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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틱낫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틱낫한 『화』, 명진출판 2002
장석만 張錫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skmjang@orgio.net
올해 4월에 출간된 틱낫한(Thich Nhat Hanh)의 『화』(Anger, 최수민 옮김)가 베스트쎌러가 되면서 지금까지 약 30만부의 책이 팔렸고, 연말까지 50만부 정도가 팔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런 틱낫한의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예전에 출판되었던 그의 책들이 재출간되고 있으며, 번역되어 있는 책만 해도 15종이 넘는다. 무엇이 그의 책에 이런 갑작스런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일까?
틱낫한이란 이름을 한자로 하면 석일행(釋一行)이다. 즉 그는 일행스님이다. 192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므로, 올해로 만 76살이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 반전운동을 주도하다가 베트남정부의 미움을 사서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망명했다. 지금도 그는 프랑스에 머물면서 수행공동체인 ‘자두마을’(Plumvillage)을 이끌고 있다. 그의 여러 책 중에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화』를 중심으로 그의 기본주장을 살펴보고,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불교는 사람 모두에게 이미 ‘부처’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불성(佛性)’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있어서 사람들은 쉽게 ‘해탈’에 들지 못한다. 그 장애요인이 바로 “탐(貪)·진(瞋)·치(癡)”라는 ‘삼독심(三毒心)’이다. 불교의 수행은 이런 탐욕스러움,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의 상태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삼독심’은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바탕이므로, 이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명(無明)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삼독심’ 중에서도 틱낫한이 주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성냄’이다. 하지만 탐욕과 어리석음의 폐해가 성냄보다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을 터인데, 왜 그는 ‘성냄’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건 탐욕과 어리석음보다 ‘성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성냄’의 주제는 다소 상투적이고 막연해 보일 수도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 대신, 불교의 핵심을 아주 비근(卑近)한 예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다. 틱낫한은 우리에게 ‘성냄’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일러주면서,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 전체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틱낫한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모으는 일’(mindfullness)이다. 모든 것이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연기설(緣起說)에서 나오는 관점으로, 틱낫한의 평화에 대한 생각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와 ‘남’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 밖의 ‘남’이든, 내 안의 ‘남’이든 나와 ‘남’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내가 ‘남’에게 폭력을 가하면 결국 ‘부메랑’처럼 나에 대한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은 마치 나와 ‘남’을 분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분노를 일으키게 한 ‘남’을 배제하고 억압하면 문제가 해결되어 화가 삭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타자박멸(他者撲滅)’의 자세는 분노의 뿌리만을 더욱 강성하게 할 뿐이다. 몸은 불의 기운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생명체의 원리인 ‘수승화강(水昇火降)’의 흐름이 역류하여 죽음의 길로 접어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불사르는 분노의 에너지를 박멸하고 정복하는 방법이 시급히 요청되지 않는가? 물론 틱낫한은 이런 물음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분노의 에너지는 없애거나 억눌러야 할 것이 아니라, 음식찌꺼기를 비료로 쓰듯이 재활용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무술의 기본원리가 상대방의 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방향을 바꿔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과도 같다.
나와 ‘남’을 파괴하는 분노의 에너지를 상생(相生)의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바로 ‘마음 모으는 일’이다. 틱낫한은 성내는 것을 비유하여 우는 아이와 같다고 한다. 아이가 울며 보챌 때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듯이, 화를 품에 안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 모으는 일’은 언제, 어느 곳에서도 행할 수 있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에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앉아 있거나 걸으면서 자신의 호흡과 몸의 움직임에 ‘기도를 드리듯이’ 마음을 기울인다. 이때의 마음은 몸과 구별되는 마음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이때의 자기경험은 과거의 향수에 의한 것도 아니고, 미래의 계획에 비추어본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숨을 쉬며 살고 있는 자신을 음미하는 것이다. 틱낫한은 바로 이런 수련을 통해 자각의 에너지가 생기고 분노의 쓰레기가 재활용의 자원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수련은 결코 몇몇 고승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적인 것이 아니라, 범부중생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것이다. 내 안에 이미 부처가 있다는 말은 그 점을 가리킨다.
하지만 백여년 전부터 머리로 얻는 지식과 몸으로 습득하는 앎이 당연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여겨온 우리들에게 이런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애써 믿어보려고 해도 머릿속으로 복잡한 궁리만 가득할 뿐,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 도무지 어떠한 차원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더구나 서구의 모델을 모방해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다해온 것이 우리의 근·현대사일진대, 지금 여기의 자신을 느끼라는 말에 짜증을 내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바 아니다. 하지만 ‘빨리빨리’의 구호 아래 온 국민을 몰아가던 서구 모방의 총동원령에 대해 사람들은 이제 조금씩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교통사고율·성범죄율·이혼율, 그리고 엄청난 공해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형편에서 이런 자각은 아마 너무 뒤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아직도 한국의 정보산업이 비약적 발전을 하고, IMF를 조기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의 ‘빨리빨리’ 조급증 덕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나마 틱낫한의 책이 우리네 한구석에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한줄기 재생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 내면적 수행을 강조하면서 결국 기존체제를 유지하게 만든다고 틱낫한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틱낫한의 생애를 한번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틱낫한을 오해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은 외부적 사회변혁과 내적 심성수양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틱낫한은 그런 이분법이 나와 ‘남’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제대로 보지 못해 생겨났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