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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진수미 陳秀美
1970년 경남 진해 출생. 1997년 『문학동네』로 등단. shistory@hanmail.net
아비뇽의 처녀들
미혜·지혜·우주와 함께
욕조에 누우면
하늘로 통하는 천장을 가진
사랑하는 욕조에 몸을 누이면
발 뿌리 끝부터 스며드는 열기 속으로
걸어오는 한 여자가 보인다.
먼지에 엉겨붙는 찰진 물방울이며
기어코 왼몸으로 육체를 이탈하는 터럭이며를
바라볼 때면 그렇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지
사포는 아니고
나혜석도 아니고
성모 마리아는 더더욱 아닌
출렁이는 젖가슴과
늘어진 둔부를 가진
닳을 대로 닳은 한 여자가,
사랑하는 욕조가 낳는 무심한 손가락 장난이
넝쿨째 천장을 타오르고
스멀스멀 하초의 윤곽을 더듬을 때면
폭죽처럼 작렬하는 저 물방울들
결코 눈을 떠서는 안되지
서걱서걱 홀몸으로 다산하는 잡풀들이
저물 때를 아지 못하는 오만한
해바라기가 허무는 하늘 구멍으로
노오란 불똥을 던지며 달려드는데
윤복희를 사랑하고
정윤희를 사랑하고
간통죄는 더더욱 사랑했던 한 여자가,
묻는다 으스러지라고 달려들며
너는 왜 이 순간에 여자만 떠오르는가
여자만 떠올리는가
사랑하는 나의 욕조들, 일제히
눈을 뜨고 웃음을 터뜨린다.
두려운 게지 너는
거울을 에워싼 수증기가 몽땅 달아날까봐
육체를 이탈하는 터럭처럼
먼지에 집착하는 운명의 물방울처럼.
무성만화 상연기
H의 응시
높은 음역에서 뛰어내리면서 그가 노려보았다. 자다가 나는 벌떡 몸을 세웠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 눈동자가 비웃고 있었다. 시선에서 긴 꼬챙이를 꺼내더니 말풍선을 모조리 터뜨리는 것이었다. 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줄줄 새는 물방울을 쳐다보았다. 물인가 했더니 침이었다. 천년 묵은 만년 묵은 호박이었다. 방울마다 내가 키운 벌레가 갇혀 있었다. 칸칸이 건너뛰면서 보따리에 푹푹 검을 넣었다. 호박 내부가 여지없이 헤쳐지면서 숨겼던 벌레들이 풀려났다. 보였던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젖혀졌던 귀들이 부르르 떨었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나는 낡은 벌레를 견딜 수가 없었다. 풍선의 꼬리를 반대방향으로 돌려버리고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벌레들이 파닥거리며 분절되지 않은 소리들을 우물우물 씹었다. 제복차림의 노파가 다가와 따각 목덜미에 구멍을 내더니 다음 칸으로 문을 밀고 사라졌다. 임자 없는 풍선이 떠다니고, 공테이프 (스크래치) 돌아가는 (스크래치) 이어폰 소리.
수리공
구두가 아니다! 남학생 둘이 외쳤다
골목은 소임을 마친 후 사라지고
구두는 구두가 아니더니 대담해졌다
거대해졌다 옛날의 내가 아냐
부푼 배를 내민다, 구겨진
빵 봉지로 갈아탔다
부스럭 (구두) 소리에 주의하시압
쓰레기통이 웅얼거렸다
카세트 리코더다!
발가락들이 몰려갔다, 거대한 (구두 대신)
발가락 대신 새까만 개미떼
지문이 해체되고 올올이 풀어진다
발을 뗄 때마다 검은
자기 바이어스가 줄줄이 따라나왔다
이상한 구두를 신고
내가 있었네
발톱을 뽑아 당겨 현을 퉁긴다
명찰 없는 남학생들이 골목을
지우다가 화다닥 도망간다
출석부를 펼쳤다
---고장난 카세트, 테레비 고쳐요오오
지워진 이름 위로
수염 난 목소리가 듬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