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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기억과 자연, 그 지층 속으로

 

 

나희덕 羅喜德

시인,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서정시에 호출된 ‘기억’과 ‘자연’

 

오늘의 서정시에 ‘기억’과 ‘자연’이 범람하는 현상을 두고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그런 편향이 불러올 소재주의와 매너리즘의 위험은 물론이고, 과거의 기억이나 가상적 자연의 추구가 현실성을 결여한 채 사적인 영역으로 침잠하는 증표라는 것이다. “시인들이 현실과의 유추적 연관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남다른 ‘기억’으로 탈주하고 나아가 그 ‘기억’과의 접점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실로부터 이중의 이격(離隔)을 시도하고 있다”1는 유성호(柳成浩)의 비판이나, “낭만적인 환상과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자연, 현실의 외부인이나 여행자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풍경’으로서의 자연, 서정적인 감흥과 동화(同化)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현실과 삶의 고통을 상쇄해주고 치유해주는 완충제로서의 자연은 이제 그 역할이 만료되었다”2는 김수이(金壽伊)의 진단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비판이 서정시에서 ‘기억’과 ‘자연’이 가지는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그것의 과잉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수용하는 복잡한 우회로를 감안한다면, ‘기억’과 ‘자연’의 빈번한 채택이 곧 현실의 결여를 낳는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오히려 ‘기억’과 ‘자연’에 대한 제대로 된 되새김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서정시의 노화(老化)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억’과 ‘자연’이 현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위험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시인들은 ‘기억’과 ‘자연’을 서정시의 주된 질료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선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서정시의 시간을 ‘영원한 현재’라고 부르듯, 서정시는 연속적이고 서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보다는 내적인 체험의 통일성을 느끼는 순간인 카이로스(kairos)와 관계한다. ‘시적 현현’이라고 부르는 순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경계 없이 함께 포섭되며, 따라서 기억의 호출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 공간화된 시간 속으로 호출된 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적 경험으로 재생된다.

그렇다 해도 이 시대의 서정적 주체가 느낄 수 있는 세계와의 동일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차이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차이를 폭로하고 성찰하며, 동시에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3주체의 혼종성과 양가성을 최현식(崔賢植)은 ‘갈라진 혀’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제 유기적으로 통합된 세계는 사라지고, 그나마 가능한 것은 디스토피아의 불안을 파편화된 형태로 드러내거나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유토피아적 지향을 모색하는 일이다. ‘바깥’이란 없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바깥’을 꿈꾸는 모순된 욕망, 그것이 오늘날 서정시인들의 존재기반이다.

서정시에서 그 ‘바깥’의 대표형으로 제시되곤 하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러나 시에 ‘자연’이 호출되는 것은 낭만적 동일화의 욕망보다는 문명적 삶을 극복하려는 본능이나 의지와 관련이 깊다. 반영하거나 재현해야 할 조화로운 현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시는 그러한 결핍을 ‘기억’과 ‘자연’을 통해 역상(逆像)으로나마 비추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정시가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그 속에는 현실에 대한 일정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시인들이 기억작용을 통하여 ‘삶’의 재생을 꿈꿀 때 그것은 현실에 대한 우회적인 발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로서는 진정한 작업을 위해서 거의 유일하게 주어져 있는 가능성을 붙잡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기막힌 생산지상주의, 상품소비주의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현실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4는 김종철(金鍾哲)의 말도 기억이나 자연의 재생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에서 젊은 서정시인들의 시세계를 ‘기억’과 ‘자연’을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것도 그런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서다. 여기서 다룰 유홍준, 김태정, 김선우, 문태준의 시에서도 ‘기억’과 ‘자연’은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정적 전통에 대한 친숙감과 함께 낡고 오래된 세계에 대한 지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실제로 이 시인들은 동네 무당의 주술적 세계나 당숙모의 전근대적 슬픔이나 어머니의 다산적 풍요로움을 자신의 삶보다 더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데 주력한다. 왜 그들은 자신의 ‘젊음’을 발산하는 일보다 ‘늙음’을 빌려오는 일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을 퇴행이나 도피라고 손쉽게 말해버리기에는 그들의 시에 나타난 ‘기억’과 ‘자연’의 지층은 복잡하다. 얼핏 서정시의 익숙한 영역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서 수동성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그 지층 속으로 좀더 내려가보자.

 

 

기억의 검은 혓바닥

 

유홍준(劉烘埈)의 『喪家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2004)은 아름다움보다는 치욕을, 삶보다는 죽음을 곱씹는 데 주로 바쳐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기억을 ‘즐기고’ 있다기보다는 기억과 ‘싸우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불우한 가족사나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찬 기억들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이란 이런 것/죽음 곁에서/능청스러운 것/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어머니도 예수님도/귀머거리 시인도/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에서처럼 살림의 공간인 집조차 죽음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삶은 이미 죽음과의 동거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喪家에 모인 구두들」에서는 “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라며 치욕이 삶의 기본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유홍준의 시는 일상 속에 미만(彌滿)한 죽음과 치욕을 다루고 있지만, 그 근원적인 뿌리를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방울토마토를 먹는 저녁의 평화는 느닷없이 “붉은 시간의 丸들이 울부짖으며 저녁을 쥐어뜯으면/우리는 모두 접시를 놓치고 비명을 지”르는(「방울토마토」) 악몽으로 번지고 만다. 그 악몽의 기억으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려는 안간힘, 그 질주가 역설적이게도 유홍준의 시를 계속 기억에 매달리게 만든다. “저녁의 검은 혓바닥 위로 나는 질주한다”는 전언을 다음 시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만나게 된다.

 

아버지,어머니자루를끌고다녔지,너덜너덜옆구리터진어머니자루,아버지패대기치던어머니자루,줄줄눈물이새던어머니자루,길바닥에주저앉아터진옆구리를움켜쥐던어머니자루,어린내가아버지바짓가랑이를잡고매달리자놔둬라,놔둬라머리카락을쓸던어머니자루,입술에피가나던어머니자루,눈탱이가퍼렇던어머니자루,고구마로만배를채우던어머니자루,몰래들어내던참깨자루나를꼭끌어안고죽어버리자던자루,넝마같이덕지덕지덧댄자루,장터에서못본척외면한자루,꾸깃꾸깃자궁에서돈을꺼내던자루,자루에서태어난나는자루를까마득히잊고사는자루,자루가무언지도모르는,자루를낳은자루

―「자루 이야기」 전문

 

어린시절의 불안으로 가득 찬 이 시에서 어머니는 자루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끝내 정형화될 수 없는, 함부로 패대기치거나 끌고 다닐 수 있는, 넝마처럼 수많은 상처로 덧댄 자루. 시인은 자신이 바로 그 어머니자루에서 태어난 하나의 자루임을, 그리고 자신 역시 또다른 자루를 낳았음을 고백한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기억의 자루 속을 몇번이고 지나야 하는 과정에서 유홍준의 시는 태어난다. 그의 시에서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축조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흐름을 통해 스스로를 방기한다. 처음도 끝도 알 수 없는 이미지의 연쇄는 현실을 조망하거나 진단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시인에게는 그 공포스러운 질주가 시를 쓰는 특유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공포에 내맡긴 채 스스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과정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일찍이 니체(Nietzsche)는 기억술의 가장 강력한 보조수단으로 ‘고통’을 들었다. 특히 어린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잊으려 해도 쉽게 잊혀지지 않고 외상을 남긴다. 영혼의 밀랍덩어리에 새겨진 그 상처는 트라우마(trauma)를 만들어내는데, 트라우마의 재생은 기억을 사실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왜곡하거나 과장하게 만든다. 유홍준의 시에 나타난 기억들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 무의식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충격을 방어하는 데 실패한 의식은 그 외상들을 끊임없이 들추어냄으로써 그것을 치유하거나 망각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공간』에서 아스만(A. Assmann)은 ‘기술로서의 기억’과 ‘힘으로서의 기억’을 구분해서 설명한다. 전자가 서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기억술’로서의 기억을 말한다면, 후자는 일종의 ‘내면화하기’에 해당한다. 둘을 구분하는 또다른 요소는 ‘시간’과 ‘망각’이다. 기술로서의 기억에서는 시간과 망각이 배제되는 반면, 힘으로서의 기억에서는 ‘시간’과 ‘망각’이 작동함으로써 전이, 변형, 왜곡, 전도된 평가가 발생한다. 아스만의 구분에 따르자면 유홍준의 시는 기술로서의 기억보다는 힘으로서의 기억, 곧 고통스러운 내면화의 산물이다. 그에게 기억은 사실적이고 풍부하게 재생되어야 할 원재료가 아니라 망각의 욕구가 작동하는 내면의 메커니즘에서 자기도 모르게 분출되는 에너지에 가깝다. 유홍준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 자체가 아니라 기억에 대한 기억이며, 그것은 현재의 실존적 고통과도 깊이 몸을 섞고 있다. 그의 시가 현실과 무관한 자리에서 개인적 몽상을 뒤쫓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통을 직설적으로 발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홍준의 시는 섬뜩하다. 「식육 코너 앞에서」는 갈고리에 꿰인 고깃덩어리와 시를, 식육 코너의 남자와 시인을 각각 병치시킴으로써 그의 시적 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얼핏 “뱃속을 모조리 긁어낸 몸통에서/뭉텅, 뭉텅, 살덩어리를 떼어내고 또 떼어”내는 식육 코너의 젊은 남자처럼 무표정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핏물이 흥건하다. 이 흥건한 무표정함처럼 유홍준의 시는 개인적 무의식에서 발원한 악몽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형상으로 직조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喪家에 모인 구두들』에서 사회·역사적 차원을 직접 드러내는 시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시들은 대체로 개인의 무의식과 사회적 차원이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가 노동자이면서 80년대 노동시와는 사뭇 다른 경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무의식적인 절박성에 힘입어서이다. 시인이 안내하는 “食肉의 문”(「식육의 문」), 그 안에 펼쳐진 아비규환의 광경들은 한 내면의 고통스러운 기록일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욕망과 병리적 현상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만하다. 그 속에서 유홍준의 기억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유홍준이 망각을 위해 기억의 공포를 감내한다면, 김태정(金兌貞)은 망각에 대한 공포와 싸우며 기억을 되새김질한다. 시인은 자신의 기억이 재와 먼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기억’은 자신의 현재를 비추는 반성적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반어와 풍자, 자조적 어조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자기반성적 태도에서 나온다. 유홍준이 무의지적 기억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것에 비해, 김태정이 기억을 환기하는 방식은 한결 의식적이다. 그리고 지나간 80년대가 궁핍과 불화의 시절이었지만 도덕적 열정과 순수함이 보존되던 시대였다는 점도 기억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을 반추하는 “나는 여전히 할말이 없어 부끄럽”(「낯선 동행」)지만, 그 부끄러움이나마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책무감이 시인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먼지바람 자욱한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문득 두려워졌다. 평지에 발을 딛는 순간 비탈 위의 기억들이 재가 되어버릴까봐. 때묻은 작업복과 해진 운동화, 문 닫힌 공장과 늦은 밤 미싱 소리, 낮은 골목길의 담배연기, 긴 축대 끝의 달맞이꽃, 그의 눈빛만큼 고단했던 시절들이 먼지로 날아오를까봐.

―「낯선 동행」 부분

 

여기서 나열되고 있는 ‘그 시절’의 세목들은 상투적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개체화되고 대문자로서의 역사가 사라진 시대에 아직도 “때묻은 작업복과 해진 운동화, 문 닫힌 공장과 늦은 밤 미싱 소리, 낮은 골목길의 담배연기, 긴 축대 끝의 달맞이꽃” 같은 기억의 목록을 연민에 찬 시선으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낯설기까지 하다. 이것들을 기억하는 한, 시인은 역사적 비전이나 공동체적 기반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다. 김태정에게 ‘기억’은 삶과 역사의 고통을 응시하고 치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김질해야 하는 마른 지푸라기에 가깝다.

실제로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은 ‘시적 후일담’의 성격을 적지 않게 지니고 있다. 거기에는 “아침이슬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과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눈물의 배후」), ‘286컴퓨터, 전화번호를 씹어삼키는 버릇’(「나의 아나키스트」) 등 80년대의 품목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다. 김태정의 시가 다소 낡아 보이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김태정의 시는 후일담 소설들이 흔히 보여주었던 낭만적 동경이나 미화의 포즈를 거부하고,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자기 자신과 오늘의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

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

아침이슬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수염이 텁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다가

그만 재채기를 했네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

 

그 사소한 콧물과 눈물과 재채기 뒤에

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

 

꽃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눈물의 배후」 부분

 

오래된 책장을 여는 순간 쏟아진 눈물에 대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라고 시인은 둘러댄다. 여기서 ‘먼지’는 역사의 광휘를 잃어버린 채 사소하고 비루해져가는 일상의 등가물이다. 기억 속에 유폐되었던 80년대가 현재를 새삼 각성시키는 이 장면을 통해 시인은 깊은 상실감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 시의 촛점은 상실감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사소한 콧물과 눈물과 재채기 뒤에/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수상한 배후’를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기억이 일으키는 먼지를 불편하게 마셔야 하는 것이다.

김태정의 불편함은 또한 포만감에서 온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궁핍이 나로 하여」)라는 구절에도 나타나듯이, 그에게 궁핍은 삶과 글쓰기의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인들은 배부른 아홉시에 텔레비전 앞에서 졸면서 “테러와 전쟁과 기아와 난민”을 강 건너 불빛처럼 바라보며 시를 ‘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실밥 따는 아줌마 혹은/꼬마 시다의 노동을 엿보는” 것은 “언어의 프락치”(「배부른 아홉시에는」)가 되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불편한 고백 속에서 우리는 변화된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의지와 자기비판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읽어낼 수 있다. 다만, 그 불편한 긴장이 좀더 탄성(彈性)을 얻으려면 현실에 대한 순정성 못지않게 언술적 새로움에 대한 모색이 필요해 보인다.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유홍준, 김태정보다 어린 연배의 김선우, 문태준은 풍요와 화해의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대척점에 있다. 그들 역시 몸속에 내장된 오래된 ‘기억’을 불러오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되새김질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기억’은 오히려 미래형에 가까우며, 심미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공교롭게도 김선우와 문태준은 1970년생으로, 근대화 이후 경제적 토대가 어느정도 마련된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고, 이념적 자장이 약화되던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절대궁핍을 경험한 이전세대들과는 달리 가난이나 이데올로기로 인한 억압으로부터도 그들을 어느정도 자유롭게 해준다. 두 시인의 또다른 공통점은 대체로 도시적 감수성과 모던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동년배 시인들과는 달리 자연이나 전통에 대한 친화력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핍진한 현실묘사보다는 자연에 대한 풍요로운 감각과 이미지를, 분열적인 내면이나 해체적 진술보다는 서정적인 동일화와 재현적 언어를 구사한다. 김선우와 문태준에게 유년은 풍요와 재생의 원천이며, 자연은 우주적 질서와 신성을 담고 있는 상상력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되 ‘저기’에 대한 초월의지를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두 세계를 소통시키려는 의지, 그것이 유년과 자연에 대한 경사로 나타난다.

김선우(金宣佑)의 시에서 일상과 신성, 삶과 죽음이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은 ‘몸’이다. 여성, 특히 어머니의 몸은 유기적이고 순환적인 질서의 담지자로서 자주 등장한다. 「내력」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어미木의 자살」 「숭고한 밥상」 「물속의 여자들」 등 첫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2000)의 적지 않은 시에서 이러한 주제를 읽어낼 수 있다. 여성의 몸에 관한 성찰은 두번째 시집인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에서도 변주되는데, 가령 「물로 빚어진 사람」에서 월경 때가 가까워질 때의 몸냄새를 바다의 생명력과 연관시킨다든가 가뭄에 월경 자국으로 비를 불러온 얘기 등도 여성의 몸을 우주로까지 확장시킨 예다.

이처럼 모성성을 줄곧 추구하면서도 김선우의 시에는 모성성에 따라붙게 마련인 순응적 태도나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보여주었던 격렬한 저항이나 부정을 표출하지도 않는다. 도발적인 상상력과 어법을 보여주지만 그 파격적인 효과는 자유로운 독립성에서 나온다. 김선우의 ‘여성성’은 ‘남성성’의 대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동일시되며 자족적인 충일을 누리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의 세계다. 남성이 없이도 ‘관계’와 ‘생산’이 가능하다는 걸 다음 시는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민둥산」 전문

 

모성성과 더불어 김선우의 시를 지탱하는 다른 한 축은 에로티씨즘이다. 『도화 아래 잠들다』는 이전의 시들보다 한결 농익은 관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 「민둥산」에서도 화자는 인적 드문 마른 억새밭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자연과의 지극한 합일을 경험한다. 이 유토피아적 순간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심미적 경험과 그것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묘사하는 다채로운 감각이다. 그런 감각 덕분에 신성의 추구나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관념적 주제는 한결 육화된다.

어떤 인위적인 장식도 벗어던진 채 ‘알몸의 유목’을 꿈꾸는 존재에게 자연은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준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라고 말할 때, 몸과 자연은 이미 신성 속에서 하나다. 이러한 일체감에는 자연과의 간극이나 불화가 끼여들 틈이 전혀 없다. 그 점에서 이 시에 펼쳐진 매혹적인 이미지는 가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자연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시도가 부정될 수는 없다. 매트릭스적 자연이 실제의 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위험도 있지만, 그 가상성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면서 활용하는 길도 현실을 드러내거나 넘어서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이 그 가상성 속에서 관계맺는 방식이다. 자연과의 합일이 서정적 자아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수많은 타자들이 실제로 공존하는 상태인지에 따라 그 가상성의 위력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바람과 관계하는 것은 인간의 몸만이 아니다. 억새꽃과 겨울풀들과 벌레집과 햇살 등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서로 관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은 일체의 ‘차별’ 없이 결합하며 우주적 희열을 만들어낸다.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에서처럼 시인은 그 존재들의 ‘차이’를 또한 강조한다. 그런데 ‘차별’이 부정되고 ‘차이’가 강조된 이 세계가 과연 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환유적인 언술보다 은유와 상징에 주로 의지한 김선우의 시는 타자지향적임에도 불구하고 서정적 동일화의 기제가 여전히 강한 편이다. 그런 경우 타자와의 교섭은 나르시시즘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타자들이 수런거리는 뒤란

 

김선우의 자연이 우주적이라면 문태준(文泰俊)의 자연은 토속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톤(tone)의 차이일 뿐, 이미지의 세공을 통해 자연을 심미화하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능한 것은 문태준도 마찬가지다. 시집 『맨발』(창비 2004)에서 그가 그리려고 하는 대상은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이다. 또는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이 사이”(「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를 그는 무어라 명명하고 싶어한다.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져지는 것처럼 그려내고, 포착할 수 없는 시간의 틈에 존재의 방을 마련하려는 이 모순된 욕구를 위해 문태준이 즐겨 쓰는 수단은 직유이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만 해도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 “감물 들듯 번져온 것” “햇솜 같았던 아이” 등의 다양한 직유가 등장한다. ‘직유는 은유의 가난한 친척’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의 시에서 직유는 상식적인 유사성에 의해 맺어진 비유의 한 종류가 아니다. 그의 시에서 직유는 수많은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다.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어두워지는 순간」 전문

 

어두워지는 순간은 “살구꽃이 살구 열매를 맺는 사이”처럼 규정하기 어려운 시간이지만, 문태준은 그 미묘한 순간을 확장해 무수한 ‘겹’의 시간, 사물들 안에 축적된 시간들을 불러들인다. 해질 무렵 만물이 또렷한 경계를 지우며 혼융하는 모습은 ‘버무린다’는 하나의 동사로 요약될 수 있다. 환유에 가까운 직유들이 반복되거나 나열되는 시행구조 역시 순연한 반죽이나 되새김질을 연상시킨다. 근대의 선형적인 시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새롭게 반죽된 시간이 천천히 발효하는 동안 그의 시는 ‘느림’을 주장하는 시가 아니라 ‘느림’을 호흡하는 시가 된다.

이 충일한 서정적 순간 속에는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버무려져 있고,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이 버무려져 있다. 과거와 현재, 인간과 자연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면서도 각각의 개별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있음’은 또다른 ‘있음’을 억압하거나 통합하지 않는다. 그런 배려와 공존이 문태준의 시를 수많은 타자들이 수런거리는 뒤란으로 만들어준다. “그 모든 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라는 말은 사물들의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어떤 서정적 통제도 포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하지만 서정시의 틀을 유지하는 한 그러한 개방성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지 되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서정적 순간을 채색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늘에 누군가 있어”라고 시인은 대답한다. 시 속에서 좀더 구체적인 형상을 찾자면 그것은 ‘어머니’다.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갔다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세상이 다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마당에 부재하면서도 동시에 마당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존재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음으로써 일상성보다는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이처럼 자연과 여성성에 신화적 차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문태준과 김선우는 근친적이다. 그래서 현실성을 결여하고 가상적인 심미성에 안주하기 쉽다는 우려를 낳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생태적 사유, 여성성, 관능적 생명력, 주술성 등은 근대문명과의 깊은 불화에서 나온 생래적인 감각에 가까워 보인다. 근원적인 세계에 대한 추구 역시 현실의 불모성에서 촉발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의 지향이 기획되거나 완결된 것이 아니라 내면의 균열을 동반한 것임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 해도 김선우, 문태준의 세계가 주로 늙거나 어린 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젊은 남성이나 억압적인 힘을 행사하는 존재를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들의 시를 애초부터 파토스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갈등이 제거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단성적인 세계를 세공하는 인공성을 강화하기보다는 타자의 파편화된 현실을 향해 자기의 몸을 고통스럽게 열 때, 자아의 정교한 독백은 비로소 부서진 타자의 목소리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균열과 지층의 심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보들레르(Baudelaire)의 『악의 꽃』이 유럽문화권 전체에 영향을 끼쳤던 최후의 서정시라고 하면서, 그후로 서정시를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 불리해진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서정시인이 더이상 음유시인이 아니라 하나의 장르를 대표하는 자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서정시가 보들레르 이후 더이상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독자들이 옛날부터 전승되어온 서정시에 대해서도 한층 냉담해졌다는 것이다.5

이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서정시는 그동안 오랜 생명력을 이어왔다. 그리고 오늘날 서정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그런 외부적인 조건이라기보다는 시인들이 겪고 있는 존재의 균열을 서정시라는 그릇에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담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90년대 이후 서정성을 회복하거나 갱신하려는 노력이 이 질문과 함께 이루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지나친 내면화로 기울면서 현실과의 살아있는 접점을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런 우회를 통해 서정시의 지층이 깊고 다양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서정시에서 ‘기억’과 ‘자연’이 중요한 질료로 떠오르게 된 사정도 소재주의적인 유행만이 아니라 그러한 심화과정과 관련이 깊다. 앞에서 살펴본 네 시인의 세계도 그 지층의 중요한 광맥들일 것이다.

존재의 균열을 응시하고 그것을 시화(詩化)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균열 자체를 극대화하고 현실을 환멸의 프리즘을 통해 묘사하는 방법과, 균열을 섬세하게 응시하되 그것을 봉합하거나 순간적으로나마 뛰어넘으려는 미학적 대응을 보여주는 방법이 그것이다. 유홍준, 김태정이 전자에 가깝다면, 김선우, 문태준은 후자에 가깝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매우 대조적인 시세계를 낳지만, 흥미로운 것은 한 시인에게서 환멸과 초월이라는 양극의 지점들이 동시에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에 관한 다음 설명에서도 그런 이중적인 입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 본질적인 세계와 조각난 현실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바로 이 시대의 보편적인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모호한 존재 지점은 현실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이탈하지도 않는 시적 태도와 의식으로 표출된다. 독립적인 단독자로서 세계 속에 최대한 존재하고자 하는 시인들은 세계 밖으로 도피하거나 섣불리 화해하지 않으며, 자율적인 미학의 영토를 개척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시적 목표는 세계를 자아의 내부에 전유하는 몰입의 경지도, 경쾌하고 현란한 미적 유희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은 내적 지향에 있어서는 동일성의 미학을, 현실을 포착하는 데는 타자성의 미학을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6

 

서정적 전통에 친숙해 보이는 시인들조차도 동일성의 미학과 타자성의 미학을 함께 견지해나가는 것을 생각할 때, 서정적 주체는 고정된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다른 어떤 몸으로 바뀌어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자아의 감정적 몰입을 통해 세계를 망각하는 낭만주의 음악에 맞서 스뜨라빈스끼(Stravinsky)가 소음과 무질서의 형식으로 세계에 대한 낯선 해석을 보여준 것처럼, 그러한 몸바꿈을 위해 오늘의 서정시는 어떤 혼란이나 소음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서정적 관습에 대한 거절과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수용을 극대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은 그것을 찢어발기는 칼에 의해서만 확대된다”는 플로베르(Flaubert)의 말처럼, 서정적 새로움 역시 존재의 균열이 지닌 지층을 더 깊이 파헤치는 곡괭이에 의해서만 발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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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성호 「한국시의 과잉과 결핍」, 『문학수첩』 2005년 봄호 52면.
  2. 김수이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 『파라21』 2004년 겨울호 72~73면.
  3. 최현식 「갈라진 혀, 차이, 그리고 동일성」, 『신생』 2004년 가을호 231면.
  4.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삼인 1999, 190면.
  5.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민음사 1983, 119~20면.
  6. 김수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풍경 속의 빈 곳』, 문학동네 2002, 19~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