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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119-450

박은미 朴銀美

1980년 경기도 안성 출생. 연세대 인문학부 4학년 japrufrock@freechal.com

 

 

 

지금-여기’의 존재론

한강론

 

 

발이 없어 평생을 날아다니기만 하다 죽을 때가 돼서야 땅에 떨어진다는 새의 이야기는 테네씨 윌리엄즈(Tennessee Williams)의 희곡을 비롯하여 왕 쟈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 또 요즘의 국내 시인의 시에까지 종종 등장할 만큼 여러 창작자들을 매혹시켜왔다. 윌리엄즈의 희곡 「지옥의 오르페우스」(Orpheus Descending)에서는 기타를 연주하며 방랑생활을 하는 발(Val)이라는 인물이 오르페우스의 이미지와 발 없는 새의 이미지에 포개어진다. 그는 예술가이고 일상에 매몰된 삶을 거부하는 보헤미안이다. 발이 없는 새처럼 살고 싶다고 되뇌는 그에게 이 새는 지상에 정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천상적 세계를 자유롭게 소요하는 예술가의 은유인 것이다. 한강(韓江)의 소설에는 이러한 예술가적 기질의 인물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철이 들도록 동식은 아버지에게 발이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무릎 어귀부터 뿌옇게 지워진 채로 비틀거리며 허공에 둥실둥실 떠서 걸어오곤 하였다. (「붉은 닻」,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288면)

 

“젊은 시절 극패를 쫓아다녔다고도” 하고 “퉁소를 불었다”고도 하는 아버지는, 발 없이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닌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지상에 안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가이다. 그런데 지상에 매이지 않은 그의 삶은 또한 ‘비틀거리는’ 삶이기도 하다. 왜 그런 것일까? 예술가의 삶은 천상의 세계를 거침없이 누비고 다니는 것과 같지 않단 말인가? 그것은 그렇게 ‘비틀거리며’ 떠다니는 것 같은 초라한 삶이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예술가,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예술가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한강의 작품에서 이들은 지상을 떠나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 「붉은 닻」에서 동식의 아버지는 퉁소 따위를 불던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그저 밤마다 노래를” 하며 “술을 마”시는 무기력한 생활인이기도 하다. 「저녁빛」(『여수의 사랑』)의 재헌 역시 살던 곳을 떠나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지만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림들을 모두 불태우고 자살을 선택한다. 「어둠의 사육제」(같은 책)의 영진이나 「질주」(같은 책)의 인규 역시 가난한 고향마을이나 불행한 유년기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한강의 인물들은 천상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발 없는 새라기보다는 차라리, “푸르른 버드나무숲의 그림자가 눈부시게 비”치는 유리문을 향해 날아가다 그 문에 부딪혀 추락하고 마는 새와 같다(「철길을 흐르는 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결국 발 없는 새는 오직 꿈으로만 존재한다. 한강의 인물들은 데뷔작 「붉은 닻」에서 보이는 것처럼 ‘비틀거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꿈과 이 꿈의 좌절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감상의 과잉과 상투적인 비극적 심상의 반복이 다소 거북하게 느껴지는 초기 단편에서보다는 좀더 성숙미가 느껴지는 최근 장편 『그대의 차가운 손』(문학과지성사 2002)에서 더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이상적인 예술세계에 대한 갈망과 이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장운형이 만든 석고상들은 ‘껍데기’로 지칭된다. 그런데 석고상이란 손이든 몸이든 마음에 드는 대상에 석고액을 발라 우선 틀집을 만든 후 그 틀집의 오목한 안쪽에 석고액을 부어 틀집을 떼어내 완성시키는 것이다. ‘나’가 연극무대에서 본 것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바로 이 틀집이다. 그것을 두고 ‘나’는 “껍데기를 품었던 껍데기”라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 석고상이라는 ‘껍데기’를 틀집이라는 더욱 이차적인 ‘껍데기’가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형태의 차원이 아닌 순서의 차원에서 석고상은 틀집보다 대상에서 더 멀어진, 더욱 부수적인 ‘껍데기’이다. 대상에 석고액을 발라 떠낸 장운형의 틀집에는 때로 신체의 털들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것은 그래도 체모 따위가 남겨진, 대상과 한번은 격렬한 접촉의 사랑을 나누었던 물체이다. 그러나 틀집에 석고액을 부어 만든 완성품에는 체모 따위가 박혀 있을 리 없으며, 대상과 살을 비비는 일 따위는 없었던 그것은 오직 틀집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껍데기 중의 껍데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전시장에서 보고 감탄하는 ‘예술작품’은 바로 이 껍데기 중의 껍데기이다.

물론 대상 자체를 똑같이 재현하는 데 예술의 목적이 있지는 않다. 따라서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가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틀집이라는 매개를 거쳐 존재하게 된 석고상일지라도 그것은 예술가의 상상력이라는 힘에 의해 대상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의미와 느낌을 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창작자의 꿈이 예술작품을 통해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중의 껍데기란 바로, 원래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예술작품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L의 손을 떠서 만든 장운형의 조각은 ‘전율’과 같은 희열을 줄 정도로 정교하지만, 그 정교함에는 “오직 한 가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제외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며, 그래서 그 조각은 L의 따뜻하고 감수성 풍부한 손을 뜬 것임에도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섬뜩하고 차가우며 비인간적인’ 물체일 뿐인 것이다. E의 얼굴을 떠서 만든 조각 역시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아 “오싹하고 꺼림칙한 탈 (…) 조각”이 되었을 뿐이다.

대상의 ‘심연’에 이르지 못하고 그 위에 드리워진 ‘막(膜)’을 더듬고만 있다는 회의적인 인식은 한강 소설의 예술가적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장편 『검은 사슴』(문학동네 1988)에 나오는 사진작가 장 역시 “사물의 껍데기만을 핥을 수 있을 따름인 카메라라는 기계에 (…) 환멸을 느”낀다.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했지만, 다시 말해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대상의 심연을 예술가의 눈으로 포착해내려 했지만, 도리어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에 실망만 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사진을 찍는 잡지사 기자 인영은 좋아하는 바다를 사진에 담으려 하지만, 막상 인화해보면 “중요한 것은 어디론가 휘발되어버리”는 것을 느낀다. 대학생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시와 소설을 쓰던 명윤 역시 “말이라는 게 원래 구차하다”며 글쓰기를 그만둔다. 이것은 실제 삶과 언어로 된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쓸쓸하고 단호한 침묵”(『그대의 차가운 손』)을 얘기하던 장운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술이나 언어가 대상의 본질로부터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들일 뿐이라는 인식은 삶 자체가 본질 없는 껍데기 같은 것이라는 인식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인식은 삶이란 어차피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장운형의 패배주의적인 생각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스스로를 ‘껍데기’ 속에 숨기도록, 또 그 당연한 결과로 타인도 ‘껍데기’ 속에 진실을 은폐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껍데기’로 위장한 자신과 역시 ‘껍데기’로 위장한 타인 사이에는 소통의 단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대의 차가운 손』은 ‘껍데기’ 속에 숨은 인간들과 이들 사이의 소통의 단절을 형식적인 차원에서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작가인 ‘나’가 장운형이라는 조각가의 수기를 읽는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나’는 소설의 가장 바깥쪽 틀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 안의 또다른 틀 속에 장운형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바깥의 틀에서도 ‘나’가 등장하지만, 틀 속의 틀에서도 스스로가 쓴 수기라는 형식에 의해 장운형이 또다른 ‘나’로 등장한다. 즉 ‘나’만 있을 뿐 ‘너’나 ‘당신’은 없다. 따라서 이 ‘나’들은 서로 무연(無緣)한 각각의 ‘나’들일 뿐 소통 가능한 존재들이 아닌 것이다. 내용적인 차원에서도 작가인 ‘나’와 또다른 ‘나’인 장운형 사이에는 인식론적 코드의 불일치와 소통의 불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나’가 던진 “왜죠?”라는 물음은 장운형에겐 절대로 대답이 존재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마치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듯 집요하게 물어본다. 그래서 장운형은 ‘진실’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에 대한 혐오감마저 느낀다. ‘진실’이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임을, 즉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진실’이란 그러므로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어린 시절에 이미 깨달은 그에게 “진실은 불쌍한 것”이며 “누추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나’가 물어본 “왜죠?”라는 질문은 장운형의 인식론적 코드와 맞아떨어질 리 없다. 그런가 하면 ‘나’는 장운형의 실종을 알리는 그의 여동생에게 우연히 만난 적이 있을 뿐 서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말하며 장운형과 관련된 일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한다. 또 장운형의 유고전에 들른 ‘나’는 “조용히 심금이 울려오는 것을 느”끼는데, 이는 “장운형의 삶이나 작품 세계와는 무관하게” 스스로의 “지난 5년을 반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장운형과 ‘나’ 사이에는 계속되는 어긋남만 있을 뿐 소통과 이해는 없다. 결국 ‘나’들의 수런거림만 있을 뿐 이들을 이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장운형이 “누구를 만나든 저들 역시 뭔가를 솜씨 있게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을 품곤” 하는 습관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을 애당초 포기해버리는 것이라면, ‘나’는 조각가의 예술세계와는 무관한 자신만의 생각에 마음을 더 빼앗겨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보려고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한강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속해 있는 소통이 단절된 고독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고독한 세계는 요즘의 소설에서 흔히 묘사되는 현대사회에서의 소통 불가능성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고독으로 인한 것이다. 장운형과 유사하게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불행한 어린 시절을 은폐한 채 사는 E는 아름답고 유능한 직장여성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를 입고 있다. E 자신은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 ‘껍데기’ 때문에 그녀는 타인과의, 또 세계와의 심각한 단절을 겪는다. E가 설계한 “적막한 느낌을 자아”내는 까페는 아름답고 유능한 여성으로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녀의 성향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기뻐요’나 ‘슬퍼요’ 같은 식의 표현을 쓰는 대신 ‘기쁜 일이군요’ ‘슬픈 영화로군요’ 따위의 표현을 쓰는 E의 말버릇 역시,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을 피하고 세상에 대해 거리를 두는 그녀의 삶의 방식을 암시한다. 빌트인(built-in) 식으로 설계되어 “모든 걸 감출 수 있게” 돼 있는 E의 주거공간 역시 위장과 은폐를 통해 더 멋있게 보여지고자 하는 그녀 자신과 닮았다. 이런 위장술을 통해 E는 의도했던 대로 남들에게 멋있는 여성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러나 쎅스할 때조차 ‘연극’을 하는, 아니 차라리 할 수밖에 없는 그녀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는 느낌은 ‘불쾌함’과 ‘씁쓸함’, 심지어 ‘더러움’이다. 장운형은 E의 눈을 두고 그녀 자신이 “보는 대상만을 고스란히 상대에게 되비”춰 보여주는 “어두운 거울의 표면” 같다고 말한다. 그 눈은 반짝거리고 아름답지만 “그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장운형이 E의 눈을 보고 실체가 숨겨진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면, E는 장운형의 눈을 보고 ‘불편함’을 느낀다. E는 장운형에게 “그 눈으로 나를 찬찬히 뜯어보는 걸 보면, 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해요”라고 말한다. “찬찬히 뜯어보는” 눈이란 바꿔 말하면 대상화의 시선이다. 기실 그는 E와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E에게 숨겨진 것이 무엇인가 밝혀보려는 자세를 취하곤 한다. E의 얼굴을 뜨는 것 역시 이런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E와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E라는 타자를 지배하려고 하는 자세인 것이다. 결국 E와 장운형 사이의 소통 불능 상태는 그 원인이 쌍방적인 것이며, 이런 점에서 그들의 단절은 ‘나’와 장운형의 단절만큼이나 심각한 것이다.

『검은 사슴』의 명윤이나 인영 역시 이러한 자신만의 폐쇄회로 속에 고립돼 있는 인물들이다. 주로 명윤과 인영, 장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이 소설은 여러 화자들의 시선이 존재하기에 시점이 단일하지가 않다. 그런데 장(章)마다 시점이 변화하는 방식은 인물들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형식적인 차원에서 드러내준다. 가령 인영이 기자로 있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는 명윤의 모습은 명윤 자신의 시각에서 한번 서술된 후, 다음 장에서 인영의 시각에 의해 다시 반복 서술된다. 사소한 사건과 관련해서도 그 사건에 대한 명윤의 마음과 인영의 마음을 따로따로 보여줌으로써 둘 사이에 내면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서술방식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과연 명윤은 “선배가 내 마음을 알아요?”라고 인영에게 쏘아붙이며, 다툼 끝에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의 얼굴이 “흡사 견고한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인영은 인영대로 명윤과 대화할 땐 “진실을 숨”기는 것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생각에 솔직한 의견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진실’을 숨김으로써 오히려 상대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한강의 소설에서 각 인물들은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예술가와 결코 내면을 드러내주지 않는 대상만큼이나 서로 단절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영원히 껍질의 폐쇄회로 속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 껍질을 E처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만들어가며 끊임없이 위장과 은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진실’을 숨겨왔기에 오히려 명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누구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 필요 없는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인영처럼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삶이 그렇게 살아질 수 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껍데기를 얘기하던 E는 이런 말을 한다.

 

어쩌면 난 분홍신을 신고 춤추는 학예회의 무희였던 것 같아. 가장 아름답게, 가장 생동감 있게 춤추는 아이. 그러나 죽도록 지쳐 헐떡이는 아이. 정작 갖고 싶었던 건 발을 조이는 토슈즈가 아니라, 커다랗고 붉은 권투 장갑 한 켤레였던 계집애. (『그대의 차가운 손』 303면)

 

결국 E가 입고 있던 껍질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을 “죽도록 지쳐 헐떡이”도록 만들 만큼 애처롭기도 했던 것이다. 위장된 삶 속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름다운 ‘분홍신’이다. 그러나 껍질을 벗겨낸 ‘심연’의 밑바닥에서 무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권투 장갑 한 켤레”였을 수도 있다. ‘분홍신’은 상징계 속에서 그럴듯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페르쏘나(persona)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면을 벗을 때 인간과 인간, 인간과 대상은 단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분홍신’은 껍질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예술의 은유이기도 하다. 마이클 포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영화 「분홍신」에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토대로 만든 발레의 장면이 나온다. 이 발레에서 ‘분홍신’을 신은 소녀는 춤을 멈출 수 없어 계속 추다가 지쳐 쓰러진다. 그때 누가 ‘분홍신’을 벗겨주자 그녀는 숨을 거둔다. 이 소녀의 역할을 맡은 발레리나는 남편이 요구하는 일상적 세계와 자신이 동경하는 예술적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다 철길을 향해 몸을 던진다. 그리고 남편이 신을 벗겨주었을 때 완전히 숨을 거둔다. ‘분홍신’을 벗고 나면 남은 것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분홍신’은 벗으려야 벗을 수가 없다. ‘분홍신’을 벗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일상의 세계는 죽음 같은 것이며, 결국 우리는 예술의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끝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술의 세계는 장운형이나 인영, 명윤 등의 갈등을 통해서 나타났듯 인간으로선 짝사랑만 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대상의 본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예술가의 꿈일 뿐 실제로 그 실현이란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예술이란 기의로부터 자꾸만 어긋나는 기표 같은 것이며, 그래서 ‘분홍신’은 어쩔 수 없이 본질을 가리고 있는 껍질이기도 하다.

이 껍질을 벗을 수도, 그렇다고 쓸 수도 없는 역설적인 상황. 한강의 소설은, 그런데, 이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내는 긴장 속에서 오히려 물기를 머금은 ‘식물’처럼 생생하게 솟아난다. 상징계에서 용납되는, 혹은 좀더 인정받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페르쏘나는 타인과의 소통을 가로막는다. 그렇다면 이 가면을 벗기 위해 우리는 상징계를 떠날 것인가? 그런데 상징계를 떠나 산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사는 것은 유아적(幼兒的)인 나르시시즘의 세계에서 사는 것 아닌가? 그런 세계는 아예 소통이란 것이 필요하지 않은 폐쇄회로의 세계 아닌가? 또 대상과의 사랑을 꿈꾸는 예술가가 그 사랑을 포기할 때 남는 것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과연 천상적 세계에 도달해 그곳에서 발 없는 새처럼 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세계는 분명 도달할 수 없는 곳이지 않은가?

결국 모든 문제는 천상이 아닌 지상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소통을 위한 노력도, 예술에 대한 꿈의 추구도, 바로 지금, 이곳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다. 「저녁빛」에서 재헌은 “해가 지는 쪽으로 한없이 배를 저어가면” 나온다는 “온종일 해가 지고 있는 나라”를 동경한다. 그곳에선 “원하는 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그림엔 늘 붉은색의 해 지는 풍경이 담겨 있다. 노을은 탈출과 초월의 환유인 것이다. 그런데 노을은 또한 죽음의 환유이기도 하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다 죽었으니 노을은 죽음의 환유도 된다. 그가 그리는 핏빛의 노을은 병적일 정도로 짙은 우울한 느낌 때문에 그 자체로 죽음의 이미지를 환기하기도 한다. 결국 탈출은 곧 죽음이며, 따라서 탈출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바다로 나갔다 죽고 만 재헌이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듯, 현실에서 벗어났을 때 예술세계도 역시 같이 소멸하고 만다. 그래서 노을은 다시 귀환의 환유가 된다.

 

식량을 찾아 강으로 숲으로 헤매던 인간의 조상들은 불타는 황혼을 신호로 하던 일들을 모두 팽개치고 자신들의 동굴을 향해 필사적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 본능이 지금까지 후예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이른바 황혼병(黃昏病), 혹은 귀소 본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붉은 닻」, 『여수의 사랑』 277면)

 

노을이 탈출과 귀환의 이중적 환유라는 사실이 암시하는 것은, 벗어나고자 하는 세계가 또한 머물러야 할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 역설은 죽음 외의 방식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조건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탈하고 싶은 세계가 실상 돌아가고 싶은, 결국엔 귀환해야 할 세계라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즉, 현실을 떠날 때 예술도 소멸하는 만큼 인간은 바로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림을 그려도 ‘이곳’, 다시 태어나고 싶어도 ‘이곳’, 늘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이곳’을 벗어날 때 맞게 되는 죽음은 결국 세계를 무의미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장운형이 L에게 “네가 죽으면, 다 끝나는 거”라고, “너 없이 돌아갈 그 세상이라는 게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한 것처럼, 현실을 벗어나면 세계는 나와 동떨어진 것이 돼버리며, 나는 더이상 꿈을 꿀 수도 세계와 소통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출은 늘 상징계에서 꾸는 꿈으로만 존재한다. 욕망이 기표들의 끝없는 연쇄를 따라 계속 자리바꿈하듯, 탈출에의 꿈은 늘 충족되지 못하고 또다른 곳을 동경하게 만든다. 『검은 사슴』의 명윤이 가난한 광산촌의 고향마을을 떠났어도 여전히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달아나려 하”는 것처럼, 「내 여자의 열매」(『내 여자의 열매』)에서 ‘나’의 아내가 ‘바닷가 빈촌’의 고향을 떠나서도 똑같이 불행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탈출에의 꿈은 끝끝내 기의를 찾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상징계 내에서 영원히 부유하는 기표로 존재하는 그 꿈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예술적 대상에 대한 사랑, 또 소통을 위한 노력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탈출을 했다면 더이상 탈출을 꿈꿀 필요가 없다. 그리고 꿈을 꾸지 않는 삶이란 살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 재미없는 삶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현된 세계에선 내가 할 일이 없고, 따라서 나는 존재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뿌리 여윈 나는 단/한 시절의 묏등도/오르지 못하였고 허깨비,/허깨비로 뒹굴다 지친 고갯마루에/무분별한 출분의 꿈만 움터놓았다”(「얼음꽃」, 『문학과사회』 1993년 겨울호)라고 말했던 것일 터이다. 뿌리가 여위었을 때 꾸는 ‘출분’에의 꿈은 ‘무분별’하기만 해서 “허깨비로 뒹굴다 지”치게만 할 뿐이다. 그래서 탈출은 뿌리가 튼튼할 때에만, 즉 현실에 단단하게 발 딛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이때의 탈출이란 상징계 속에서의 탈출, 즉 정확히 탈출에의 꿈이다. 상징계를 떠난다는 의미에서의 탈출이 죽음으로 인한 세계의 무의미화를 초래한다면, 상징계 내에서 꾸는 탈출에의 꿈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세계를 의미화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한강의 작품에 식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으면서 위로는 초월을 지향하는 이중적 존재태이다. 발 없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자기는 “굳건하게 땅을 디디고 서 있음”에 감사해하는 동식이 “자신의 두 발을 땅 깊이 묻기를 원”한다고, “그곳에 물을 주어 잎을 틔우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식물은 현실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존재의 은유이다. 그리고 현실을 떠나지 않으므로 꿈을 꾸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그 탈출에의 욕망은 위를 향해 뻗어나가는 줄기와 잎사귀의 이미지로 현시된다. 뿌리가 뽑혔을 때 줄기와 잎사귀는 모두 시들어버리며 그때 탈출에의 꿈은 사라지고 만다. 어쨌든 뿌리는 단단히 땅에 박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향마을을 떠났어도 여전히 불행해서 “지구 반대편까지” 떠나려 하던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구 반대편에 가기는커녕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서 식물로 피어나는 것은, 결국 탈출이란 현실에 뿌리박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탈출이란 그것을 향한 지상의 현재적 운동성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주인공은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고, 밖에만 나가면…… 햇빛만 보면 옷을 벗고 싶어져”라고 말한다. 이는 『검은 사슴』의 의선이 알몸으로 햇빛을 받고 싶어 길거리에서 옷을 벗어던지는 것이나 「흰 꽃」(『내 여자의 열매』)의 ‘나’가 끊임없이 햇빛을 ‘욕망’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강의 소설에 유독 햇빛을 향해 줄기를 뻗는 식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지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혹은 지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수직적 초월을 향한 몸짓을 할 수 있는 존재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지상에서 탈출의 꿈을 꾸며 세계를 어떻게 의미화할까를 모색한다는 것은 세계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물론 이 답은 살아 있는 한 결코 찾아지지 않겠지만, 그러나 “더 이상 해독되지 않는 글자”는 “바라보고, 냄새 맡고, 쓰다듬고, 껴안고, 애무할 수밖에 없”(채호기 「글자」, 『수련』, 문학과지성사 2002)다는 어느 시인처럼, 껍질을 벗겨 그 내면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몸으로라도 그 대상과 만나보려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바로 지금, 여기서, 대상과 몸으로 직접 부딪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여전히 실망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계와, 또 대상과 통정하려는 노력 자체가 살아 있는 것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장운형이 자신은 스스로가 “빚어내는 삼차원의 견고하고 육체적인 형태들을 통해서만 간신히 이 세상과 연결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예술은 사물의 본질에 이르게 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세상과의 연결통로가 되어준다. 『검은 사슴』의 장이 광산의 사진을 찍기 위해 광부들과 친분을 트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듯, 그가 찍은 사진이 사물의 표면만을 드러낼 뿐이지만 그럼에도 광부들의 세계와 그 자신을 이어주었듯, 예술은 세계와 세계 내 존재를 잇는 삶의 한 방식이 되어준다. 명윤이 동생 “명아를 찾는 일을 포기하면서부터”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세계와의 끈이 끊어질 때는 예술도 역시 소멸한다. 인영을 만나지 못한 지 한달이 넘게 되자 의선은 머릿속에서 편지 쓰는 행위를 그만두고 만다. 그 편지는 아예 잊어버린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내면의 기록처럼 여겨질지라도 타인과의 소통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명윤과 의선의 예에서도 알 수 있지만 상징계를 떠나면 언어도 소멸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소통이란 것이 애당초 필요하지 않은 자폐적인 세계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어로 구조화된 상징계에 튼실하게 뿌리를 둔 채로 대상과의, 또 타인과의 통정을 꿈꿀 수밖에 없다. 이 통정을 위한 노력은 장운형과 E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녀의 알몸을, 거기 반쯤 포개어진 나의 벌거벗은 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때 왜 내 눈이 뜨거워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집요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던 일생의 긴장이 조용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움켜쥔 왼손을 끌어다 잡았다. 뿌리치려 하는 손가락들을 하나씩 폈다. 손톱 끝부터 뿌리까지 손가락들을 빨았다. 여섯번째 손가락이 잘린 자리를 오랫동안, 마침내 손의 저항이 누그러질 때까지 핥았다. 그리고, 내가 석고를 발랐던 순서대로 천천히 그녀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자궁에 내 손가락을 넣었을 때, 그녀의 텅 빈 통로는 따스하게 젖어 있었다.

“들어가도 돼?” (『그대의 차가운 손』 316면)

 

손은 소통을 위한 통로의 은유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내 손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를 이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것. 내 얼굴보다 더 나에 가까운 것. 그것이 없다면 이미 나는 없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장운형의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상징계에서의 삶을 위해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는 것과 달리 손은 진실을 “가리려 하지만 (…) 다 가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손은, 완전히 가면을 벗는 것이 불가능한 삶 속에서도 껍데기의 폐쇄회로 속에만 갇혀 있지는 않을 수 있도록 해준다. 원래 따뜻하고 섬세했던 L의 손이 거식증과 폭식증의 생활을 거치면서 “생기 없이 냉랭하게 늘어”진 ‘차가운’ 손으로 변했을 때, 장운형은 그 “차갑고 통통한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 열 개의 손가락을 차례로 입에 넣고” 빤다. 마찬가지로 그가 상처의 흔적이 새겨진 E의 손가락을 빨았을 때, 전에는 “흡사 강간당하는 여자처럼 메말라 있었”던 “그녀의 텅 빈 통로는” 드디어 “따스하게 젖”는다. E가 자신의 손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상처를 장운형에게 공개하고 나자 둘 사이에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껍데기’에 틈새를 만드는 존재방식도 가능함을, 이 틈새를 통해 타자와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통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장운형과 E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그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마다 “상처난 손가락의 갈퀴들이 아”프다고 하는 것이다. 소통이 아픔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진실’이란 “누추한 것”이며 ‘환멸’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껍데기’에 가려져 있을 때는 그럴듯해 보이던 것이 막상 그 ‘껍데기’를 벗겨내자 기대하던 바와는 다른 모습을 드러낼 때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럼에도 소통에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욕망이 생활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방에만 틀어박혀 무기력한 생활을 하던” 명윤이 의선을 만나면서 적극적인 생활인으로 변하는 것과도 같이, 타자와의 소통은, 혹은 소통을 위한 노력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명윤이 “경이 속에서 (…) 의선을 보았다”고도 말하고 있지만,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해질 때 그것은 경이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과도 같다.

 

조심스럽게 나는 그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내 갓난 누이의 이마를 물들였던 붉은 피 같은 즙이 통로 가득 적시어져 있었다.

(중략)

나는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문질렀다. 내 끈적이는 땀이, 언젠가부터 흘러내린 찝찔한 눈물이, 흰 석고 가루로 얼룩진 그녀의 뺨에 엉겼다. 그녀의 입술에 웃음이 물렸다. 마치 처음 웃는 아기처럼 그 웃음은 불가사의했다.(『그대의 차가운 손』 317면, 강조는 인용자)

 

더이상 “강간당하는 여자처럼 메말라 있”지 않은 E의 ‘통로’는 신생의 ‘즙’으로 ‘적시어져’ 있다. ‘껍데기’에 틈새를 내어 장운형과 ‘통정’하는 E가 짓는 웃음 역시 신생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결국 다시 태어나는 것은 「저녁빛」의 재헌처럼 해가 지는 서쪽 나라에 갈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장운형과 E처럼 ‘지금-여기’에서 소통을 위해 노력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기’가 소통을 위한 장소이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장소라면 ‘이곳’을 떠난 또다른 초월적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장운형과 E가 함께 실종되었다가 에필로그에서 다시 출몰하는 것은 떠날 수 없음에 대한 암시이다. 그리고 그들이 작가 ‘나’에 의해 목격되는 것은 그들 역시 고립된 폐쇄회로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의, 상징계 내에서 수많은 타자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의 암시이다. 장운형과 E가 영원히 실종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제 그들 둘만의 닫힌 세계로 퇴행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것은 ‘나’의 태도 변화이다. 장운형과 계속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관계를 드러내던 ‘나’가 갑자기 나타난 장운형과 E를 쫓아간 것은, ‘나’가 타자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에서 벗어나 타자와 소통하려는 태도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가 장운형이나 E를 놓쳤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소통이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돌발적인 이 행동이 타자와의 소통을 향한 그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서로 이어질 수 없는 ‘나’들의 수런거림만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의 행동은 결코 그 결실을 얻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타자를 향해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바깥쪽 틀의 ‘나’와 안쪽 틀의 ‘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조금씩 메워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지속될 때 이 ‘나’들은 각각 무연한 ‘나’들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너’나 ‘당신’인 존재로 변화한다. 그런 노력에 대한 의지는 바로 이 작품의 제목 자체에서 드러난다. 작품의 제목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작품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몇번 반복돼 나오는 말은 “그녀의 차가운 손”이다. 장운형의 수기 제목 역시 “그녀의 차가운 손”이다. 이 ‘그녀’라는 3인칭을 ‘그대’라는 2인칭으로 바꾼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모호하긴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바깥 틀에 위치한 ‘나’의 이야기와 안쪽 틀에 위치한 또다른 ‘나’ 장운형의 이야기가 하나의 소설로 엮이면서 ‘그녀’가 ‘그대’로 변했다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은 소설 전체가 ‘그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녀’에 대한 시선은 폭력적일 수 있다. 혹은 최소한 ‘그녀’라는 3인칭은 나와는 무관한 존재에 대한 상징적 지칭어이다. 그러나 ‘그대’에 대한 시선은 포용적이다. 이런 인칭에는 타자를 나와 유관한, 더 나아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존재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는 소설 제목은 소통을 통해 타자의 손을 ‘따뜻한 손’으로 바꿔보려는 열망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 것이다.

『검은 사슴』의 명윤이 자살을 생각하면서도 담배가 “필터에 가깝게 타들어갈수록 니코틴의 함량이 높아진다는” 기사를 읽고 “꽁초를 피우지 않”게 된 것처럼,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면서도 아프면 꼬박꼬박 약 먹고 병원에 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 아니던가. 우습게도 보이는 이 아이러니가 인간의 엄연한 진실일진대 어쩔 것인가. 결국 이 세계에서 온갖 사물들과, 또 타인들과 몸을 비벼대며 살 수밖에…… 혼자서도 잘 산다고 큰소리치던 인영 역시 결국 이성적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명윤을 따라 의선을 찾아나서지 않았던가. 혼자만의 자족적인 세계란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초월이나 탈속도 불가능하다. 주민등록번호조차 없는 완벽한 타자인 의선을 찾아가는 명윤과 인영의 힘겨운 여정이 아름답게도 보이는 것은, 초월적 세계를, 혹은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던 인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곳’의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점 때문이다. 그것이 이 세계를 떠날 수 없는 우리들에게 한강의 소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심사평

 

어느 분야든 대학문학상에 거는 기대가 있겠지만 그것이 남달리 큰 분야는 아무래도 평론일 법하다. 창작의 성과들이 다양한 원천에서 나오고 있는 데 비해 비평활동의 주된 근거지는 역시 대학이라고 해도 좋겠기 때문이다. 평론 쓰기는 상당한 지적 수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젊은 패기나 문학에 대한 열정만으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지식의 세계에 눈뜨면서 사회현실을 자신의 삶과 맺어서 사고할 것이 요구되는 대학생에게, 문학평론에 대한 도전은 젊음의 의미를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심사자들로서는 이번 심사가 우리 대학생들의 지적 삶의 한 단면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전체 응모작 30편 가운데 소설을 다룬 것이 14편, 시가 10편 그리고 문학일반론과 외국문학이 각 3편이었다. 학생들의 문학공부 경력이 다양한 것처럼, 이 응모작들의 수준도 차이가 났고 아직은 여러모로 미숙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평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감을 가지고 써낸 좋은 글들도 여럿 되었다. 미숙한 경우의 몇가지 유형을 든다면, 작품의 내용을 따라잡는 데 그치고 있거나, 기존 해석들의 틀을 답습하거나, 충실한 읽기 없이 섣불리 재주를 부리려 하거나, 이론적인 틀을 무리하게 작품에 부과하려 하는 것 등이 눈에 자주 띄었다. 역시 비평에 있어서도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정신과 깊이 생각하는 습관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젊은 비평의 도전이 실다운 내용을 얻을 것이다.

30편의 응모작들을 나누어 읽은 심사자들은 일차적으로 5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지난 12월 11일 대산재단 사무실에서 만나 집중 논의했다. 박은미(연세대)의 「‘지금-여기’의 존재론: 한강론」, 국영은(이화여대)의 「가벼움을 향한 변증법적 성장: 최승자론」, 양승현(명지대)의 「‘광장’을 바라보는 양안적(兩眼的) 시선」, 이종호(성균관대)의 「삶의 재구성, 활력, 여성성: 공선옥론」, 양기민(한양대)의 「새로운 문학의 변이, Djuna」가 그것이다. 이 다섯 가운데 양승현과 양기민의 작품은, 전자는 「광장」에 대한 그간의 논의에 대한 정리에 그쳐 평론의 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 후자는 새로운 유형의 문학의 의미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제대로 뒷받침받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 우선 고려대상에서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남은 세 작품 박은미의 한강론, 국영은의 최승자론, 이종호의 공선옥론은 글의 성격은 서로 약간씩 다르지만, 주제에 대한 집중력, 논리의 일관성, 문장력, 작품 읽기의 훈련 등이 상당히 갖추어져 온전한 평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박은미의 작품은, 한강의 소설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작품들을 적절하게 동원하고 논의하며 인간 사이의 소통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가는 끈질김이 돋보였다. 땅을 떠난 예술가적 인물을 거론하며 주제로 바로 직핍해들어가는 시작에서부터, 땅에서의 만남에서 가능성을 시사하는 마지막 대목까지, 치밀하게까지 여겨지는 논리구사와 작품 읽기가 병치되어 신뢰감을 준다. 문장의 안정감과 명확함도 높이 살 만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작품에 대한 해설의 차원을 벗어나려는 의식도 노력도 찾기 어렵다는 점인데, 이것은 최종 검토대상에 오른 다른 작품들을 포함하여 실상 거의 모든 투고작들의 공통된 결함이기도 하다.

국영은의 작품은, 최승자의 시를 면밀히 읽는 나름대로의 독법이 흥미롭다. 최승자 시에 나타난 절망과 허무의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으나, 시에 나타난 육체 이미지를 동원해서 일관되게 해석해나가는 뚝심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대개 단문으로 이어지는 문장도 군더더기가 적고 뜻하고자 하는 바도 비교적 명쾌하다. 그러나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한다”는 주제부터가 너무 진부하여 쉽사리 이해되는 반면, 사고의 여지를 별로 주지 않는 점이 큰 한계라고 해야겠다.

이종호의 작품은, 공선옥의 소설에서 주체의 문제를 고찰한 평론으로 앞의 두 글들에 비해서 이론을 좀더 표나게 동원하여 작품해석에 활용하려고 한다. 공선옥의 소설들을 ‘파편화된 주체’와 그 재구성이라는 틀로 해독하려는 노력에 그 나름의 힘이 느껴지고, 광주와 여성이라는 널리 인정된 이 작가의 두 주제에 이같은 독법으로 접근하여 어느정도 새로운 기여가 가능했다. 이론화에의 욕구가 앞선 나머지 구체적인 작품분석과 이어지는 부분이 다소 취약하고, 그 때문에 투박하고 추상적인 주장이 생경하게 드러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선옥의 소설을 이만큼 이론적으로 풀어내기도 쉽지 않을 성싶다.

이상 세 작품을 가지고 논의한 결과, 심사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치밀하고 완성도가 높은 박은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하는 데 쉽게 합의했고, 이어서 나머지 두 작품의 각각의 장단점을 두고 잠시 망설였으나, 덜 세련되긴 했지만 도전의식이 더 돋보이는 이종호의 작품을 가작으로 추천하는 데도 곧 합의했다.  

〔吳生根 尹志寬〕

 

 

당선소감

 

3학년 때였던가. ‘고도’(Godot)라는 이름을 ‘신’(God)과 ‘점’(dot)이라는 낱말로 분석하여 설명하던 어느 학우에게 선생님께서는 이런 얘기를 하셨다. 어릴 때 우리는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본다고, 그런데 머리가 굵어지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된다고, 그러다 성숙의 경지에 이르면 산이 산으로 물이 물로 보이게 된다고. ‘고도’를 그냥 ‘고도’로 보면 되지 왜 신이니, 점이니 하느냐고. 그러면서 이런 얘기도 하셨다. 성숙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기에 ‘고도’를 신과 점으로 나누는 식의 인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 오류가 비평이라는 글쓰기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평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한계나 오류들과 부딪쳐 싸워야겠지…… 아직 그 싸움을 해나가기에 부족한 점도 많고 읽는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덜컥 쓰기부터 했을 만큼 경솔한 나 자신을, 더욱 끈질기게 문학에 매달리겠다는 다짐으로 옹호해본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이 아니었다면 감히 응모를 할 생각도 못했을 터였다. 자신감을 갖게 될 기회를 마련해주신 대산문화재단과 창작과비평사의 여러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변변찮은 글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오생근 선생님, 윤지관 선생님 두 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짝사랑일 것만 같아 이름을 적어 감사를 표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분들께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을 끝내 감출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동안 글과 강의를 통해 비평의 매력에 눈을 뜨게 해주신 정과리 선생님께 가장 큰 감사를 드린다. 해석과 평가를 섬세한 문체로 절묘하게 엮어내는 유종호 선생님의 평문도 내겐 늘 경이이다. 4년간 이런저런 방식으로 내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신 모교 국문과, 영문과의 다른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