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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이라크전 이후 미국의 국제질서 재편

 

 

박인규 朴仁奎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매거진엑스 부장, 미디어팀장 역임. 현재 인터넷신문 프레시안(www.pressian.com) 대표. inkyu@pressian.com

 

 

 

지난 5월 1일 죠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에서의 주요 전투가 끝났다는 이라크전쟁 종결선언을 했다.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지 43일 만이다. 그러나 전쟁은 개전 20일째인 지난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됨으로써 사실상 끝났다. 예상보다 빠른 종결이었다.

전쟁 종결에 대해 미국의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새로운 세계 무질서’(New World Disorder)의 시작이라고 했고, 현대전 연구가인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는 ‘일방적 전쟁의 시대’(The Age of Unilateral War)라고 했다. 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일련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전쟁의 본질이 ‘무력에 의한 미국의 세계지배’라고 했다.

테러와의 전쟁 및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수행된 이번 전쟁은 과연 향후 미국의 진로와 세계질서에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우선 지적돼야 할 것은 미국이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이번 전쟁의 본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부시행정부는 사담 후쎄인이 9·11테러의 주범인 알카에다의 배후지원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후쎄인과 알카에다의 연계에 대해서는 미중앙정보국(CIA)은 물론 이스라엘 정보기관조차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오사마 빈 라덴을 추종하는 알카에다는 이슬람원리주의 세력인 데 비해 후쎄인은 종교적 기반을 부정하는 바트당 계열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사실상 앙숙관계다. 양자가 손을 잡을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것이다.

대량살상무기에 관해서는 유엔 무기사찰단이 지난 1월부터 이라크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전쟁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후쎄인이 생화학무기는 물론 스커드미사일조차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무너졌다는 점이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지금까지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라는 부시행정부의 주장은 허구였던 셈이다.

또하나, 이번 전쟁은 냉전종식 직후부터 기획되고 추진돼온 ‘군사력에 의한 세계지배’의 첫 신호탄이라는 점이다.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가 이라크전쟁의 직접적 계기라고는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미 언론인 니콜라스 레만(Nicholas Lemann)이 미 시사주간지 『뉴요커』(New Yorker) 2002년 4월 15일자에 기고한 「다음번 세계질서」(The Next World Order)라는 기사에 따르면 부시행정부의 세계전략의 핵심은 “앞으로 영원히 미국의 라이벌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고, “이같은 사태를 예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핵심적 국익이며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세계전략이 마련된 것은 냉전 종식 직후인 1990년 5월이다. 당시 국방장관 딕 체니의 주도하에 마련된 ‘521 페이퍼’가 그것이다. 1990년 5월 21일 부시 대통령(현 대통령의 아버지)에게 보고됐다고 해서 이같은 이름이 붙은 이 보고서의 내용은 지난 1992년 『뉴욕타임즈』에 보도돼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미국 강경파의 이같은 세계전략은 자본의 직접지배라는 신자유주의적 접근을 채택한 클린턴 시대(1993~2000년) 8년 동안 휴지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클린턴의 유화적·다자주의적 외교노선에 절망한 미국의 강경파들은 1997년 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라는 싱크탱크를 결성, 레이건의 군사주의·일방주의적 외교노선의 부활을 통한 미국 헤게모니의 유지를 주창하고 나선다. 이들은 1997년 6월 3일에 발표된 이른바 ‘원칙의 천명’(Statement of Principles)을 통해 “앞으로 수십년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현 지위가 유지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NAC에는 부통령 딕 체니를 비롯해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부장관,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존 볼튼 국무부차관, 리차드 펄 전 국방부 국방정책위원장 등 현 부시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거의 망라돼 있다. PNAC의 이같은 주장은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를 시작으로 러시아 및 중남미의 금융위기, 그리고 2000년 이후 거세지고 있는 반세계화운동 등에 의해 일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더이상 자본에 의한 직접지배는 불가능하며 무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미국의 엘리뜨 계층에서 지배적 담론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번 이라크전쟁의 1차적 목표는 이라크의 ‘정권교체’(regime change)이다. 즉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중동지역은 물론 동유럽에서 파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라크의 무진장한 석유자원을 장악함으로써 국제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즉 미국은 앞으로 군사력과 에너지에 의한 세계지배라는 목표를 실현해가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우선 군사부문의 경우, 미국은 지난 1999년 코소보전쟁 등을 통해 발칸반도에 군사기지를 획득했으며, 2001년 아프간전쟁에서는 우즈베끼스딴, 따지끼스딴 등 중앙아시아 지역 9개 나라에 13개의 새로운 군사기지를 마련했다. 또 『뉴욕타임즈』 4월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앞으로 이라크에 4개의 군사기지를 신설할 계획이다. 이 신문은 “(미국과 이라크 간의) 군사관계가 긴밀해진다면 현재 지중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략적 혁명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사태발전이 될 것”이라면서 “이 지역에 대한 서방측의 영향력이 이처럼 확대된 것은 지난 수세대 만에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동유럽에서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에서의 미국의 해외 군사력 확대는 2가지 점에서 냉전시대와 다른 특징을 갖는다. 우선 냉전시대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미일안보조약을 근간으로 소련의 팽창을 막는 데 촛점을 둔 방어적 성격이었다면 지금은 상대적 힘의 공백지대인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을 중심으로 미 군사력의 확대를 꾀하는 공격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에너지자원의 보고이자 미국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이 취약한 이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함으로써 잠재적 경쟁상대인 서유럽과 동아시아를 압박해 들어가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또 냉전시대 해외 미군이 주로 장기 또는 영구 주둔형태를 취한 반면 이제는 기동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즉 특정 기지에 군사력을 장기 주둔시키기보다는 상대국 정부로부터 기지사용권·영공통과권 등을 확보해 유사시 언제라도 군사력을 파견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겠다는 것이다. 이는 첨단무기와 신속타격을 주 내용으로 하는 럼즈펠드 등의 군사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갈등이나 분쟁 발생시 즉각 무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미 지도부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1945년 미 국무부의 한 문서는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에 대해 “전략적 힘의 엄청난 근원이며,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리품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굳이 이 문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현대사회에서 석유자원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세계 교역량의 약 10%를 차지하는 석유 없이는 현대 산업사회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석유에 대한 통제권 장악은 곧 각국 경제의 숨통을 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라크의 석유매장량은 약 1120억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2610억 배럴)에 이어 세계 2위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라크의 미확인 석유자원이 확인된 석유 매장량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에너지 전문가인 마이클 클레어(Michael T. Klare) 뉴햄프셔대학 교수에 따르면 미 에너지부는 이라크의 미확인 석유자원의 규모를 최대 2천억 배럴로 잡고 있다. 다시 말해, 이라크가 세계 최대의 석유자원국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클레어 교수는 엑슨-모빌 등 “미국의 석유기업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라크의 ‘처녀’ 유전지대에 대한 개발권을 갖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사담 후쎄인은 집권시절 프랑스·중국·러시아 등의 석유기업들에 대해 약 440억 배럴에 이르는 이라크 석유자원에 대한 개발권을 허용했다. 금액으로는 1조1천억 달러(배럴당 25달러 기준)에 이른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하에 차기 이라크 지도자가 될 것으로 유력시되는 이라크국민평의회(INC) 의장 아흐메드 찰라비(Ahmed Chalabi)는 지난해 9월 “우리는 모든 기존 계약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또 “이라크 석유에 관한 한 미국기업들이 최대의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은 현재 지난 1970년대 국영화된 이라크국영석유회사(INOC)의 민영화를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INOC를 분할해 미국 석유기업 등에 배당하는 한편 이라크 석유수입으로 점령비용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석유자원 장악은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강화하려 할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은 또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민영화함으로써 OPEC의 가격, 공급량 등 시장조작능력의 약화를 노리고 있다.

아프간전쟁과 이번 이라크전쟁으로 세계는 이제 전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이 자신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든 ‘선제공격’ ‘예방전쟁’의 이름 아래 미국의 군사공격에 직면하게 되는 ‘일방적 전쟁의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특히 유엔 등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행정부가 강행한 이라크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미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미 강경파들은 한층 더 무력행사에의 유혹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유엔을 이미 무력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법재판소 비준 거부, 국제기후협약 탈퇴 등을 통해 스스로의 행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즉 국제사회와의 협조보다는 자신들의 국익의 잣대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동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후쎄인정권 축출을 완료한 지금 미국의 당면목표는 중동지역의 재편이다. 우선 이라크에 민주화의 외양을 갖춘 친미정권을 세우고, 아랍인들의 반미감정을 잠재우기 위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에 나서는 한편, 중동지역의 마지막 반미거점인 이란 및 시리아에 대한 정권교체를 노릴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향후 행보에 대해서는 월러스틴의 전망을 인용하기로 한다.

 

첫번째 과제는 중동을 재편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3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적대적 정권을 제거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힘을 약화시키며(어쩌면 영토분할까지 포함하여), 허울뿐인 국가수립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해법을 강요하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전 승리 직후 시리아를 미국 안보에의 위협으로 제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중동지역의 재편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동북아 상황을 현상유지에 묶어두려 할 것이다. 즉각적인 군사행동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인데, 부시정부의 강경파들은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이 더이상 핵활동을 진전시키지 않도록 설득하도록 하려 할 것이다. 잠정적인 휴전상태로 볼 수 있다. 휴전상태를 이용해 강경파들은 다른 문제들을 먼저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을 벌 것이며, 이것들이 처리되고 나면 북한문제에 손댈 것이다. 그들은 북한체제의 생존을 용인할 의사가 없다.

강경파들의 두번째 과제는 미국 내를 평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연방예산의 거의 모두를 군사비에 쏟아부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연방세를 삭감하고, 사회복지제도나 정부부담 건강보험제도(메디케어) 등을 민영화하는 등 모든 다른 예산을 삭감하기 위해 전면전을 펼 것이다. 이들은 또한 언론자유를 최대한 억압할 것이다. 이는 정권유지는 물론, 마음놓고 세계를 주무르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가장 긴급한 과제는 이른바 ‘애국법’을 영구화하는 것이다. 현재 이 법은 3년 기한으로 돼 있다. 이제까지 ‘애국법’은 주로 아랍계나 회교도들에 대해 적용돼왔다. 부시행정부는 그 적용범위를 넓히려 하고 있다. 2004년 대선이 분수령이 될 것이다.

세번째 과제는 유럽이다. 중동지역의 재편이나 미국 내 반대파의 억압보다 유럽을 깨뜨리는 것은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때문에 강경파들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번 전쟁에 따른 ‘충격과 공포’가 유럽인들의 저항의지를 치명적으로 약화시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유럽의 약화를 기다리는 동안 강경파는 꼴롬비아에 대해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또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할 것이다.(“Shock and Awe?” http://fbc.binghamton.edu/111en.htm)

 

물론 이러한 과제들이 쉽사리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이라크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 회교도들을 중심으로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커져가고 있다. 또 북부 쿠르드족의 독립 움직임이 본격화된다면 터키 등의 무력개입이 확실시되며 이 경우 이라크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이라크가 ‘제2의 팔레스타인’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가 하면 쿠르드족의 북부, 수니파 회교도의 중부, 시아파의 남부 등 이라크가 세 조각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씨나리오도 제시되고 있다.

한편 미국이 2005년을 시한으로 제시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도 팔레스타인 내부의 저항은 물론 이스라엘측의 반대 등으로 그 실현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태다.

이라크 친미정부의 수립이나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등이 지지부진해지고 미국 내의 반대운동이 격화될 경우 부시행정부는 또다른 무력행사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특히 200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또 한차례 미국의 군사행동이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부시행정부는 이미 지난 2002년 중간선거에서 이라크문제를 선거이슈화함으로써 박빙의 승부를 이끌어내는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1차적 대상은 이란, 시리아 등 중동의 반미정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미국은 지난 4월말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란의 반정부무장단체 ‘인민무자헤딘’(MKO)과 휴전조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이미 이란의 이슬람정부 전복을 위한 비밀작전이 시작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MKO는 미 정부에 의해 테러조직으로 지정된 단체인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미국정부가 테러조직과 휴전조약을 맺은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한편 노엄 촘스키는 미국의 좌파 월간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5월호의 인터뷰에서 “강경파들은 커다란 파국 없이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다시 말해 사실상 전투랄 것도 없이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의 외양을 갖춘 친미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꼴롬비아나 베네수엘라 등에 군대를 투입할 것이며 에꽈도르나 심지어 브라질까지도 넘볼 수 있다”(www.monthlyreview.org/0503chomsky. htm)고 예상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 15%나 수입하고 있다.

물론 일방적 무력행사에 의한 세계지배라는 미국의 세계전략이 아무런 댓가 없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미국의 고립이다. 이미 이번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는 수백만명이 참여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반전시위가 벌어진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미국은 세계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당성을 이미 상실한 것이다. 미국은 또한 이번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엔 안보리의 승인을 얻는 데도 실패했다.

한편 이번 전쟁의 결과로 2차대전 이후 세계를 이끌어온 미국과 유럽간의 대서양동맹은 사실상 붕괴됐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이번 전쟁에 대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앞으로 독자노선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유럽대륙과 미국의 분열가능성은 냉전이 종식된 1990년 이후 유럽연합이 독자방위를 모색하면서 어느정도 예상됐던 것이었다. 나토의 존재 이유였던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유럽의 움직임이 시작됐으며 이번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대륙 간의 입장차는 더욱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만장일치에 의한 나토의 의사결정 구조가 미국의 행동의 자유에 커다란 제약이라고 느껴왔으며, 특히 지난 3월 독일·프랑스·벨기에 등이 이라크전 발발에 대비한 나토의 터키 보호에 반대하면서 나토 존속에 대한 회의가 강화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독일 등 서유럽 주둔 미군을 동유럽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그리고 동유럽을 비롯,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 등에 배치된 미국의 군사력으로 유럽대륙의 독자노선 움직임을 견제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쟁을 통해 미국의 군사력은 예상외로 강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미국은 일방적 무력행사로 인해 국제사회의 자발적 협조와 동의라는 정치적 자산을 잃어버렸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단 한번도 자신의 군사적 우월성을 정치적 성공으로 이끈 적이 없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정치적 승리라는 점에서 단지 군사력만으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미 강경파의 야심은 무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가망 없는 무모한 야심 때문에 당분간 세계는 근대역사상 가장 위험한 시기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