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서영인 평론집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창비 2005
오창은 평론집 『비평의 모험』, 실천문학사 2005
신생의 오름에서 한국문학의 내일을 호흡하다
황광수 黃光穗
문학평론가 clhwks@dreamwiz.com
200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한국문학의 지평에 모습을 드러낸 두 젊은이의 비평적 자의식과 ‘세대감각’을 음미할 수 있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1년차 동년배인 서영인徐榮硜과 오창은吳昶銀은 각각 2000년과 2002년에 등단했다.“순진한 독서가 이끌어낸 무모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서영인의 비평은 서술적이어서 논리적 비약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만큼 우리 문학에 대한 그의 해석이나 비판에서 반론의 여지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이에 비해, ‘인식의 지도’를 강조하면서 메타비평에까지 발을 들여놓는 오창은의 비평은 ‘모험’을 감행한만큼 비판의 여지를 한두 군데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비판의 여지는 ‘모험’과 관련된 것이고, 때로는 뒤따를 수 있는 비판에 대한 반론 가능성까지 열어놓는 것이니 비평의 수준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두 비평가는 작품 또는 텍스트와 비평의 관계설정을 통해 자신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면서 ‘지도(地圖)’라는 말로써 비평적 지향성 또는 비평의 척도를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두 ‘지도’는 그 용도와 성격에서 다소 다르며, 그런만큼 그들의 비평적 태도에도 차이가 드러난다. 서영인은 “작품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것과 그 작품이 서 있는 우리 삶의 자리들을 섬세하게 조망하고 그것들 사이의 거리와 위치를 통해 하나의 지도를 그려내는 일,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의 자리”(5~6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오창은은 “비평가로서 정체성을 갖게 된 후, 텍스트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비평이란 텍스트의 이면을 후비는 것이고, 작가의 무의식이 사회의 무의식과 어떻게 닮아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7면)고 말하면서 “인식의 지도를 그릴 능력이나 자원이 부족할 때, 작가는 삶의 복잡성을 해명하려 하기보다는 파국적 결말의 유혹에 더 쉽게 노출되고 만다”(24면)고 말한다. 그러니까 서영인의 ‘지도’는 비평가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에 대한 비유이고, 오창은의 그것은 ‘내성의 문학’을 견지해온 작가들에 대한 비판적 요청을 담고 있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작품이 말하지 않은 것”(서영인)과 “텍스트에 드러나지 않은 것”(오창은)은 의미상 거의 동일한 내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문학작품은 작가 자신이나 사회, 나아가서는 독자들과의 관계 또는 소통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표면적으로는 세밀한 읽기와 관련된 듯이 보이지만,90년대의 문학과 비평의 오류 또는 결핍을 드러낼 수 있는 문학적 사유 또는 비평적 거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적절해 보인다. 이러한 비평적 태도는 이론이나 이념을 앞세우지 않고 작품에 드러나 있지 않거나 작품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읽어냄으로써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짚어내고 소통의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80년대 비평과의 ‘단절’을 과도하게 드러낸 90년대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면서 한국문학의 미래를 힘차게 열어갈 수 있는 가능성까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서영인의 비평적 이상은 “시대를 직접 말하지 않고도 시대를 담아내는 비평을, 문학을 말하지만 그것이 어느새 우리 시대의 삶으로 이어지는 비평”(6면)을 쓰는 것이다. 서영인은 머리말에서 자신의 비평이 ‘비판의 결여’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내비치지만,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심미적 파장, 그리고 작품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다짐한다는 점에서 이미 평가와 비판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평론집의 중심에 놓여 있는 9편의 무게있는 작가론과 90년대 이후에 등단한 비평가들에 대한 글에서 충실하고 섬세한 독서를 통해 근거있는 ‘비판’들을 보여주고 있다(이 가운데 『외딴방』의 부정적 측면과 앞선 세대의 이원론을 비판한 신수정의 또다른 이원론을 날카롭게 드러낸 대목은 그의 비평적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90년대에 등단한 비평가들이 80년대의 비평적 지향을 너무 급격히 ‘반전’시켰다고 보고 있는 그는 이러한 반전이 현실이 달라진만큼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전 세대의 이념적 지향에 대한 반감 때문에 충동적으로 ‘과장된 단절의 포즈’를 취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80년대 비평 또는 그러한 경향성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는 리얼리즘과 민족문학의 권위적 규정성에 대한 거부감이 그것들을 오히려 과도하게 강박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90년대의 비평가들이 80년대의 비평과 자신들의 비평 사이에 쌓아놓은 ‘벽’을 그 자신은 ‘틈’으로 이해하면서 바로 그 자리가 자신의 비평이 설 자리임을 확인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말하지 않은 것’과 ‘틈’이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 두 가지 비평영역은 빈틈없이 읽고 사유하는 데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비평에 신빙성을 실어주는 요소로도 작용하고 있다.
서영인에 비해 오창은의 문제의식은 ‘인식의 지도’를 앞세우는만큼 다소 선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 90년대 문학과 21세기 초입의 당대문학을 넘나들며 한국문학이 어떤 도정에 서 있는가를 확인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관념성을 넘어서고 있다. 오창은의 비평적 특징은 그의 평론집 여기저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문학의 ‘실천적 역능’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는 새로 집필하여 평론집 앞머리에 배치한 글에서 현재의 한국문학이 놓인 자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도를 그려놓고 있다. 그는 먼저 ‘사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유기적 관계를 짚어내면서 자신의 비평적 사유를 전개해간다. 그는 ‘사적 자유’는 나름의 의미를 지닌 것이지만 소통을 통해 ‘사회적 자유’로 확장되지 않는 한 주관을 절대화하는 세계관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결국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인식적 바탕에서 그는 90년대를 풍미한 ‘내성의 문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근래 우리 문학에 새롭게 싹트는 리얼리즘적 가능성을 살핀다. 그러나 그는 ‘역사소설’의 질적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나름의 척도를 제시하면서도 장르적 특성에 대해서는 새로운 탐색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역사소설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존재하려면, 먼저 시공간(時空間)의 양과 질에 대한 해명이 앞서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지금의 싯점에서 역사소설에 대한 논의는 별다른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오창은의 비평적 모험은 최원식의 ‘회통론(會通論)’에 대한 메타비평에서도 감행되는데, 이 글은 아쉽게도 황종연과 윤지관의 관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회통론’을 복습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회통론’이 실질적 회통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회통론’을 다시 거론하려면 진전된 목적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문학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회통론은 두 개 이상의 경향들이 (대립적이건 아니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이런 상태가 문학을 위해 불행한 일도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무관계 속에 방치될 수도 있는 것이다.
끝으로,21세기 초입에 등장한 이 두 비평가들이 궁극적으로 독서효과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미학적 차원과 현실연관성으로서의 의미론적 차원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자신들만의 비평 방법론과 문체를 좀더 뚜렷한 모습으로 벼려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것은 20세기 이후 스스로 예술이 되려고 노력했던 비평이 대중독자와 유기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태동을 예감하고 있는 두 비평가의 첫 평론집들은 나로 하여금 내일을 향해 한걸음 크게 떼어놓을 수 있는 힘을 실어주었다. 두 비평가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