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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승자 崔勝子
1952년 충남 연기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등이 있음.
나는 사람인가 간다인가?
한 사람이 앞으로 간다.
두 사람이 뒤로 간다.
세 사람이 옆으로 간다.
네 사람이 돌아간다.
사람은 행위인가 존재인가?
사람이 간다인가, 간다가 사람인가
…………………………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이상한 거울, 혹은 GODIOLOGY, 왈
집시 신비주의자는 사랑이 신비라고 말한다.
차크라 신비주의자는 일곱번째 차크라가 신비라고 말한다.
탄트라 신비주의자는 성합이 신비라고 말한다.
수피 신비주의자는 교훈이 신비라고 말한다.
애스트롤로지 신비주의자는 넵튠이 신비라고 말한다.
카발라 신비주의자는 케테르가 신비라고 말한다.
타로 신비주의자는 13번 카드 죽음이 신비라고 말한다.
나는 오늘의 밥 한그릇이 신비라고 말한다.
그래도 어디 위에서부터인지 뒤에서부터인지 나는 듣는다.
“그렇게도 GODIOLOGY를 모르는 너희들이 신비이다.”
그래서 속으로 나는 묻는다. “뉘신지요.”
“내가 GODIOLOGY이다.”
GODIOLOGY 왈, “너희가 나를 모르는 게 신비다.”
“당신이 누구인데요?”
“이 지상에 온갖 신비주의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온 우주와 생명들을 창조했다고 일컬어지는 장본인이다.”
아, 그 장본인! 그에 대해서는 정말 나는 아는 게 없다.
그는 나를 안다고까지 말하는데,
우리가 그를 모르는 게 자기에겐 신비라고까지 말하는데
누굴까, 누굴까, 내 생전에 그 기억이 없다.
나도 내가 그를 모르는 게 신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모르고 그리하여
나는 나를 모르는 게 신비다.
GODIOLOGY는 내가 그것을 통해서 비춰보아야만 하는
나를 알게 되는 이상한 거울인가보다.
그런데 어디 가야 그 이상한 거울을 구할 수 있을까?
앰트랙 스모킹 룸
피닉스 어디쯤에서 앰트랙을 탄다.
이틀이었던가 하루였던가를 달려 뉴욕에 닿기 위해서,
그리고 중간에 낡고 낡은 세인트루이스 정거장에서 내려
몇시간 혼자 어슬렁거리기 위하여,
앰트랙은 이동하는 즐거운 유람지,
그중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곳은 아래층의 스모킹 룸.
달리는 열차 안에서 담배피는 사람들은
자주 바뀌기는 하지만 일정한 숫자.
가끔씩 들러 담배를 피며 둘러보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얘기를 거는 모습이 보인다.
오기만 하면 스모킹 룸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장광설을 펴는 여자도 있었다.
아예 캔맥주까지 들고 와 마시면서
담배를 피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들도 많이 들른다.
그런 때는 다국적 스모킹 룸이 된다.
한번은 혼자 여행하는 스위스인이 내 옆에 앉게 되었는데,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너희 나라 사람들 중 아는
유일한 사람은 칼 구스타프 융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내가 코리아 사람 중에서 아는 유일한 사람은
미스터 팍, 박찬호라고 말했다.
거기서 사귄 또 한사람은 호주인,
그는 목공일을 해서 번 돈으로
세계를 돌고 있는 중인데 이번 앰트랙 여행이
그 여행 프로그램의 끝순서라고 말했다
그 밤늦은 시각 그는 캔맥주를 아예 박스째로
들고 와 마시고 있었는데 나도 좀 얻어마시다가
취해 나도 모르게 거기서 잠들어버렸고
그래서 내가 내려야 할 역을 놓치고 말았다.
다음 정거자에서 내릴 때는 즐거운 유람지였던
앰트랙이 스산한 유곽으로 변해버렸다.
취해 실수로 하룻밤 지냈던 유곽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