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현장통신
재일 조선학교
탈분단시대의 대안교육 현장
정병호 鄭炳浩
한양대 교수, 문화인류학. 공저로 『북한의 식량문제 실태와 대책』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문화와 국가경쟁력』 『함께 크는 우리 아이』 등이 있음. bhchung@hanyang.ac.kr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일본의 웬만한 대도시에서 전철을 타고 가다보면 차창 밖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빨간 한글 간판이 눈에 뜨일 때가 많았다. 재일 조선학교이다. 다른 일본학교들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학교건물 옥상에 바로 얼마 전까지 보란 듯 세워놓았었다. 분단시대를 살아온 남한사람으로서는 그런 글자를 유심히 읽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닐까 염려될 정도로 자극적인 간판이었다.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궁금증 때문에 그런 학교 문앞에서 어정거리면 끌려들어간다고도 했고, 그 안을 구경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남한사회가 민주화되고, 남북정상회담까지 하게 되어 비로소 남한의 평범한 학자도 그 안에 들어가볼 수 있게 되었다. 반갑게 우리말로 맞아주어 오히려 이쪽의 긴장감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공부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자랑스레 보여주어 교실 안까지 들어가보니, 김일성·김정일 사진과 각종 구호가 적힌 환경 구성물들 때문에 북한 교실에 무심코 발을 들인 것 같아 다시금 불안해졌다. 막 소년단 모임을 마친 아이들은 빨간 스카프를 휘날리며 달리다가 낯선 손님과 마주치니 반듯이 서서 “안녕하십니까” 또박또박 우리말로 인사를 한다.
이런 학교가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사회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졸업생이 지금까지 모두 1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현재도 유치원에서 초·중·고, 대학까지 120여개 학교에 1만5천명 정도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는 재일동포사회 전체 취학연령 인구 중 약 10% 정도를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학생들의 부모 중 30% 이상이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다.
이들 재일 조선학교는 일본의 문부성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다. 따라서 졸업을 해도 학력 인정이 안되고, 일본에서는 의무교육인 초·중등 과정도 무상이 아니라 따로 학비를 내야 한다. 교육내용도 일본학교와는 아주 다른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학교에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들을 보내나? 왜 보내나? 학생들은 그곳에서 무얼 배우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나? 또한 이곳의 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오늘날 일본사회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다. 물론 남북한 주류사회 구성원들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일본은 단일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획일적 국민교육을 강조해온 사회이다. 중앙이 통제하는 교육제도의 틀 안에서 학교와 교사 그리고 교과서 내용까지 철저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문화가 폭넓게 일상화되어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차별받는 소수민족이 스스로를 교육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은 더욱 필요하고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재일 조선학교같이 눈에 띄는 공식(formal) 교육기관을 전국적으로 설립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나?
일본 내에 최초로 대규모 민족교육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해방 직후였다. 처음부터 빼앗긴 말과 글 그리고 이름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강제된 일본어 사용과 창씨개명 등 문화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고, 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대다수 동포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로서 민족교육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조국의 분단과 정세 불안정으로 아직 상당수의 동포들이 귀국하지 못하고 있을 때 모든 민족학교들을 일본의 의무교육체제로 편입시키라는 미국 점령군의 불합리한 명령이 내려졌고, 이에 저항하다가 대부분의 민족교육현장들이 폐쇄되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때의 치열한 집단적 저항의 성과로 오오사까 등의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민족학급이란 특별반 교육이 가능하게 되어 현재도 170여개의 민족학급에서 3천여명의 어린이들이 민족정체성 교육을 받고 있다.
한편, 미군의 학교 폐쇄령에 저항하는 민족교육투쟁을 통해 더욱 좌경화한 교육자와 부모 들은 남북한이 각각 분단된 상태로 국가를 세우자 절대 다수의 출신지가 남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다수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정통성 있는 조국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때 무인가 비공식 교육시설로 민족교육현장을 지켜온 학교들은 인민공화국 국기를 올리고 이미 지배적 이념이 된 반공주의에 저항하였다. 이는 일단 남한의 고향으로 귀국했다가 제주 4·3이나 여수·순천사건 등의 학살과 탄압을 피해 다시 밀항해온 사람들에 의해 더욱 강한 신념이 되었다. 일본의 단일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선 민족정체성의 바탕이 되는, 한 민족국가의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휴전 후 복구의 시기에 북한은 재일동포를 해외공민으로 선언하고 1957년부터 거액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냈다. 전후 복구의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보내온 큰 규모의 교육원조는 재일동포사회에 감동과 환상을 주었고, 곧이어 추진된 ‘귀국운동’(남쪽의 표현으로는 ‘북송’)의 촉매가 되었다. 귀국운동에 대한 동포사회의 열렬한 호응은 다시 민족교육에 대한 폭발적 참여로 이어졌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대규모의 조선학교들은 이 시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재일 조선학교는 ‘지상낙원’인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곳으로서 일본사회에서의 삶 자체를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으로 개념화하도록 하였다.
조국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은 비교적 금방 알려졌지만, 일본사회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문화 속에서 사회적 자아실현의 길이 막힌 많은 동포들은 오히려 조국건설의 사명감을 갖고 돌아가기도 했다.1980년대 중반까지 민족교육현장에서는 조국통일에 기여하는 일꾼으로서의 자기정체성과 언젠가는 ‘통일조국’ 즉 유토피아로 돌아갈 것이라는 삶의 목표가 강조되었다.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조선학교에 대해 주기적으로 위협하고 견제하기는 했지만 교육내용에 대한 전면적 탄압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조선학교의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충성의 맹세가 일본 지배집단에게는 위협이 되기보다는 국내 좌익세력의 결집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배집단은 재일동포사회에서 가장 응집력이 강한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공산주의적 이념과 상징을 공공연히 표방하면 할수록 접근하기 어려운 고립된 집단이 될 것이고, 아울러 동포사회의 정치적 분열과 대립은 자국내 소수민족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지연시킬 것이라고 전략적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억압받는 소수민족집단으로서는 일본의 자본주의 지배체제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상적 목표와 상징적 지향점을 가시적으로 강조하는 급진적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꼈을 것이다. 이미 반세기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주변정세가 변하고 일본사회의 정치역학과 재일동포의 경제력, 사회적 지위, 세대 변화가 폭넓게 진행된 상황에서도 민족교육현장을 유지하고 재생산해낸 힘은 의외로 이렇게 일본사회 내부의 일상적 현실로부터 유리된 목표와 상징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재일 조선학교와 같은 분리주의적 교육현장이 폭넓게 설립되고 유지된 배경에는 일본의 소수민족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배제의 사회현실이 있다. 취업·결혼·승진·사업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제약받는 소수민족으로서는 자기 집단 내부에서 가능한 한 자급자족하는 대응방식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총련은 조선학교를 통한 일관된 민족교육체제를 마련함과 동시에 전국적인 지부조직 구성, 은행·보험 등 금융기관 설립, 각종 사업체 단위의 계열별 조직화와 출판·문화·연예사업 등의 일관된 사회경제적 순환체제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조선학교를 나와도(아니 오히려 일관된 민족교육을 받았을수록) 총련의 조직사업체 안에서 평생 일하며 생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었다. 동시에 소수민족집단 내부에서 훈련된 우수하고 헌신적인 새로운 세대의 충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이러한 내부 순환체제가 원활하게 가동될 수 있었다. 따라서 총련의 모든 모임과 행사에서 조선학교는 명실상부한 공동체의 중심으로 인정받았고 또 그런 기능을 수행하였다.
재일 조선학교에서는 모두 우리 이름을 쓰고, 우리말과 우리글로 교육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이 일은 이미 그 부모들까지 일본에서 태어난 3세의 교사들이 4세의 학생들에게 자신들도 익숙하지 않은 말과 글로 일본사회의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는 언어와 지식을 교육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말과 글 교육은 그 기능과 효용의 측면보다는 민족적 긍지의 표현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문화현상은 근대의 민족사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졌고, 오늘날 일본의 단일민족국가 이데올로기의 압력 속에서도 재생산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별 효용이 없던 우리말이 그나마 쓸모있게 된 것은 일본사회가 국제화되고 남한과의 인적·경제적 교류도 많아지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총련에 대한 남한사회의 경계 때문에 이중언어 구사능력을 중국 조선족의 경우만큼 본국과의 관계에서 잘 활용하지는 못하였다. 월드컵 당시 한 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지부에서 같은 지역의 총련 간부들을 초청하여 부산경기장으로 안내했을 때, 민단 간부들은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일본어 통역이 필요했고 처음 한국에 온 총련 간부들은 모두 부산 시민들과 자유롭게 대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총련에 대한 경계가 어느정도 풀리면 앞으로 더욱 많은 기회에 그들의 언어구사능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까지 재일 조선학교의 모든 교실에는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장군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특별한 상징물이었다. 매일 일상적인 의례를 바치고, 정기적으로 모두 기립한 가운데 대표가 올라가 정중하게 모셔 닦았다고 한다. 수령은 민족정체성과 정통성의 상징으로 받들어졌다. 물론 북조선의 정치체제와 주체사상의 상징적 장치가 그대로 수입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학교 구성원들 중에는 자발적인 정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실제 열성 총련 가정에서는 거실에 수령의 초상화를 모시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북한체제의 인격적 수령의 존재와 이미지가 북한 정치권력의 직접적 영향력 밖에서도 민족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기능하는 것을 보면 그 나름의 필요성과 효용성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그것은 전후 일본사회에서도 온존하고 있는 ‘유사종교로서의 천황제’와 천황의 상징성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의 민족정체성과 일정하게 구조적인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민족적 상징으로서 초월적 권위를 가진 살아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항일투쟁과정에서의 수령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일본땅에서 지금도 억압받고 있는 소수자들에게 저항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이때 살아 있는 수령은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적 지배와 억압의 현실에 현재적으로 함께 저항하는 상징적 존재가 된다. 폐쇄적인 북한사회가 아니라 수령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까지 포함된 모든 정보가 흘러넘치는 일본에서 수령의 상징을 조선학교가 아직도 받들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내부적인 요인보다는 일본의 천황제와 민족차별의 현실, 그리고 항일 표상의 필요성 등 일본사회와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외부적 요인이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기근과 미사일, 핵문제 등으로 북의 위신이 실추된 상황에서도 수령과 장군의 초상화 사진은 그대로 중앙에 걸려 있다. 그러나 2000년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조선학교는 남쪽과도 새로운 관계설정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 수령의 초상화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자 몇가지 변화를 꾀하였다. 우선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부터 “아이들 정서에 맞지 않는” “딱딱한” 정면 초상화를 내리고 아이들에 둘러싸여 활짝 웃는 “화사한” 사진을 교실 뒷면에 걸기로 하였다. 비교적 급진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교사들은 남북정상회담 때 남과 북의 지도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교실 앞에 걸자는 주장까지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식변화가 각 지역 총련조직 내부에서 일정한 저항과 지지를 받으면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던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 직전에 각급 조선학교에 걸린 초상화를 내리라는 공식적 지시가 나오게 되었다.
조선학교의 여학생들은 교복으로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여름에는 흰색 저고리에 검은(혹은 감색) 개량 주름치마를 입고, 겨울에는 위아래 같은 색의 동복을 입는다. 단정한 머리모양을 한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 제복은 단연 눈에 띄는 복장이다. 초기부터 이 옷을 입은 여학생들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호기심과 가학적 폭력은 빈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1998년 북한의 미사일실험 이후 여학생들에 대한 폭력이 너무 심해지자 등하교 때 별도의 제2교복을 착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교하는 ‘영웅적인 여학생들’과 이러한 여학생들을 노리고 습격하는 비열한 폭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북한의 납치고백 이후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더욱 빈발해지고 있다.
일본사회에서 주기적으로 터지는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사례와 폭력사건 등은 총련이나 재일 조선학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성원들이 이러한 민족정체성에 매달려야 할 현실적 근거를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를 칼로 찢는 것 같은 만행은 즉시 연극, 무용, 영화로 만들어져 구성원 모두의 경각심을 높일 뿐만 아니라 차별받고 탄압받는 현실이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바로 현재 진행형임을 체감케 하여 민족교육현장의 상황인식을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찢긴 치마저고리는 일제에 짓밟힌 정신대 여성이 민족 전체의 유린당한 운명을 시사하는 것과 같은 상징적 유추도 가능하게 한다.
학생과 부모 및 교사 모두가 민족교육의 성과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주류사회 학교와의 학력 비교보다는 일본사회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한 예술양식의 공연과 스포츠 경기 등을 통해서이다. 북한이 국가적 차원에서 개발한 사회주의적 예술양식을 소조활동을 통해 연마해 수준 높은 공연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교육과정이 된다. 전통예술 공연을 위해 평양에서 직접 그곳 예술가들의 지도를 받기도 한다.
공연은 단순히 남들에게 보여주는 쇼(show)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그 존재를 무시당한 소수자 집단이 자신을 드러내어 표현하고 그러한 표현을 통해 스스로의 훈련과 노력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일을 포함한다. 따라서 조선학교 학생들의 발표회와 공연은 단순한 학예회의 규모와 수준을 넘어선다. 이는 일본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거부하며 다른 방식으로 살기로 결심한 소수자 집단의 자기 확인의 장이자 교육과정의 성취를 가늠하는 자리이다.
대부분의 조선학교 학생과 학부모 들은 이 학교가 좋다고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착하고 비뚤어지지 않아서” 좋다고 하고, 아이들은 “따돌림(이지메)이 없고 (입시)공부를 안해서” 좋다고 한다. 교사들은 “다른 어떤 학교에서도 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육이 가능해서” 좋다고 한다.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상급 조선학교로의 진학률이 98%나 된다. 일본학교를 다니다 도중에 편입해오는 학생들도 있다.
비교적 소규모인 조선학교에서는 헌신적인 교사들이 학생 한명 한명의 특성을 다 알고 소외나 차별이 없도록 세심하게 짜여진 비경쟁적인 집단주의적 교육프로그램을 다양한 특별(소조)활동을 통해 익히도록 한다. 매일 방과후 교정 구석구석에서 어두움이 깔릴 때까지 각종 체육활동과 무용·합창·국악·관현악·미술활동에 열심인 “행복한” 청소년들의 열기가 가득한 그런 학교인 것이다. 경쟁적인 입시준비 중심의 일본 제도교육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교육현장으로도 생각해볼 만한 특성들이다.
부모들은 우선 일본학교에서 아이들이 차별받거나 왕따를 당해서 비뚤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이 학교를 보내기도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는 이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길러지는 흔들리지 않는 민족정체성을 바탕으로 세대간의 갈등이 최소화되고, 가족 단위의 상호이해와 단합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혁명적인 상징과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구호가 강조되는 교육현장이지만 생활면에서는 오히려 규율과 규범을 준수하게 하고 근대적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는 보수적인 측면이 있어서, 탈근대의 유행 속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을 안심시킨다. 대부분 조선학교 출신인 학부모들은 학교의 운영과 교육 및 모든 행사에 깊숙이 참여하면서 학교를 소수자 공동체의 중심적 네트워크로 활용하고 있다.
학생들은 일단, 일본학교 다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수험준비와 시험에 시달리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경쟁심이 모두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일단 조선대학교란 고등교육기관까지 있어서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2001년도 고급학교 졸업생의 64%)이 대학을 갈 수 있다(약 과반수가 조선대학, 그외는 일본 대학 등). 일본사회에서 출세(실제로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민족교육을 통해 그리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음)하고자 하기보다는, 재일동포사회에서 현실적인 생업을 갖거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일을 더욱 의미있게 생각하게 된다. 최근에는 국제화 추세 속에 (입시준비에 매달리지 않는) 영어교육이 아울러 강조되면서, 어렸을 때부터 내면화한 완벽한 이중언어 교육경험을 바탕으로 영어까지 3개 언어에 능통한, 국제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인재가 되고자 하는 새로운 목표가 추가되었다.
개인별 경쟁과 학력성취가 규범이 되다시피 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재일 조선학교같이 비경쟁적 집단주의를 이상으로 하고 모든 과정에서 평등과 협동, 동료에 대한 배려와 집단에 대한 헌신, 그리고 비물질적 가치를 강조하는 교육이 여러 세대에 걸쳐 실천될 수 있었다는 것은 교육학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동안 강조되어온 민족교육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소수자들의 자발적 공동체교육이자 대안교육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육개혁의 모델이 되는 30여개에 불과한 소규모 대안학교현장들과 비교해보면 재일 조선학교의 규모와 내용, 역사적 깊이는 교육학적 측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현재 재일 조선학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내부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북한과 일본의 긴장관계와 이를 계기로 한 외부의 탄압 때문이다. 납치사건과 북한 핵위협을 빌미로 재일 조선인에 대한 핍박을 자행해온 일본의 보수우익집단은 일본인들의 피해의식만을 일방적으로 부추겨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과 보복마저 주장하며,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거대 군사세력화를 도모한다. 지난 1년간 일본의 여론은 이들에 의해 철저히 호도되었고, 현재 일본사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극우적 움직임을 견제할 만한 힘이 결집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일본사회의 극우적 움직임 속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곳은 일본에 있는 민족교육현장들이다. 특히, 재일 조선학교의 무고한 아이들은 광기에 찬 계속되는 폭언과 폭행사건으로 공포에 떨며 생활하고 있다. 이들 학교는 법적·제도적으로 일본정부의 차별적 교육정책에 의해 압박받고 있고, 재정적으로도 학교의 존립자체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재일 조선학교 부동산을 담보로 재정지원을 했던 조선은행의 운영권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면서 일본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의 조선학교를 해체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일본사회에서 차별받으면서도 동포사회의 모든 역량을 모아 구축한 민족교육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인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재일 조선학교의 실천경험은 귀중한 ‘민족사적 교육실험’이다. 분단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질화된 남북간의 교육 가치관과 방법론을 이해하고 통합해야 할 과제를 눈앞에 둔 오늘날, 한국사회가 먼저 분단적 사고와 편견을 극복해 재일 조선학교 민족교육의 의미를 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분단의 역사를 통해 일본땅에서 차별과 억압을 딛고 자라난 이 학교가 탈분단시대에 남과 북이 함께 키우고 남북이 함께 배우는 새로운 민족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