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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한국경제, 무엇이 문제인가

산업금융씨스템의 실종

 

 

신장섭 申璋燮

싱가포르국립대학 경제학과 교수. 저서로 The Economics of the Latecomer, 『한국경제 제3의 길』, 공저로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등이 있음. ecssjs@nus.edu.sg

 

 

 

한국경제는 지금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금융위기 이전의 경제씨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했는데 별로 좋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나빠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기양극화, 빈부격차도 더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금융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방식에 의해 가장 ‘성공적인’ 경제구조조정을 했다고 칭송받았는데 지금 우리 경제는 무엇이 문제인가? 왜 갑자기 한국경제에는 비관론밖에 들리지 않는가? 어떻게 타개책을 찾아야 하는가? 필자는 현재 한국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산업금융씨스템에 있고 해결의 실마리는 금융위기 이후의 구조조정에 대한 재조명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융위기 이후 국내외에서 지배적이었던 인식은 구조적 금융위기론이었다. 정부–은행–재벌 사이의 긴밀한 협조를 축으로 하는 한국경제의 구조가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불러일으켜 금융위기가 왔고 따라서 이 구조를 뜯어고쳐야지만 경제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금융위기 이후 ‘IMF 플러스’라고 불릴 정도로 IMF 원안보다도 강도높은 구조조정대책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부채비율 규제 등을 통해 금융기관이 기업에 더욱 엄격한 대출심사를 하도록 하고 재벌이 내부거래, 지급보증 등을 이용해 추가로 자금을 굴리는 통로를 막아서 과잉투자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으로서 외국인 투자와 중소기업(벤처기업) 육성을 통해 성장동력을 찾아나가려고 시도했다.

필자는 이러한 구조조정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현재까지의 결과를 살펴보자. 일단 과잉투자 여부에 대한 시비(是非)를 떠나 지나친 ‘과잉조정’이 이루어졌다. 이는 산업금융 부문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한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있던 1998년은 예외라 치고 제외하더라도, 금융권의 기업대출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연평균 19조2천억원으로 금융위기 전(1996~97년) 연평균 38조3천억원의 절반에 불과하다. 주식시장에는 더욱더 기댈 것이 없다. 현재 한국의 주식시장은 자금조달창구가 아니라 자금유출창구이다. 2001년 이후 상장기업들이 증시에서 조달한 자금보다 배당, 자사주 매입 등으로 증시에서 빠져나간 돈이 2배가 넘는다. 기업들의 투자는 당연히 위축되어 있다. 국민경제활동에서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인 설비투자율은 금융위기 전(1995~96년) 평균 14.1%에서 2001년 11.0%, 2002년 10.4%, 2003년 9.5%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외국인 직접투자도 내용을 살펴보면 별볼일 없다. 오히려 속이 상한다. 정부 공식통계로 보면 외국인 직접투자는 금융위기 이전(1991~97년)에 연평균 24억달러에서 금융위기 이후(1998~2002년) 연평균 120억달러로 거의 5배 가까이 급등했다. 정부의 공식입장은 이것이 그동안 구조조정 및 적극적인 외자유치 정책의 성과라는 것이다. 현재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경제자유구역 육성정책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 발표하는 외국인 직접투자액은 신고액 기준이다. 신고한 다음에 하지 않을 수도, 적게 할 수도, 늦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직접투자 국제통계를 작성하는 UNCTAD(국제연합무역개발기구)에서는 국제수지표상에 드러나는 실제 지불액을 사용한다. 이 통계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후 외국인 직접투자는 연평균 59억달러로 나타난다. 물론 금융위기 이전의 연평균 14억달러에 비해서는 4배 가까이 늘었다. 그렇지만 정부 공식통계에 비해서는 절반에 불과한 수치이다. 그나마 거의 전액이 외국인들에 의한 M&A(인수합병)의 결과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연평균 M&A 액수가 외국인 직접투자액수와 같은 59억달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는 우리 재산을 잔뜩 헐값에 처분해놓고 이것이 경제회복의 중요한 원인이자 성과라고 포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직접투자 및 외국인M&A 추이(단위: 백만 달러)

UNCTAD World Investment Report, 2003(출처: 산업자원부)

UNCTAD World Investment Report, 2003(출처: 산업자원부)

 

기업대출이 이렇게 경색되고 외국인 투자도 우리 경제에 별로 기여한 것이 없다면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회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필자는 돈을 많이 풀고 환율도 높이는 전형적인 케인즈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조정이 잘되어서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도가 회복됐기 때문이 아니다. 금융위기 초기에 한국은 IMF의 전통적 처방에 따라 고금리를 취했지만 1998년 중반 전세계로 금융위기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선진국들이 대폭적으로 금리를 낮추기 시작하던 때를 전후해서 국내금리를 대폭 떨어뜨렸다. 콜금리는 1998년 말 6.8%까지 떨어졌고 그후 5% 이하로까지 낮아졌다. 금융위기 이전에 금리가 한자리 숫자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엄청난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실채권 해소, 실업대책 등을 위해 재정적자도 대폭 늘렸다. 금융위기 덕분에 환율이 대폭 올라가서 수출경쟁력도 높아졌다. 금융위기 직후 한 국내기업인은 “이 정도 환율에서는 돌을 수출해도 돈을 벌 수 있다”고 얘기했다. 과거에 투자해놓은 설비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새로 투자하지 않더라도 그것들만 잘 굴려도 수출할 수 있었다.

돈이 많이 풀린 상태에서 금융기관들은 신용카드 및 부동산관련 소비자대출을 대폭 늘렸다. 기업부문 대출에 대해서는 강력한 규제가 새로이 도입됐고 금융위기로 기업대출에서 많은 손실을 본 경험 때문이다. 소비자대출 확대는 금융위기 이후 경기를 빨리 회복시키려던 정부의 바람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소비자 금융에 대한 과거 규제를 대부분 철폐하고 내수경기를 육성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벤처기업을 적극 육성했다. 일단 거시경제의 모습은 좋아 보였다. 내수와 수출이 동시에 잘되면서 ‘쌍끌이 경기’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신용카드 거품이 터지면서 4백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들이 양산됐다. 벤처거품도 꺼졌다. 부동산경기 과열에 따른 고강도 부동산경기 억제대책으로 부동산시장도 냉각됐다. 이제는 소비자대출 증대를 통해 경기를 진작시킬 길도 막혀버렸다. 김대중정부 때에는 과거에 소비자금융 규제가 많았던 덕분에 산업금융이 경색됐어도 소비자금융 확대를 통해 경기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현재의 노무현정부에서는 산업과 소비자 부문이 모두 금융경색에 빠져버렸다.

 

필자는 한국경제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산업금융에 따르는 위험부담(risk-taking)씨스템을 어떻게 구축하고 유지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 고려 없이, 과거 씨스템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이상화된 영미씨스템을 최고선인 양 급진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은행–재벌로 이어지는 과거 체제는 ‘유착’이라는 부정적 수식어가 붙기는 했지만 최소한 산업금융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지에 대한 씨스템적 대안을 갖고 있었다. 투자를 할 때에 가장 큰 문제는 불확실성이다. 거대 신규사업이 수익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누군가 뒤를 받쳐줘야 한다. 과거 체제에서는 정부가 성장성이 보이는 부문에서 금융기관 대출을 독려하고 재벌들은 이 돈을 받아 지급보증, 계열사 보조 등을 통해 추가로 신용을 창출하면서 위험을 부담해나갔다. 현대그룹이 조선업에 아무런 경험이 없으면서도 세계 최대규모의 조선소를 만들어낸 것이나 삼성그룹이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어서 세계 최대 메모리업체로 등극한 것은 이러한 씨스템 차원의 투자위험부담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은 이러한 위험부담 기능을 과잉투자의 원인이라고만 보고 이를 아예 없애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산업정책수단을 거의 모두 던져버렸다. 대신 금융기관들에 대한 감독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금융기관들은 기업대출에 대해 아주 까다로워졌다. 정부는 재벌들의 지급보증도 완전 해소하고 계열사간 자금거래에도 공정거래법을 훨씬 엄격하게 적용했다. 금융위기 직후 3년 동안 공정거래위원회는 30대 재벌에 23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정부가 경제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고, 금융기관들에 자금배분을 완전히 자율적으로 맡기고, 기업들은 그룹이 아니라 개별기업 단위로 행동하는 이상화된 영미식 경제로 씨스템만 바꾸어놓으면 시장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바람직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장은 따라오지 않았다. 이것은 어떤 경제제도든간에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춰 제도개선을 해나가야 하는데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의 경제씨스템은 투자에 따른 위험부담 능력이 높은 반면 금융위험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이상화된 영미씨스템은 금융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신 위험부담 능력도 낮아서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영미씨스템에서 산업금융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미국과 영국이 대표적으로 주식시장이 발달한 나라들이라고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 대부분의 장기투자자금은 기업의 이익잉여금에서 나온다. 주식시장은 기업이나 개인이 부(富)를 실현시키는 곳이지 자금조달하는 곳으로서의 기능은 약하다.

 

그러면 한국의 산업금융씨스템은 어떻게 새로이 구축해야 하나? 필자가 생각하는 출발점은 한국이 현재 선진국도 아니고 후진국도 아닌 중진국이며 아직까지 ‘추격’(catch-up)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성장잠재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저성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패배주의적 논리를 펴곤 한다. 그러나 선진국과 같은 성장률을 유지하면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과거처럼 10%에 육박하는 성장률은 아니더라도 6~7%대의 성장률은 유지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씨스템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정부의 역할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과정에서는 정부가 경제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었다. 영미식에 맞춰 최소정부를 추구하는 것이 개혁의 당연한 방향이라고 가정할 뿐이었다. 그러나 영미계 정부들이 실제로 최소정부만 추구하고 있는지도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정부는 국책연구라는 명목하에 국방관련, 의료관련 산업을 지원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 대해 시장개방 및 지적재산권 보호를 요구하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산업정책을 광범하게 펴고 있다. 이곳 싱가포르는 아직도 정부가 미래전략산업에 대한 투자를 주도해나가고 있다.

우리도 정부가 경제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적극 찾아야 한다. 실제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가지이다. 인프라 구축이나 제도 마련은 정부만이 할 수 있다. 시장이 대체할 수 없다. 현재의 경제관련 제도를 성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이와 함께 외환보유고 등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정부가 이를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지도 씨스템 관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산업금융을 확대하기 위해 과거처럼 정부가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대출을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엄격하게 만들어놓은 기업대출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금융기관들이 산업금융을 늘릴 수 있는 길을 넓혀줘야 한다. 다행히 이제는 중진국 경제이기 때문에 금융기관에 대기하고 있는 자금이 과거보다 훨씬 많다.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과정에서 정부는 이 부동자금이 투기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규제는 대폭 철폐했다. 그러나 이 자금이 기업부문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는 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이 부분을 반대로 풀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현 부채비율이나 미래 현금흐름 등에 대한 금융감독 기준은 대폭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많은 돈을 벌어놓은 기업에는 부채비율 200%라는 기준이 투자에 별 장애요인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나는 기업은 이 기준에 걸려 모험적 투자를 감행하기 위한 자금을 대출받기 어렵다. 또 기업의 미래 현금흐름을 계산하고 돈을 빌려주라고 하면 장기 대출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단기 현금흐름조차 실제로는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하는 것이 보통인데 은행 입장에서는 나중에 감독기관에 걸려 문제될 소지가 있는 대출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은행이 기업과 함께 위험을 부담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투자하는 혁신적 행위에 대해 제도적인 징벌이 가해지면 은행가는 감독규정만 지키는 단순행정가로 전락한다. 성장률을 높이려면 이런 행위를 오히려 북돋워야 한다.

경기양극화가 심해지는 데에는 산업금융 경색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대출기준을 강화하면 중소기업이 더 큰 피해를 본다. 대기업은 투자를 못하는 선에서 그칠지 몰라도 중소기업들은 사선(死線)을 넘나들게 된다. 은행은 기업의 신용도를 보고 대출하는데 대기업이나 재벌계열사가 중소기업보다 신용도가 평균적으로 높은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대기업의 돈줄을 죈다고 중소기업 사정이 좋아지지 않으며, 평균적으로는 오히려 나빠진다. 중소기업 문제는 전반적인 산업금융보다는 중소기업에 대한 별도의 미시대책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주식시장이 산업금융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빨리 깨는 것이 좋다. 대다수 투자가들이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동원하는 행위, 즉 유상증자를 죄악시하는 분위기에서는 산업자금 조달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금융기관을 통한 산업금융기능을 어떻게 빨리 복원시킬 것인지가 관건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경제발전과정에서 주식시장이 산업금융의 중추기능을 한 나라는 필자가 아는 한 없다.

최근 소비자금융이 경색상태에 있기 때문에 산업금융기능 회복은 경제성장에 더욱 중요하다. 신용불량자들의 채무를 일부 탕감해준다 한들 이들이 정상적인 소비활동으로 복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산업부문에서는 창업을 하거나 기존 기업이 확장하려는 수요가 언제나 대기하고 있다. 이 에너지를 경제성장이라는 현실로 바꿔나가기 위한 제도적·정치적 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부가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이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많이 들어오면 좋은 일이지만 마치 여기에 경제발전의 성패가 걸려 있는 듯이 매달릴 필요는 없다. 현재 국내총투자에서 외국인 직접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많아봤자 5% 이내이다. 국내총생산에 비해서는 1~2%에 불과하다. 아무리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끌어온다 하더라도 외국인 직접투자가 경제성장에 공헌하는 정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투자가 잘 이루어지고 외국인들도 국내 기업이나 시장의 성장성을 보고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재벌문제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도 중진국이었던 고도성장기에는 트러스트(trust) 등 각종 기업결합이 성행했다. 포드, 모토롤라와 같이 가족이 소유하는 대기업도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다. 개별기업 단위로 기업활동이 이루어지고 또 이 기업들이 전문경영인에 의해 경영될 때 경제발전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이론도 역사적 증거도 없다.

재벌문제에 관해 국내 정책담당자들과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편견은 기업집단이 비정상적인 기업조직이고 개별기업 단위로 사업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기업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이나 경영학 교과서를 벗어나서 다른 나라들의 현실을 직접 살펴보자. 일본, 프랑스, 이딸리아,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라질 등 많은 나라에서 기업집단은 경제활동에서 핵심적인 기업조직이다. 독일의 경우에는 은행이 기업에 지분투자하고 이사를 파견해서 은행 중심의 집단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기업집단이 오히려 보편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재벌문제는 기업집단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기업집단은 보편적 현상인데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우리의 현실에 맞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중진국에 진입한 한국경제에서 일부 돈을 많이 번 기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제전반적으로 볼 때 이들이 쌓은 이익잉여금이 장기투자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기업들의 투자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산업금융기능 회복과 함께 그룹구조가 갖고 있는 투자위험부담 능력 등의 긍정적인 측면을 계속 활용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이 매출확대보다 수익률만 따지면 공격적인 투자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경제성장률도 낮아지게 된다. 그룹구조는 현재 잘되고 있는 개별기업의 수익률은 일부 희생하더라도 새로운 유망산업을 키우고 그룹의 전반적인 확장을 도모하는 데 강점이 있다. 물론 내부거래를 둘러싸고 내부자들과 외부 주주들 간에 갈등의 여지는 상존해 있다. 그러나 내부거래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은 내부거래 자체를 봉쇄하기보다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고 소액주주 권리를 강화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주주들의 집합적인 선택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개선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 한국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지나치게 급진적인 제도들을 도입한 뒤 각종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선책을 세우지 못하고 개혁의지가 희석된다는 명분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다. 과했던 것은 되돌리고 고칠 것은 고쳐나가는 실용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