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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촛불시위
학생도 당당한 한국인입니다
ecoboy
ID명, L고등학교 1학년.
2002년 6월 13일,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던 날이고 내 생일이기도 했다. 그날은 또 지방선거 날이기도 해서 학교를 가지 않았다. 오전에 집에서 쉰 후에 컴퓨터 학원에 가서 메일함을 열어보니 생일 축하한다는 친구들의 메일이 와 있었다. 메씬저 ‘버디 버디’에 들어가니 친구들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해준다. 기쁘기도 하고 내일의 축구경기 결과도 궁금하고 해서 애들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애들이 어제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나는 신문에 보도도 안되고 해서 ‘별거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기사가 몇군데 실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별거 아니려니 생각했다. 그후 월드컵이 끝난 7월, 신문과 TV에서 보도되는 사건현장을 보고 그 참혹함에 놀라게 되었다.
그래서 7월 27일 5차 범국민대회부터 참가를 하게 되었고, 6차 범국민대회에서는 발언을 했다. 또 2차 청소년행동의 날에는 시낭송 등을 하게 되었고 10월에는 여중생 시민특별수사대(cafe.daum.net/antimigun02)에 가입을 하였다. 그후 미군의 형사재판권 이양불가 통보, 미군에 대한 무죄선고 등은 추모행사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10만 범국민대회, 7·8차 범국민대회, 10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에 참가하면서 나는 이 사건이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다. 직접사과를 요구하고,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시작되던 그때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했던 것은 조지 부시의 미대사를 통한 간접사과였다. 나는 다짐했다. 조지 부시가 직접 공개사과하고, 살인미군을 처벌하며, SOFA의 개선이 아닌 전면개정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올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행사에 참가하면서 나는 참 많은 소리를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서명운동 진행시, 행사 참가시 교칙에 의해 처벌하겠다는 말도 들었다.
행사장에 가면 많은 기자들, 어른들이 나에게 묻는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왜 이런 데 오냐”고.
나는 그런 어른들에게 말한다.
“어른이 죽었나요? 우리의 동생, 친구인 여중생이 죽었는데 우리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나요?”
이제 그런 어른들에게 한마디 더 하고 싶다.
“우리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유엔 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 15조 1항에도 명시되어 있는 집회 참가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