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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유와 존재

송병옥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에코리브르 2004

 

 

소광섭 蘇光燮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kssoh@phya.snu.ac.kr

 

 

 

현대물리학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이다.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넘어오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개벽에 가까운 대혁명을 겪었으며, 원자와 소립자 등 물질의 본성과 우주의 형태와 시작과 끝에 대한 연구에 크나큰 발전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은 여전히 완벽한 이해를 거부하는 난제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양자물리와 시공간의 통일적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의 근본이라고 보는 소립자의 이론도 얻지 못하고, 우주의 시원에 대한 연구도 오리무중에 빠져든 상태이다.

전세계의 뛰어난 이론물리학자들이 시공간의 근본법칙을 찾아내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뚜렷한 성과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통일장이론(unified theory of field)의 탐구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되돌아볼 싯점이 아닌가 싶다.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수학적 방정식을 다루는 기술적 노력에 집중되고 있으며, 시공간이나 물질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따져보는 철학적 시도는 거의 없었다. 바로 이 점이 현재 물리학계가 봉착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안되는 이유가 아닐까?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머리말’에서 송병옥(宋炳玉) 교수는 “과학기술이 단지 과학기술 그 자체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 과학적 지식의 원천에는 그것의 사상적 배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 그중에서도 자연과학에 근원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철학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학은 철학적 토양 위에서 발전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9면)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예로 하이젠베르크(W. K. Heisenberg)의 불확정성원리는 현상학자 후썰(E. Husserl)의 철학 강의에서 나타난 불확정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을 든다.

저자는 책의 끝머리에서 현대물리학이 당면한 시공간의 과제를 해결할 철학적 기반이 이미 주어져 있음을 알리고 있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이제까지 시간과 공간은 화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고, 이런 이질성이 근대과학을 낳는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질성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성찰은 이미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성찰에 근거한다면, 현대 자연과학이 이해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보다 훨씬 깊이있고 포괄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대과학이 당면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많은 난제와 혼란을 제거할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다. 따라서 미래 자연과학의 모델은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형이상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다. 달리 표현해서 어떤 형태의 자연과학도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은 이미 준비된 것이다.”(503면)

저자가 제시하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적 기반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순수직관의 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범주의 선험적 도식으로서의 시간이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헤겔과 하이데거의 시간론이다. 이 책의 마지막인 제3부 ‘형이상학’의 제6장 ‘시간과 사유’는 긴 논의의 결론에 해당하는데, 사실상 이 책의 핵심내용이고 백미라 할 수 있다. “사유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밝혀나가고자 한다”(439면)는 선언은 현대물리학의 자연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철학자만의 주관적 상상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유 자체의 본성과 그 한계를 다룸으로써 현대과학을 포함해서 모든 가능한 지식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접할 수 있게 된다”(같은 곳)는 설명은 이러한 기우를 일시에 소멸시킨다. 물론 이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 즉 시간과 공간은 바깥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란 관점과 궤를 같이한다.

The Quarterly Changbi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거의 동격으로 보는 데 반하여, 칸트·헤겔·하이데거는 시간이 더 근원적이라고 본다. 공간의 연장은 시간을 전제로 해야 하며, 공간은 시간의 산물이다. 그뿐 아니라 시간은 존재의 가능조건이기까지 하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속성을 드러낸다. 시간은 존재로부터 현실 즉 현존재가 나타나는 원리이다. 이 현묘한 주장을 설명하려면 시간과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 전반을 먼저 소개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시간’이 ‘존재와 사유의 가능조건’이 될 만큼 근본적이고, 공간은 파생적이라는 핵심주장만 지적하고자 한다.

이 주장은 현대물리학, 특히 상대성이론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바여서 우려와 기대를 함께 낳는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4차원 연속체로서 관찰자의 운동상태에 따라 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상대론적 관점이다. 이러한 시공간 이론을 물질적 존재에 관한 과학인 양자물리와 결합하여 ‘양자 시공간’ 방정식을 만들어보면 무한대(∞)가 계산 결과로 나온다. 그러므로 현대물리학은 시간, 공간, 물질적 존재를 함께 묶는 데 실패했으며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다. 저자가 제시한 시간이 존재와 인식의 가능조건이며, 또한 공간의 산출자라는 형이상학적 주장은 현대물리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등대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의 본령은 자연과학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학을 이끄는 초연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505면)라는 저자의 주제가 실현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송병옥 교수의 심오한 철학적 사색의 결과인 이 저술의 내용을 모두 다 다룰 수가 없어서, 물리학과 깊은 관련성이 있는 시공간과 물질적 존재에 관한 부분만 간략히 논의했다. 이 책의 목표는 자연과 자연과학의 원리적 구조를 인식론과 존재론의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데 있고, 그 중심축은 형이상학에 두고 있다. 그래서 사유와 행위, 정신과 물질의 통일성이라는 최고의 높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다루는 내용도 깊고 광범위하다.

제1부 ‘과학의 정의’에서는 근대과학과 그 철학을 조명하고 있는데 근대과학의 본질적인 특징을 잘 정리하고 있으며,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내용으로 이해하기도 쉬운 편이다. 제2부 ‘현대과학의 특징’은 양자물리학의 자연관이 주로 소개되고 있는데, 추상양자론은 바이츠제커(C. F. von Weizsäker)의 이론을 중심으로 과학철학적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물리학자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난해한 면이 있다. 제3부 ‘형이상학’은 이 저술의 깊이와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앞의 2부를 소화하지 못했거나 읽지 않았어도 3부를 보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사실 이 3부를 논의해야 제대로 된 평을 쓰는 것인데 여기서는 시간과 관련하여 몇가지 편린만을 모자이크처럼 제시해보고자 한다. 칸트의 초월적 통각은 ‘자아 자신이 자신을 직관하는 능력’이다. 이 통각이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산출된 초월적인 것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여기에서 떨어져나와 자기를 자신으로 확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통각의 자기동일성과 자기차별성이다. 초월적 통각을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라고 규정할 때 직관하는 자신과 직관되는 자신은 분리된다. 통각 자신의 분리는 자신과의 차별성으로 나타나는데, 이 차별성이 곧 시간 길이의 차이이고 시간의 의미이다. 시간은 형식적으로 초월적 통각의 자기 ‘동일성’과 ‘차별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시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차별성은 존재자들을 구별하는 ‘존재의 차별성’과 사유 수행의 근거가 된다. 이 차별성에서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이때와 저때 등이 구분되며, 수의 개념도 나온다. 공간상 배열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이 시간의 형식 아래로 들어오며, 공간의 크기와 구조는 시간의 길이와 구조인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물질적 요소와 공간적 배열은 배제되고, 단지 구조로서의 시간배열만이 남게 된다.

동일성과 차별성은 본질적으로 분리되고 단절된 이질성이 아니라 ‘동일한 주체(정신)’의 양극성이다. 이 양극성의 쌍은 ‘사유와 존재’ ‘영원과 순간’ ‘존재와 무’ ‘긍정과 부정’ 등 상황에 따라 여러 변형된 개념으로 나타난다. ‘대립’ 또는 ‘긍정성과 부정성’ 등의 쌍개념은 모든 존재의 근본성질이다. 이 양극성의 요소는 존재가 나타내는 양면성이기 때문에 상호 종속적이다. 시간·운동·사유는 다같이 ‘차별성과 동일성’처럼 쌍개념에 의해서 밝혀지는데, 주목할 것은 이들 대립 개념의 ‘상호침투’와 ‘통일성’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헤겔에 의하면 아직 규정된 것이 없는 자기에게서 역시 규정된 것이 없는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 즉 ‘부정적 자기관계’에서 시간은 시작된다. 헤겔은 또 이 ‘부정적 자기관계’가 모든 활동의 원천이자, 생명과 정신의 자기운동이 시작되는 원천으로 본다.

송병옥 교수의 이 방대한 저술은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이 마침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자연과학이 부딪친 시공간의 문제에 대한 활로를 제시하고 있으며, 현 인류가 봉착한 변화와 혼란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근본적으로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의 책이 과학에 관한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인간·존재·사유·시간에 관한 깊은 사색의 결정판임은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을 읽어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규정할 수 없는 것 안에서 모든 것이 규정된다는 것은, 왜 믿음이 지식보다 본원적인가를 보여준다. 이처럼 명증성을 주지 못하는 꿈과 믿음이 인간 존재의 원천을 이룬다는 것은 이제까지 논의해온 흐름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믿음이란 시간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이 기대는 그 자체로는 확실하지 않은 것이지만, 개념을 산출할 수 있는 ‘모음(종합)’의 자료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꿈과 희망은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체를 지닌 가능성, 즉 순간과 영원이 함께하는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꿈과 희망이 가능성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이것이 곧 삶을 추진하는 정신적인 원동력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중간’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꿈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꿈이 완전히 실현된 현실도 아닌 중간으로 돌아온다. 특히 형이상학은 중간에서 폭넓게 위와 아래를 바라보며, 자신 안에 자연과학을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의 위치이다.”(5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