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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모래 속에 흐르는 시간

염무웅 평론집 『모래 위의 시간』, 작가 2002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septuor@hananet.net

 

 

염무웅(廉武雄) 선생의 새 평론집을 읽으며 품게 되는 감정은 예사롭지 않다. 저자가 군사독재시대인 60년대부터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여러 중요한 고비에 이정표를 세우듯 발표했던 이 평문들은 특히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작품에 눈을 터주고, 생각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삶의 여러 지경에서 지혜와 용기를 주었던 글들이다. 게다가 저자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평론집은 여러 지면을 통해 수시로 발표되긴 하였으나 그의 개인 평론집에 수록된 적이 없는 글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오랜 독자들은 그 글 한편 한편에서마다 마치 잃어버렸던 가형(家兄)의 편지를 다시 발견한 것처럼 이상한 감회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래 위의 시간”이라는 이 평론집의 제목이 또한 이 감회를 더욱 깊게 한다. 저자 자신은 “한 인간의 일생이 집념과 열정, 좌절과 환멸로 점철되는 시간의 파괴적인 리듬 안에서 진행되듯이 그의 이상과 고뇌가 녹아든 작품 역시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햇빛 받은 이슬처럼 스러지기도 하고 더러는 조개 속의 진주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6면)는 느낌을 이 제목 속에 담아보려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래에 해당할 수도 있을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 느낌을 이 짧은 글에서 다른 말로 해석하고 싶다.

모두 다섯 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의 제목이 모두 6·25와 4·19 이후 우리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변화에 부응하는 이 평론집은 그 자체로서 현대한국문학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감수성과 정신의 역사를 이루기에 충분하다. 제1부 ‘방황과 모색’에 수록된 평문들은 전쟁의 상처를 4·19를 전후한 세대의 시각에서 극복하려는 작품들에 대체로 촛점을 맞추고 있다. 방황과 모색은 당시 한국문학이 직면했던 상황이면서 동시에 저자가 감당해야 했던 과제이다. 제2부 ‘민중시대를 위하여’에서는 유신시대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민중의 질곡과 저항의지를 그린 작품들을 분석하여 민중의식의 힘과 그 방향을 점검하고 있다. 이 글들은 모두 정치적 억압과 파행의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항쟁의 표현이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최고의 사회적 실천’ 속에서 ‘가장 순수한 예술성의 실현’을 발견하는 감수성의 심화와 확대이다.

116-391제3부 ‘민족문학의 길’은 문학이 민중체험으로부터 얻은 이 동력으로 민족문학의 이론을 개발하고 그 전통과 역사를 추적하는 한편 이를 시대의 요청과 부응시킨 평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험난했을 뿐만 아니라 그 험난함으로 뚫어야 했던 민족문학의 길은 또한 이 저자가 몸소 걸어온 길이다. 제4부 ‘주춤거리며 보낸 날들’은 주로 80년대의 발호하던 신군부에 맞서 높게 결집된 민중의식과 용광로처럼 들끓던 지적 열기를 타고 시대의 장벽에 문학적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여러 시도들을 성찰하고 지도하는 평문들과, 민족정신사의 큰 줄기를 정리하려는 강연원고들을 수록하고 있다. 주춤거렸다는 것은 관심과 염려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이며, 시대의 질문에 즉답하던 문학활동에 정리와 종합이 시도되었다는 뜻을 함축한다.

마지막 제5부 ‘세계화의 재앙 속에서’에 수록된 글들은 바로 이 시대가 내걸고 있는 질문들, 곧 진보적 예술과 민족예술의 새로운 활로의 탐색, 분단된 가운데 세계화시대를 맞는 민족의 운명, 전지구의 자본주의화를 꾀하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인문교육과 지역문화의 위축 등으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거나 대답의 모색이다. 여기서도 저자의 열정은 민중·민족문학의 길을 개척할 때의 그 뜨거움을 여전히 유지한다.

지난 40년의 한국문학에서 감수성과 주제의 변화, 열정과 관심의 확대를 요연하게 보여주는 이 평론집은 물론 『한국문학의 반성』(1976) 『민중시대의 문학』(1979)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1995) 등 이 저자가 이미 발간했던 평론집에 대한 보충적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그 전체에 대한 하나의 좌표가 되기도 한다. 수록된 평문들이 대부분 청탁에 기초한 것이고 시대의 당면과제에 맞서 즉석에서 날카롭게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룩된 것이지만, 이런 조건들이 글과 글 사이에 단절을 만들지는 못했다. 역사와 문학에 대한 저자의 긴 안목과 강한 믿음이 튼튼한 끈을 만들어 전체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늘 다음에 올 질문과 대답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제기되고 마련된다. 이를테면, 5,60년대의 소설가들에 대해 개인적 한계를 지적하는 자리는 뒤이어 민중의식과 민족미학이 필연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자리가 된다. 문학이 정치와 날카롭게 맞섰던 시대에 그것들의 관계에 대해 깊은 수준에서 강구했던 논의의 결과들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민중문학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할 때 그 원칙으로 제시된다.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재앙’이 몰고 온 여러 문제에 마주해서는 저 민족문학이론을 수립하던 시대의 경험과 지혜에서 가장 큰 힘을 빌려오게 된다. 이 평론집의 글들은 저자가 내내 문학과 정치의 현장에서 써온 글들이지만, 그 현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 힘들은 그 의지의 강도와 사색의 깊이를 말해준다.

그래서 나는 ‘모래 위의 시간’이라는 이 평론집의 제목에 대해, 그것이 하나의 역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 이 책은 현대한국문학의 감수성과 주제와 정신의 역사라고 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역사이다. 저자의 ‘이상과 고뇌’는 그의 작품에만 녹아든 것이 아니고,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홀로 고독하게 스러지거나 단단해진 것만도 아니다. 그것들을 읽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도 녹아들어갔고, 그 생각 속에서 성장하기도 했고, 어떤 실천으로 개화되기도 했다.

저자가 이 글들을 쓰며 살고 고뇌하였던 시간은 ‘모래 위의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모래 속에 물처럼 흐르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를 또하나의 역사라고 부르고 싶다. 염무웅 선생은 모래 위에 무엇을 짓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것을 기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