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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소설
성장서사와 균열의 상상력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저서로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fos.com
1. 성장서사와 균열의 상상력
성장서사는 문학독자를 오래전부터 매혹해온 이야기 양식이다. 개인이 집단에 적응하는 고난의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성장서사는 한 사회가 지닌 내부적 모순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집단에 적응하기 이전의 자아의 혼란과 절망을 보여주면서도 결국에는 사회체제 속에 안전하게 합류하게 되는 자아의 모순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성장서사가 근본적으로 균열의 도정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위기의 서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1
최근 소설들의 흐름을 살펴보아도 자기성찰의 여정 속에서 대두되는 고향 모티프나 성장서사는 기원찾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성석제와 은희경, 구효서와 윤대녕, 조경란과 하성란의 소설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가족과 성장의 모티프는 이전의 나르씨씨즘 서사와는 다른 각도에서의 계보적 고찰을 필요로 한다. 가족적 유대가 희미해진 김애란과 박민규 소설들 역시 ‘아비 없는’ 성장서사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례이다. 위기와 균열을 극화하는 성장서사는 주인공이 목표로 삼은 성숙의 지점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가는 힘겨운 과정 그 자체를 돌아보는 데서 의미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계절에 만날 수 있는 성장서사들 역시 다양한 모색과 성찰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관심을 끄는데, 그중에서도 전성태, 김중혁, 윤성희, 공선옥의 소설은 소외의 현실과 타자적 존재의 발견이라는 주제를 깊이있게 형상화한 작품들로 다가온다.
전성태(全成太)의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는 압축적인 대화의 묘미와 서정적인 감수성을 잘 살린 뛰어난 성장소설의 형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전리 마을의 한 학교에서 시행되는 하프마라톤 훈련과정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고장의 풍속과 시대상을 절묘하게 연계시키는 풍부한 입담의 세계를 그려낸다. 마라톤 대표선수인 ‘오쟁이’의 종아리 굵기를 재며 성장신화를 역설하는 학교 교장,11대 대통령 취임식을 축하하는 현수막, 방과후 달리기연습에 동원되는 아이들, 편도선이 부은 아이들에게 모나미볼펜 대롱을 통해 가루약을 불어넣는 노인의 모습 등은 이 소설이 힘있게 장악하고 있는 풍속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동네 아이들의 우상인 오쟁이의 과묵한 모습이나, 늘 건들거리며 아이들을 괴롭히는 쎄비 형, 새침한 명심이와 순박한 돼지어멈의 생생한 캐릭터 역시 이 소설을 활기차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소설에서 아이들이 달리기를 통해 속도경쟁체제의 원칙을 습득해가는 일련의 과정은 성인사회로의 편입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것이 지닌 모순과 균열을 들여다보게 한다. 오쟁이의 신발이 부러웠던 ‘나’는 우연히 주운 돈으로 육미관 설렁탕을 사먹고 스파이크 슈즈를 사 신는다. 그러나 돈의 임자인 돼지어멈이 나타나는 바람에 행운은 곧 불운으로 바뀐다. 멋모르고 쓴 돈을 갚기 위해 쎄비 형에게 돈을 빌린 나는 다음날부터 개구리를 잡아 다리 껍질을 벗기고, 라면봉지를 주워다 나르며 돈을 모으려 하지만 고단한 노동의 뜀박질은 해도해도 끝이 없다. 주인공이 체감하는 물신사회의 가혹한 원리와 속도경쟁체제의 부조리함은 오쟁이가 짐수레에 밀려 사고를 당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괜찮다니께. 이대로 서울까장도 달리겄구만”이라는 오쟁이의 자신만만한 음성은 과하게 짐을 실은 수레의 무서운 가속도에 휩싸여 힘없이 사라진다. 이 장면은 성장신화가 균열을 일으키고 붕괴되는 한 지점을 현시한다. 속도전의 선두에 서 있던 오쟁이가 궤도 밖으로 이탈해 사라져버리는 장면은 주인공이 느낀 어깨의 격통과 더불어 비극적인 성인식의 한 장면을 상징하는 듯하다. 사고로 실려간 오쟁이는 돌아오지 않지만, 눈속임수로 오쟁이의 종아리를 재던 교장은 ‘야구시범학교’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며 또다른 성장신화 재건에 몰두한다. 이 소설이 일러주는 진정한 비극은 바로 오쟁이의 사고 후에도 냉혹한 경쟁사회의 논리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성장의 화법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의 일면을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남기는 비극적인 여운은 상징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매향』(실천문학사 1999)의 세계가 일찍이 가리켜 보인 농촌공동체의 서정적인 기억을 절실한 체험의 형태로 가져다놓았으며, 『국경을 넘는 일』(창비 2005)이 묘파한 제도적 억압의 양상을 구체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물론 비극적인 아이러니의 장치가 전성태의 모든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가동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서 즐겨 변주되는 비극적 반전은 현실의 암울함을 충격적으로 환기시키는 효과를 내지만, 반대로 그 비극 자체가 극적 장치로만 머물러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 예로 탈북자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룬 「강을 건너는 사람들」(『문학수첩』 2005년 가을호)은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명한 서술로 포착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리를 극적 소재 이상으로 드러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이에 견준다면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가 보여준 비극적 아이러니는 풍부하고 다양한 에피쏘드들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중심부의 역사와 주변부의 역사, 집단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이 교차하는 경계선의 이야기들을 붙잡아내려는 작가의 시도를 보여주는 귀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2. 탐색과 소통, 아웃싸이더들의 자의식
등단작 「펭귄뉴스」(『문학과사회』 2000년 겨울호)에서 근작 「無用之物 博物館」(『한국문학』 2004년 겨울호)에 이르기까지 김중혁의 소설들이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찾아가는 탐색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無用之物博物館」에서 눈 감고 상상하는 사건이 직접 목격하는 사건들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바나나 주식회사」(『문학과사회』 2003년 겨울호)에서 고물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는 호수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탐색의 여정을 거쳐 인식론적 변화를 갖는 성장서사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어머니를 잃은 주인공이 삼촌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게 되는 과정을 그린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작가세계』 2005년 가을호) 역시 그런 점에서 독특한 성장서사를 지닌 작품이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여읜 주인공에게 이국 땅에 있는 삼촌이 선물로 나뭇조각을 보내온다. 그것은 에스키모가 사용하는 지도임이 밝혀지는데 인터넷을 통해 지도의 사용법을 찾던 주인공은 “이것은 눈으로 보는 지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상하는 지도입니다. 손가락을 나뭇조각의 틈새에 넣은 다음 그 굴곡을 느껴야 합니다”라는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속의 ‘에스키모 지도’는 시각적 상상력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제안한다. 이 상상력의 세계는 구체적인 삶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고립의 현실을 견디게 하는 소통의 출구가 되고 있다. 실제로 에스키모의 지도를 통해 주인공은 부모를 잃은 현실을 위무하며, 지도에 열광했던 자신의 유년을 돌아보게 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삼촌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마음의 상상력을 통해서만 해독할 수 있다는 에스키모 지도는 문학이 호소하는 상상력의 세계와 만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김중혁 소설에 자주 출현하는 ‘상상력의 소중함’은 그런 점에서 ‘문학적 양식’의 존재의미를 나타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화려한 감각적 이미지들의 성찬 속에서 문학은 소리없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으며 점점 현실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미래의 문학은 창고에 처박히는 골동품이 되어, 마니아들의 수집품으로만 그 명맥을 이어나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학적인 상상력은 바로 그 ‘쓸모없어 보이는’ 점 때문에 소설 주인공의 관심대상이 된다. 더불어 그것은 문명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는 고독한 아웃싸이더들을 연결하는 은밀한 통신매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압축과 진보의 신화 속에 묻혀 소멸되어가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세계에 대한 발견과 옹호는 김중혁의 소설이 끊임없이 드러내는 주제적 진술이다. 물론 이 진술 자체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때때로 상식적인 차원의 문명비판론을 작품 속에 늘어놓는다. 근작 중의 하나인 「멍청한 유비쿼터스」(『문예중앙』 2005년 가을호)에서도, 견고한 감시체제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운명을 지나치게 평범한 에피쏘드로 형상화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컴퓨터 속 쿨러팬의 소음과 같”(「멍청한 유비쿼터스」)은 소리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단정이나,“모든 톱니바퀴들이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나가는 듯한”(「펭귄뉴스」)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 인식, 혹은 “지구가 둥근 이상 모든 곳이 세상의 끝”이며 “이제 혼자서 살아가야 하지만 나는 너무 늙어버린 듯하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라는 고백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익숙하게 만날 수 있는 진술이다.
문명비판론의 단순화된 구도에도 불구하고 김중혁 소설이 지니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면, 이러한 주제의식을 포착하는 긍정적이고 유연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인물들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따뜻한 상상력의 세계를 발견하고 행복해하지만, 그것이 삶을 일시에 바꿀 수 있다는 환상 을 갖지는 않는다. 이들은 그저 세상에 소음을 보태고 딴지를 걸며 조금씩 느리게 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친근한 아웃싸이더들이다.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의 주인공은 삼촌과 대화를 나누지만 자신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리라는 섣부른 확신을 하지는 않는다. 「無用之物博物館」의 주인공은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는 상상력의 세계에 감동하지만, 그 자신의 일상은 여전히 압축된 첨단문명제품을 디자인하는 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고립된 단자들의 풍경을 긍정적으로 수락하면서도 그 속에서 작은 틈새들을 찾아가는 개인들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김중혁의 소설에 이르러 우리는 통증과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성장서사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애의 서사를 여유롭게 해석하고 수용하는 긍정의 방식은 소통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새로운 인식주체의 발견으로 다가온다.
김중혁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립현실에 대한 따뜻한 긍정은 윤성희(尹成姬)의 소설에서 적극적인 소통의 열망으로 나타난다. 최근 윤성희의 소설은 단절된 개인들이 느끼는 결핍심리의 섬세한 묘사에서 나아가 이들이 이루는 소통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데 몰두한다. 「자장가」(『한국문학』 2005년 가을호)에서 포착된 따뜻한 소통의 양상들도 이러한 가능성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자장가」에서 인물들이 시달리는 심리적 강박의 구체적인 양상은 ‘꿈’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인물들이 성장과정에서 체험한 가족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오빠가 떠난 이후 당근밭에 서 있는 꿈을 꾸는 여주인공,13년 동안 맨발로 어딘가를 걷고 있는 꿈에 시달리는 남자, 한글의 자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꿈을 꾸는 사람 등 ‘언제나 그 꿈’의 동호회 회원들은 개인이 견뎌야 하는 근본적인 단절의 위기와 고통을 꿈으로 표출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지하던 여동생을 놔두고 이민을 떠나버린 오빠나, 사업파트너로서의 자식에게만 관심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주인공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이 결정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성인사회로 편입하게 되는 자각의 과정이 평범한 성장의 의미라면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성장서사의 일반적인 구도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딛고 넘어야 할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집단은 이미 영향력이 희미해져버린 화석화된 기억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 잠복한 위기의 양상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것을 일탈의 행위로 분출할 수 없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평범한 개인들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사람들을 알아보고 만남을 갖는 것뿐이다. 소설 속의 그녀는 남편과 친구로부터 상처입은 304호 여인과 302호 여인의 줄넘기시합을 주선하며 소통의 출구를 찾는다. 꿈의 강박에 시달리던 그녀가 비슷한 강박을 지닌 그에게 “당신을 만나고부터, 꿈을 꾸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나요”라고 고백한 순간 소설 속의 인물들이 꿈꾸는 장밋빛 소통의 세계는 이미 달성된 듯하다. 그 만남의 세계는 낭만적인 이상향처럼 보인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타자들이 엮어내는 찰나적인 공감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관습적이고 형식적인 소통관계가 갖는 균열의 지점을 들여다보게 한다. 생기를 잃고 가라앉아 있는 사물과 세계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 소통의 상상력은 소외된 존재들끼리 이룰 수 있는 위무의 영역을 넓힌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일 수 있다. 반면에 이 따뜻한 시선이 비관적인 삶의 풍경을 어느만큼 견뎌갈 수 있을지는 궁금한 일이다. 염려되는 것은 통증의 징후를 예민하게 캐내던 소설이 성급하게 치유의 서사로 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소설 인물들은 핏줄의 집단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안식과 위로를 낯선 이들에게서 구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가족을 대체하는 또다른 환상인지도 모른다. 가족이 껴안을 수 없었던 상처를 낯선 타인들은 어느만큼 껴안을 수 있을까? 이것은 개인 존재가 느끼는 결핍의 징후들을 섬세하게 그려왔던 그의 소설들이 맞이한 새로운 변화에 대한 궁금증이자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기대를 담은 질문이기도 하다.
3. 사랑의 좌절과 소외의 풍경
스물한살의 여성이 겪는 실연담을 다룬 공선옥(孔善玉)의 「명랑한 밤길」(『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은 연애서사를 표층으로 하여 고단한 가족사와 주변부의 궁핍한 삶의 현장들을 엮어올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공선옥 소설의 활기와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 작중인물의 묘사나 스토리 전개과정에서 약점을 노출함으로써 해석과 평가의 상이함을 가져오게 만든다. 우선 연애서사에만 촛점을 맞춰본다면, 여성인물이 겪는 실연의 과정은 가해자/피해자, 남성/여성의 구도를 평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여성인물의 내면에 개입하여, 남성인물을 필요 이상으로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작가의 시선은 캐릭터를 단순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여성의 시원한 복수극도, 남성의 잔인한 돌아섬도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이 특이한 연애담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매끄러운 사랑 이야기로는 흡수되지 않는 거칠고 생생한 현실의 한 부분을 끄집어낸다.
사실 공선옥 소설에서 그려지는 낭만적 연애의 좌절과정은 여성인물들이 수시로 처하는 삶의 곤경 중 하나이다. 공선옥 소설에서 ‘사랑의 실패’는 모든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계기를 제공한다. 나아가 주인공이 체험하는 연애는 성과 사랑, 결혼과 가족제도를 둘러싼 갖가지 편견과 모순을 한꺼번에 노출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감싸안는 중요한 극적 장치가 되고 있다.2 현실적으로 따져보아도 공선옥의 여성인물들이 안고 있는 강퍅한 삶의 여건은 사랑의 통념과 이데올로기에 도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극빈층의 모자가정, 재혼녀 등 그녀의 주인공들이 지닌 연애의 조건은 제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랑한 밤길」에서도 주인공의 감상적인 연애를 실질적으로 가로막는 것은 남자에게 풍족한 선물을 할 수 없는 궁핍한 경제환경이다.
연애 실패담을 전면에 내세운 이 소설이 부각시키는 것은 남성의 배신으로 인해 좌절한 여성의 심리 속에 투영된 탈주의 욕망이다. “태어나 살던 이 고장을 떠나 먼 곳으로, 도시로 나가 살고 싶은 그 열망 하나”를 지니고 간호보조학원을 나온 그녀에게 도시남성과의 연애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 신용불량자인 오빠들, 이혼하고 모자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언니로 둘러싸인 갑갑한 가족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실질적 출구가 되는 셈이다. 그것은 빈곤한 가족현실로부터 벗어나 신분을 바꾸고 싶은 이십대 여성의 강렬한 변신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순진하고 낙천적인 여성으로 묘사된 것과 달리 이 여성은 세속적인 연애과정의 모습을 어느정도 꿰뚫고 있는 물정 밝은 사람이다. 그녀는 “이 고장 여자들에게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병원장의 속내를 쉽게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졌고 공장에서 일하는,“세상을 열어 보일 능력이 없는 남자들”에게 잘못 걸려들까봐 늘 경계한다. 연인 노릇을 하던 남자가 연락을 끊고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친구에게로 마음을 돌리는 과정조차도 다 눈치채고 있는 그녀는 연애소설의 비극적 여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나 영리한 여성이다.
“나는 남자가 이 고장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흥분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라는 고백이 직접적으로 일러주듯이 여성주인공이 매혹당한 것은 지식인 남자인 동시에 ‘도시’이다. 그런데 그녀를 유혹했던 남자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도시의 경쟁체제에서 밀려난 보잘것없는 낙오자에 불과하다.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주인공과의 결별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내가 잘나가는 사람 같으면 뭐 이런 데서 이러고 있겠냐?”라는 남자의 부르짖음이 나름대로 절실하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여성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낭만적 연애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인물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은 남성의 배신에서 말미암기는 했지만, 근원적으로는 도시를 향한 허위적인 욕망이 깨져나가는 고통과 자기환멸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도시에 대한 동경과 매혹이 좌절당하는 쓰라린 과정은 역설적으로 여성주인공이 지닌 허위의식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전환의 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비극적 연애담의 결말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삶의 구체적 현장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데, 정작 공선옥 소설이 보여주는 힘과 매력은 여기에서 발휘된다. 남자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서글픈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녀는 자신이 은근히 경계하고 피해왔던 이주노동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연인과 은밀한 사랑을 나눌 뻔했던 물레방앗간에서 그녀가 몸을 숨기고 듣게 되는 이들의 고단한 삶의 사연은 어느 순간 마음 한구석을 절박하게 파고든다.
한국인 사장에게 월급을 떼이고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는 비극적 삶을 살면서도 “내일은 시내 가서 윤도현 음악씨디하고 고무장갑하고 소주하고 옷하고 신발하고 여러가지를 살 거야. 난 윤도현 왕팬이야”라고 중얼거리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은 이 소설의 전반부가 꼼꼼하고 섬세하게 묘파한 소외의 현실을 한꺼번에 압축해 보여준다. 길에서 우연히 주운 채소를 보며 즐거워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가난한 밥상 앞에서 치매 걸린 어머니의 중얼거림을 상대해야 하는 막막하고 아득한 주인공의 현실과 순식간에 연결된다. 그녀의 고단한 일상은, 낯선 타지에서 고향의 달을 그리워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궁핍한 일상과 다르지 않은, 소외된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장면은 공선옥 소설이 포착하는 삶의 진경이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쩌면 물레방앗간 장면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 이 소설은 멀고 먼 길을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굳이 타자와의 연대 운운하는 해석을 붙이지 않더라도 단번에 이해될 수 있는 이 짠한 감수성의 세계는 공선옥 소설만이 건져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공선옥 소설이 응시하는 사랑의 실패는 매우 전략적이고 매혹적인 서사의 산물이다. 이 소설이 보여주듯이 제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궁핍한 삶은 타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된다. 공선옥 소설의 고유한 개성과 상상력도 이 마르지 않는 체험의 샘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을 이어주는 이 체험의 세계는 과연 생래적 조건으로, 혹은 운명적 조건으로만 주어지는 것일까. 공선옥 소설에서 여성의 자기정체성과 연결된 궁핍한 삶의 현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가져오지만, 한편으로는 체험의 영역에 소외의 다양한 양상들을 가두어놓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을 향한 질문은 밤길을 뚜벅뚜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이야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설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답고 슬프고 쓰라린 여행” 이후에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낯익고 낯익어서 슬픈 풍경”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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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균열은 여성 성장서사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남성 성장서사의 상당수가 조화로운 인격의 완성을 위한 길찾기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여성 성장서사는 가부장제사회로 쉽게 투항할 수 없는 여성주체의 고뇌와 거부를 은연중에 노출한다. 이처럼 제도 속에서 자아감각을 파괴하지 않으려는 여성의 정체성 인식은 “불확실성의 수사학”으로 명명되기도 한다(김성례 「여성의 자기진술의 양식과 문체의 발견을 위하여」, 『또하나의 문화』 9호, 1992, 123~24면).↩
- 공선옥 소설에서 인물들이 엮어내는 연애서사가 소설 속의 가족제도를 성찰하는 중요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 ‘사랑 이야기’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제도의 그물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간간이 노출되는 상투적 소극의 성격으로 인해 종종 평가의 대상에서 벗어나곤 한다. 한기욱이 공선옥의 『수수밭으로 오세요』를 두고 “사랑 이야기는 껍데기처럼 느껴지고 어미 ‘강필순’을 중심으로 하는 모계적 가족구성의 이야기가 알맹이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한 대목이나 임규찬이 이 소설의 구성 자체가 ‘사랑’에 촛점을 맞춘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두 평자의 세심하고 밀도높은 작품분석에서 사랑 이야기가 소설의 핵심과는 동떨어져 있는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소설에서 이섭과 필순의 연애담은 서사 중심부에 있지는 않지만, 모계적 가족구성이나 빈곤한 삶의 묘파라는 전체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는 중요한 복선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한기욱 「우리 시대의 사랑, 성, 환경 이야기」, 『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 93면; 임규찬 「공선옥 문학은 어느만큼 와 있는가」,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87~88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