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평론 | 제9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환(幻)의 순간, 초월의 문턱
최정례론
강계숙 姜桂淑
1973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현재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thoth73@freechal.com
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존재의 근원적 비밀에 대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 영혼의 궁극적 깊이는 시간의 근원적 깊이”라고 말한 토마스 만의 예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삶의 조건이자 사회적 리듬의 형식임을, 또한 경험과 행동에서 비롯된 지적 구성물이자 내적 존재형식임을 알고 있다. 특히 자아 내부에서 체험되는 시간의 지속양상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는 세계에 대한 자아의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세계와 우주, 자아와 대상 간의 관계를 사고하는 근저에 어떤 시간관이 놓여 있는가에 따라 문명의 특징과 사회의 구조가 형성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시간이 기계적 분절 단위로 인식되면서 사회적 공동리듬은 균등화되었고, 삶의 이질성과 고유성을 허용하지 않는 표준화된 패턴이 강요되었으며, 그 결과 효율성과 동질성만을 최우선시하는 오늘날의 문명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고찰은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숙고이자 성찰이기도 하다.
시간의식이 이렇듯 존재의 내적 구성물이자 체험 인식의 주요 원리라는 점에 관심을 두고, 이를 시작(詩作)의 중심 화두로 내세우는 시인이 있다. 서정시의 장르적 본질 중 하나는 시적 ‘순간’에의 몰입을 통해 세계와의 합일을 성취하고,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다양한 시간체험을 ‘영원한 현재’로 통합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타자성의 화해와 자기동일성의 재창조를 의미한다. 이때 서정시의 시간은 계기적이고 연대기적인 현세의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는 심미적·상상적 시간에 의해 해체하는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형식이다. 따라서 서정시를 형성하는 시적 상상력 속에는 ‘시간(순간) 안에서 시간(자연사)을 극복’하려는 역설이 내재되어 있다.1 ‘시간 안에서의 시간 초월’이라는 이러한 역설적 상상력으로 존재의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형이상학적 열정을 육화시킨 또다른 개성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1990년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2을 상재한 최정례(崔正禮)가 바로 그같은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소재의 특이성이나 시형식의 파괴 등을 통해 일회적인 충격효과를 의도하는 시들과 거리가 멀며, 정신주의를 표방하면서 달관과 관조의 자세를 유지하는 작품들과도 다르다. 그의 시선은 ‘빨간 다라이’ ‘보푸라기’ ‘돌멩이’ ‘파헤쳐진 흙’ 등에 닿아 있다. 그의 손끝을 거치면서 이 별볼일 없는 미천한 사물들은 거대한 시간의 누적을 숨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간결하게 절제된 언어와 명징한 이미지들은 지리멸렬한 살림살이들을 고전적인 투명성의 장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 투명성은 일의성을 거부한다. 다의적인 모호성을 거느린 그의 시적 언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현재 속으로 끊임없이 간섭해 들어오는 과거의 거대한 지층이 투시될 때 비로소 존재 전체가 드러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시인의 입을 빌려 현재화되는 ‘장난감 기차’와 ‘장롱’들은 자기들만의 역사와 ‘시간의 호수’를 품고 시의 땅에 영원의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최정례의 시는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지적 탐색을 통해 최근 우리 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두고 온 푸른 사과
‘지금 여기’에서의 결여는 없는 것, 빈 것의 자리를 채우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면 욕망의 대상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 가방 속에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할 때 난감함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감지된 그 무엇의 부재가 삶에 치명적인 균열을 초래한다면 사태는 자못 심각해진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본 노점에서 예측 불허의 파국이 시작되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푸른 사과’로부터 생이 어긋나고 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사소한 우연에 의해 안전하다고 여겨진 삶의 질서가 방향 없는 혼돈으로 이끌리는 것, 삶의 그러한 나약함과 불완전성이야말로 존재의 원초적 한계이기도 하다.
버스가 거기 섰기 때문에 노점의 푸른 사과가 내게로 왔다
여름도 다 가고 한물간 수박 곁에서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보았기 때문에 푸른 사과는 한층 푸르고
배꼽 부분은 부드럽게 패인 채 나를 향하고 있었다
(…)
푸른 사과는 내가 저를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아직 그 정거장 좌판 위에 서 있을 것이다
한없이 기다리다 지쳤기 때문에 푸른 사과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누군가의 손에 매달려 갈 것이다
참 이상하고 짧은 불꽃이
한달간 밥을 먹지 못한 이 여름이
언제 올지 모르고 가고 있었다
푸른 배꼽 속으로 뛰어들어가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내려서 푸른 사과에게 갈 수가 없었다 이상한 버스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지
푸른 사과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푸른 사과」(『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부분
이 시는 이지(理智)의 영향권을 벗어나 어떤 구체적 대상(푸른 사과) 속에 감춰져 있던 기원(起源)의 상이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우연을 통해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푸른 사과’는 간절한 희구의 대상 혹은 영혼의 내밀한 동반자를 암시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망각된 자기 생의 기원을 상징한다. 그것은 잠재된 기억의 얼음 바다를 부수는 한자루의 도끼이다. 도끼날로 조각난 바다는 정해진 노선의 ‘버스’와 그것에 의지한 삶을 향해 위태롭게 넘실댄다. ‘푸른 사과’가 내면적 관심사가 되고, 그 “푸른 배꼽 속으로 뛰어들어가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게 된 이상,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평온한 삶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버스’가 된다. 그 버스 안에서 ‘나’는 전할 수 없게 된 말을 가슴에 담은 채 안타까워한다.
기원을 잊은 자에게, 기원에 가까이 다가갔으나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자에게 과거는 현재화될 역동성을 상실한 부재의 공간이다. 과거와의 연속성을 보장받지 못한 현재는 그 결과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실의 순간이 된다. 근원에 대한 망각이 도저한 시간의 강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무의미의 정지상태로 만든 것이다. 딱딱하게 응고된 무상(無常)의 순간만이 ‘지금 여기’를 채우고 있다. 시인은 두께도 누적도 없는 이 무시간의 상태를 죽음과 동일시한다.
西天 냇갈에 고기 잡으러 갔다
솜방맹이 석유 묻혀
깊은 밤 검은 내 불 밝히면
붕어들 눈 멀거니 뜨고 가만 있었다
흐르는 냇갈 안고 자고 있었다
밑 빠진 양철통 갖다대도
아직 세상 흐르는 줄 알고 가만 있었다
우리 언니 죽을 때 꼭 그랬다
착한 눈 멀거니 뜨고
입 벌린 채
–「西天으로 1」(『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전문
“흐르는 냇갈 안고 자”는 붕어와 “눈 멀거니 뜨고 입 벌린 채” 죽은 언니, 이 둘의 병치는 지속적인 경과 속에 존재하면서도 흐름의 연속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영원한 정지’ 속에 갇히는 것이 바로 죽음임을 보여준다. 흐르는 물 속에서 자신도 흘러가는 줄 아는 붕어의 천진성은 ‘밑 빠진 양철통’이 다가오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변할 줄 모른다. ‘검은 내’는 죽은 언니에게서처럼 시간이 부재하는 저승이다. 그 안에서 “눈 멀거니 뜬” 채 멈춰 있는 붕어는 이미 굳어버린 시체이다. 붕어와 죽은 언니가 수시로 교차하는 이러한 병치구조는 두 대상이 인간 존재의 상징임을 짐작케 한다. “아직 세상 흐르는 줄 알고” 그 속에 몸 담가 변화와 발전, 진보를 이루려는 어리석음, 흐름의 시원과 방향을 묻지 않는 맹목적 자세, 없는 과거와 오지 않는 미래를 생산하는 시초에 대한 무감각. 붕어는 생을 죽음으로 이끄는 인간의 박제화된 현재를 되비춘다. 절대적 부정의 이 정지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붕어이거나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
‘검은 내’ 속에서의 일상이 죽음과 얼굴을 맞댄 파편화된 순간들의 짜깁기일 뿐이라는 것, 그로 인한 단절과 소외가 우리의 현실적 상황이라는 것을 「방」(『햇빛 속에 호랑이』)은 ‘그’를 둘러싼 방 안과 방 밖의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방 밖에는 ‘천 마리의 새’가 날아와 지저귀고,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커다란 나무’가 제 잎을 떨군다. 그에 반해 방 안에는 “시간을 쌓아”둔 이가 세상과 결별하고 스스로를 무시간의 부동성에 방치한다. 그의 잠은 그래서 “아주 재가 되어”버린 “죽음 같다”. 방 밖이 자연의 리듬을 따르느라 밝고 화사하다면, 방 안은 무관심과 피로, 유기된 생활로 인해 어둡고 황폐하다. 「西天으로 1」의 ‘검은 내’가 방 안을 흘러다닌다. 「사막 편지」(『햇빛 속에 호랑이』)에서는 이 ‘검은 내’가 ‘모래 사막’으로 변용된다. 모래와 살고 모래를 기르며 모래를 퍼먹는 삭막한 사막 풍경은 물기 가득한 바람에의 꿈마저 헛된 소망으로 만든다. 탈출 욕구는 무위로 끝나고, 끝없는 갈증과 막막한 절망이 ‘이곳’에 가득하다. 생명이 소진된 이러한 공간들은 과거의 흔적도 없고 미래의 조감도 무의미해진 일상이 언제라도 무너질 허위의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래서 일체가 죽음의 난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표상한다.
최정례에게 죽음과 일상성은 자기만의 고유한 시간이 상실된 것을 뜻한다. 그것은 세월을 겹겹의 나이테로 쌓은 ‘까마득 나무’가 고사상태에 이른 것에 비견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영원한 멈춤, 어두운 무(無)로 돌아가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그는 ‘3분’이라는 틈새를 파고들어가 찰나의 무한한 확장과 열림을 시도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리가 끊어지고, 비행기가 떨어지고, 심지어 한 나라를 세울 수도 있는 ‘3분’, 이 중대한 가능성의 시간을 ‘수치와 망각’ 속에 허비하는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을 향해 그는 “서둘러 겨드랑이에/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3분 동안」, 『붉은 밭』)라고 재촉한다. ‘검은 내’와 ‘모래 사막’과 우울한 ‘방 안’에서 벗어나 자신의 다른 가치를 찾아 비상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상에 매인 한, 여기 아닌 ‘저 너머’를 꿈꾼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좌절을 동반하게 됨을, 낭만적 동경의 그 비극적 아이러니를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배반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 오천살은 먹은 내 마음”(「한 오천살은 먹은 내 마음이」,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을 확인하는 꿈이다. “백천만번의 잎”(「까마득 나무 앞을」, 『붉은 밭』)이 피고 진 시간, “청동거울 속의 바닷길 수수만년 전 떠난 별빛이 이제 와닿”(「지락와도」, 『햇빛 속에 호랑이』)는 시간, “멀리서 달려온 것 아득하게 지나가는 것에게 백천만번 절”(「저 햇빛 삼천갑자를 흘러」, 『햇빛 속에 호랑이』)하는 시간, 이 거대하고 유장한 시간을 스스로의 존재 속에서 반추하는 탐사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회복하고자 한다.
배반의 꿈
모든 변신은 일종의 소멸이며, 동시에 안이한 상태에 있는 현존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이다. 현상태를 포기해야만 변화와 이행이 가능하므로 그것은 일정한 성질의 사라짐을 뜻한다. 한편 변신 욕망 속에는 현재를 불만스러워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의지와 함께 미숙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려는 열의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변신은 방향성을 띤 과감한 일탈이다. 시인은 ‘늙은 배나무’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일상성의 권태와 무료를 과감히 배반한다. 따라서 그 안에는 ‘지금 여기’에 대한 강한 부정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숨이 차
나는 나무가 아닌 것 같애
속박받는 고통을 깜빡깜빡 잊고
부지런을 떠는 젊은 잎들이
오해를 사랑이라고 믿고 열심히 수액을 밀어올리는
뿌리가 줄기가
이젠 몸에서 멀어
몸은 이제 내가 아니야
시간의 안개 속에 희미해진 그림자에게로
거슬러가는 중이야
조그맣고 떨떠름한 열매를 달았던
가시덤불 속에 얼크러졌었던
밤이면 서로의 몸을 포개어 기대고
칭얼대는 어린 잎들을 자라 자라 달래주었던
나는 죽어가는 몸의 일부로 배반을 꿈꿔
천의 꽃송이를 하나의 눈(芽) 속에 가두었던
시간 저편으로
–「늙은 배나무」(『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부분
오래 산 까닭에 점점 죽어가는 ‘늙은 배나무’는 그 자체 하나의 긴 역사이다. 뿌리와 줄기를 따라 수만 갈래의 수맥이 쉴새없이 뻗어나가고, 조그맣고 떨떠름한 배가 가지마다 열리고, 어린 잎을 달래느라 밤을 지새기도 한 기나긴 세월. 시인은 배나무의 몸을 빌려 “시간의 안개 속”을 헤친다. “천의 꽃송이를 하나의 눈 속에 가두었던/시간의 저편”, 그 먼 시원을 꿈꾼다. 생(生)과 사(死) 가운데 겪는 가지가지 일들이 시인의 상상 속에서 새롭게 체험되고 기억되는 것이다.
최정례는 ‘늙은 배나무’ ‘가물치’ ‘눈먼 물고기’ ‘사슴’ ‘구름’으로의 변신을 통해 근대적 시간관을 거부한다. 시간을 사물과 상품과 자아의 생산적 원천으로 파악하고 시간에 따라 창조된 사물이야말로 시간을 초월해 영속한다고 여김으로써 유한한 인간 존재에 불멸감을 부여하려 한 파우스트적 시간관도, 과거는 본래 아무것도 없었던 무(無)이며 시간의 경과는 사물과 존재를 모두 무(無)의 심연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이므로 인간 역사에서 과거의 가치는 명백히 부정된다는 메피스토텔레스적 시간관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기정체성을 찾으려는 정신적 여정 속에서 시간의 복수성(複數性)을 인식한다. 시간은 결코 단선적인 하나의 흐름이 아니며, 과거·현재·미래라는 이질적인 시간들을 포용하고 있는 여러 겹의 다발이라는 점을, 그 결과 지금의 ‘내’ 속에는 무수히 다른 시간들이 중첩되어 흐른다는 점을 간파한다. 그리고 그것을 거듭되는 창조의 과정이자 변신의 연속인 영원회귀로 구체화한다.
영원회귀는 고대 인도인의 시간관이었던 윤회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윤회란 인과의 사슬에 의해 전생(轉生)하는 무한한 회귀작용을 가리키며, 다양한 지역에서 여러 민족에 의해 받아들여진 순환적 시간관의 대표적 형태이다. 그런데 이 윤회설 속에는 자아정체성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인식이 담겨 있다. 그것은 무아(無我) 사상으로, 장구한 시간이 겹겹이 누적된 ‘나’란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실체 없는 인무아(人無我)의 존재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시인은 ‘일체개공(一切皆空)’으로 집약되는 이러한 존재론 속에서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얻는 참된 자유의 상태를 발견한다. ‘실체 없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無)’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없음이라는 ‘무한(無限)’을 가리킨다. 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복수의 시간이 현재 속에 깃들임으로써 존재의 무한한 창조와 파괴가 실현됨을 뜻한다. ‘내’ 속에 “처음도 없고/끝도 없는”(「숲」, 『붉은 밭』) 까마득한 시간의 유적들이 내재되어 있다면, ‘나’는 현세의 한계성을 뚫고 무한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최정례 시에 나타난 영원회귀에는 생이 되풀이된다는 뚜렷한 자각과 함께 그것을 자기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강한 능동성과 긍정성이 내포되어 있다.
「내가 한 잎 나뭇잎이었을 때」(『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에는 영원회귀를 반복하는 ‘나’의 25년 전, 55년 전, 100년 전의 전생이 형상화되어 있다. 아버지, 고모, 삼촌,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로 거슬러오르는 혈연관계의 소급은 ‘가물치’와 ‘한 잎 나뭇잎’이라는 기원 속으로 서서히 녹아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한 잎 나뭇잎’으로 흔들리며 먼 앞날의 ‘나’, 오늘 이 순간의 ‘나’를 내다보는 새로운 ‘내’가 나타난다. 과거와 그 과거의 미래, 현재와 그 현재의 과거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 융합되는 가운데 창조적 변신으로서의 회귀놀이는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일회적 존재에 불과하던 ‘나’는 기원을 향해 오르는 자유로운 한마리 가물치가 되어 이 세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무’의 존재가 ‘무한’의 존재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자 자기정체성의 진면목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세계의 유한성을 극복케 하는 이러한 회귀체험은 시인에게 죽음 같은 일상을 견디게 하는 내면적 힘이다. 아이의 눈물 속에 “아버지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가 “가만가만 흘러온 길”(「어떻게 왔을까」, 『햇빛 속에 호랑이』)이 있다는 깨달음이나, 달과자 속에서 “내 속에서 나온 애/그애 속에 또 그애의 딸/그 속에 더 작은 그애의 딸”(「낮달」, 『햇빛 속에 호랑이』)을 보게 되리라는 예견은 무(無)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의 흔적이 현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한, 생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의식을 반영한다. 이것은 허무의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최정례의 시에서 영원회귀의 재현은 삶의 무상성(無常性)에 대응하는 시적 상상력의 발현이자 무가치한 일상성을 극복하려는 초월의지의 소산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정체성과 기원을 밝히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생(타자)과의 만남으로 확대되어 허무의식에 대응하는 방법적 전략으로 기능한다.
내 몸에 찍힌 어디 먼 다른 생
고대 인도의 철학자들이 윤회를 설명하기에 앞서 세계를 신이 꾼 ‘꿈’(Maya)으로 비유했듯이, 이것이 저것으로 혹은 여기가 저기로 변전하는 ‘물화(物化)’ 개념을 장자는 자신의 나비꿈을 통해 설명한다. 「끝장면」(『햇빛 속에 호랑이』)이나 「붉은 밭」(『붉은 밭』)에도 신들의 마야나 장자의 호접몽처럼 ‘내’가 다른 이로 변화하는 현존의 질적 비약이 ‘꿈’으로 재현되고 있다. 시인은 “어디 먼 다른 생의 알 수 없는 끝장면이 내 몸에 찍힌”(「끝장면」) 탓인지,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붉은 밭’에서 잠든 것인지 깬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몽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 혼몽의 착각, 환(幻)의 순간을 가리켜 스스로 “착란의 순간”(「시인의 말」, 『붉은 밭』 119면)이라 부른다.
최정례의 시에서 환의 순간은 자기정체성의 확인방법인 영원회귀의 기억이 자아라는 한정된 테두리에서 벗어나 타자를 발견하고 외부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 합치되는 순간인 환은 또다른 개안(開眼)의 순간이자 존재의 비밀이 현시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자아가 포기되고 망각되는 순간이며, 그로 인해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접하는 순간이다. 일상적 현실이 낯선 것으로 뒤바뀌고 눈앞의 실재가 비실재로, 부재가 현존으로 탈바꿈하는 현상은 환의 순간이 초래한 새로운 체험이다. 골목 안의 비닐봉지가 ‘1초 전의 틈 속’에서 ‘오리’로 변해 날아가는 것(「1초 전에는 오리」, 『붉은 밭』),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게 언제인데 방이 넷인 아파트에서 이렇게 누워 있는데 내가 교복을 입고 쪽마루에 엎드려 우는 고등학생 홍주”가 되는 것(「붉은 구슬」, 『붉은 밭』), “좀처럼 잡혀주지 않는 불여우가/내 머리 위에서 튀어 달아나” 전광탑 위에서 “미친 듯 요염한 재주를 넘는”(「여우의 길」, 『붉은 밭』) 것은 모두 환의 다양한 구체화이다.
환상적 이미지의 창조로 가시화되는 이러한 환의 순간은 궁극적으로 타자와의 만남, 타자와의 상응이 실현되는 고양과 충만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두가 이곳에 있지만 동시에 다른 곳, 다른 때에 있다는, 존재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과 밖에서 타자와의 교감을 통해 ‘되어가는’ 것이라는 생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로써 영원회귀의 기억은 자기 삶의 근원을 찾는 한정된 고투에서 벗어나 ‘나’의 생과 타자의 생이, 이 사물과 저 사물이 서로 조응하는 우주적 차원의 회상으로 심화된다.
달빛은 참
모텔 안으로 까만 차가
미끄러져 들어서고
빨간 차가 또 소리없이 스며드는
거길 비추기도 하지
하루 온종일
수박밭은 뜨거웠는데
달빛은 참
미루나무를 눕히고
골짜기 논물에 미루나무가
누워서 흔들리다 흐려지다
꿈에 들어 혼몽 중인
거길 지나기도 하지
수박은 혼자서
둥글어지고 둥글어지고 둥글어지다
잎사귀로 노를 저어
둥근 달에게
기어오르기도 하지
달빛은 참
초록으로 얼룩덜룩한 줄무늬 속으로
붉은 방으로 가득 들어차려고
먼 태양 흑점에서부터 수박씨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너를 만나러 왔는지 몰라 중얼거리며
여름날과 겨울날이 섞여버리도록
목이 말라서
푸른 골짜기 붉은 밭으로
달빛은 참
–「달과 수박밭」(『붉은 밭』) 부분
달이 수박으로, 수박이 달로 융합하는 풍경이 그려진 이 시는 타자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포용하는 어울림의 세계가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 세계인지 잘 보여준다. 모텔 안에서 벌어지는 낯간지러운 풍경과 논물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졸고 있는 미루나무와 먼 태양의 흑점을 수십억년 동안 지켜본 달빛의 기억은 수박의 “얼룩덜룩한 줄무늬 속”에, 검은 수박씨에 알알이 새겨진다. 수박 또한 달을 닮고자 열심히 “둥글어지며” 하늘을 향해 오른다. 땅의 기억을 품은 수박과 하늘의 기억을 담은 달의 하나됨은 타자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을 폐기함으로써 자신의 현현을 성취하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고립과 폐쇄에서 벗어나 타자의 생명 탄생과 성장의 신비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각자의 고유한 시간이 회복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강아지풀을 두고 “달빛이 살쾡이같이 내려와서/(…)/뾰족해진 것/칼과 같이/특이한 식물이 돼버린 것”이라고 노래한 「달빛이 살쾡이같이」(『붉은 밭』)나 미루나무를 가리켜 “미루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미루나무 시간을 삼키고” 구름이 되어 “흩어지고 부서지며 떠간다”고 표현한 「미루나무 길」(『붉은 밭』)은 다른 생의 다른 시간과 조우하는 또다른 예들이다.
또 황사바람 몰려온다
한번도 소식 들은 적 없다
그런데 가끔 그 집 부엌의 숟가락들과
그 아내의 살빛을 생각하는 적이 있다
어쩌면 죽어 이 세상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래바람 속에
기억의 목소리 속에
그 집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있다
노루새끼 같을 아이들의 등허리와
흔들리는 유리창
마당에 널린 빨래들
바람에 섞여 번쩍인다
이상하다
사람과 넋과
있는 것과 없는 것
먼 곳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처럼
첩첩의 산과 강 건너 거기
내 집 아닌 곳이 내 집인 것처럼
가끔 그곳과
그 집이 모래에 섞여 온다
–「황사」(『붉은 밭』) 전문
「달과 수박밭」이 사물간의 조응을 형상화하고 있다면, 「황사」는 황사라는 자연현상을 매개체로 ‘나’의 생과 타자의 생이 서로 교섭하는 체험을 그리고 있다. “어디 먼 다른 생”(「끝장면」)이 모래바람 속에 숨어 있다 황사와 더불어 현현하는 순간, 시인은 이상함을 느낀다. 그것은 낯선 대상이 불러일으킨 어리둥절함이기도 하지만, 원래부터 있었던 듯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리창과 빨래들’이 ‘내’ 안에서부터 밖으로 솟아나온 것 같다는 놀라움이다. 그것은 잊혀졌던 유대감이 회복되고 상호간의 동질성이 확인될 때 느끼는 새로움이기도 하다. 두려움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끌림이 타자의 생을 ‘내’ 안으로, ‘나’의 생을 타자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일치의 정점은 ‘기억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은 때부터 이미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의 발화로부터 이질적인 타자성의 원천인 각자의 과거·현재·미래가 하나로 접합되고 용해된다. 이 목소리가 언어의 옷을 입고 ‘영원한 현재’로 재탄생하는 과정이 바로 최정례의 시작(詩作) 과정이다.
그의 시적 언어는 다른 생을 호명하여 자기 생과 대면케 하고, 서로간의 근원적 연관성을 재확인시키며, 시간의 퇴적물을 음미하게 한다. 흡사 “가벼운 흔들림/때론 고요한 정지/상처의 틈에 새 잎 함께 재우며/(…)/세상 저편의 바람에게까지/팽팽한 끈 놓지 않”(「나무가 바람을」,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는 ‘나무’처럼, 그의 언어는 ‘착란의 순간’ 세상 저편의 ‘너’에게, ‘그’에게, ‘그녀’에게 이르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천년 전의 바람에 흔들리며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다른 나무에게도 이르”는 길이자 “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는”(「숲」, 『붉은 밭』) 길이라는 ‘일즉다(一卽多)’3의 관계성을 성찰하는 언어들, 이것이 최정례가 추구하는 시적 연금술의 궁극이다.
뜨거운 마음의 끝은 차갑다
그러나 자아와 타자,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가 끊임없이 호응하는 환의 순간에 시인은 타자와의 교감에 따른 기쁨보다는 생의 슬픔과 비애를 먼저 통찰한다. 낭만적 충만감에 도취되기엔 이 세계에서의 일상적 삶이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를 정직하게 직시한다. 그의 시에서 무너지고 사라지고 추락하고 주저앉는 이미지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피폐화된 생활의 이면을 명징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안에는 주관적 감정이입이 배제된 정제된 연민과 안타까움이 녹아 있다.
“축대가 무너지고 아무런 새 날지 않고 바람 불지 않고 (…) 사진관이 사라지고 정거장이 사라지”(「산 위에 밭」, 『붉은 밭』)는 풍경은 자신의 자취를 소리없이 지워가는 사물들로 인해 처연하고 적막하다. 시인은 이 세계에 내던져진 실존의 현실적 운명을 서서히 사라지는 ‘축대’ ‘새’ ‘사진관’ ‘정거장’에 빗대어 말한다. 「기차, 바퀴, 아버지」(『붉은 밭』)는 폐품처럼 소모된 인생의 절망과 고통을 담담한 어조로 표현한 또다른 예이다. 실직당한 가장의 상황이 망가진 장난감 기차와 병치된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아이를 향해 “얘야, 기차가/봐라, 숨차게 달리다, 바퀴들/어떻게 널브러져 있는지/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해라/만지면 만지면/날아가버릴지도 몰라/폭삭 주저앉고 말 거다”라고 말한다.
세계의 부정성과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삶의 어두운 공허와 죽음 같은 일상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초월의지라 부른다면, 최정례의 시에서 그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나를 벗어나 너에게로 가는 것, 멀리 또다른 나인 너에게로 돌아가는 것, 처음으로 처음으로 거슬러 가는 것”4이다. 이는 자기 기원을 향해 수렴되는 영원회귀의 기억과 타자와의 합일을 꿈꾸는 환의 순간으로 방법화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초월의지가 현실을 버리고 현실 아닌 ‘저 너머’로 수직상승하는 관념적 승천욕구와 분명 다르다는 점이다. 시인은 현실세계의 사물화와 비정한 획일화를, 그리고 그것을 운명처럼 짊어진 자들의 불우를 계속해서 적시한다. 훼손된 현실을 경계삼아 ‘지금 여기’를 있게 한 까마득한 ‘시간의 저편’으로 수평이동하는 것, 그리하여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생활세계가 직면한 불모의 심각성을 인식케 하며, 동시에 타자와의 공존이 힘겨워진 삶을 되돌아보도록 ‘저 너머’로부터 우리를 각성시키는 것, 그것이 최정례 시에 함축된 초월적 욕망의 본질이다. 현실의 구체성을 초월의 문턱으로 삼는 한, ‘저편’으로의 지향은 내재이면서 초월이고 초월이면서 내재이다. 황폐화된 일상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무욕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쪽 길이 간다
마음을 뻗어보면
마음도 따라 굽어서 간다
붉은 하늘은 별로 내게 마음이 없다
새들이 시끄럽게 저녁 둥지에 깃들고
그들도 내게는 마음이 없다
누군가 지금 나를 오라고 한다면,
마음을 준다면?
나는 그에게 갈까?
뜨거운 마음의 끝은 차가워
나는 그냥 간다
–「西天으로 3」(『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전문
절망이 절망을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맹렬한 반항이듯,5 투명하게 정돈된 무욕은 건강한 욕망을 낳지 못하는 세계의 비건강성에 대한 거부이자 반항이다. 그것은 또한 누추한 현실에 대항하는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방심(放心)이다. 최정례의 무욕은 욕망의 ‘없음’이 아니라, 속악한 세계로부터의 욕망의 ‘거둠’이자 ‘비움’이다. ‘붉은 하늘’과 ‘새들’이 “내게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로부터 욕망을 거둔 것이다. 욕망을 비운 까닭에 마음은 길 따라 자유롭게 “굽어서 간다”. 누가 ‘내게’ 마음을 준대도 “나는 그냥 간다.” ‘내 속의 너’ ‘네 속의 나’도 모른 척하고 “백천만 번의 잎”이 피고 진 시간을 따라 “버려두고 (…) 뿌리치고”(「까마득 나무 앞을」) 간다. 사실 비우고 거두는 노력은 분주한 정신과 냉정한 활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 마음은 ‘뜨겁고’ 그 끝은 ‘차갑다’. 뜨거운 마음의 차가운 끝 때문에 최정례의 시적 언어들은 선명하고 단정하며 예리하고 날카롭다.
강한 부정정신 속에 유지되는 이러한 정갈한 무욕이 다른 생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공감하려는 열정과 어떻게 길항할 것인가에 따라 최정례의 시는 앞으로 새롭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깊이있는 성찰과 밀도높은 언어로 자신의 시세계를 넓혀온 그간의 활동으로 미루어보건대, 자기갱신의 시적 과제에도 시인이 성실히 임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영원성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인식 속에서도 “학은 날개를 펼친 채/하늘을 지그시 밟고/(…)/사슴은 목을 빼 향기만 취해도/백년을 산다”(「자개장롱 속으로」, 『햇빛 속에 호랑이』)는 당초무늬 어우러진 ‘무릉도원’에의 희구가 종종 나타난다는 사실은 시인이 사적 신화의 창조와 고전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경도될 수 있음을 예시한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거슬러오른 최정례의 다음 행보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