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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고교등급제’ 논란의 재음미

 

 

강태중 姜泰重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과 시민사회’공동대표. tjgahng@cau.ac.kr

 

 

1

 

이른바 ‘고교등급제’ 논란은 교육에 관련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속성을 배경에 두고 있다. 단순히 대학입학 전형에서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의 정당성을 두고 편이 갈려 갑론을박하는 현상이 아니다. 고교등급제 논란은 우리 사회의 계층이 분화하고 고착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고, 우리의 역사·사회적 경험이 낳은 편집적(偏執的) 교육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 점을 놓치고 보면 고교등급제는 일회적인 논란거리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요인에 닿아 있다. 이 요인들이 해소되지 않는 한 고교등급제는, 같은 이름이나 외양으로 거론되거나 나타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 논의에 꾸준히 오르내릴 사안이 된다.

 

 

2

 

말 그대로 보면 ‘고교등급제’란, 각 고등학교가 특정한 준거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그 등급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게 되는 제도이다. 이때 등급을 매기는 준거는 해당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과거에 대학입학 경쟁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학교 단위 과거 성적이 해당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수학(修學) 잠재력을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 이를테면 선배들이 대학 진학에 성공적이었던 소위 ‘좋은’ 고등학교를 다닌 입학 지원자들에게는 평범한 고등학교를 다닌 지원자들은 받을 수 없는 부가 점수가 대입 전형과정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널리 보도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를 두고 이루어진 공방은 팽팽했다. 제도를 시행했다는 혐의를 받은 대학들에서는 그 제도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고 자신을 정당화했다. 대학에 제공되는 자료(내신기록)만으로는 입학 지원자들의 우열을 가리기에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학교에 따라 학생들의 수준 차이가 분명한 현실에서 그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학교의 수준이 똑같은 것처럼 내신성적을 고려하라는 제도적(교육부의) 주문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말한다. 학교별 차이를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이른바 ‘성적 부풀리기’가 일반화된 상황에서(그래서 고등학교마다 한결같이 학생들에게 ‘성적 우수자’의 라벨을 붙여 입학원서를 제출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학교 차이를 반영해야 했다고 항변한다. 요컨대 고교등급제는 엄정한 평가를 해내지 못하는 고등학교와 학교간 격차가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는 교육부의 구속이 빚어낸 제도라는 것이 대학측의 주장이다.

반면, 고교등급제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현대판 연좌제’라는 말로 비난한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개인의 독특한 특성이나 성취에 관계없이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이 용납될 수 있느냐는 비난이다. 예컨대 선배들이 대학에 진학한 성적이 누적되지 않은 고등학교에 재학했다면, 개인적으로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인데 과연 그것이 정당한지 묻는 것이다. 더욱이 서울과 같이 지역별로 거주자들의 계층화가 일어나고 있는 대도시들에서는, 고교등급제가 곧 지역간 차별이 된다는 점에서 비판이 더욱 가열된다. 이를테면 서울의 경우 고교등급제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유있는 계층이 밀집해 있는 소위 강남지역의 학교들을 사실상 우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러한 지역으로 이사해 살 수 없는 ‘서민’들이 차별받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바, 민주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고교등급제’에 대한 비난과 옹호는 그 자체로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고교등급제에 연루된 문제를 풀어가는 일은 두 입장을 대등하게 인정해주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일리 있지만 상반된 주장은 사실 서로를 제대로 겨누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양측 모두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측면만 부각시키고 있어서 공방의 주장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엇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태에서는 문제해결을 모색하기 어렵다. 정직한 토론은 없고 문제에 대한 과장이나 은폐만 난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솔로몬의 해법이 고안된대도 양측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다. 한쪽의 찬성은 곧 다른 쪽의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분쟁의 블랙홀’이 형성되는 형국이어서 어떤 대안도 타협을 이루어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교등급제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제에 대하여 포괄적이고 바른 이해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3

 

대학이 ‘고교등급제’라고 불릴 수 있는1 전형방식을 강구하게 된 데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학교육은 자율을 바탕으로 성숙하고 피어날 수 있다. 고교등급제로 비난받는 대학의 이번 행위들도 자율적인 것이었다. 해당 대학들은 허용된 권한 안에서 나름의 자율을 구사했다고 말하고 있다. 내신성적 자료가 기본적으로 고등학교 사이의 수준 차이를 변별해주지 못하고, 더욱이 한 학교 안에서도 성적 자체가 지나치게 부풀려져 학생 개인의 성취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학은 개개인의 상대적 학력 순위를 유추해낼 방법을 어떻게든 강구해야 했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부 조사로 알려진 바와 같이, 대학들은 나름의 학교차 고려방식을 고안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대학들도 이러한 방식이 최선이고 바람직하다고 여기며 적용했다고는 강변하지 않는다.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학의 입장을 받아들이더라도 남는 의문은 ‘왜 학력의 상대적 순위를 가리려고 고집하는가’ 하는 것이다. 상식에 비추어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서까지 학력(성적) 변별에 집착하는 대학의 행태는 설명될 필요가 있다. 사실 개인을 평가해야 할 국면에서 그 개인이 속한(그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집단(학교)의 속성에 비추어 개인을 평가하는 처사는 그 누구도 납득할 수 없다. 더욱이 한 집단(학교)의 속성이 해마다 다를 수 있는(즉 졸업생들의 학력 수준이나 분포가 해마다 달라지는 것이 사실인) 조건에서, 선배들의 성적을 후배들이 무조건 세습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고교등급제를 채택한 데 대해서는 대학에서 내린 결정의 방법적 합리성마저 의심하게 된다. 고교등급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부당해 보이는데도 대학들이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게 된 곡절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대학이 입학생 사정의 기준은 마땅히 학력(점수)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고, 따라서 입학 지원자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대학들의 해명을 받아들인다면, 대학들은 학생들간의 학력 차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그들이 재학한 학교가 어떤 수준의 학교인지 고려하였다. 과거 입학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학교 출신이면 전형에서 우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학의 전형방안은 입학생 선발은 적어도 학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는 정당화될 수도 있다. 사실 대학들은 이러한 전제에 대하여 의심해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입학자 전형이 학력상의 우열을 가르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에 대학들이 관성적으로 묻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고교등급제를 채택한 대학들의 비합리성은 학력 위주의 입학전형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는 우리의 교육적 관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교등급제가 대학의 천박함이나 무분별함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잠입해 있는 학력 위주의 관성이 키워낸 것이라고 볼 법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적으로 획일적인 입학전형제도를 시행해왔다. 하나의 시험을 국가 관리 아래 시행했고 그 성적에 따라 각 대학이 입학생들을 사정(査定)하도록 해왔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대학입학 지원은 국가 관리 시험의 성적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고, 사실상 모든 대학이나 학과가 합격, 불합격을 가르는 점수 선(이른바 커트라인)을 기준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몇점짜리 입학생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대학이나 학과의 명성이 결정되었다. 결국 대학이나 학과에서는 이 명성을 얻어내기 위하여 소수점 이하의 점수일망정 조금이라도 높은 점수를 얻은 학생을 확보하는 데 입학전형상의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대학 밖으로 드러날 수 있는 상대적 우열에 민감하게 된 이러한 대학들의 관성은 국가 수준의 표준 잣대(국가 단위 시험성적)가 적용될 수 없게 된 이른바 수시전형이나 특별전형에서도 여전히 작용하였던바, 소위 고교등급제가 그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학력상의 우열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학들은 지원자들이 재학한 고등학교의 과거 평균 수준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변별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고교등급제가 단순하게 학력 변별에 대한 대학들의 집착만으로 고안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좀더 일반적인 사회적 경향에 의하여 지지되지 않는 경우에는 고교등급제와 같은 발상이 일반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하면 고교등급제의 현상이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계층화가 문화적인 영역에까지 분명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적·물질적인 측면에서 잘살고 못산다는 구분을 넘어 이제는 취향이나 처세 양식의 격(格)을 따지며 동질적인 무리를 짓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는 것과 고교등급제의 발상이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대학에서 ‘어떤 학생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암암리에 문화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학들이 출신 학교나 지역에 따라 학생들의 격이 달라진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격을 갖춘 학생들을 변별해내기 위하여 학교나 성장 지역을 고려하는 것이 일리있는 입학전형방식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높은 문화적 지위를 뽐내왔다고 볼 수 있는 이른바 명문대학들이 자신들이 느끼는 격에 합당한 입학생들을 선발함으로써 그 문화적 우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대학들이 반드시 의도적으로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대학들은 어쩌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만큼 이 경향은 대세가 되는 것이다.

고교등급제가 이러한 대세 속에서 생겨났다는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대학들이 해명하고 있는 바 고교등급제가 학력의 우열을 가늠하는 궁여지책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학력 변별 의도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이고, 사실은 문화적 변별을 추구하는(바꾸어 말하면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것이 고교등급제의 본령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회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학력 표준의 전형을 외양으로 하여 사실은 문화적 차별을 숨기는 것이 고교등급제의 제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교등급제는 일상적으로 암암리에 번지는 사회적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포용적이기보다 배타적이고 통합적이기보다 분열적이라는 점에서 마땅히 경계해야 할 사회의 흐름이다.

 

 

4

 

고교등급제와 같은 문제를 바로 보기 위하여 우리는 교육에 대하여 새삼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공정–불공정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문제 되는 부분에 대하여 기술적(技術的)인 대안을 찾음으로써 결말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교등급제의 문제는 범국가적이고 표준적인(획일적인) 대입 전형방식에서 벗어나 대학별로 다양한 전형방식을 갖추어가는 과도적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모든 학생들을 변별해줄 절차와 방식을 폐기하게 되는 상황(이를테면 현재 1학기 수시전형과 같은 상황)에 대비해서 각 대학은 나름의 변별(전형)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그러나 기존의 표준적 전형의 관성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대학들에서 이러한 대비는 아직 무리였다. 결국 표준적인 잣대(예컨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가 없는 상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대학들이 미숙한 방편으로 고교등급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입학자를 가려내기 위하여 그들의 출신학교를 고려할 양이었으면 대학들은 고등학교에 관한 좀더 충실하고 타당한 정보를 지원자 개개인에 따라 특정하게 확보했어야 했고, 아울러 그 정보를 해석할 역량을 갖추었어야 했다. 입학 지원자가 단순히 어느 학교 출신인지 보는 지극히 개연적인 평가에 그치지 말았어야 했다. 개인의 교육(학습) 경험이 어떤 경로로 어떤 수준에 이르기까지 조직되고 제공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 특수하고 세밀하게 개개인과 관련된 학교 정보를 확보했어야 했고,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개인의 잠재력을 타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인력과 조직을 구비했어야 했다.

이와 같은 정보나 체제의 구비가 단순히 기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에 대한 안목과 표준을 갖출 때 비로소 대학이 학생들을 바르게 선발할 조건을 갖추게 될 것이다. 지원자와 관련하여 어떤 정보를 찾을 것인지는 대학이 어떤 학생을 받아들일 것인지 명료한 관점을 가질 때 결정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대학이 대학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교육을 추구할지 교육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때 견지할 수 있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고교등급제는 대학이 자신의 고유한 교육 이상(理想)과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독자적인 구상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성적 우수자’ 유치경쟁에 몰입하던 관성과 그러한 관성을 지지해주는 사회문화적 통념을 따르던 데서 생겨난 생존방편이다.

그렇다고 모든 대학들이 나름의 교육이념을 규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학생선발의 양식을 가지면 문제가 다 풀릴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양한 선발은 필경 학생 입장에서는 부담이 클 것이다. 즉, 문화적으로 빈곤한(상대적으로 박탈된 환경에서 성장하는) 학생들에게는 이전의 국가 표준적인 선발양식보다 다양한 선발양식이 오히려 더 불리한 것이 될 것이다. 다양한 선발방식은 대체로 더 많은 문화적 자본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심층면접은 어휘 구사나 말의 억양에서부터 몸짓과 언어,심지어 옷매무새에 이르기까지 동질성을 요구하는 심사절차가 될 수 있고, 다양한 봉사나 지역사회 활동 그리고 비(非)교과 특별활동의 평가가 실제로는 학생들이 소속한 사회 네트워크의 계층적 수준이나 문화적 소비수준을 비교하는 것에 다름아닐 수 있다. 고교등급제를 넘어서 좀더 다양하고 원숙한 대학입학전형 체제를 추구하는 길에는 이러한 사회적·구조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대세에 밀려 이러한 함정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선택할 길은 무지한 상태로 대세에 밀리기보다 그 함정을 의식하며 대세를 항해하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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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학측에서는 ‘고교등급제’라는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 입학 전형과정에서 말 그대로 고등학교들에 대하여 기계적으로 등급을 매기고 획일적인 점수를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고교등급제를 적용했다는 주장은 과장이라는 것이다. 다만 학교 차이를 고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