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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네이스

 

상식을 위한 투쟁

 

 

이계삼 李啓三

밀양 밀성고등학교 국어교사. ygs0720@hanmail.net

 

 

교사들은 겨울방학 때부터 2월 봄방학 직전까지 한해의 학생생활기록부를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늘상 해오던 업무라 생각하면 그저 한 이틀 정도 출근하여 컴퓨터 앞에 앉아 내용 입력하고, 출력물 뽑아내어 대조작업 하면 되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 작업의 ‘교육적’인 무의미함을 생각하고, 그것이 교사에게 강요하고 있는 관료적 억압을 생각하면 정말 속상하고 짜증난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학생생활기록부에는 상담누가기록이라는 항목이 있다. 사실 웬만큼 성실한 교사라도 자기가 맡고 있는 모든 아이들과 일일이 한번씩만이라도 마주앉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란 정말 쉽지 않다. 모난 데 없이 평범하게 생활하는 많은 아이들과는 1년 동안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상담누가기록’란에는 월 1회, 한 학기 3회, 도합 6회 정도의 상담기록을 남기게끔 되어 있다. 그러니 거의 대부분 ‘가라’로 때운다. “일시: 2002년 7월 15일 오후 17:00~18:00 어간(於間). 장소: 도서실. 내용: 기말고사 성적 분석하고 학습방법에 대해 조언해줌.” 이런 내용을 1인당 5, 6회 입력하고 나면 교사는 순식간에 200번 정도의 거짓말을 하게 된다. 또 ‘종합의견란’이란 게 있다. 고등학교의 경우, 학생생활기록부가 대입전형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에 그 내용들은 한 아이의 인성·학업·대인관계에 대한 엄정한 평가라기보다는 가급적 ‘아름다운’ 언어로 채워주는 것이 관행이다. 공부에 통 흥미가 없는 학생이라면 “자기만의 공부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으로 쓰고, 대인관계에 좀 문제가 있는 학생이라도 “교우관계에 있어서 자기만의 원칙을 갖고 이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고 쓴다. 그런 식으로 한 아이에 대한 이러저러한 항목을 모두 엮어 모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생생활기록부상에는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전인(全人)’으로 묘사된다.

학생생활기록부를 입력하는 동안 머릿속을 떠다니는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대개는 헝클어진 기분이 되고 만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일까’ 하는 번민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한 일밖에 한 적이 없는 학교가 한 학생에 대해 100가지가 넘는 항목의 모든 세세한 정보들을 기록하고, 1년 동안 어떻게 관리하고 키웠는지 미주알고주알 써서 남기는 관행. 학생기록부가 마감되면 한해의 학사업무도 종결된다. 교무실 회의용 탁자 위에 쌓인 흰 종이의 거대한 탑. 어쨌건 우리는 국민의 세금으로 이 학생들을 받아서 1년 동안 탈없이, 틀린 것 없이 ‘관리’하였음을 저 탑은 묵언으로 웅변하고 있다. 1년어치의 학교교육에 대한 말끔한 레이아웃이다. 그러나 저것이 1년 동안의 학교교육과 아이들의 성장변화에 대한 진실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들에게는 온통 거짓부렁에,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대학 입학 때에는 일일이 점수화되고, 결혼 전에는 간혹 세심하고 의심 많은 상대쪽 집안 어른들에게 검열당하는 인생의 해코지꾼일 뿐이다. 혹시 그 아이가 연예인이 된다면, 「TV는 사랑을 싣고」의 리포터에 의해 화면에 부끄러운 성적 부분만 살짝 가린 채 클로즈업 될 날을 기다리며 묵은 먼지 뒤집어쓰고 행정실 캐비닛 속에서 고요히 잠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작년 늦은 가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학교종합정보관리씨스템(C/S)이 들어온 지 만 2년이 채 되지 않아 이름도 생소한 국가교육정보씨스템(NEIS)이 도입된다고 했다. 『우리교육』지에서 ‘함께 하는 시민행동’이라는 시민단체가 쓸데없는 일에 예산 낭비하는 국가기관에게 주는 ‘밑빠진 독 상’이라는 것을 NEIS 도입건과 관련하여 교육부에 수여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교무실에서는 다들 한숨을 쉬었고, 전산 담당 교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올 상반기, 예상한 대로 일은 벌어졌다. 서교장 자살 사건으로 가뜩이나 발톱을 세우고 있던 교육기득권세력들이 달려들었다. 누군가가, “차라리 전교조가 NEIS를 적극 지지했더라면 교총이나 조·중·동이 NEIS를 물고 늘어져서 일이 오히려 잘 풀렸을 거”라고 한 씁쓸한 농담이 상당한 공감을 샀을 만큼 그들의 공격은 논리도, 합리성도 결여된 비이성적인 것이었다. 전교조는 인증 거부, 인증서 폐기에 연가투쟁으로 맞섰고, 당연히 교육기득권세력들도 총궐기하였다. 그들의 집회에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학교장의 권한으로 명한다. 불법행위 중단하라.”(‘학교장의 권한으로 명한다’는 빨간색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이 말이야말로 저들이 그동안 전교조의 ‘등쌀’에 애태우고 속태우면서 가슴속에 사무쳤던, 그러나 끝끝내 체면 때문에 내뱉지 못했던,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토록 외치고 싶고, 또 지키고 싶은 그 무엇일 것이다. 학부모들도 지지 않았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나의 아내는 연가투쟁을 위해 학교를 나서다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학부모들이 우르르 몰려와 “선생님, 제발 수업만큼은 빼먹지 말아주세요”라고 아주 ‘간곡한’ 어조로 설득하는 통에 일과시간이 끝나고서야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교사의 수업에 대해 애정이 있었다면, 제발 교실의 아이들이 요즘 어떻게 망가져가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아내는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는 선생님들이 다수 계시고, 학교 관리자들 또한 여러 의견들을 조율해나가는 문화가 어느정도 정착되어 있어 NEIS 도입과 관련하여 다른 지역의 예에서 보듯 학교가 둘로 똑 쪼개어지는 정도의 분란은 없었다. 다만, 여름방학 직전 NEIS 업무를 담당하는 일부 교사들이 그동안 서로간의 공조와 토론 속에서 조율되어온 방향을 일방적으로 뒤트는 바람에 분란의 소지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나는 NEIS 논란을 학교에서 바라보면서, 이것이 학교가 아이들을 ‘관리’하는 현재의 씨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NEIS 도입이냐’ ‘C/S로의 복귀냐’하는 선택의 범주를 넘어서 과연 아이들과 관련한 모든 세세한 정보들을 모아 기록해서 남겨야만(그것이 진실한 정보이건 짜맞추어진 정보이건 상관없이) 교육활동의 성과물로 인정해주는 이 관료적인 습속에 대해, 이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인지, 그리고 진정한 교육행위를 실제로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언론에서 NEIS가 큰 논란거리가 되니 거의 모든 학교의 교무실이 NEIS 도입을 주장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큰 싸움이 벌어졌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 학교를 포함하여 실제 일선학교에서는 대체로 덤덤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물론 언론에 보도된 사례들처럼, 학교장과 전교조측이 물러섬 없는 싸움을 벌인 곳들도 많지만.) 그것은 바깥의 자극이 학교공간으로 들어올 때 이를 걸러내는 ‘특별한 필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입시’이다. NEIS 도입을 추진하는 정보화 담당교사들이나 관리자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전교조 교사들을 제외한 다수 교사들은 대개 양쪽의 논란 속에서 침묵하는 분위기였고, 그들은 다만 NEIS의 거대한 정보집적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을 따름이다. 오히려 많은 교사들에게 NEIS 도입시기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은 교사 자신에게 돌아올 업무의 양이었다. 요컨대, NEIS는 현재 대한민국 학교들의 유일한 존재근거라 할 ‘상급학교 진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NEIS는 이를 관리하는 씨스템의 변용일 뿐이므로, 일선 학교의 많은 교사들에게 이것은 다만 자신들에게 돌아올 업무량으로만 저울질되는 일반적인 분위기를 낳았던 것이다. 그 다음 단계가 NEIS의 해킹 가능성과 사생활 침해라는 정보 인권적인 측면과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다시 주워담아 C/S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현실론이 잠시 다투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이것은 7차 교육과정이건, 그 어떤 훌륭한 교육적인 명분을 내걸고 시행되는 교육정책들도 ‘입시’라는 우리만의 특별한 필터를 통과하고 나면 모두가 이를 중심으로 말끔하게 정렬되는, 그리하여 그것들은 입시를 향한 길목에서 반드시 치러야 할 새롭고도 귀찮은 일거리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대표적인 것이 아마 중·고생들을 숙젯더미에 파묻고 만 ‘수행평가’와, 아이들을 방학중 관공서 청소꾼으로 내몬 ‘봉사활동 인증제’가 아닐까 싶다) 이 기막히고 놀라온 한국교육의 특성에 그대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가끔 ‘상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교사가 되기 전 가령, 독일의 발도르프 학교나 우리나라의 풀무학교를 공부하면서 대안교육의 이상을 꿈꾸기도 했던 나는, 그러나 공교육체제의 교사로 일하게 된 얼마 후부터, 한국의 교육과 관련한 모든 노력은 ‘상식을 위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입시’는 한국의 모든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교육 행위들을 통합하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간과 공간을 분배한다. NEIS 논란은 이전에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었던 아이들의 정보인권에 대해, 그리고 정보인권의 더 큰 범주인 학생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고, 어느 동료선생님의 말씀처럼 “다시는 NEIS와 같은 어이없는 발상이 시도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NEIS를 두고 아이들의 정보인권을 이야기할 때, 날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인권유린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여전히 가위를 든 교사에게 자기 머리를 잘리고, 염색을 풀어야 하며, 아침마다 교문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만나야 하고, 소설책, 만화책, 자기 소지품에 대한 압수가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어지며, 무슨무슨 색 스타킹은 신으면 안되고, 무슨무슨 양말도 신으면 안되고, 머리에서 어깨 몇 cm까지,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는 온갖 자잘한 교칙들과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을 시에 당해야 할 모욕적인 처사들……) 그리고 NEIS는 향후 어떻게 결론이 나건 학교현장에서 꺼지지 않는 논쟁의 불씨가 될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또 한번 슬프게 확인해야 하는 것은 우리 교육이 딛고 있는 ‘상식’의 현주소이다. 전체주의사회가 그러하듯이, 단일한 가치로 통합된 사회에서는 그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미 방조제 공사가 80% 진척되었다고 해서 새만금사업은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사업이 되고, 군산에서 부안에 이르는 그 엄청난 바닷길을 몇개의 섬을 꼭지점 삼아 주욱 그어 이어붙이고선 “여기를 메워 농토로 만듭시다”라고 한 그 무지막지한 발상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 문제삼지 않는다. 개발만이 살길이요, 경제규모가 더 커져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논리의 끈에 포박당한 우리 같은 사회에서만 새만금사업은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그저 성적순으로 반듯하게 줄 세우고 그럴듯한 포장을 씌워서 대학에 보내는 것이 초·중등교육의 존재이유로 믿고 있는 사회에서만 NEIS와 같은 전체주의적 발상은 가능한 것이며, 또한 극히 ‘효율적인’ 씨스템이라는 영광스런 레테르를 붙일 수 있게 된다. 도대체 우리의 교육은 아이들이 어떤 번민과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지, 아이들에게 정말로 어떠한 경험이 가치있는 것이며 바른 존재로 성장케 하는지, 이를 도와주고 북돋워주어야 할 교사는 무엇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하는지, 도대체 관심이나 있는 것일까.

상식의 회복, 그 대열에 가장 앞장세워야 할 것은 바로 아이들을 여덟살부터 열아홉살까지 12년 동안을 온통 극기와 절제의 전사로 살아가게 하는 이 살벌한 체제를 최대한 누그러뜨리는 일이며, 아이들의 그 억압된 에로스–우정과 희망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자기의 존재만큼 타자를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그들만의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NEIS가 철회되고, C/S가 되건, 10여년 전처럼 모든 자료를 직접 기록하는 형식이 되건 그것은 2차적인 문제일 뿐임을, 진정한 교육행위는 절대 그런 씨스템에 의해 깃들 수 없다는 상식이 상식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날은 언제가 될 것인가. 그리하여 교육이란 숨결이자 땀이고 사랑이어서, 교육관료들이 할 일이란 무슨무슨 씨스템으로 수천억의 세금을 갖다쓰거나, 정책에 반대한다고 징계하고 잡아가두는 것이 아니라 ‘제발 가만히 놔두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배려라는 일선교사들간의 상식이 교육계의 상식으로 자리잡을 날은 또 도대체 언제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