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임홍배의 비평에 대한 짧은 반론

지난호에서 임홍배의 「시와 혁명」은 김수영(金洙暎)의 후기 ‘난해시’들에 대한 정치한 분석글이다.그런데 그중에서 나는 「꽃잎 1」(1967)에 대한 그의 분석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독하기 어려운 시가 품게 마련인 언어의 의미작용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전혀 없는 바 아니지만,“4·19혁명이 제기한 미완의 과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으로만 그의 시를 집중해서 읽은 나머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속뜻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많이는 아니고 조금/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한 잎의 꽃잎 같고/혁명 같고/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임홍배는 우선 이 시의 핵이 3·4연에 있다고 보고(그렇게 단정해서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논지의 전개상 그렇다는 말이다) 3연의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한 잎의 꽃잎 같고/혁명 같고”에 주목하여 “여기서도 바위를 무너뜨리는 힘과 꽃의 개화를 매개하는 것은 ‘바람’이다. 자연을 운행시키는 힘으로서의 바람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이 제 몫을 다했을 때는 다시 낙화의 힘으로도 작용하며, 그것이 거대한 바위를 만들고 다시 부수는 자연의 풍화작용이기도 한 것이다.‘언뜻 보기에는’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진행되는 꽃의 개화와 바위의 낙반에 작용하는 근원적인 힘은 동일하다는 통찰이다. 그렇게 해서 꽃잎이 바위를 뭉개는 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전집 2』, 개정판 400면)은 자연의 순리에서 보면 결코 기적이 아닌 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시의 핵은 2연의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에 있다. 즉 이 시는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꽃잎’이나 ‘혁명’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무거운 것에서, 거대 의미에서 벗어나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는 바람의 무의미, 무의도성에 가닿기 위한 시인의 어떤 지난한 몸짓(포즈가 아니라) 혹은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연을 보라.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라고 묻고 나서 시인은 곧장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많이는 아니고 조금” 숙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가.“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조금’이라는 한정어가 1·2연에 모두 네 번 나오는 것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조금’은 ‘심각하지 않게’ ‘그냥 심드렁하게’ 정도의 뜻이다.) 그러므로 임홍배가 2연의 “조금/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를 ‘꽃의 개화’로 유추하여 3연의 “임종의 생명”과 억지로 대비해 “죽음을 앞둔 삶의 비장함을 느낄 수도 있고, 고단한 삶을 온전히 살아낸 자의 아름다운 죽음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꽃의 생리에 비추어서 평이하게 읽으면 꽃의 아름다움은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는 말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말이기는 하지만 과잉해석의 한 예이다. 이때의 “꽃으로 되어도” 역시 그 앞의 “조금”이라는 한정어의 도움을 받아 “즐거움”보다는 조금 기쁜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로 이어지는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를 글자 뜻 그대로 “그저 조금 기꺼웠다 깨어나고”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한 것이다. 문제는 3연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정작 극대의 무게 단위로서의 ‘바위’와 극소의 질량으로서의 가벼운 ‘꽃잎’, 그리고 ‘혁명’ 같은 파장이 큰 첨예한 의미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아니, 집착을 버린다면) 의외로 손쉬운 결말을 볼 수가 있는데―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변주곡」에서의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을 다른 평자들처럼 “민중적 각성의 포즈” 또는 “민중에 대한 인식과 각성”(오태환 「한 정직한 퓨리턴의 좌절」, 『시안』 2003년 겨울호) 등 요란떨면서 과도하게 해석하지 않고 “그냥 눈을 떴다 감는 기술” 정도로 심드렁하게 해석하는 임홍배의 견해는 탁월하다―내가 보기에 3연은 임홍배가 「꽃잎 2」(1967)를 분석할 때 스치듯 언급한 바 있는 일종의 연극적 상황 혹은 “연극적 제스처”의 도입으로서, 시인은 여기서 마음놓고 거의 해방된 심정으로, 자유를 이행하듯 다채로운 언어의 주술적 변주를 쏟아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술의 강력한 무기는 물론 그의 시의 정직한 독자들을 당혹케 하고 의미의 미로에 갇혀 꼼짝 못하게 하는(김수영에게는 확실히 의미를 따라잡으려는 그의 성실한 독자들을 의식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교란’하려고 한 혐의가 있다) 김수영의 예의 그 어떤 율격의 흐름도 거부하는 듯한 자유분방한 도취의 리듬이다. “자연스러운 율독 시행을 의도적으로 분절하거나 이어붙이는, 이른바 행간 엇걸침의 형식과 함께 구사되는” 그의 파격적인 율격은 “구문상의 자연스런 끊김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 행이 낭독의 속도를 얻”으며 “독자로 하여금 이 작품을 차분하게 속으로 음미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소리 내어 취한 듯 읽게 만든다”(강연호 「단단한 고요, 사랑에 미쳐 날뛸 날」, 『시와 정신』 2003년 겨울호). 독자에게 자기 최면을 거는 듯한 3연의 시행을 한번 따라 읽어보라. 1·2연의 차분한 호흡과는 달리 우리는 ‘임종의 생명’이니 ‘바위’ 같은 의미들을 건성건성 건너뛰어 리듬만으로도 어떤 숨가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며 이런 급박한 율격의 흐름은 3연 4행의 “혁명 같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가 그 다음과 다음 행(3연 5·6행)에서 점점 잦아들어 한 행의 휴지부를 두었다가 4연 마지막 단행(單行)의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에서 드디어 파문처럼 조용히 잦아든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으니 그것은 3·4연의 주체가 바로 ‘바람’이라는 것이다.(물론 임홍배도 앞에서 본 바대로 “바위를 무너뜨리는 힘과 꽃의 개화를 매개하는 것은 ‘바람’”이라고 했다.) 바람은 1·2연에서처럼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겸허하다가도 3·4연에서처럼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하는, 가장 자연스런 것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로 화(化)할 수 있는 대상인데, 이에 대한 시인의 새삼스러운 경외 같은 것을 이 시는 전언으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식적인 전언을 읽기 위해 시를 읽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임홍배의 말처럼 이 시에서 “모든 개체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소명을 다함으로써만 매순간 다시 시작될 역사의 새로운 기점을 환기하는 비장한 울림” 같은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작품이 주는 전언보다도 교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과잉해석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아니 훼손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살아 있는 작품을 만나는 일이며, 매순간 나의 살아 있는 날호흡으로 그것들과 열렬하게 부딪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는 일이다.(그리고 여기서 그것이 살아 있는 작품이라면 반드시 독자의 감성과 정신에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킨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원한 희망사항이 되고 말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시를 더욱 살아 뛰게 하는 ‘생물비평’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죽은 김수영의 살아 있는 참뜻이기도 한 것이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이 시의 새로움은 바로 이 ‘평범’의 발견에 있으며, 사람 아닌 다른 것에 문득 고개를 돌리는, 아니 고개를 숙이고 싶어하는 시인의, 만년의 삶에 대한 뜻밖의 경외를 읽어내는 데에 시읽기의 핵심이 놓여져야 할 것이다. 한편 2연의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모르고” 운운의 행들은 좀더 시인의 치밀한 운산을 거친 일년 뒤의 작품 「풀」의 사유로 이어진다. 그리고 「풀」이야말로 우리의 손쉬운 해석을 거부하는 진짜 ‘무의미시’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풀’과 ‘바람’은 오태환이 앞의 글에서 적절히 시사했듯 “크나큰 침묵”(「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김수영 전집 2』, 367면)을 안은 채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전집 2』, 399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년의 거기에 이르는 시적 사유의 단초는 「꽃잎 1」이 열고 있다. 풀이 왜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 눕는지 모르듯이 바람 또한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른다. 그리고 흐린 날 풀이 “발목까지/발밑까지”(「풀」) 온전히 눕듯이, 즉 대지와 깊숙이 일체화되듯이 바람 또한 “거룩한 산에 가닿기/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쉼없이 불고 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풀이 사랑하는, 바람이 껴안아야 하는 자기 운명이고 자기애(自己愛)인 것이다.“거룩한 산”은 어디인가? 그것은 결코 덩치가 큰 산만은 아닐 것이다. “도시의 피로”에서 ‘사랑’을, 끓어넘치지는 않는 열렬한 “사랑의 절도”(「사랑의 변주곡」)를 배운 김수영은 이제 바람이 “가닿는 언덕”과 “거룩한 산”을 자기 운명처럼 격렬하게 조용히 속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대지의 은폐”처럼, “‘노래’의 유보(留保)”(「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전집 2』, 399면)처럼.

시인 이시영 roadwalker1@hanmail.net

 

새로운 근대 세계사에 대한 물음

A. G.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유재건의 「세계사 다시 읽기와 유럽중심주의」는 최근 역사학의 관심을 잘 반영한 시의적절한 글이었다. 이 글은 프랑크의 유럽중심주의 비판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매우 비판적이다. 프랑크는 먼저 세계사에서 근대 유럽의 우위가 2백여년에 불과했으며 근대 초 아시아의 경제력과 농업생산력이 유럽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역사가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쟁점적인 것은, 그의 주장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이후 세계사를 커다란 싸이클로 보며 근대를 상대화하는 보편사적 관점이다.

두 쟁점에 관한 유재건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아시아의 ‘경제적 우위’는 인정하더라도, 아시아가 ‘상호관련된 유라시아 단일체제 안에서의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는 19세기 직전 농업생산성의 단순비교에서 아시아가 유럽과 거의 유사한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발전한 상태였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16세기 이래 유라시아 무역체제에서 상품공급 능력, 무역량, 수출입량, 화폐유입량 등에서 그 주도성을 강조하고, 16세기의 서유럽-동유럽-아메리카 연결망은 아시아 시장에 링크되면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상호연관된 유라시아 단일체제 안에서의 우위’가 충분히 역설되고 있는 셈이다.

두번째 보편사적 해석에 대한 비판에서, 프랑크 식으로 고대부터 계속 존재한 단일한 유라시아 세계체제를 인정하고 근대 특유의 차이를 부정한다면, 세계사는 경제성쇠 싸이클의 영원한 순환적 역사에 불과해질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크다. 프랑크는 1820년대 이전까지 원산업화(proto-industrializaton)의 수준 및 각 생산성 지표에서 중국 및 아시아가 유럽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 웡(R. Bin. Wong)과 포머런즈(Kenneth Pomeranz)의 연구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유럽 산업자본주의가 유럽문명만의 내재적 특질 때문에 필연적으로 탄생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결국 유럽 근대의 우연성과 단절성을 강조하는 것에 중점을 둘 뿐, 1820년대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9%대의 지속적 고속성장이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결국 19세기 초의 ‘거대한 역전’의 원인에 대한 물음은 유효한 것이다.

전체 글을 읽어보면 유재건의 주장은, 사실은 유럽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전지구를 통합해갔으며, 유럽이 세계체제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주도 위에 만들어진 것은 “착취적 자본주의”이며 “정의롭지 못한 세계”였다. 프랑크는 “유럽의 자본주의 주도〓유럽중심주의”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문제는 유럽중심주의가 아니라 “해방과 억압의 이중성”을 직시하고 “유럽중심의 불평등한 세계”를 넘어선 올바른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 비판은 매우 추상적이다. 그리고 역사학자로서 그 이상의 구체적인 반박에 대한 기대가 꺾여버린다. 적어도 최근의 연구들이 구체적 수치와 사례 연구로 예전의 상식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역시 더욱 구체적인 논쟁이 한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또한 이 글의 프랑크 비판은 궁극적으로 미야지마의 16세기 근대기점론에 귀착되는데, 사회과학자 프랑크의 보편사적 모델과 미야지마의 역사학적 접근은 사실 근본에서 다르게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크의 세계체제론은 고대까지 포괄한 대단히 보편사적 가설이지만, 미야지마론은 16세기 이후를 대상으로 한다. 이 글이 제기한 16~18세기 변동기와 이후 제2기 근대의 성격에 과연 동질적인 연속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현재 역사학 각 분야에서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방면의 역사연구는 이제 막 본격적인 단계에 올랐고,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재미있는 과제가 너무도 많다.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진아 e-history@hanmail.net

 

생생하고 아프게 남은 최영숙의 유고시, 아쉬운 기형도론

『창작과비평』을 받아보면 항상 문예면에 있는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과 먼저 대면하게 된다. 저마다 생에 대한 다채로운 관점과 쉽게 지나칠 법한 일상의 비의를 풀어내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의 삶이 조금은 넉넉해지고 풍성해지는 것 같다.

겨울호에 실린 여러 작품들 중 유난히 나의 가슴속 깊이 공명한 것이 있다면, 여섯 편의 시를 마지막으로 지상의 저편으로 가버린 최영숙의 작품이다. 오랜 지병으로 몸속 깊이 침투해가는 죽음의 증상들을 두 눈으로 지켜보며 이 땅의 한 여성으로서 어미로서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개체화된 한 인간으로 살아왔던, 그리고 살아 있는 시간들을 생생한 피의 언어로 응시하고 사유한 시인의 궤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특히 「내 안의 나무」 「바람 든 무」 「옷 벗는 여인」 「문」 등의 시편에서 현실의 속살을 거침없이 드러내 그것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따듯한 성찰로 나아가는 모습은 시인과 함께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덧붙이자면 평론 「기형도와 1980년대」는 80년대라는 역사적 문맥 속에서 기형도의 시를 분석하고 90년대 ‘기형도 붐’을 만들어냈던 대중과 평단의 평가를 재평가하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기존의 평가를 지나치게 도외시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유희석의 리얼리즘적 해석 역시 오히려 뻔하고 쉬운 분석이 아닌가 반문해본다.

오세연 sebari55@hotmail.com

 

창비 겨울호 소설을 읽고

모두 4편의 소설을 읽었는데, 읽고 난 느낌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현대 소설이라는 것이 근대 이후 인과관계에 기초한 계몽적인 소설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작품이 씌어질 땐 당대와 호흡하며 삶의 진솔한 면을 포착하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할진대,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몇편 있는 것 같았다.

우선 김주희의 「소꿉놀이」는 어린 소녀의 눈으로 80년대를 반추하고 있는데, 왜 이 싯점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 소설은 80년대 상황을 현재의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도 아니고, 후일담 소설로 씌어진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소설이 가지는 몇가지 장점이 있지만 결말부가 너무 안이하게 처리된 점―심사평에 의하면 “크게 뛰거나 시끄럽게 소리지르는 작품이 아니므로 결말도 자연스럽다”라고 하는데―이 눈에 거슬린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빈곤계층이 살아가는 모습과 주인공의 세상에 대한 낯선 경험이 주된 내용을 이루며 순탄한 문장으로 매만진 노력은 높이 치하할 만하나 매만진 만큼 이에 값하는 주제의식이 약하다.

김연수의 「거짓된 마음의 역사」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무척 생경한 19세기 후반 개화기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편지글의 수신인으로 나오는 죠지 워싱턴 브룩스 씨나 그의 약혼녀 닷지 양을 찾아 은자의 나라 조선으로 들어오는 주인공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낯설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의 쌍방향적 의사소통의 통로가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오만과 편견을 부각해 오늘날 미국 중심의 세계패권주의에 대한 성찰을 내다본다면―그런 점에서 ‘거짓된 마음의 역사’라고 본다면―그건 너무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김원일의 「고난일지」는 과거 70년대 유신독재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서슬 시퍼렇던 공안정국 아래서 유신에 반대하던 조직활동가의 억압적 삶에 대한 반추가 그 주된 내용이다. 그렇다면 다시 왜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현재가 바로 그런 상황의 재현이란 말인가, 아니면 소재의 빈곤인가? 소설사회학적 관점은 차지하고서라도 적어도 한 작품은 그 작품이 잉태된 시대를 진솔하게 반영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가? 또 백번 양보해서 역사적 사건을 통해 현재를 재조명한다 할지라도 이 소설에서 뭘 부각하려는지 그 의도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거론한 소설이 전통적 소설양식에서 벗어난 누보로망 계열의 작품인가? 이를테면 어떤 교훈적 내용이나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오로지 읽는 사람의 관점에서 독자들이 스스로 알아 판단하는 그런 소설은 아닐 것이다.

윤영수의 「새떼」는 오늘날의 세태를 그린 소설로 읽어도 무난한 작품이다. IMF 이후 실직한 사람들의 생활 풍속도를 그리고 있는데, 옥에 티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박윤명의 돌연한 죽음과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결말부가 그렇다. 중의적 해석의 하나는 박윤명의 죽음을 사주와 같은 운명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윤명의 죽음에 대한 주인공의 심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친구와 세상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는 점일 것이다.

소설이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독자들에게 있을 법한 이야기로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함으로써 감동을 준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이다. 신인이나 기성작가를 막론하고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차분한 문장력이나 표현력으로 무리없이 전개해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현 시대와 교통하며 우리 사회의 환부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정신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현장통신’란에 「재일 조선학교」란 글이 실려 있는데, 재일 조선인 문제를 다룬 신인작가 박영선의 「코파카바나」(『동서문학』 2003년 겨울호)는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정훈 arbre@intizen.com

 

삶과 역사를 담아내는 작가의 고투

창비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은 문학계간지이면서도 국가와 세계가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노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노력은 다름아닌 사회 각층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게을리하지 않으려는 기고자들의 의지일 것이고, 세상을 소설이라는 그릇에 오롯이 담아내려는 소설가들의 고민일 것이다.

지난 겨울호에 실린 김연수의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과거 격변기의 조선을 미국인의 눈으로 조망해 현재 미국의 삐뚤어진 프런티어 정신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이라크전쟁을 벌이고 세계를 독식하는 미국의 잘못된 시각을 다루어줄 작품을 기다린지라 무척 반갑게 여겨졌다. 또한 편지 형식이 틀을 이루고 있어 외국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신선함과 세련미까지 곱씹을 수 있었다. 김원일의 「고난일지」는 역사와 시대라는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끈덕짐이 건재함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그의 단편을 접하는 감회가 새로웠지만 작은 스케일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지난 가을호에서는 개인과 역사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정지아의 소설 「행복」은 장기수 문제나 좌익에 몸담았던 부모를 다룬 소설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추억과 행복의 매개체가 아니어서 애잔한 울림이 오래갔다.봄호에서 읽었던 작가의 「미스터 존」도 이데올로기 문제로 고심하는 화자의 깊은 시각이 드러나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둘 다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심증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백민석의 「기원, 작은 절골」 역시 한 개인의 과거를 더듬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어린시절 누구나 느꼈던 장난기와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가끔은 눈물을 흘려야 했던 성장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한살 때의 일까지 끄집어내는 기억력(?)이 독자를 미소짓게 한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등장인물과 관객과의 거리를 좁혀주어 인물을 더욱 친근하게 보이게 한다.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조금은 놀랍기도 하지만 자신의 아픔과 추억까지 소설이라는 체에 걸러낼 줄 아는 그들에 대해 좀더 애정을 갖는 기회가 되어 기쁘다.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 동화타운 102-1702호 이연희agnes72@hanmail.net

 

새만금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김석철 교수의 ‘새만금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꾸준히 읽어왔다. 갖은 저항을 받고 있는 노무현정부가 새만금에 대해 건설적이고 미래중심적인 대안에 적극적이라면 새만금 하나만으로도 높게 평가받는 대통령이 되리라 확신한다. 김교수의 뛰어난 계획안을 정부당국이 모방해서라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새만금안을 계속 연재하는 창비의 아낌없는 지원 기대한다.

경기 안양시 동안구 부림동 1608-4 동아 406호 최종국 topgun4270@yahoo.co.kr

 

민중의 고통에 대한 대안도 다뤄주길

지난호 특집에서 박명규 교수의 글은 우리 시대의 문제점에 대한 근원적 고찰로 느껴졌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원인분석 방법이 아닌 인과의 법칙과 변증법적 문제 해석, 대안제시가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앞으로 창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남한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노동자 도시빈민 등 민중―물론 나의 개인 생각이지만―이 안고 있는 고통의 원인, 이상적 대안 그리고 현실적 대안에 대한 특집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울산시 동구 방어동 193-1 나래골든맨션 902호 이태용 caos62@hanmail.net

 

공선옥 소설의 곰삭음

일정기간 창작활동에 매진해온 작가들에겐 으레 ‘어떠어떠한 성향’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마련인데 공선옥은 이런 점에서 있어서 특히나 다수 독자들의 편을 가르게 만드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고집스럽고 무뚝뚝해 보이는 문체가 인간미 없어 보인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무뚝뚝함이 결코 삶에 대한 잔정 없음이 아니라 ‘상처의 곰삭음’이라고 반박한다. 지난 여름호에 실린 「영희는 언제 우는가」는 전적으로 후자의 견해가 옳음을 느끼게 한다.

서울시 강북구 수유3동 9-28호 nomad28@hanmail.net 윤두한

 

남북한 문학의 틈을 메우는 작업

지난 가을, 모처럼 모교인 경희대 도서관에서 창비 가을호를 보곤 반가운 마음에 책장을 펼치니, 황동규 선생의 시들이 계절의 정취와 잘 어울려 다가왔다. 얼마 전 임진각에서 열린 ‘통일마라톤’에 참여하여 파주를 지나치며 든 생각인데, 통일을 대비한 남북한 문학의 ‘틈’을 메워가는 작업 및 시도가 착실히 준비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북한의 근현대 문학 소개나 현존 작가 인터뷰 등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국제보건 전공 rockhyun@unitel.co.kr 이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