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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데이비드 하비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생각의 나무 2005

단절을 통해 지속하는 전통으로서의 모더니티

 

 

김홍중 金洪中

서울대 강사, 사회학 slimci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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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타고 유람(遊覽)하는 사람은 빠리(Paris)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렌트(H. Arendt)가 지적했듯이, 미국의 대도시들과는 달리 빠리에서는 산보객이 되어 걸어야 한다. 지칠 때까지 걸어 길을 잃었을 때, 지도나 책자에 표시된 명소를 확인하고픈 관광객다운 욕망을 상실했을 때, 미로로 돌변한 빠리는 화장 밑에 숨겨둔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이 횡단보도에서 롤랑 바르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쎈느강의 바로 저 다리 아래서 아우슈비츠를 살아남은 시인 파울 첼란이 몸을 던져 생을 마쳤다. 명사들의 흔적을 좇을 필요도 없다. 어디를 가보아도 벼락맞은 바벨탑에서처럼 각종 언어들의 혼성적인 화음이 들려오고, 평범한 관찰력을 지닌 자들도 순간 인류학자로 만들어버릴 만큼 다양한 기원의 인간들이 활보하고 있다. 도인보다 더 느긋한 표정으로 낮술에 취해 혼몽에 잠긴 노숙자와 부랑아 옆으로 축제의 흥겨움으로 착각하기 쉬운 시위대의 떠들썩함이 테크노음악에 맞추어 지나간다. 구름은 보들레르가 극찬한 메리옹(C. Meryon)의 판화에서처럼 우울하게 도시를 압박하고, 땀내와 지린내를 풍기는 광인이 데까르뜨적으로 조경된 기하학적인 가로수 무리와 담론중이다.

이 분열증적인 유목민의 도시, 모든 양태의 사물과 인간의 박람회가 일상적으로 펼쳐지며, 고전적이고 이국적인 것이 현대적이고 프랑스적인 것과 혼융되어 갈등과 조화의 변증법 속에 문란한 통합이 시시각각 진행되는 도시,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뿌리뽑힌 고아들의 도시,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개인주의적 토양에서 자란 근대적 연대의 열광이 혁명적 사건들의 형식으로 꽃피었던 도시―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연구서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Paris, Capital of Modernity, 김병화 옮김)는 이러한 만화경적 빠리에서 모더니티의 원형을 발굴하려는 고고학적 시도이다.

정통 지리학을 본령으로 하는 하비의 학문세계는 이미 오래 전에 지리학 고유의 공간에 대한 관심과 역사학 특유의 시간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켜, 하비 스스로 표현하고 있듯이 “역사–지리학적”(34면) 방법론을 도입하여 근대성, 근대화, 도시화, 공간, 자본주의 등에 포괄적으로 접근하는 폭넓고 깊이있는 성과들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에서 시도된 근대성의 고고학은 근대라는 시간축과 도시라는 공간축의 교차점에서 선택된 빠리의 역사적 형성에 대한 방대하고 야심만만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특정 도시를 중심으로 근대성의 형성과정 전체의 징후를 판독하겠다는 발상은 물론 하비의 독창적인 기획이 아니다. 저자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이 작업은, 벤야민이 1927년부터 1940년까지의 빠리 망명시기에 방대한 인용문과 논평의 모자이끄로 구성한 기념비적 미완성작 『파싸겐베르크』(Passagen-Werk)에 그 영감의 한줄기를 대고 있고, 카를 쇼르스케(Carl Schorske)가 『세기말 비엔나』에서 보여준 빈(Wien, 비엔나) 모더니티에 대한 매력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을 또다른 모델로 지향하고 있다(32~34면). 빠리 대 빈, 이 흥미로운 모더니티의 종주권 경쟁은 자못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빈에는 프로이트가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이 있었고, 빈의 오스망(B. Haussmann)이라 불릴 만한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있었으며, 슈니츨러, 크라우스, 호프만슈탈, 클림트, 그리고 코코슈카와 쇤베르크가 있었다. 이 일군의 지성과 예술가들의 근대적 음조는 빠리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을 독자적인 색깔과 특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서구 모더니티의 성좌를 구성하는 두 개의 가장 걸출한 도시로 빠리와 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비는 빈에 비해 빠리가 갖고 있는 특성에 촛점을 맞추고 이 책을 저술하였다. 그것은 바로 1848년의 2월혁명에서 본격화되어 1871년의 빠리꼬뮌으로 부활하는 계급투쟁의 세계사적 체험인데, 이 두 사건이 분할하는 연대기에 맞추어 저서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같은 하비의 관심을 방증한다. 제1부에서는 발자끄가 『인간희극』을 기획하면서 천착했던 테마들을 중심으로 1830년에서 1848년까지의 빠리라는 도시공간의 구조화를 분석적으로 묘사한다. 제2부는 1848년에서 1870년 사이의 기간, 즉 모더니티가 본격적으로 물질화되는 시기를 다루는데, 오스망화로 대표되는 도시공간의 발본적인 변형, 제2제정기의 화폐·신용·금융의 발달, 루이 나뽈레옹 치하 프랑스의 국가적 지향과 한계,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 그리고 재생산의 실천양식들, 여성의 사회적 여건의 변화, 문화의 영역에서 나타난 재현의 위기와 이에 대한 응전의 양상 등을 조목조목 분석함으로써 모더니티의 물질적 하부구조를 정치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 저자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빠리를 굽어보는 성심(聖心)성당의 건설과정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인 갈등과 역학을 빠리꼬뮌에 대한 집단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 세 가지 지층의 발굴과 탐사를 통하여 총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19세기의 빠리는 하비가 즐겨 사용하는 개념인 신체정치(body politics)가 그 기획과 저항 속에서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공간적 매체를 제공한다.

빠리의 역사적 변형과정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제시되는 하비의 모더니티는 베버적인 의미의 철창(iron cage)이 아니고, 하버마스가 말하는 미완성된 계몽의 기획도 아니며, 또한 푸꼬가 제안한 에토스로서의 모더니티와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하비는 한층 냉정한 시선으로 모더니티가 추진했던 새로움과 혁신, 과거와의 단절을 하나의 신화로서 고발한다(9면). 이는 기왕의 질서에 대한 창조적 파괴작업임에 틀림없는 모더니티의 역사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티의 내부에 새 것과 낡은 것, 전통과 아방가르드, 혁신과 회귀의 변증법이 내적 동력으로 이미 장착되어 있었음을 밝히는 좀더 섬세한 발상법이다. 발자끄, 보들레르, 플로베르, 맑스, 쌩씨몽 등의 사유에 기대어 하비는 단절된 새로움 속에서 신세기를 창출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극복대상인 전통과 옛것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조회해야만 했던 모더니티의 모순된 운동을 지적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영향임이 명백한 이러한 입론이 구체적 공간의 역사와 만났다는 점에서 하비의 작업은 20세기 후반 역사인식의 중요한 흐름인 시대간의 단절론과, 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포스트담론들을 다시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한 최근 서구학계의 지적 조류와도 은근하게 조응하고 있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생산적인 명명들과 이론적 체계들이 난립했던 탈근대라는 ‘언설의 숲’을 통과하고 난 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근대 앞에 다시 서 있다. 탈근대는 이제 더이상 수수께끼가 아닌 듯싶으나 오히려 근대는 한층 난해해진 형상으로, 구체적인 역사성을 부여받은 채 우리의 이해와 설명에 스핑크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단절이 아닌 절단이라 불러야 그 폭력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역사적 체험, 즉 근대성과 식민성의 착종을 좀더 근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싯점에서 모더니티가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을 사유했던 하비가 최근의 저서에서 다시 본격적인 모더니티의 문제로 돌아왔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