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착취에 대항하는 사회
P. 끌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울력 2002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anshin.ac.kr
사람들은 모여서 산다. 이 모여사는 사람살이를 사회라고 한다. 그런 사회를 바라볼 때, 내게 언제나 궁금한 것은 사회를 관통하는 지배와 착취 현상이다. 누구는 지배하고 누구는 복종한다. 누구는 누군가를 위해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일하고, 누군가는 그 땀의 달콤한 열매를 즐긴다. 명령하고 누리는 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가치는 자명하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적게 돌려주거나 거의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왜 복종하고 착취당하는 자들마저 사회 속에서 사는가? 그들에게 모여산다는 것은 무슨 이득이 있는가? 역사의 짓누르는 무게와 사람들을 지배에 길들이는 사회화 과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언젠가 역사에 갈림길이 있었다면 왜 자유와 착취 없는 삶의 선택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일까? 지배와 착취에 대한 혐오와 자유의 박탈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왜 지속되는가? 인간사회에는 지배와 착취로 향하는 어떤 계기가 내장되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언제 어떤 식으로 실현된 것인가? 강제와 수탈이 없는 공동생활은 진정 가능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루쏘와 헤겔 또는 맑스가 제시한 해명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고작 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몇가지 개념과 구상의 제안 이상은 아니다. 제대로 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엄밀한 경험적인 조사와 연구에 기초한 사회과학적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어찌 보면 너무 근본적인 질문이어서 그런지 그것에 매달리는 학자들이 별로 없다. 사회과학의 일상적 작업은 지배와 착취의 발생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현재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규명으로 향한다. 후자가 더 답을 얻을 가능성이 크고, 또 시급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그런 경향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며 학문의 과정이 질문의 교체과정일 때가 많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핵심적 질문을 견지하는 집요한 작업이 더 필요하며, 그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삐에르 끌라스트르(Pierre Clastres)의 작업은 매우 소중하다 하겠다.
삐에르 끌라스트르는 정치인류학자이다. 그가 연구한 정치인류학 분야는 인류학의 주류 분야는 아니다. 하지만 오래 전 뒤르켐(E. Durkheim)이 ‘종교생활의 기본형태’를 원시사회를 통해 연구함으로써 중요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끌라스트르가 ‘정치생활의 원초적 형태’를 원시사회를 통해서 밝히려는 것은 대단히 흥미있는 시도이다. 이처럼 중요한 연구를 개척해온 끌라스트르가 인류학 내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가진 사람인지 필자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번역된 그의 『폭력의 고고학』(원제는 “정치인류학 연구”Recherches d’anthropologie politique, 변지현·이종영 옮김)을 일독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연구가 지배와 착취의 발생사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폭력의 고고학』에서 원시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로 규정된다. 사회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권력기관이라는 의미에서 원시사회에 국가가 없다는 이 규정은 올바른 사실판단이다. 그러나 많은 인류학자들은 이런 사실판단으로부터 잘못된 추론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국가가 없다는 사실을 원시사회를 ‘원시적’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으며, 국가 없는 사회로부터 국가 있는 사회로의 이행을 진화적이고 필연적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국가 없는 사회에는 왜 국가가 없는가를 물어야 한다. 원시사회에 국가가 없는 이유는 원시사회의 미발달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가 국가의 발생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다시 말해 원시사회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국가를 거부하는 사회이기 때문은 아닐까?
끌라스트르는 이 점을 원시사회 지도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보여준다. 원시사회에서 지도자(우두머리, 대형)는 같은 사회구성원들에 대해서 명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그가 행하는 봉사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를 받는 자이며, 그로부터 위세(prestige)를 얻는 자일 뿐이다. 그의 의견은 그것이 전체 사회의 관점을 표현해주는 한에서만 청취된다. 그는 이 지도자의 범주와 왕의 범주 간에 어떤 연속성도 없다고 단언한다. 우두머리는 동료 중에 나은 자일 뿐이며, 원시사회는 이 차이가 절대적 차이로 전환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따라서 사회의 권력은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사회 안에 계속해서 거주한다.
같은 논리로 원시사회는 경제적 잉여를 거부한다. 그 사회는 미숙한 생산력 때문에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의 생산을 거부한다. 그들의 경제는 소비생활과 자급자족을 지향하는데, 그것은 ‘정치적 자급자족’의 전제조건이다. 원시사회에서 경제적 대형(大兄)들은 부를 축적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웃에게 끊임없이 나눠주어야 하며, 그 대신 명예와 위세를 얻는다. 요컨대 원시사회에서 부자는 이웃을 착취하는 자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착취당하는 자이며, 위신을 위해서 자신을 착취하는 자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시사회는 사회로부터 분리된 경제에 ‘대항하는’ 사회이며, 착취를 거부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원시사회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전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전쟁은 전사집단을 형성하고, 사회로부터 분리된 권력집단을 생산하지 않는가? 끌라스트르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원시사회에서 전쟁은 일반적이며, 그런 점에서 원시사회는 전쟁사회이지만, 그 사회에서 전사는 적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무훈을 성취해야 한다. 그런 무훈은 명예와 칭찬을 제공하지만, 곧 잊혀지는 덧없는 것이어서 전사는 새롭고 더 강력한 무훈의 길로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로 인해 그는 사회를 능가하는 권력의 축적에 이르기 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으로 내몰린다. 원시사회는 전쟁사회이지만, 전사에 ‘대항하는’ 사회인 셈이다.
끌라스트르의 이런 주장은 원시사회야말로 지배와 착취에 저항하여 자유를 수호한 성숙한 사회이며, 착취와 지배의 발생은 사회의 진화적 귀결이 아니라 사회의 실패라는 것을 말해준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거기서 그친다(거기까지 작업하고 죽었다). 왜, 어떤 계기에서 사회가 지배와 착취에 대항하고 거부하는 것에 실패하게 되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라 보에띠(Etienne de La Boétie)의 이론에 의존하면서 드러내는 인간학적 가정으로의 도피라든가, 원시사회에서의 전쟁의 발생기제에 대한 가설적 설명 따위에서 노정된 몇가지 이론적 약점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지배와 착취의 발생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불어 내게는 그의 주장이 현대 민주주의를 새로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권력, 아마도 정치적·경제적 과두제로부터 시작하여 전문가 권력과 관료제로 심화된 권력을 사회로 환수하는 과정, 혹은 사회의 자기결정의 심급을 최종적으로는 사회 자체 안에 머물러 있게 하는 제도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우리 동료가 우리보다 지나치게 부유해지는 것을 막고, 우리의 동료가 조직된 무력을 영속화하려는 것을 방해하며, 명예와 위신을 명령하는 힘으로 전환해 우리의 복종을 의무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노력, 자유의 상실에 대한 부단한 근심에 기초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회가 언젠가 상실한 자유를 되찾으려는 길고 긴 투쟁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훨씬 더 복잡해진 사회적 조건에서 자유를 확보하려는 민주주의의 과제는 몹시 까다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공의 기본조건은 양떼처럼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열망에 기초한다. 그것을 강력하게 상기시킨다는 점만으로도 끌라스트르의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