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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창비적 독법’과 나의 소설읽기
『창비』 소설비평 특집에 대한 김명인·김영찬의 논의에 부쳐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로 『흔들리는 분단체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대조적인 창비관
『창작과비평』 지난 여름호(통권 124호)의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는 창비 편집진의 평론가들이 모처럼 분발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자 기획되었다.‘모처럼’이라는 표현은 곧 그동안 분발이 부족했다는 자성을 포함한다. 특집 들머리의 ‘편집자 대담’에서 진정석(陳正石)이 말했듯이 “그간의 직무소홀을 일거에 만회해보겠다는 야심(?)도 어느정도 있었”(20면)다고 봐야 할 게다.
직무소홀을 반성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나 자신이 해당된다. 그것도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문학평론가를 자처하면서도 벌써 몇해째 평론다운 평론을 써낸 일이 없고 한국문학에 대한 독서조차 게을리해왔으니 그것만으로도 통렬히 반성할 처지인데, 편집진 전체가 특별한 분발을 해야 할 형국이라면 비록 편집 일선에서 물러선 상태일지라도 편집인으로서의 책임 또한 면키 어렵다. 물론 『창비』가 틈틈이 문학특집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보다 정도가 덜할지언정 상당수 동료들이 문학생산의 현장에 밀착해서 활약하지 못했고, 어쨌든 『창비』가 충분한 내부토론과 의견조정을 거쳐 한국 문단에 신선한 기여를 하는 힘이 예전 같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 싶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일거에’ 만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물론 그런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다. 각자가 소설생산의 현장에 자기 식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고 추후의 공붓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기갱신의 첫걸음을 내딛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번 창비 특집은 그 이벤트적 성격이나 규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단 자세히 읽고 보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는 문제는 괄호 속에 들어 있고 그것은 필자로 참여한 ‘창비식구’들 각자의 몫이 된다”1는 김명인(金明仁)의 비판은 당연히 감수할 내용이다.또, “무엇보다 90년대 이후 소설에 대한 총론이 없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문제이다”(명 257)는 지적도 맞다. 이와 관련해서 김영찬(金永贊)은 “창비가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자족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비평적 시각과 담론의 적합성을 시험하면서 그 자체를 스스로 활발한 토론과 비평의 대상으로 방(放)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영 271)라고 좀더 호의적인 해석을 내려주었지만, 적절한 총론의 부재는 ‘지금까지의 자족적인 태도’ 이외에 다른 총론이 없을 거라는 그 자신의 심증을 굳혀주었는지도 모른다.
기획의 이런 원천적 한계를 전제하고도 그 구체적인 실행에서 또 수많은 아쉬움을 남겼음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이 특집에 대해 김명인, 김영찬 두 분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여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창비로서는 애초의 다짐대로 분발을 수행하면서 그 일환으로 두 분이 시작한 생산적 토론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 믿는다. 이것이 여전히 평론가로서의 준비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창비』 편집진의 한 사람이자 후속논의에서 중요하게 거론된 글의 필자로서 몇가지 의견을 개진하기로 한 연유이다.
김영찬은 김명인이 창비적 관점의 부족을 비판한 것과 대조적으로, “창비가 그간 보여왔던 보수적인 비평적 행보의 근본적 전환” 시도를 환영하면서도 “그 근본적 전환을 가로막는 창비 고유의 비평적 태도와 판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영 271)을 문제삼는다. 특히 편집자 대담에서 임규찬(林奎燦)이 “마치 실제 현실에 상당한 무엇이 있는데 창비가 그것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반문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먼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124호 21면)라고 말한 것을 두고, 의처증 환자에 대한 라깡의 지적을 원용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다.“라깡에 따르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의처증 환자의 주장이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질투는 여전히 병리적이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주체와 관련된 어떤 진실을 억압하면서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영 272)2
그런데 특정한 ‘창비적 독법’을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김영찬과 김명인이 묘한 공통점을 보인다. 김명인의 경우 그것은 ‘창비 비평’의 전환이 아니라 그 본래 임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하라는 주문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여전히 7,80년대 민족문학론의 아성으로서의 지위를 자의건 타의건 포기하지 않고 있는 창비는 한사코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원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90년대 이후의 문학에 대해서 이제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일까. 혹은 건네고 싶은 것일까.(명 254)
이어서 그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소설계의 총아들”을 창비에서도 출판하게 된 현상을 두고, “이를 종래 ‘민중적 민족문학’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발간 작품을 준별하던 창비가 그 엄격성을 대폭 완화한 결과라고 하면 과언이 될까”(같은 면)라고 묻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여름호의 특집에 실린 나의 평론3은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거의 ‘창비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은 것”(명 259)으로 보이는 세 편 중 하나로 분류된다.
아무튼, “창비가 아직 ‘민족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 ‘민족문학’이란 것이 2000년대의 남한문학에서 무엇이며 어떻게 생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먼저 이루고,90년대 이후 작가들에게 그것을 납득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며 바로 그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당대 문학의 산물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견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명 269) 김명인의 기대와 주문에 대해서는 이번 글 또한 멀리 못 미칠 것임을 미리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려니와 창비도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을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4 사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민족문학’이든 ‘민중적 민족문학’이든 그것을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명하다고 단정하던 것들과 거리를 두었다고 해서 무수한 질타의 대상이 되었음은 두루 알려진 일이다.
김명인 자신이 일례로 제시한 현대 한국소설의 지형도에 대해서도 나는 구체적으로 시비를 가리거나 대안을 내놓을 능력이 없다. 평론가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무엇보다 독서의 절대량 부족 탓이다. 다만, “은희경이 열어젖히고 전경린이 세속화시킨 일상성의 세계, 윤대녕과 신경숙이 개척한 내면성의 세계, 공지영이나 방현석이 지켜온 후일담의 세계, 성석제와 김영하, 혹은 김연수에게서 보이는 탈낭만적 서사의 세계, 요즈음 이를 테면 『피터팬 죽이기』의 이주희, 『어느덧 일주일』의 전수찬 등 최신예들의 무중력의 세계, 그리고 공선옥, 한창훈, 전성태 등이 견지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민중탐구의 세계 등”으로 지도를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김명인 자신이 “나는 이런 나의 관점이나 분류항목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비 비평’에서 이와 같은 최소한의 거친 관점이라도 발견되기를 기대한 것이다”(명 259)라고 부연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 분류기준이 잡다할뿐더러, 훌륭한 작가일수록 어느 항목에도 집어넣기가 힘들어진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의 분별을 흐려놓을 우려가 큰 것이다. 비평작업에서 소재나 경향 위주로 작가들을 분류해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좋은 문학작품을 알아보는 안목을 바탕으로 그러한 작품과 그보다 덜 좋은 작품, 아예 안 좋은 작품 들을 지공무사하게 가려주는 본래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5 한다는 것이 나의 비평관이다.
‘창비적 독법’에 대해서도 나의 종요로운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런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읽기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고정된 방법이나 ‘코드’도 기껏해야 그때그때의 방편에 그쳐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본인의 의도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고, 그러면서 그런 줄조차 모를 수가 있다. 아니, 라깡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 ‘억압’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각기 자기식으로 읽더라도 비슷하게 읽는 사람끼리 모이는 일은 자연스럽고 어느 선까지는 바람직하기도 한데, 그 댓가로 ‘억압’의 비중이 커지는 상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집단적인 자기인식을 더욱 명료히 하라는 김명인의 다그침이나, 미처 깨닫지 못한 집단의식의 폐해를 강조하는 김영찬의 비판이 하나같이 고마운 채찍질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이에 보답하려고 노력하되 내 역량의 한계에 맞고 비평관에도 어울리는 방식, 즉 특집의 배수아(裵琇亞)론을 놓고 두 분이 구체적으로 비판한 내용을 위주로 ‘창비적 소설독법’에 관한 논의를 진행할까 한다.
2. 『에세이스트의 책상』 재론
배수아론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 이하 『책상』) 한 편에 대한 작품론이었다. 그나마 동시대의 문학지형에서 배수아의 소설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또 그의 작품세계에서 『책상』이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가 하는 ‘총론’이 생략된 작품론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특집에 참여하는 것조차 힘겨웠던 내 처지에서 섣부른 일반화를 자제하고 그 한 작품 읽기만이라도 제대로 해보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책상』에 그렇게 주의를 집중했을 때는 당연히 배수아가 그만한 주목에 값하는 작가라는 판단을 전제한 것이며, 『책상』이 그의 최신 장편일 뿐 아니라 결코 열등한 작품이 아니라는 판단도 독자에게 전달되었으리라 믿는다.
이 작품을 재론하는 지금도 나는 배수아의 작품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있지 못하다. 장편소설로 국한하더라도 지난번 글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한 네 편 외에 첫 장편 『랩소디 인 블루』(고려원 1995)와 새로 나온 『독학자』(열림원 2004)를 읽은 정도인데, 초기작들의 풍성함과 발랄함을 선호하는 평자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기는 하지만 정신의 치열성에서 오히려 진일보한 『책상』을 배수아 문학의 후퇴로 보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나는 배수아야말로 우리 현대문학에 몇 안되는 진성(眞性) 모더니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는 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나로서 최고의 평가와는 거리를 두는 셈이지만, 모더니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대부분이 외래 조류인 풍토에서,6 그리고 ‘모더니즘 대 포스트모더니즘’을 문학의 주된 대립축으로 삼는 구도 자체가 수입품이며 한국문학의 핵심을 비켜선 논란이라 믿는 입장에서, 단순히 민첩한 두뇌와 반짝이는 감수성으로 방불하게 만들어낸 유사품의 수준을 넘어 작가적 체질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자 온몸을 던진 탐구로서의 모더니즘 소설이 한국어로 씌어진 현상은 뜻깊은 성취라고 본다.
김명인은 특집의 여러 글을 두루 언급한 까닭에 『책상』 읽기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소략해졌다. 어쨌든 그의 주된 논점은 내가 시도한 자세히 읽기가 이 작품에 대한 “좀 과람(過濫)한 대접”이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글 말미에 사족같이 붙은 부분,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거나 ‘책상에 대한 다분히 낯익은 집착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예리한 소설적 탐사’를 당부한다”는 말로 그치고 평자 자신의 해명과 진단을 생략한 것은 “정당한 의미에서의 자세히 읽기로서의 비평”에도 미달한다는 것이다(명 265). 이어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을 제시한 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90년대적 탈주서사의 한 극점이라고 할 만하다”고 결론짓고, “자, 이 작품은 과연 ‘분단시대 민족문학’의 깊이와 넓이 안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일까”(명 266)라고 묻는다.
“이 글에서의 창비적 체취의 부재”(같은 면)를 아쉬워하고 있는 김명인이니만큼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나는 『책상』에 대한 그의 해석을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김영찬이 상정하는 ‘창비 고유의 독법’에 딱 들어맞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김영찬은 “이 소설의 ‘서사(敍事)’를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 보여준” 나의 자세한 읽기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것이 예의 창비적 독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소설에 대한 과람한 대접은커녕 도리어 “그렇게 읽는 것이 과연 작품에 대한 ‘충분한 대접’인가”(영 274)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김영찬은 특집의 글들에 대한 논평을 나와 최원식(崔元植)에 집중했기 때문에 『책상』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논의를 보태주었다. 이 논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착실한 『책상』론이라 할 만하며 내가 보건대 단행본에 부친 그의 ‘해설’에 비해 진일보한 평론이어서, 내 글도 개입된 생산적 토론의 한 성과를 목격하는 흐뭇함을 느낀다. 실제로 배수아 소설을 두고 그가 내놓은 많은 진술은 나도 수긍하는 내용인데, 어쩌면 김영찬 자신은 ‘창비적 독법’에 대한 그 나름의 고정관념 때문에 내가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예단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있는 목적론적·선형적(線形的) 서사를 굳이 선형적으로 재구성”(영 276)해본 것은 양자 사이에 “가로 놓인 ‘뱀과 화염의 강물’(배수아 「작가의 말」, 『책상』 198면)이 소설을 조직하는 특수한 담론적 양상을 가벼이 넘겨”(같은 면)버려서가 아니다. 서사와 재현의 문제―둘이 동일한 것도 물론 아니지만―에 대한 창비 관계자들의 개인적 견해야 다양하겠지만, 내 경우 소설읽기에서 재현을 “중요한 참조점”(영 275)의 하나로 삼기는 할지언정 그것을 예술성의 핵심으로 설정하지 않음은 이미 여러 군데서 밝힌 바 있다.7 내가 스토리의 진행을 재구성해보는 “다소 저급한 비평방법”(백 37)을 동원한 것은, 김영찬의 ‘해설’을 포함한 요즘의 너무나 많은 비평이 선형적 서사의 파괴를 곧바로 서사의 부재와 동일시하며 『책상』에서처럼 작가가 실제로 공들여 창작한 서사를 가벼이 넘겨버린 채 ‘특수한 담론적 양상’에 대한 비평가 자신의 (그것도 이제는 대체로 낯익은 것이 되어버린) 담론을 펼치는 데 몰두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내 나름의 이의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M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의식은, 새롭게 방향을 돌려잡은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M이 겉으로 재현된 스토리의 차원에서는 구체적인 실존인물일지 몰라도 담론의 차원에서는 하나의 추상적 상징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영 277)는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다만 상징적 존재로서의 M, 그리고 글쓰기의 “격렬한 인간적 내면의 드라마”(영 279)가 그 온전한 울림을 얻기 위해서도 작가가 들려주는 ‘서사’를 제대로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 재현된 스토리 차원”의 문제로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라, 스토리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서사를 복잡하게 요리해놓은 소설적 담론의 문제인 것이다.
예컨대 제2장의 화자가 물에 빠지는 에피소드가 뜬금없이 나왔다가 뚜렷한 결말 없이 끝나는 데 따른 효과는 먼젓번 글에서도 지적했다. 즉 계속해서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낼뿐더러, “물속에서 화자가 했던 M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 들이 꾸준히 독자의 머릿속에 남게 되기도 한다”(백 34)는 점이다. 이 사건이 독일로 다시 가서 요아힘의 집에 머물던 시기가 아니라,M과의 결별을 작심하고 M의 집을 나온 뒤에 일어났음이 9장에 가서 화자가 M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 도중에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나온다는 점 또한 언급했다(백 33,38).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마치 독자와 숨바꼭질하듯이 해서 작가가 얻는 게 무엇인가? 화자가 M의 집에서 뛰쳐나와 M을 만나주기를 거부한 것이 M에게 앰뷸런스에 실려갈 정도의 타격을 준 것 못지않게, 화자도 우연이든 반 의도적으로든 익사 일보전까지 가는 상처를 입었음을 섬세한 독자가 음미하도록 남겨둔 것이 아닐까?8 『책상』이 단지 사랑 이야기만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사랑 이야기로서의 그 애틋함을 놓친다면 그 자체로서 부주의한 읽기요, 글쓰기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실감하는 작업에도 충실치 못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M의 성별 문제도 그렇다. 김영찬은 여전히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M은 주체 바깥의 모든 것을 증류해버린 ‘영혼의 삶’을 살고자 하는 화자의 자아이상(ego ideal)이 투사된 인물”(영 277)이라는 지적 이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주체 바깥의 모든 것은 물론 주체의 성적 정체성마저 증류해버리려는 시도일지라도 소설 속에서 그 시도가 여자를 두고 진행되는지 남자를 두고 진행되는지, ‘탈정체성 작업’의 대상이 남녀관계인지 여여관계인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게 마련이다.9 실제로 화자와 M이 둘다 여자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미묘한 효과가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점에서 M이 여자임을 정확히 어느 싯점에서 알게 되느냐는 문제도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나는 M이 남자려니 하는 선입견(및 그렇다는 활자화된 소문)에 사로잡혀서 읽어나가다가 8장의 134면에 이르러서야 여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백 40), 이에 대해 김명인은 “이미 그 이전 112면에서 에리히가 M과 화자를 더불어서 ‘아가씨들’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이 나온다”(명 264 각주5)고 일깨워주었다.10 실은 이 점을 제일 먼저 알려준 것은 임홍배(林洪培)였다. 공간(公刊)된 자료는 아니지만, 그는 단순히 이 사실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에리히의 발언이 그가 화자 및 M과 각기 맺어온 관계에 얼마나 어울리는 행동인지를 날카롭게 설파했다.
7장에서 분명히 밝혀지지만, 이 장면에서 에리히가 개입하여 ‘나’와 M의 황홀한 순간에 훼방을 놓는 것은 두 사람에 대한 질투심과―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는―M에 대한 복수심의 노골적 표현이다. 이어서 에리히가 이 ‘아가씨들’에게 “힘쓸 만한 (…) 남자들은 다 여기 모여 있는데 거기서 뭐하는 거야?”라고 야유하는 것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인 것이다.11
이런 소설적 세목을 포착하는 것이 글쓰기에 대한 『책상』의 성찰을 과소평가하는 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나는 김영찬이 강조한 『책상』의 성취를 대부분 인정하는 입장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소설적 성취는 ‘고립된 삶’을 예찬하는 정신주의의 설파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꾸로 육체적·경험적 현실이 그 정신주의의 허위성을 전복하는 장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나타나는 경향이 배수아의 소설로서는 썩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굳이 소설적 성취를 논한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이 소설이 개체적 고립의 정신주의를 동력으로 씌어지는 기억의 서사의 실험적 극단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에서 그 자체의 한계로서 작용하는 격렬한 인간적 내면의 드라마를 통해 자기 자신의 글쓰기의 한계지점을 성찰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영 279)
내가 화자의 성찰이나 진술이 서사의 진행을 통해 전복되는 대목들을 지적하고 상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자의 차원에서도 그 의식이 결코 단순치 않으며 정신주의의 한계지점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자기성찰의 과정에서조차 “나는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는 관계를 알지 못한다”(『책상』 136면)는 식의 맹점에 대한 통찰은 없음을 상기시킨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화자의 시야와 자기인식에 어떤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할 경우에는 그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백 46)고 주문했던 것이다.12
『책상』을 평가하면서 나 자신이 ‘소설’과 ‘에쎄이’를 대비해보았지만 이들 낱말을 각기 다르게 정의하다보면 부질없는 입씨름에 휘말릴 우려도 없지 않다. 나는 ‘소설’을 특정한 재현작업과 서사구조를 전제하는 규격품이 아니라 온갖 에쎄이적 요소와 ‘반소설’적 성취마저 소화하는 잡식성 장르로 이해했다.또, 비록 그런 기준의 ‘소설’에 미달하는 ‘에쎄이’ 차원에서도 『책상』에는 “빛나는 대목이 많”(백 42)음을 전제하면서 그 이상의 ‘소설적 성취’마저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글쓰기에 대한 자기성찰의 기록이 아무리 매혹적일지라도 “책상에 대한 다분히 낯익은 집착”(백 47)의 주관적―즉 자기성찰이 불충분한―토로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나쁜 의미의 에쎄이적 요소’로 표현하기도 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임홍배의 경우, 『책상』에서 “삶의 문제를 정신주의적 지향으로 해소하지 않는 작가의식의 표명”을 시종 읽어내면서 이 작품의 “진정한 ‘에쎄이’적 지향”과 “가장 ‘소설적’인 국면”의 합치를 강조한다는 점이다.13 ‘소설’에 대한 나의 이해를 기본적으로 공유하면서 ‘에쎄이’라는 낱말은 달리 사용해서 『책상』의 성취를 나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에쎄이’라는 낱말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떠나 임홍배의 작품읽기 자체에 김영찬이 공감할지는 의문이다. 그는 『책상』에 대해 어떤 면에서 나보다도 단호한 비판을 가한다.
사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그동안 오해되어왔던 배수아 소설의 ‘정체’를 작가 스스로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전까지와는 달리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소설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려는 탈근대적인 허무주의적 실험의 충동을 스스로 절대적인 순수 코기토(cogito)라는 다분히 근대주의적인 고정점 안에 가두어버린 것은 자신의 소설이 발산하는 고유한 매력과 장점을 흐려버리는 패착(敗着)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영 280)
나는 ‘근대주의적 코기토’와 ‘탈근대적 허무주의’가 동전의 양면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에 『책상』의 작가의식을 “순수 코기토(cogito)라는 다분히 근대주의적인 고정점”으로 못박을지는 망설여지지만, 화자든 저자든 무엇인가에 갇혀 있는 건 분명하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주장이다. 김영찬의 비판은, “화자의 시야와 자기인식에 어떤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할 경우에는 그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주문과 상통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
3. 소설읽기와 ‘코드’
결론적으로 김영찬은 내 글에 대한 비판을 ‘창비의 고유한 독법’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백낙청의 비평은 모더니즘 소설을 읽는 창비의 고유한 독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모더니즘을 리얼리즘 쪽으로 끌어당기는 독법이다. 그것은 가령 『에세이스트의 책상』처럼 애초에 ‘소설’의 규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소설에 오히려 미리 설정된 ‘소설적’이라는 기준을 적용하고 그 기준에 호응하는 요소를 가려내어 소설의 공과를 가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때 그 ‘소설적’이라는 기준도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규범의 영역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비 고유의 독법은 말하자면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익숙한 코드로 환원하는 방식이다.(영 281)
이는 리얼리즘을 주장하거나 창비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 한번쯤 숙고해 마땅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비판은 비판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양날의 칼이 아닌가! 나는 모더니즘을 리얼리즘 쪽으로 끌어당기든 리얼리즘을 모더니즘 쪽으로 끌어당기든 그것이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익숙한 코드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굳어지지 않고 읽는이 나름의 진지한 독법이기만 하다면 다 좋다는 입장인데, 혹시라도 김영찬은 나의 이런 독서관이 그가 상정한 창비식 독법에 비해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어서 이를 자신에게 ‘익숙한 코드로 환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듭 말하지만 나를 포함한 ‘창비 비평’에 그가 우려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애초에 ‘소설’의 규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때 김영찬은 그러한 작품마저 기꺼이 포괄하는 나의 소설 개념을 배수아가 거부한 선형적 서사 위주의 소설로 환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재현’ 문제에 대한 내 생각도 김영찬이 예단하는 것과 꽤 다르리라는 점을 앞에 밝혔는데, 기존의 『책상』론들이 곧잘 무시하는 재현적 요소를 부각시킨 것을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규범의 영역 내”에 머문 것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일종의 환원 독법이라 하겠다.
리얼리즘론으로 말한다면 그 경직되고 환원주의적인 주장들이 한때 우리 문단을 휩쓸었고 지금도 리얼리즘을 옹호한다는 사람들 자신이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은만큼 유독 김영찬에게 리얼리즘에 대한 이해가 곡진하지 못하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특정 리얼리즘론자가 아니라 리얼리즘론 일반을 문제삼을 적에는 우리 평단에서 벌어진 리얼리즘 논의 중 가장 수준높은 내용을 일단 상대하는 것이 비평의 정도일 것이다. 나 자신이 관련된 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는 쑥스럽지만,지난 한 세대에 걸쳐 한국에서 진행된 리얼리즘 논의에는 외국에서도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은 이론적 쟁점과 모색이 있었으며, 어쨌든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규범’으로 쉽사리 규정할 수 없는 내용이 적지 않았다.80년대의 투박한 논의들과의 결별을 자랑삼아온 신진 평론가들이 리얼리즘론에 대한 투박한 논의를 태연하게 내놓곤 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김영찬 나름의 코드의 작동은 김영하(金英夏)의 장편 『검은 꽃』(문학동네 2003)을 논한 최원식의 글(「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김영하의 『검은 꽃』과 홍석중의 『황진이』」)에 대한 비판에서도 감지된다. 이 작품에 대한 나 자신의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나는 『검은 꽃』을 김영찬과도 다르고 최원식과도 다르게 읽었으며, 오히려 김명인이 이를 “서사충동과 반서사충동이 갈등하면서 실패한 텍스트”로 규정하고 “이 소설은 역사소설로도 실패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데도 실패”했으며 “바로 거기서 최원식의 오해, 혹은 약간의 과잉평가가 나올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명 261)고 비판한 데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물론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김명인이 “서사충동과 반서사충동의 갈등”이라고 규정한 것은 내가 보기에,이 작품이 “선형적 서사성을 배제”(같은 면)했다기보다 시간순서를 약간 뒤바꾸긴 했어도 대체로 뚜렷한 스토리를 서술하는 가운데 특정한 성격의 서사를 기대하는 독자―어쩌면 김영하 자신도 ‘리얼리즘적’이라고 부를지 모르는 코드에 익숙한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작업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데서 오는 작품효과의 분산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이런 식의 의표 찌르기는 또다른 코드로 굳어질 수 있으며 『검은 꽃』의 방대한 화면과 서사를 감당하기에는 어차피 역부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역사소설로도 실패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데도 실패했다”는 김명인의 비판에 큰 무리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김영찬이 상찬하는 ‘쿨(cool)함’이라는 미덕이 『검은 꽃』에서 어느 정도로 생동하고 있다고 김명인이 인정할지는 모르겠다.14 나 자신은 그 효과를 아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장면 하나씩을 단편처럼 따로 읽는다면 작가의 재치와 ‘쿨한’ 아이러니, 그리고 전체적으로 저자의 묘사력과 서술력이 돋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믿는다. 다만 여러 장면을 서로 연결지어 파악하다 보면 작가가 그때그때 거두는 단발적 효과가 누적된 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도리어 지루한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이는 소설에 대한 어떤 일반화된 틀에 맞춘 통일성 또는 단일효과를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검은 꽃』이 장편일뿐더러 대규모 서사의 뼈대를 갖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걸맞은 매력과 장악력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김영찬의 『검은 꽃』 평가가 결코 칭찬 일변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그가 ‘리얼리즘’ 또는 ‘창비 고유의 독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상당부분 작용해서 약간의 과잉평가를 초래했다는 느낌이다. 기존의 독법이라는 것―그것이 과연 리얼리즘적이며 창비적인 것이냐는 일단 논외로 하고―을 흔들고 뒤집는 일이 지금은 도리어 유행이다시피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작업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한국소설에서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온 역사주의와 국가(민족)주의를 상대화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영 287) 운운할 때는 그동안 한국 소설이나 평론에서 결코 자명하지 않았던 것까지 자명한 것으로 치환하는 새로운 코드에 그가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하지만 『검은 꽃』의 문제점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지적은 날카로운 비평안을 선보인다.
『검은 꽃』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역사와 근대, 국가와 주체 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상대화하는 아이러니의 유희 자체가 거꾸로 그에 대한 더이상의 집요한 사유와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그 아이러니의 질주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 활기찬 탐닉의 향유 속에서, 탈환상의 아이러니에서 유일하게 제외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영 287~88)
이는 내가 제기한 비판과 다시 한번 상통하는 바 있다고 생각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론에 가서 리얼리즘에 관한 예의 이분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지금 한국문학과 모더니티의 생생한 진실은, 아직 오지 않은 리얼리즘의 ‘물건’이 아니라 비록 비루해 보이고 마뜩지 않을지는 몰라도 ‘문학의 위기’가 이야기되는 이 후기근대의 현장을 힘겹게 포복하고 있는 바로 그 문학들 속에, 그 문학들이 안고 있는 결여 속에 있는 것”(영 290)이라고 할 때 ‘후기근대’를 그가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비루해 보이고 마뜩지 않을지는 몰라도 ‘문학의 위기’가 이야기되는 이 후기근대의 현장을 힘겹게 포복하고 있는 바로 그 문학들”이란 표현이야말로 다름아닌 리얼리즘론자의 언사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중요한 것은 작품이라는 ‘물건’이며 이에 대한 독자 개개인의 읽기이지, 리얼리즘론자나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주창자의 언사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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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인 「민족문학론과 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창작과비평』 125호(2004 가을)256면. 앞으로 가을호에 실린 이 글과 김영찬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을 언급할 때는 각기 ‘명’과 ‘영’으로 약칭하고 면수만 표시한다.↩
- 그러나 임규찬으로서는 다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라깡의 비유를 엄밀히 적용한다면, 먼저 현재의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한지 그렇지 못한지(즉 환자의 아내가 놀아나고 있는지 아닌지)를 먼저 규명한 뒤에, 만약 활발하지 않다는 의심이 맞을 경우 임규찬의 판단 중 어느만큼이 정상인의 통찰이고 얼마만큼이 ‘의처증’에 해당하는지를 자상하게 가려주었어야 할 텐데, 김영찬은 “억압되고 있는 것은 (…) 창비 스스로가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직접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즉 바로 창비가 정확히 그 문제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영 272)라는 말로 임규찬의 현실진단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그런 논증을 생략해버린 것이다.↩
- 졸고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배수아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읽기」, 『창작과비평』 124호. 이하 이 글을 언급할 때 ‘백’으로 약칭하고 면수만 표시한다.↩
- 김명인 평론집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창비 2004)‘책머리에’ 참조.↩
- 졸고 「비평과 비평가에 관한 단상」, 『문학과사회』 38호(1997 여름)525면. 실제로 나는 민중·민족문학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엽에 비슷한 입장을 거의 동일한 표현을 써서 밝힌 바 있다.1985년 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주최 ‘민족문학의 밤’ 행사에서 강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작품의 생산에 헌신적이고 좋은 작품과 덜 좋은 작품 또 아주 좋지 않은 작품을 가리는 데 있어서 공명정대한 문인들의 모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민족문학과 민중문학」,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 창작과비평사 1985,351면)↩
- 리얼리즘은 외래 조류가 아니냐는 반문이 아마도 나올 것이다. 나는 그게 똑같은 경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리얼리즘을 내세운 작품이나 논의 중 상당수 역시 바로 수입품의 생소함을 벗어던지지 못한 점이 문제라는 데는 쉽게 동의한다.↩
- 예컨대 졸고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창작과비평사 1985);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 『실천문학』 24호(1991 겨울);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 『창작과비평』 76호(1992 여름) 등 참조.↩
- 그러고 보면 내가 별다른 논평 없이 인용했던 “그 사고에 대해서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M에게 설명해줄 수 없었다”(『책상』 142면)는 화자의 진술도 그대로 고지식하게 수용할 일은 아니다. 설혹 그 순간에 그랬다 치더라도 책상머리에 앉아 글쓰기를 시작한 화자의 기억에는 제2장의 내용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다.↩
- 『동물원 킨트』에서처럼 저자가 처음부터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물’을 그리려는 시도를 한 경우도 있으며 『이바나』에서는 K를 일부러 남자인 것처럼 부르다가 뒤에 가서야 그 연유를 밝히게 됨은 지난 글에서 지적한 대로다(백 40 각주5). 『책상』의 방식은 그 둘 중 어느 것과도 다른 제3의 것인데 작품마다 상이하게 작동하는 장치를 가려서 반응할 필요가 있다.↩
- 그러나 이어서 “M의 첫인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M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설의 82면 ‘처음 만난 M은 키가 컸고 중성적이고 아름다웠으나 엄격하게 보였다’는 부분이다”(같은 주)는 김명인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정된 성적 정체성으로부터의 탈피를 추구하는 이 작가의 소설에서 그러한 표현은 남녀 어느 쪽에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고려사항이 없다면 심지어 김명인이 지적한 112면의 그 대목조차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우리는 채식주의자들의 식탁 곁에 선 채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고 있었다”(『책상』 11면)고 했으므로, 당시 그곳에 여성 채식주의자가 한명 이상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거기 아가씨들!”이라는 에리히의 외침을 ‘나’와 그 여자들을 향한 것으로 읽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 임홍배 「소설 읽기의 다양한 방식―『창비』 여름호 특집을 읽고」(2004.7.16 비공개 공부모임 자료)2면. 이 자료의 인용을 허락해준 임교수께 감사한다.↩
- 이를 두고 이 주문이 “‘작품 자체’라면 몰라도 화자와 똑같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작가에게 건네는 요구로서는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한다”(영 276)는 비판은 이해하기 어렵다. 원칙적으로 비평이 작품에 대해 피력하는 이런저런 아쉬움은 설령 작가에 대한 주문의 형태를 띠더라도―이 경우엔 그러지도 않았지만―작가 개인이 아닌 ‘작품 자체’에 대한 주문이자 비판임은 당연한 상식이다. 아니, 배수아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이런 비판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굳이 예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 “M과의 황홀한 체험이 일회적 순간의 체험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와 M의 관계가 순수한 정신주의적 교감으로 자족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동시에 삶의 문제를 정신주의적 지향으로 해소하지 않는 작가의식의 표명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M에 대한 기억이 마침내는 하나의 ‘임의적 기호’로 환치되는 에피소드는 그런 의미에서 잉여와 결핍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는 현실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나’의 의지와 확신과 예측을 빗나가는 삶의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 어쩌면 이 작품의 진정한 ‘에쎄이’적 지향인 동시에 가장 ‘소설적’인 국면이 아닐까.”(앞의 자료 4~5면)↩
- 김영찬의 이 발언은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에 관한 것이지만 그는 이것이 『검은 꽃』에도 상당부분 적용된다고 판단한다.“김영하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의 무겁지 않은 진실을 시종 그 안도 바깥도 아닌 경계선상에서 짐짓 시치미 떼면서 무관심한 척 건드리고 지나간다. 이러한 태도가 갖는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대로 다시 따져보더라도, 적어도 그 ‘쿨(cool)함’이 한편으로는 현실과 역사에 지나치게 덧씌워진 엄숙한 환상을 탈각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만은 틀림없다./『검은 꽃』에서 그 점은 소설에서 재현되는 역사적 소재의 무게에 의해 어느정도 견제되고 있기는 해도, 그 ‘쿨’한 탈(脫)환상의 태도는 여일(如一)하다.”(영 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