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승희 李承熙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sominyi@yahoo.co.kr
감자 3
햇살의 애를 배어,
석달 열흘을 보채는 햇살의 마음을 배어,
땅속 깊은 곳에 흰 등(燈)을 걸어두고
날마다 그리움의 신방(新房)을 차렸구나.
오, 어여뻐라
이 죄없는 사랑 앞에 나는 무릎꿇고 운다,
이 모든 비밀을 가슴에 묻고 넉넉한
이 물기 많은 눈썹이 아름다운 땅에
엎드려 나는 오래 운다.
초승달이 보름달로 옮겨지던 그 저녁이었구나, 까닭없이 가슴이 터질 듯하던 그 밤이었구나. 열 손가락을 다 비추고도 남던 그 달빛 아래서 몸 풀었던 게구나. 수천 수만의 강줄기들이 내게로 와 노래불렀고, 낮고 오랜 기다림의 편지가 네게 닿았구나.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내 눈물은 자꾸만 뜨거워지고, 푸른 행성이 지나며 둥글게 네 신방을 가려주었던 게구나.
꼭지
잎 진 자리
씨앗이 한 생을 마무리하고 떠나간 자리
떠난 것들의 아주 오래된 그림자
속으로
깊디깊은 연못
거기서 놀던
수천 수만의 물고기
지금 어디서 지느러미 쉬고 있는가
맨몸에 늘어진 난닝구만 입고도 행복한 사람을 안다.
벽제 가는 길 4
편지
누님 손등에 여린 햇살 몇 올려놓고 싶은 날입니다. 저리 환장한 봄날은 다 누구의 것일까요? 햇살 비치면 먼지도 너무 선명해 싫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너무 환한 세상에서는 먼지 따위는 보이지 않아요. 일요일이에요, 주저리주저리, 호화롭게 소풍가는 자동차들이 온통 길을 빼앗아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길조차 남겨두지 않았네요. 나도 오늘은 누님과 소풍을 가려고 합니다. 누님이 일하는 공장 뒷산도 좋다고 했지만 난 싫어요. 어디든 그 공장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좋겠어요. 누님, 기억나지요? 찔레꽃이 피었을 거예요. 날 업고 찔레 새순 벗겨주시던 누님, 쌀밥 같은 싸리꽃, 잘 가라고 노래부르며 불어대던 민들레 꽃씨들, 세상에 내가 나 아닌 것과 다르지 않았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 아닌 것들로 나이기만 합니다. 불구의 저녁이 기다리는 세월입니다.
누님 손안에 한가득 흰 꽃을 담아놓고 싶은 날입니다. 고봉밥처럼, 담아드리고 싶습니다. 마당 넓은 옛집이라도 가보고 싶습니다. 담벼락 아래 화단에는 지금 무슨 꽃이 피었을까요. 담벼락을 떠받치듯 서 있던 대추나무는 안녕한지, 그 환하던 뒤란의 앵두나무 건강한지. 이마의 주름까지 어머니를 닮아가는 누님, 머리에 흰 꽃 피고, 소풍이라도 가야 하는데, 불량이 많았나요? 공장문은 열리지 않고요. 어째요, 저 환장한 봄을, 저들이 다 가져가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