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김해자 金海子

1961년 목포 출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無花果는 없다』가 있음. haija21@hanmail.net

 

 

이계숙

 

 

잉그리드 버그만 뺨치게 생겼지만

마흔 넘도록 남자랑 키스 한번 못해본 여자

남자랑 자보지는 않았지만 무슨 종교의식처럼

체위를 물어가며 섹시하게 연애소설을 번역한 여자

몸 튼튼하고 마음 착한 남자 만나 연애하겠다던 여자

남이 자긴지 자기가 남인지 곧잘 헷갈리던 여자

남의 일에도 삼투가 잘되어 넘어갈 듯 좋아하던 여자

아름다운 거리 한치가 모자라 눈물깨나 빼던 여자

운동은 못하고 배고픈 운동권들 밥만 해댄 여자

손 많이 가는 반찬도 후배들이 맛있게 먹으면 입이 헤벌어져

서너 시간 다듬어서라도 콩나물 한 양푼 무쳐주던 여자

조선고추장 풀어 애호박된장국 기막히게 끓이던 여자

정작 자신은 굶은 적이 많았던 이미 병 깊었던 여자

원없이 아프다 간 여자 그래서 눈물도 안 나오는 여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여자, 이 생을 건너

몇만도의 불속으로 들어갔다 유리벽 하나 사이 랄라

낮과 밤 사이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 랄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르도로 떠났다

아, 자비로운 이여

아무도 없는 어둠속에서 저 여자를 지켜주소서

불속에서도 다른 생에서도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하소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위해 사는 무한 허공의

빛으로 환생하게 하소서

 

✽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의 49일간의 중간상태를 바르도라 부른다. 『티벳 사자의 서』에 의하면 바르도에서 사자(死者)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선택한다고 한다.

 

 

 

먼 나라

 

 

그 나라엔 천둥 벼락이 치고 불기둥이 솟구쳤으나

가을 내내 나는 무사 안녕했다

총탄과 사이좋게 만나가 떨어지던 그 뜨거운 나라에

눈도 없이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와도

그리스도를 빼닮은 아라비아 남자들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그자가 천국에 들어갈 일순위로 정해준 아이들 또한

천국에 가기 위해 아주 일찌감치 죽어주었고,

배고파 울다 아멘도 없이 총 맞아 죽어갔으나

나는 안녕하다 못해 해피한 망년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지속적이고도 우호적으로 거기에서 눈길을 떼지는 않았다

몽둥이가 난무하는 조폭영화를 보면서 아름다울 미와

나라 국에 대해 제3자의 본분 내에서 진지하게 고찰하며

힘없는 나라의 죄와 힘있는 나라의 정의에 대해 명상했다

술에 취해 그 나라의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 불을 지르는 꿈도 꾸며

어느 것 하나 실행하지 않은 채 양심을 지키는 법을 배웠으며

평화 없는 세상에 대해 새삼 깊이 애도하기도 했다

봄이 오면 여느 해처럼 아직 오지 않고 있는, 하지만

반드시 온다고 여겨지며, 확신되는, 그 먼 사랑의 나라를

다시 꿈꾸기 위해 딱 제3자만큼의 고통을 뒤척이며

내내 침묵의 이불을 덮고 겨울잠을 잤다

 

 

 

천 잎의 당신과 함께

 

 

얼마 전까지는 내 모습이 어떨까 조금은 멋져 보이는 사람들 아니 익명의 지나쳐가는 사람들에까지 그들에게 보이는 날 의식하곤 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버스를 타려다 쇼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옷깃을 여미기도 하고 굽은 허리를 세우는가 하면 나도 몰래 찌푸렸던 미간을 펴기도 했다 그래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할까 혹 의심하고 때로 안심하며 당신의 눈 속에서 내 포즈를 찾으려 애썼다

 

무엇 때문일까 바람도 없는 물가에 앉아 당신도 나도 가라앉아버린 잔잔한 물길이나 바라보며 지나간 것도 다가오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있으니 그저 이 순간의 물길에 발을 담그고 이 가슴에 핀 당신을 비춰보니 좋은 것을 가슴에서 한 잎 한 잎 떨어져내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강물에 앉은 천 잎의 당신과 노닐고 있으니 좋은 것을 희뿌옇게 빛살 터오는 새벽 물안개 속으로 차차 멀어져가는 당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홀로 앉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