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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촛불시위
한국의 힘을 보여준 촛불시위
조재석 曺在錫
대전 문성초등학교 교사. 303ai0@hanmail.net
지난 토요일(2002. 12. 14). 미선이 효순이의 영혼을 달래는 추모행사와 촛불시위에 참석하기 위하여 대전역으로 향했다. 행사로 거리가 복잡할 것 같아서 중구청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갔다. 날씨가 쌀쌀했다.
생각과는 달리 행사장엔 사람들이 많진 않았지만 지난 여름 땡볕 아래의 월드컵 때완 달랐다. 각종 단체들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구호를 적은 팻말들이 번쩍였다. 종이를 깔고 앉은 이들은 추운 날씨에 엉덩이가 차가워오는데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엄마와 함께 앉아 있는 아이들이 대견했다.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 친구가 보내는 편지, 안일한 정부 규탄, 미군의 만행 보고, 살인미군 재판 무효 선언, 부시 사과·SOFA 개정·미군 철수 요구 등으로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좀더 모였다. 오십대의 어떤 아저씨는 “모 후보 선거연설장이냐”고 묻는다. 이 행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한 후보의 차량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했더니 미국을 왜 반대하느냐는 듯 가버린다. 허탈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교원단체와 대책위 측에서 종이컵에 끼운 초를 나누어주었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우금치’ 놀이패의 진혼제가 이어지는 동안 초에는 불이 붙어 조용히 광장 가득 번졌다. 나도 옆사람이 전해주는 촛불에 초를 대고 불을 붙였다. 오늘 행사에 참석하자고 아이들에게 권했는데 혹시 만나려나 해서 초 하나를 더 얻어 주머니에 넣었다. 부시 화형식이 이어지고 억눌린 한이 박수와 함성으로 터져나왔다. 「아침이슬」을 입모아 부르는 모습은 숙연했고 그 소리는 장엄하게 차가운 밤하늘을 갈랐다.
힘찬 풍물패가 길을 트고 ‘으능정이’ 거리까지 행진이 시작됐다. 행진은 서두름 없이 침착했고 옆사람을 서로 배려하며 진행됐다. 유월의 뜨거운 함성으로 나라사랑을 이끌었던 젊은이들이 나라의 자주권을 찾으려는 제2의 독립운동에 또 주역이 되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이들을 버릇없다, 철없다 질타하는가? 누가 이들의 기를 꺾어 입을 막는가? 소파 개정! 부시 사과! 주고받는 구호엔 힘이 솟아 거리의 건물을 흔들었고 밖을 내려다보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으며 길가 나무에 깃들던 새들을 놀라게 하여 밤하늘을 어지러이 날게 했다. 행진은 가다 서다 했지만 모두들 여유가 있었다. 미선이를 살려내라! 효순이를 살려내라! 여학생들의 함성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어지는 재판 무효! 미군 철수! 남학생들의 함성엔 힘이 더욱 실려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초에 불을 붙였다. 기다리던 아이들이 왔을까. 결국 아이들은 만나지 못했고, 초 두 개를 아빠 품에 안긴 아이에게 건넸다. 한쪽 길을 가득 메운 행렬은 이백여 미터는 되는 듯했다. 번갈아 구호를 외치며 한 시간 넘게 행진하는 동안 무리는 더욱 늘어났고 구호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월드컵 축구응원과는 다른 숙연함이, 분노의 함성이, 차가운 하늘에 펄럭이는 깃발과 그 뒤를 따르는 군중이, 아이 손을 이끌고 행진하는 엄마의 모습이, 엄마를 따라가는 아이의 모습이, 목말을 태운 아빠의 모습이, 아이 손에 들린 파닥이는 촛불이, 발걸음을 멈춘 행인들의 엄숙한 모습이, 행렬 때문에 꼼짝 못하고 서 있는 시내버스에서 불평 없이 앉아 동정어린 시선을 주는 무거운 눈빛이 가슴을 눌러왔고 참았던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가슴 저려오고 눈시울이 더워왔다.
평범한 시민들이, 철부지 아이들 청소년들이, 엄마들 아빠들이 애국자였다. 대통령이, 정치지도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이 어정쩡 양다리 걸치고 있을 때 잡초인 민중은 깨어나 자주국민, 자주국가, 주권회복을 외친다. 그리고 그 외침 속엔 정부와 지도층에, 가진 자의 침묵에 대한 항의와 분한 마음이 차가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새 대통령을 뽑았다. 노무현 당선자의 승리는 우리 보통사람들의 승리다. 그의 삶은 우리의 삶이었기에 청소년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국민의 마음을 다독이며 분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누구에게나 당당한 대통령, 대〜한민국을 빛내는 대통령이길 고대한다.
초가 제 몸을 다 태워 더이상 쥘 수 없을 즈음, 집회가 끝났다. 돌아오는 길엔 배가 고파 다리가 휘청거렸고 길이 흔들렸다. 이 집회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책임을 느끼게 하고 학생들의 포부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더없는 교육의 장이 되길 바랐다. 언제 어디서 이런 군중의 힘을, 사람냄새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눈이 오려는지 날이 흐려진다. (2002.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