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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정적 주체와 경계의 해체
이숭원 李崇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평론집 『폐허 속의 축복』 『초록의 시학을 위하여』와 저서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등이 있음. topos@swu.ac.kr
1. 담론의 출발
시가 어떤 의미를 담은 발화의 한 양상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그것이 산문과 구분되는 독특한 층위를 지닌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밥을 먹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지시한다. 그런데 “허기로 지친 내가 눈물 젖은 밥을 꾹꾹 씹어삼킨다”라고 하면, 여기에는 화자의 감정과 태도와 반응이 복잡하게 얽혀든다. 이것을 다시 “공복의 현기/눈물 젖은 식욕의 갈증/목구멍에 넘어가는 환멸의 흰 밥알들”이라고 고쳐쓰면, 최초의 단순한 의미가 분해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의미의 층이 형성된다.
이런 점에서 시는 어떤 의미를 단순명료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기능적으로 부적합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진술(statement)은 말하는 주체(화자)가 있고 그 말을 듣는 객체(청자)가 있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화자가 청자에게 전달하려는 의미가 뚜렷해야 하며, 의미를 뒷받침하는 화자의 태도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자세가 진지해야 하고, 주체와 객체의 의사소통을 이어주는 공통언어의 기반이 있어야 한다. 내용이 명확하지 않거나 화자의 태도가 소극적이라면 청자의 자세 역시 산만하게 되어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내용이 명확하고 화자의 태도가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청자의 자세가 산만하여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교장선생님은 강단에서 열변을 토하는데 학생들은 떠들고 장난치는 초등학교 강당을 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시에는 화자의 존재가 크게 부각될 뿐 의미전달의 대상인 청자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청자의 자세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의욕은 넘치고 태도는 진지하지만 말의 내용을 딱 잘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복잡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감정의 파동에 따라 언어로 흘려보내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약 80년 전 영국의 리차즈(I. A. Richards) 같은 사람은 시를 ‘진술 비슷한 것’(Pseudo-statement, 흔히 ‘의사진술’이라고 번역한다)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다음의 시를 보면 리차즈가 설명하려 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맨발』, 창비 2004) 전문
이 시는 서로 다른 여섯 개의 장면을 제시하고 있을 뿐, 비가 오려 할 때 어떠했다든가, 비가 오려는 것과 나머지 다섯 개의 장면이 어떤 관계에 있다든가 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고 있다. 독자는 그저 이 여섯 개의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며 각각의 시행이 환기하는 정취와 장면끼리의 연관성을 상상할 뿐이다. 이 시의 화자는 적어도 전달하려는 의미가 무언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장면의 제시를 통해 의미의 상상을 방임해놓은 형국이다. 화제전달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따라서 매우 방임적이고 비관여적이다. 청자의 자세에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이 발화의 비의를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런 기묘한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이 시에서 우리가 수용하게 되는 것은 산문과 같은 명백한 의미의 층이 아니라 각각의 장면이 환기하는 감정의 파동이다. 요컨대 이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느끼게 하는 데 주력한다. 겉으로는 진술의 형태를 취했지만 어떤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므로 ‘가짜 진술’(Pseudo-statement)이라 할 만하다. 까만 염소를 소심한 공증인에 비유한다든가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편다고 표현한 것도 의미의 명확성을 희석하면서 오히려 감정의 다의성을 증폭시킨다. 특히 “바람의 살들”이라는 구절에서 ‘살’은 햇살이나 물살처럼 미세하게 흐르는 결을 뜻하는 동시에 바람과 청보리밭이 서로 접촉하며 술렁인다는 점에서 바람의 살결을 연상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의미의 명확성을 스스로 분해시킨다. 이러한 산포(散布)와 희석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가 오기 전의 풍경들이 몽롱하게 접합되는 특이한 감각체험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시가 언제나 이러한 의미배제의 몽롱한 어법만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의식을 내세우면서 산문이 추구하는 의미전달의 측면을 끌어안고 감정적 충동의 효과를 활용하려 할 때 시는 의사진술의 자리에서 벗어나 진술과 담론의 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프로문학의 목적시가 그러하며, 1980년대에 문단을 풍미했던 민중시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머리띠를 질끈 묶으며
적과 아를 확연히 갈라내어 묶으며
전선에 선 동지들을 한 대오로 묶으며
‘결사투쟁’ ‘일치단결’ ‘승리쟁취’ ‘노동해방’
살아 펄펄 뛰는 구호들을 정수리에 새기며
결연한 투지로 비장한 맹세로
떨리는 손길로 머리띠를 묶는다
–박노해 「머리띠를 묶으며」(『참된 시작』, 창작과비평사 1993) 부분
민중시 중에서도 전위의 자리에 섰던 박노해의 노동시는 불필요한 어사를 배제하고 선명하게 집약되는 의미의 중심을 향해 정연하게 시어를 배치하고 있다. 눈앞의 목표가 뚜렷하고 확고하므로 멀리 에둘러갈 필요가 없다. 단결심과 투쟁의식 고취를 위해 필요한 말만 할 뿐이다. 80년대의 이러한 직설적 시는 산문의 기능을 시의 율격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의미의 명확성과 격정의 파동을 함께 전달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 시대가 산문이 감당해야 할 의미전달의 통로가 상당부분 막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가 이런 시를 시도한다면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고 지탄을 받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전달매체가 우리 앞에 널려 있기 때문에 산문적 의사소통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다채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더욱 내밀화되고 화자의 목소리는 더욱 음성화된다. 위의 문태준(文泰俊)의 시와 박노해의 시를 비교해보라. 박노해의 시에 당당히 살아 있던 명령하는 주체의 목소리는 문태준의 시에서 찾아볼 수 없다. 몇개의 작은 장면을 소개하고 저 뒤에 물러서 있는 화자의 모습을 감지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큰 것인데 이러한 차이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들의 시에서 서정적 주체 즉 화자는 어떠한 양상으로 작동하는가? 최근 간행된 세 권의 시집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겠다.
2. 독백의 어법과 서정적 주체의 자리
공교롭게도 고재종(高在鍾)은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 2004)의 ‘시인의 말’에서 바로 이 주체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 시에서 주체가 사라지곤 했다. 아니 애초부터 그랬다. 그건 내가 나를 별로 신뢰하지도 않지만, 세계와 우주를 ‘독학’하는 처지에 무슨 목소리를 내랴 싶어서이기도 했다. 주체가 드러내는 게 ‘속내’라고 한다면, 어쨌든 그것은 속에서 내를 열든가 산을 세우든가 무슨 길을 찾겠거니 하고 되레 그걸 꼭꼭 눌러두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눈을 항상 밖에 두고 농민이니 생태니 하는 대상에 생각을 의탁하거나 몰입시키곤 했으니, 그나마 이게 어떤 길을 찾는 몸부림 정도는 될 것이라 생각되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길을 찾지 못한 주체는 결국 속에서 아우성이었다. 살려달라고, 외롭다고, 날이면 날마다 외쳐대는 그 죽음과 고독에 들린 존재를 더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이 글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주체가 필자가 앞에서 말한 화자로서의 주체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나오는 억누를 수 없는 육성을 주체의 절규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필자의 주체 개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재종은 공적인 담론형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주체의 드러냄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 짧은 글에서도 시인의 고민과 방황이 암시되고 있듯이,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자연풍경의 생태학적 인식이라는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벗어나 완전한 주체의 자유를 구가하지는 못하고 있다. 독서체험에서 온 관념적 사유나 반복되는 사색의 관성이, 예전의 그의 시 「날랜 사랑」(『날랜 사랑』, 창작과비평사 1995)에서 볼 수 있던, 시적 대상과의 발랄하고 자유로운 부딪침을 상당부분 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주체의 목소리가 밖을 향해 넉넉히 발산되지 않고 다시 내부를 향해 응축되는 양상을 보인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일월의 억새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난발의 바람집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 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 길들을 흙먼지로 뒤덮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과
망나니가 보인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꽃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억새꽃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전문
이 시에 여러번 나오는 ‘나’라는 대명사는 반복적 의미강화에도 불구하고 주체적 화자로서의 분명한 위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화자는 억새밭에 들었다가 그곳에서 오히려 고향을 느끼고, 억새밭 마른 울음에 스스로 한없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새로운 것들이 온통 누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인 후에야 비로소 눈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에게 보이는 것은 고개 떨군 귀신과 망나니의 모습이다. 대상을 대하는 서정적 주체의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고, 화자의 시선은 억새밭의 바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억새밭과 다름없는 봉두난발의 형상으로 남루의 행려를 꾸려가고 있다. 두 번 반복되는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이라는 말은 그의 내면의 공허를 드러내기 위한 비유일 텐데, 그것이 어떻게 그의 ‘마음의 거처’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나약하고 텅 빈 자아의 모습이 거침없이 그의 시에 노출되게 된 연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 생동감 있고 활기 넘치던 「날랜 사랑」의 화자, 둔중하고 믿음직스럽던 「면면함에 대하여」(『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문학동네 1997)의 서정적 주체는 어디로 갔는가?
이 시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화자가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전후의 관계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용된 시어가 반복적이라는 느낌이 들고 시상 전개에 공감을 얻기 힘들다. 시는 의사진술이라는 관점과는 다른 범주의 이야기다. 시가 산문적 진술을 넘어서는 복합적 환기력을 가질 때 시로서의 성가가 발휘되는 것이지 산문적 의미진술에 미달하는 발화상의 착종까지 시라는 이름으로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비해 다음의 시는 화자의 위치가 어느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내 무슨 영혼의 집 같은 게 있다면
먹을 것 다투다간 쫓겨나 한사코
헤매던 강변의 갈대밭 속일까 헤매다
기계충 가득한 머리 들어 쳐다보던 그곳
바람에 높은 키만 휘는 미루 가지 사이의
두어 채 얼기설기한 까치집일까
거기 하냥 돌 던지는 것도 싫어 다시
애보리밭의 갈까마귀 떼나 쫓다가
마른 버즘살 에이는 삭풍날 피해
옹송옹송 숨어든 짚가리 밑 잔볕 속일까
다시는 들어가지 않으리라 고집 부리며
해 떨어진 뒷동산 청솔 둥치나 쳐대다가
몰래 기어들던 무당집일까 먼 마을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도 막은 귀
끝내 제 풀에 열려 돌아오면
관솔불 환히 타는 아궁이로 이끌어
자글자글 몸 녹여주던 부엌일까
춥고 배고픈 것들이 오늘도
서럽고 쓸쓸한 만큼 우우우 소리 지르는
황량한 벌판에 서면 오히려
그들과 함께 마음이 놓이는 이 심경을
내 무슨 영혼의 본적지로 삼아선
한바탕 씻김굿이나 쳐대면 좀 좋을까
–「내 영혼의 바리데기 집」 전문
앞의 시가 ‘마음의 거처’를 문제삼은 데 비해 이 시는 ‘영혼의 집’에 대한 명상이 펼쳐졌다. 그 영혼의 집에 ‘바리데기’란 말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설화 문맥 중 버림받은 아이의 의미를 끌어들인 것이다. 원래 바리데기 이야기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후반부의 영웅적 성취의 내용은 배제하고 전반부의 유기와 방황의 모티프만을 채용했다. 화자가 영혼의 집으로 설정한 것은 어릴 때 헤매던 강변의 갈대밭, 미루나무 가지 사이의 까치집, 짚가리 밑 잔볕, 몰래 기어들던 무당집, 아궁이에 관솔불 환히 타던 부엌 등이다. 이 작품의 서정적 주체가 껴안고 있는 영혼의 집의 풍경은 그가 어릴 때부터 몸으로 생생하게 감촉하고 살아온 인접의 대상들이다. 그것은 그의 육체의 일부와 같은 것이기에 거리감이나 이질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대상을 반추하는 시적 주체의 위상은 모호하지도 않고 흔들림도 없다. 춥고 배고픈 것들이 소리 지르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지만 그 대상들을 떠올리면 마음은 오히려 느긋하게 녹아드는 것이다.
앞의 시가 ‘마음의 거처’를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십일월의 억새밭’ ‘봉두난발의 바람집’ 등으로 은유화하여 유사성의 차원에서 시상을 전개한 데 비해 이 시는 ‘강변의 갈대밭’에서 시작하여 ‘몸 녹여주던 부엌’에 이르는 환유적 구성으로 연결하여 인접성의 맥락을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의 사물이 단절되지 않고 통합의 축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시적 주체의 자리가 든든히 확보되고 훨씬 분명한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화자의 목소리가 가장 자신있게 흘러나온 것은 다음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런 특징을 보인 것도 화자의 삶이 뿌리박혀 있는 토착적 어법을 생생히 살려냈기 때문이다.
활활거리는 화톳불이 온 마당에 환하다
잘 갔다고 한다, 맏상제도 덩달아서
아침밥 잘 잡숫고는 잠든데끼 가셨구먼, 한다
윷판에선 윷 모 떨어져 환호성 지르고
초경 이경 상여 놀이로 서로들 낄낄거리고
필요도 없이 오래 사는 치도 많은데
잘 갔다고 한다, 마나님도 덩달아서
평생을 흙 파묵고 살았응께
인자 흙밥 되는 게 옳지라우, 한다
텃밭 가에선 초롱초롱 오동꽃도 등 밝히고
내일 발인 날엔 날씨도 화창할 거라 하니
활활거리는 온 마당에 화톳불이 환하다
그래도, 그래도 쪼끔은 서러워야 한다고
배경음을 깔아대는 저 지랄 불여귀들!
–「환한 마당」 전문
앞의 시들과 비교해보면 이 시의 화자는 사실을 보고하는 관찰자의 자리에 있을 뿐, 자의식이나 환멸감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 있다. 그만큼 화자는 적절히 생략하고 적절히 인용하면서 자유로운 어법을 구사한다. 그의 생활 속에 길들여진 친숙한 방언은 화자의 태도를 당당하게 한다. 책에서 읽은 지식에 억압당할 필요도 없고 무엇을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한편의 시를 제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어릴 때부터 몸과 마음으로 부딪쳐온 이웃들과 어울려 낄낄거리고 환호성 지르듯 그렇게 말을 다루면 된다. 화톳불이 활활거리면 그대로 쓰고 불여귀가 밤을 새워 서럽게 울면 그 지랄 같은 처연함을 배경으로 제시하면 된다. 화자가 가장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풍경을 마주할 때 목소리는 선명해지고 태도는 당당해진다. 서정적 주체가 온전히 드러나 시 전체를 통섭(統攝)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시의 행간 속에 희로애락의 충돌하는 감정을 겹겹이 스며넣어 의미의 복합성도 꾀하고 있다. 환호성과 낄낄거림과 망자에 대한 덕담과 활활거리는 화톳불과 서럽게 지랄대는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어울려 사람이 사는 환한 마당을 이루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감싸안는 자리에 서정적 주체가 서 있다.
3. 주체와 대상의 교호작용
시인은 평생 몇차례의 싸움을 벌인다는 말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요, 그 다음으로는 타인과의 싸움, 사회와의 싸움, 전통과의 싸움 등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다투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갈 것이다. 나희덕(羅喜德)은 요즘 관념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다섯번째 시집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의 ‘시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벗어나려 할수록 단단히 들어박혀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견고한 관념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희덕의 작업을 보면 그가 관념을 앞세워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갑각의 관념’으로 표상되는 기존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작은 구속이라도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창의적인 예술활동은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예술적 창조행위는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 관념의 틀에 정체되지 않으려는 부단한 몸부림,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대상을 새롭게 파악하려는 의지를 양식으로 삼는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가 택한 방법은 주관적 명상의 자리에서 벗어나 생의 국면과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다.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
허공 속의 길을 따라
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
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
새끼들이 푸르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가 꽉 찬다
큰 날개가 한 획 그으면
模畫하듯 날아오르는 작은 날개들,
그러나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곧 오리라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
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창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겨울 아침」 전문
화자는 어치 울음을 듣고 깨어나 아침쌀을 씻으며 어치의 동작을 바라본다. 아침에 쌀을 씻는 것은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만들기 위해서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그 일은 따분하고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그 무료한 일상사에 어치 일가의 일상사가 겹쳐진다. 어치가 새끼들을 데리고 나무 위를 오르내리는 것 역시 어치에게는 거의 본능에 속하는 행동일 것이다.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고 시인은 쌀을 씻는다. 서로 무관한 것 같은 이 두 행위가 2연과 3연에서 연결되며 의미의 접합을 이룬다. 2연의 세밀한 관찰과 점착력 있는 묘사는 어치의 구체적인 활동에서 생의 섭리를 터득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구성한다. 이것은 관념적 진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묘사이며 자연의 실상을 그대로 보고하는 화법이다. 서정적 주체는 쌀 씻는 개수대에 서서 창밖의 동태를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2연의 끝부분 “그러나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곧 오리라”에서 사유의 단서가 제시된다. 이것은 새나 사람에게 두루 통용되는 생태학적 사실이다. 이 사실적 판단은 3연으로 이어져 자신과 관련된 생의 의미에 대한 단언적 진술이 도출된다. 그러나 3연의 어법을 보면 일반적 진술의 기본문법을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써 시적 발화로 날아오르려는 기도를 보인다. 문법적으로 보면,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에 해당하는 생의 진실, 즉 ‘우리도 새처럼 새끼들을 기르며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새들의 움직임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시행을 독립적으로 처리한 다음 “창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이라는 시행을 배치하여 마치 두 대목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처럼 의미의 교란을 꾀하였다. 생의 실상과 관련된 각성을 수용하면서도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관념이 육화되면 어느 사이에 갑각의 틀로 굳어진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색이 요구하는 논리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독립적으로 처리된 마지막 시행도 관념적 논리를 구체적 묘사로 바꾸려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어치의 일생이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오르내리는 일에서 시작되고 거기서 끝나듯이 사람의 생애라는 것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을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라고 하자 그것은 일반적 진술의 논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의 일생을 새에 비교하다니 이것은 ‘가짜 진술’에 속한다. 가짜 진술이기에 그것은 관념과 맞선다. 새로운 방법은 아니지만 시인은 이것으로 관념의 갑각화를 피하려 했다. 이와 연관된 작품이 「극락강역」 「연두에 울다」 「행복재활원 지나 배고픈다리 지나」 등의 작품이다. 시인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고 그런 움직임의 도정에서 생에 대한 사색을 펼친다. 생에 대한 사색은 얼핏 관념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한데 그 순간 기묘한 시적 장치에 의해 감각의 구체성을 회복한다. 그러나 화자의 지향이 체험보다 사색 쪽에 기울어 있고 서정의 전개가 유사한 궤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나희덕의 장기는 무심한 자연물에서 생명의 기미를 포착하여 놀라운 상태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있다. 그러한 작품도 이 시집에 여러편 들어 있는데 자연을 보는 눈은 더욱 정밀해졌고 화자의 태도는 더욱 관조적인 거리를 지킨다. 다음의 작품이 그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어떤 出土」 전문
이 시에 제시된 장면은 그렇게 드문 장면이 아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놀라운 장면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 우리는 경탄하게 되는데 그것은 서정적 주체의 태도와 시각과 사유방식 때문이다. 텃밭에 남아 있던 호박에 벌레들이 달라붙어 속살을 파먹고 있는 것은 밭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히 보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일상적 현상을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모습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다. 화자는 대뜸 호박을 ‘그녀’라고 지칭했는데, 벌레에게 젖을 빨리는 모습을 연상했기에 그것은 당연한 호칭이다. 젖을 물린다면 벌레들은 호박의 새끼들이란 말인가? 화자의 생각은 한단계 더 상승하여 소신공양의 불꽃을 연상한다. 자기 몸을 불태워 더 큰 무엇을 이루려는 구도행위를 떠올린 것인데 호박에 붙어 있는 벌레들은 소신공양을 도와주는 불꽃에 비유된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호박도 흙바닥에 사그라지고 벌레들도 사라진 가을날 그곳에 가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다. 생명의 즙액을 자식에게 다 먹이고 탈진한 어미의 모습일 수도 있고, 소신공양이 끝나고 남은 육탈한 잔해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제 생명이 소진했음에 틀림없는 물체이기에 화자는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들어올렸다고 했다. 그 다음 한 행의 발화로 시는 끝나버린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온갖 벌레들에게 자신의 살과 즙을 모두 먹이고 스스로의 몸을 소진하여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렸으니 그 육신의 보시와 소신공양의 공덕으로 분명 사리가 생길 만하다. 식물의 생리로 보면 호박은 식물의 종자이니 그 속에 담겨 있는 씨앗을 땅에 퍼뜨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다. 그러니 사람이 호박을 먹는 것보다는 동물이나 벌레가 호박의 살을 파먹고 남은 것은 쉬 썩게 하여 씨앗이 땅에 묻히게 해야 호박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 잘 실현하는 법이다. 그냥 사그라져도 좋을 몸, 온갖 벌레들의 식욕을 채워 포식케 하고 소신공양의 신비로운 불꽃 형상도 보여주었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종말이 어디 있겠는가?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야말로 이 아름다운 죽음에 깃들인 축복임에 틀림없다.
이 시의 서정적 주체는 자연현상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와 시각과 사유를 통해 상당히 많은 양의 발언을 이 시에 담아놓았다. 단순히 관찰하고 서술한 것 같으면서도 서정적 주체의 발언은 매우 뚜렷한 각인을 남긴다. 그러나 그 발언은 당당히 서서 큰 소리로 떠드는 박노해의 육성과는 사뭇 다르다. 말하면서 그것이 옳은가 다시 되돌아보고 자신의 사유를 되짚어 반추하는 반성적 사유의 음성이다. 박노해의 육성이 한 가지 의미만을 전달하는 데 비해 이 시의 발언은 여러 가닥의 해석을 생산한다. 서정적 주체와 독자 사이에 다성악적 교호작용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시의 카니발이요 진정한 서정의 축복이다.
4. 서정적 주체의 분화, 경계의 소멸
다시 문태준의 시로 돌아가자. 그의 두번째 시집 『맨발』에 붙은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불교적 사유와 우파니샤드적 사유를 드러내는데 이것을 자신의 시론으로 삼아 실천한 것은 문태준이 처음이다.
네 해 동안 꽃이랑 풀, 낯빛이 어두운 사람, 별과 여울, 미루나무를 만났다. 습지와 같은 그늘을 드리운, 낱낱이 오롯한 존재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대화가 이번 시집을 낳았다. 입아아입(入我我入)이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 나 아닌 것, 그러면서 동시에 나인 것들을 잘 섬기며 살아야겠다.
나희덕의 「겨울 아침」과 「어떤 出土」에서 서정적 주체는 대상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대상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이를 기르고 텃밭을 가꾸는 여성시인의 모성적 존재성이 두 편의 시에 깊게 스며들기는 했지만 그것을 통해 화자의 시선이 어치의 생태에 근접하거나, 그의 손길이 늙은 호박을 만지고 들추기도 했지만 서정적 주체가 어치 속으로 들어간다든가 늙은 호박이 시인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서정적 주체가 갖는 대상과의 거리감이 어조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감정의 방만함을 차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문태준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내 어릴 적 처마 밑에는 아슬아슬한 빛들이 있어
누에의 눈 같기만 했던 빛들이 있어
빛보다 그림자로 더 오래 살아온 것들이 내 눈 속에 붐벼
나는 오늘밤 그 가난한 가슴들에게로 가는 것인가
저릿저릿한 빛들에게로 가는 것인가
–「반딧불이에게」 전문
이 짧은 시에서도 서정적 주체의 시선은 매우 복합적이다. 지금 공중에 떠도는 반딧불이의 불빛을 보고 있는가 하면, 어릴 적 처마 밑에 날아다니던 불빛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런 희미한 빛도 못되어 그림자처럼 살아온 소외된 사람들의 가난한 삶이 눈에 밟히는가 하면, 처마 밑의 가난한 가족, 이웃, 슬픈 사랑을 나눈 사람들을 모두 떠올리며 가슴 저릿저릿한 연민의 감정을 풀어내기도 한다. 서정적 주체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며,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삶의 굴곡도 보고, 거기서 가슴 저린 애환도 느끼고, 오늘밤 공중에 떠도는 반딧불이의 빛을 따라 가난한 이웃들의 마음에 다가서려는 지향을 갖는다. 그러니까 서정적 주체는 어릴 적 처마 밑의 아슬아슬한 불빛 속으로 들어갔다가 가난한 이웃들의 저릿저릿한 사연과 하나가 되었다가 오늘밤 공중에 떠도는 누에의 눈 같은 빛 속으로 다시 스며드는 것이다. 내가 그것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것들이 내 속에 들어온다는 것과 같은 얘기다.
이러한 문태준의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형질은 매우 다양하게 분화된다. 어떤 경우 「모닥불」처럼 서정적 주체가 보고자의 위치에 있는 듯한 작품도 있고, 「밤과 고둥」처럼 아예 주체가 사라지고 대상만으로 존재하는 듯한 어법의 작품도 있다. 생활의 단면 속에서 명상이 펼쳐질 때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처럼 서정적 주체가 체험한 모든 것을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변용과 창조의 기틀을 세우는 구도자적 고행의 창조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불확정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태준 시의 서정적 주체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세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그의 대표작 「맨발」을 통해 살펴보겠다.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 전문
서정적 주체는 어물전의 살아 있는 개조개 한마리를 본다. 어물전의 개조개는 언젠가는 팔려 식탁에 오를 생물이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대상이기에 ‘죽은 부처’ ‘관’ ‘조문’ 등의 시어가 준비되었다. 이것은 불교에 나오는 곽시쌍부(槨示雙趺)의 고사와 관련된 것으로 서정적 주체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사유의 취향을 알려준다. 석가모니 부처가 사라쌍수 나무 아래 입적하였을 때 석가의 법통을 이어받을 마하가섭은 다른 곳에 가 있다가 먼 길을 걸어 늦게 도착했다. 마하가섭은 저 유명한 염화시중의 미소로 석가와 이심전심의 교류를 이룬 인물이다. 이 뛰어난 제자가 늦게 도착하자 부처는 관에서 두 발을 내밀어 가섭의 조문에 응했다는 얘기다. 이 설화의 문맥대로라면 조개가 내 앞에 맨발을 내보인 것은 내가 조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할 것이라는 마음의 작용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아니나다를까 시인은 조개를 대상으로 조개의 슬픔과 아픔을 포용한 위와 같은 시를 썼으니 이심전심의 비법이 전수된 것과 다름이 없다.
부처의 발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개가 내민 맨발은 살이 부르텄고 몸은 움막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극빈의 처지에 놓인 걸식자의 모습인데 동작은 아주 느려 세상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듯하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라는 시행은 그러한 처지에 대한 동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부분에서 서정적 주체는 조개를 이야기하는 데에서 벗어나 슬픔이 응어리진 극빈의 가장을 이야기하는 어법을 취한다. 더 나아가 이 부분의 상황은, 서정적 주체가 바로 대상 자체가 되어, 다시 말하면 조개가 되었다가 다시 극빈의 가장이 되어 부르튼 맨발로 거친 땅을 헤매고 양식을 탁발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움막 같은 집의 아이들이 굶주림에 울음을 터뜨리면 거리에서 맨발로 양식을 구하고, 다시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은 그 소루(疏漏)한 양식으로 배를 채워 한순간이나마 울음이 멈추는 그 캄캄한 빈한의 궤적을 시인은 참으로 자연스럽게 서술하였다. 그야말로 입아아입(入我我入), 내가 저것 속으로 들어가고 저것이 내 속으로 들어와야 이런 경지가 열린다.
이것은 결국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는 경계의 소멸, 주체와 대상을 나누는 경계의 해체이다. 이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불교의 연기적 상의성(緣起的 相依性) 이론과도 연관이 있다. 그런데 나와 나 아닌 것의 융합은 서정시의 기본적 특성이기도 하다. 자아와 세계의 융즉(融卽),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는 서정시의 본질이다. 서정적 주체가 선언적 자세를 취하던 80년대의 민중시가 서정시의 본질에서 멀리 이탈한 것이라면 서정적 주체가 대상과 혼입되어 주체와 대상과의 경계가 해소된 상태는 서정시의 본질로 회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문태준의 시는 바로 그러한 경향의 시금석적 위치에 놓인다.
고재종, 나희덕, 문태준의 시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서정적 주체가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고재종 시에 나타난 번민의 독백, 나희덕 시의 사색의 내면화, 문태준 시의 융합의 어법은 서정적 주체의 선명성을 희생한 자리에서 획득된 서정적 형질이다. 주체와 대상의 경계선은 고재종에서 나희덕을 거쳐 문태준의 시로 오면서 순차적으로 약화된다. 이것은 이 세 시인의 연령적 차이와도 관련이 있다. 문태준은 체제의 금기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온 시인이다.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지우는 그의 방임적 어법은 소통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시대의 사회환경과 상당부분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야기된다. 80년대에 서정적 주체의 당당하고 뚜렷한 발성이 일정한 문학적 관습을 형성했듯이 문태준의 경우 유동적 화자의 몽롱한 화법이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지우는 창조적 모험이 서정적 회귀라는 추상적 틀에 갇혀버린다면 그것은 또하나의 지루한 답보, 혹은 복고주의적 퇴행으로 비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