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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선식 李善植
1954년 강원도 양구 출생. 199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poemlee@hanmail.net
낙타를 타고 간다
차량들 전속으로 질주하는 도심의 갓길
작은 오토바이 꽁무니에 리어카를 매달고
명사산 산자락 멀고 먼 집을 향해
오토바이 위엔 아들이
리어카엔 아버지가 타고 간다.
얘야, 천천히 가거라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시간을 앞지를 수는 없다.
예, 알았어요. 아버지
근데 사람들이 우리를 자꾸만 쳐다보잖아요.
그리워하는 거지, 천천히 가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향수 같은 거다
수레를 타고도 이웃들과 너무 쉽게 멀어진다고 생각하던 시절 말이다
사막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준다는 건 즐거운 일이잖니
보아라 얘야,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구나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에게 내 훗일을 부탁해
지전 한뭉치의 시간을 지불하고 날개를 흥정하고 있구나
번데기도 되기 전에 성충을 꿈꾸는
단단한 껍질에 싸인 애벌레 같지 않니?
난, 이렇게 세상 끝까지 너에게 실려갔으면 좋겠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제 꿈꾸는 바퀴를 굴려 아버지를 세상 끝으로 데려간다는 건 끔찍해요
끝이란 건 희망의 밭 한뙈기마저 사라져버렸다는 말이잖아요
전 아직 아버지의 깊은 보습으로 갈아야 할 커다란 밭인걸요.
챙 넓은 밀짚모자 아래 붉게 노을진 아버지
밭이랑을 타고 흐르는 석양의 웃음이 넉넉한 저녁
남루가 주는 고단함과 흙냄새가 고봉밥 떠오르게 하는
낯선 별에 품앗이 다녀가며 쌍봉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는
아버지와 아들 도란도란 먼 세상 이야기하며
오래된 토장국 끓는 집으로 간다.
김일수씨 부부
골이 깊어 치대던 골바람도 기진하여 갈대밭에 스러지는
한계령자락 필례마을 찾아 들어가면
수묵화 같은 마을을 맨발의 세월이 지나가고
구겨진 미농지를 밟고 지나가듯 세월의 발걸음 소리 들린다네
싸릿대처럼 꽂히는 햇살 사이로 세월은 생채기 하나 없이 걸어가고
들꽃 별빛 단풍 눈꽃 들 가득 쟁인 술 익는 오지항아리처럼
그윽한 향기로 붉어가는 단풍잎 같은 부부가 있었네
손 없는 까페에서 두 내외 티브이를 보다가 그것도 시큰둥해지면
밖으로 나가 난간에 기대어 먼데 점봉산 바라보며
곰배령 야생화 얘기며 설악산 가을단풍 한계령 눈꽃이며
며칠을 발을 묶어 뜨끈뜨끈한 구들장과 뒹굴게 하는
펑펑 내리는 눈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아내의 손등을 톡톡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그도 오래지 않아 싫증이 나면, 여보! 내가 염색해줄게
김일수씨 아내의 상고대처럼 하얀 머리를 곱게 빗어가며 약칠을 한다네
어깨 위에 찰랑찰랑 별빛 미끄러지던 검은 머리
어느새 서리 내린 억새밭이 되었는지
눈꽃을 그렇게나 좋아하더니 당신 머리에 눈꽃이 폈구먼그래!
당신 머리가 한계령이야! 올겨울엔 한계령 갈 필요 없겠다!
슬슬 아내 복장을 긁어가며, 이젠 다른 데 시집갈 생각은 말아!
누가 받아주기나 하겠어! 천상 김일수 마누라네! 농을 하며
이젠 다 늙었구나, 가파른 세월 감아 오른 칡넝쿨처럼
약칠한 머리를 틀어올린다네
산뽕나무 산사나무 마타리꽃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서로 쳐다보고 빙그레 웃으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네
소나무 우듬지에 산새들 날아와 포포릉 포포릉 울어쌓고
풀벌레들 까르르 까르르 양철지붕 별빛 쏟아지는 시늉을 했다네
염색을 끝낸 김일수씨
하따, 또-옥 스무살 때 경덕씨구먼!
그 광경을 보며 나는 괜스레 먼데 아내 생각이 나고
가슴에는 흥건하게 더운물이 고여오고
역전다방
역전다방 모퉁이 홀로 앉아서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린다
시간은 내 안타까운 마음을 뿌리치고
내 가슴의 어두운 플랫폼으로부터 떠나간다.
동행하기로 한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뿌리내린 말뚝처럼 혼자 떠나지 못하고
역전다방 모퉁이 고인 물처럼
동심원의 파문으로 나타날 그를 기다린다.
하나 둘 또는 삼삼오오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역전다방
배정된 시간표에 따라 보따리를 챙기고 계산을 끝내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면 아침해가 기다리는 곳으로
구겨진 영수증을 흘리고 그들은 떠나간다.
그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지 않음으로써 기다림은 길을 잃고
증발한 행선지
촉촉이 내 협곡을 적시던
증발한 설레임의 밤벌레소리
열차는 떠나고 내 기다림의 목적도
텅 빈 객차거나 화물칸 어디엔가 실렸다
광장에 분주히 오가던 사람들도
하나 둘 증발하듯 사라지고
텅 빈 사내 하나 텅 빈 광장을 가로질러
세상 속으로 다시 가라앉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