇄된 내면의식으로 구성된다. 삶의 이러함을 선뜻 받아들이고 오히려 당당히 자임하는 점에서 진희의 의식은 열려 있으나, 그 이상의 살아 있는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사유하는 일은 이 작품에서 배제된다. 이것은 은희경의 첫 장편 『새의 선물』(1995)이 가지는 모종의 건강성에 비춰보더라도 어딘가 병적인 삶의 인식과 유관한 것이다. 『새의 선물』의 문학적 성취는, 관찰자적 시선에 지배되는 면은 있어도, 민중적 삶의 현실에 대한 해학이 어느새 그같은 시각의 감옥에서 벗어나 인물과 사건들을 생동케 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가 조숙하긴 하나 어디까지나 어린이인 탓에 허용된 자유로움이 도리어 이같은 성취로 이어진 반면, 성인이 된 화자의 위악적인 어투에서도 예고되듯이 이미 굳어진 관찰자의 냉소어린 시선 아래서는 삶에 대한 성찰의 영역이 현저히 축소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럼에도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는 속물적인 삶의 양태들에 대한 객관적인 제시를 통해서 발현된다고 여겨지는 일정한 사회성이 동반되는데, 최근작인 『마이너리그』에서 강화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마이너리그』는 이 시대 소시민적 삶의 풍속도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으로, 마이너로 지칭되는 소시민의 삶의 양태를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의 와중에 함께 배치하되 그 무연함과 우연성을 암시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의 사건으로서의 위엄을 희화화하고 동시에 개개인들이 가지는 삶의 희비극성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만수산 4인방의 삶에 어떤 진정성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희극적인 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희에 대한 그들의 순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 자체는 어떤 절실성이 상실된 채 사회적 사건들 혹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훼손되고 마모되면서도, 속물적인 우월감을 버리지 않고 마치 지푸라기처럼 삶의 격랑을 헤쳐나가는 끝없이 고단한 도정이다. 『새의 선물』에서 보이던 건강한 해학의 자취는 사라지고 일종의 블랙코미디의 요소가 지배하게 되면서 곳곳에서 발휘되는 풍자조차도 삶의 절실함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순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속물됨의 그 나름의 정당성에 대한 옹호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빈말에 대한 거부의 포즈 자체가 내용이 되어버림으로써, 『마이너리그』의 삶의 비평력은 피상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된다.

은희경이 보여주는 지적 유희의 전략에서 속물화된 90년대적 대중은 궁구(窮究)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단지 풍자나 자조 혹은 웃음의 대상이 되며, 그 결과 시대와 속물성의 문제에 대한 이를테면 역사적인 혹은 사회학적인 탐구를 통해 도달될 수 있는 깊이를 얻지 못한다. 대중의 속물성에 대한 이러한 불철저한 태도는 『마이너리그』에서 보이듯 애매한 연민의 감정을 동반하는바, 여기에 속물됨의 근거에 대한 좀더 본원적이고 사회적인 질문은 자리잡기 어렵다. 사회에 대한 풍자의 순간이 도로 세상질서에 되잡히고 마는 역설에 은희경 소설의 위기가 존재하고 있다면, 이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 현상 이면에 깊이 자리잡은 어떤 역사성에의 열림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세 여성작가 가운데 가장 늦게 주목받은 전경린은 최근 들어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1999)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2001) 『열정의 습관』(2002) 등을 잇달아 펴내 어떤 점에서는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세 장편소설은 전경린이라는 한 독특한 작가의 파탄의 궤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주목된다. 전경린이 가진 독특함은 특히 초기작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도달한, 기괴함과 일상성의 절묘한 결합이다. 작가는 한 평범한 전업주부(미소)의 일상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통해, 무료하게 잠자고 있던 한 영혼이 굳어진 삶의 외피를 뚫고 모험에 대한 추구와 더불어 깨어나는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같은 주제 자체는 진부한 것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아파트 단지에 출현한 염소라는 이미지를 한 평범한 주부의 구체적인 일상과 핍진하게 맺어둠으로써 엉뚱할 정도로 새롭고도 절실한 어떤 긴장어린 공간을 창출해내었으며 이 아슬한 균형 속에서 일상성의 외피를 깨는 일 자체에 대한 사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같은 소설적 긴장은 이후 나온 장편들에 의해서 무너지는데, 이것은 전경린이 일종의 무서운 균형을 포기하고, 해방된 본능의 세계와 그 운명적 성격에 대한 탐닉으로 떨어짐으로써 비롯된다.

최근의 장편들 가운데서 그런대로 전경린에게서 가능한 삶의 비평력이 발휘된 작품은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정도이다. 이 작품은 한 기혼여성(미흔)이 성을 통해 자기의 삶을 자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자기파멸적인 정열에의 탐닉과 그것으로 야기되는 삶의 열림과 단절, 그리고 자연으로서의 성의 회복을 통한 일종의 우주적 소통의 체험에서 생겨나는 세상살이의 슬픈 비밀과 생명의 곡예에 대한 깨달음이 존재한다. 이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만큼, 이 작품이 “본격문학의 외양을 두른 함량미달의 낯뜨거운 연애담”(이명원 「‘마녀’는 어떻게 부드러워지는가」)이라고 치부될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두드러지게 지배하는 것은 운명론적 세계관이며, 여기에는 그 우화적인 배경의 설정에서 보이듯 역사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져 있다. 이 열정의 사건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국면이 아니라 일정한 시공간에서 언제나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이야기로 나타난다. 즉 생명의 요청으로서의 ‘몸’의 부름에 응하는 한 인간의 삶은, 그 삶이 실제로 뿌리박고 있는 현실과 역사의 공간에서 풀려남으로써 일종의 주기적인 반복의 메커니즘 속에 흡수된다. 미흔의 깨달음은 타자와의 만남과 사회적 관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낭만적 자아의 생명체험과 그 좌절 등 유아론(唯我論)적인 경험을 거쳐 도달한 것이며, 그런만큼 추상적이다.

물론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소재가 된 불륜 이야기는 근대소설을 근대소설이게 하는 욕망의 문제와 근대성 자체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함축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륜이 흔한 소재로 쓰인다는 현재의 대중추수적인 경향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개별 작품에 구현된 그 비평력은 그것대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에 이같은 열정의 파괴성뿐 아니라 그 파괴의 기원에 사회구조(구체적으로는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질서)가 가로놓여 있음이 폭로되고 있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다. 또한 성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며, 이같은 열정의 체험을 통해서 파괴를 통한 생성이 이룩된다는 암시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소설에서 기대되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와, 제도나 윤리를 포함한 기성질서의 폭력적인 합리성 사이의 대립이 끈질기게 추구됨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새로운 인식과 리얼리티를 이 소설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삶’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으로 환원된 나머지 사회적 삶과의 연관에서 뿜어져나오는 생동감이 없는데, 이 부재는 「염소를 모는 여자」의 ‘미소’가 담지하고 있는 어떤 생생함에서도 아주 멀어져버린 전경린의 폐쇄된 세계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난해 출간된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에서 이같은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운명담의 요소는 더 악화되어 나타난다.

『열정의 습관』은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다소 길게 다뤄지고 있는 작품인데, 기실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부터가 수상쩍다. 성의 문제를 파고듦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묻고자 하는 의도가 짐작이 간다고 해도, 이 소설에서 작가는 마음먹고 성(性)에 대한 자신의 머릿속 이해를 표현했을 뿐 작품으로서의 의미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인공인 미홍이든 아니면 다른 등장인물이든 여기서의 성은 살아 있는 인물들의 그것이 아니다. 모든 인물들이 작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관념의 꼭두각시들이며, 이것은 이 소설에서 인물들 사이의 만남에 아무런 필연성이 주어지지 않는 것과도 상통한다. 두드러지는 것은 성행위라는 오랜 습관에 대한 숭배와 성적 쾌락의 성격에 대한 관심이며, 이러한 관심과 성에 부착되어 있는 생명의 요소가 구별되어 나타나지 않는 점에서, 말하자면 포르노의 경계로 위험스럽게 다가간다. 이같은 소설에서 삶의 비평의 수준은 논외(論外)가 된다. 굳이 사회적 부도덕성을 문제삼을 까닭은 없겠지만, 이보다 오히려 더 심각한 추문은 이것이 성에 대한 일종의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주의적’ 의도의 소산이라는 점에 있다.

 

 

4. 나오는 말–비평은 있다

 

비평을 다시 생각하자는 뜻으로 시작한 이 글이 이처럼 세 여성작가의 장편들에 대한 한바탕의 ‘타작’으로 이어진 것을 새삼 변명할 생각은 없다. 전체적으로 이 세 여성작가의 장편들이 겪고 있는 곤경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그것은 삶과 존재에 대한 이들의 인식에서 역사의 지평이 희미해지는 순간 그 소설적 비평력의 저하가 일어난다는 점, 고독한 개인의 영상이 등장인물 혹은 화자의 일면적이고 심지어는 자폐적인 의식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같은 존재태의 사회적 조건이 탐구되지 않음으로써 삶 혹은 등장인물의 살아 있는 역동성이 드러나지 않고 추상화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90년대를 대변하는 데 큰 몫을 해온 이 작가들의 세계가 이번에는 자신을 통해서 구성된 그 90년대성을, 더 구체적으로는 그 담론의 감옥을 벗어나는 소설적 모험을 요구하고 있다면, “90년대 문학의 위기를 낳은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인 과잉해석 및 주례사 비평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필요하다”(권성우 「현학과 과잉, 그리고 ‘비평의 감옥’」)는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의 문제의식은 어느정도 유효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비평의 직분이 반드시 비판을 의미하지도 않고 비판을 해야만 제대로 된 비평이라는 보장도 없으며 어떤 점에서는 작품의 의미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충분히 좋은 비평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주례사 비평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거론된 ‘해설’이나 심지어는 겉표지의 추천사조차도 그 수준에 따라 거기에 어떤 비평의 속성이 실릴 수도 있고, 단순한 과잉수사이자 선전문구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비평의 직분은 작품의 비평력을 포착하는 능력과 그것을 풀어내는 논리가 뒷받침될 때 제대로 살아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 작가에 대한 필자의 논의가 비평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평의 자리는 작가와의 대화, 더 구체적으로는 작품의 비평력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그같은 대화의 과정에서 진정한 비평이 생성된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는 길은 이처럼 창조적 정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룩되는 삶의 새로운 인식으로부터 열린다. ‘빈말’을 하지 않는 습관은 창작에서나 비평에서나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건이 된다. 비평은 바로 거기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