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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破鏡, 또는 근원으로부터의 출발
이인성·최인석·하성란의 최근작을 중심으로
황광수 黃光穗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삶과 역사적 진실』이 있음.
1
삶은 모순을 내포한 생명운동이다─이렇게 생각하면, 삶의 난제들이 얼마간 해소될 수 있을까? 우선 제논(Zenon)의 아이러니는 해결될 수 있을 듯하다. 움직이는 행위는 ‘운동’과 ‘정지’라는 모순의 일회적 통일성이기에, 화살은 날아가고 토끼는 거북이를 앞지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운동과 생성을 미분하여 정지와 고정을 이끌어내려는 욕구에 휘말리기도 한다. 삶의 본질이 운동성이라면, 거기에서 어떤 접점이나 접면을 찾으려는 것은 무모한 집착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무슨 일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으레 사물의 경계부터 찾거나 시공간적 틀로 그것을 포획하려 한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지닌 형상적 사유와 그에 바탕을 둔 행위에는 사물을 경계짓고 서열화하려는 욕망이 깃들여 있다. 이렇게 하여 굳어진 삶의 각질을 깨고 근원에서부터 다시 출발하려는 욕망이 우리의 글쓰기를 부추기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들뢰즈(G. Deleuze)의 말처럼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이 표면이라면, 근원은 표면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근원의 신화’는 깨어지지 않고 표면에서 부활한다. 그리고 표면의 안과 밖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맞닿은 채 공존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향하든 그것은 우리 삶의 공간을 의미로 부풀어오르게 한다.
계급의 전선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역사와 우리의 의식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것이 실재했다면, 그 지시대상이 달라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제 껍데기만 남은 텅 빈 개념처럼 보인다. 세상이 달라졌고, 우리의 관심이 그보다 더 미세하거나 보편적인 어떤 것─예컨대 ‘권력’이나 ‘욕망’과 같은─으로 이동함으로써 개념적 효용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내용은 문화산업과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대중문화의 폭발적 증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사회’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으며, 사용가치 못지않게 이미지를 소비하는 현상을 증대시켰다. 그런데 씨뮬라크르가 몇몇 이론가들의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 이후, 그것이 현실의 물질적 근원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인 양 오해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현실이 기호들의 체계로 이해되고, 원본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상황에서 혼성모방(pastiche)을 실행한 작품의 이름이 우리 문학사에 버젓이 등재되는 현상도 경험하였다. 대중문화가 별다른 미학적 배려 없이 무절제하게 수용되는 경우가 늘어가면서, 키치와 구별되기 어려운 ‘가벼움’ 또는 ‘경박함’이 90년대의 문학판도를 휩쓰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연대에 가벼움만 범람한 것은 아니었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들도 많이 생산되었다. 90년대는 가벼움에 못지않게 왕성했던 실험정신으로도 기억될 만한 연대였다. 이 글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거나 인용되는 세 권의 소설집(이인성, 『강 어귀에 섬 하나』, 문학과지성사 1999; 최인석, 『아름다운 나의 鬼神』, 문학동네 1999; 하성란, 『옆집 여자』, 창작과비평사 1999)에는 삶의 근원성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새로운 의미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빼어난 작품들이 실려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에서 작가의 의식이 최초에 가닿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제의식과 그것들의 전개ㆍ발전 속에서 어떠한 문학적 의미와 리얼리티가 싹트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인성(李仁星)의 『강 어귀에 섬 하나』 첫머리에 실린 「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는 ‘고요함’과 ‘어둠’이라는, 성글고 모호한 감각적 소여(所與)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된다. 먼저 그 ‘고요함’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요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소리에 둘러싸임으로써 이루어진 것, 그래서 공간적 실체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 “골목 어귀에서 들려오는, 카세트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 행상이 늘상 틀어놓는 싸구려 노랫소리가, 꺼지지도 않았는데 귀 밖으로 멀리 밀려나 이 고요함에 단단한 껍질을 둘러친다. 고요함의 껍질은 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이루어낸 어떤 것인 모양이다.”(9면) 늘 들려오는 소리는 서술자의 의식에서 이미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것은 ‘단단한 껍질’과 같은 고체성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오늘, 또, 그 껍질은 쉽게 벗겨질 것 같지 않은 조짐이다. 흡사 거기 있기조차 않은 듯이 뿌옇게 앉아, 한없이 맥을 잃은 그녀의 모습이 그런 예감을 준다. (…) 저것은 그녀가 끌고 다니는 거의 병적인 고요함이다”(같은 곳)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 ‘고요함’은 공간적 성격을 잃고 작중인물의 성격 또는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은유로서 다가온다. 이인성은 아직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서술자의 시선과 의식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에 물질적인 질감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한 인간의 실존적 정서를 풀어놓는다. 언어보다 근원적인 물질적 요소와 의식의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효과는 우리를 이 소설의 공간 속으로 강하게 유혹한다.
‘어둠’의 묘사에서는 물질적 요소와 정서의 융합이 더 전면적이고 활성적이다. 빛을 빨아먹는 거머리! 끈적거리거나 축축한 물질적 성격과 함께 어둡고 텅 빈 결핍을 느끼게 하는 집 안과 거기에서 일하는 그녀의 심리상태를 거머리의 흡착성과 결합시키는 놀라운 상상력은 우리의 몸속에 어떤 생리적 반응을 일으킬 만큼 강한 느낌을 동반한다. “그 칼빛을 빼면, 그녀가 홀로 앉아 있는 저 대여섯 평의 넓이 속에서, 모든 것이 빛을 빨아먹는 거머리들이다(이상스럽게도, 그 거머리들이 그녀의 칼빛만은 어쩌지 못한다). 볕이 전혀 들지 않아, 쾨쾨칙칙한 냄새가 살내음처럼 깊숙이 배어 있는 이 집 안에는 항상 축축한 어둠의 거머리들이 스멀거린다. 전등을 켜도 마찬가지다. 천장에 늘어붙어 있던 거머리들은 불그스레한 허공을 가로질러 식탁이며 시멘트 바닥 위로 뚝 뚝 떨어져내려, 탐욕스레 전등빛을 빨아먹는다. 오래 전에 제 빛을 다 빨린 천장과 벽의 피마른 살껍질은 거머리들의 습기에 젖어 온통 쭈글누글거린다. 때로는, 이 집 전체가 마른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한 마리의 거대한 거머리가 되어버린 것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녀에게서조차 간혹 징그러운 흡인력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10면)
『강 어귀에 섬 하나』에 실린 작품들의 서술주체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한동안 인칭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대상에 대한 서술자의 개입, 또는 세상과 서술자 사이의 관계의 활성화가 그만큼 지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대신 충분한 시간 동안 집요한 응시 또는 사유가 진행된다. 이처럼 더딘 진행은 억압된 욕망과 세계 사이의 충돌이 예비되는 시간에 대한 미분 또는 확장의 결과이다. 서술자의 시선은 먼저 언어적 층위보다 더 내려가 물질적 차원과 맞닿은 층위에 가닿는다. 이러한 응시는 물론 객관적 관찰자의 평면적 시선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이 각질성을 잃고 스스로 부피와 질감을 갖게 되면서 어떤 정서 또는 심리상태와 융합되게 한다. 살아숨쉬는 존재의 분위기는 점차 삶의 차원에서 일어나게 될 사건에 대한 예감까지 뿜어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융합 속에 내재된 모순이 폭발할 때 응시주체의 인칭이 드러난다. 여기까지 응시자는 삼인칭적 세계를 바라보는 ‘사인칭 현재’의 시점에 숨어 있다. 앞의 소설에서, ‘그녀’가 주인집 여자에게 “이년이 서방질하구 나면 간덩이가 부어터지나베!”(24면)라는 언어폭력에 맞닥뜨리는 순간 응시자는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느끼는 ‘나’로 드러난다. ‘나’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시야가 흐려지고 ‘어질머리’를 앓게 된다. 물질성과 실존적 정서를 하나의 분위기 속에 통합하던 밀도 높은 문장들은 해체되어 구문론적 질서를 잃고, ‘나’는 이제 욕망의 분출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다. “아… 향긋한 개천 냄새… 어… 눈이 내리네… 뽀얗고… 암갈색 문 위에서… 컴컴하다… 환해… 잉잉잉잉…”(27면) 이처럼 감각적 편린들이 그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러한 혼돈은 한 사건의 효과이고, 그것은 성장기에 있는 소년이 낯선 욕망과 맞닥뜨리는 모습을 통해 소설적 의미를 형성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드러나는 그 욕망은 소년으로 하여금 어둠에 묻혀 자신의 몸까지도 지워버리고 싶게 할 만큼 지독한 혼란을 몰고 온다. 이 소설의 속편인 「무덤가 열일곱 살」에서도 “그의 어머니가, 뱀과 마주치는 날이면 ‘그년’이 되”고, 그는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가 개옻나무 잎새로 온몸을 문질러대며 용두질을 하고, 다시 허물어진 언어질서 속에서 “‘나’가 죽어야 그나마 ‘그’가 살 텐데…” 하고 중얼거린다(48〜50면). ‘그’와 ‘나’의 분열, 또는 ‘그’를 회복하려 하는 ‘나’의 몸부림은 자신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처리할 줄 모르는 소년의 미성숙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포획되기 어려운 대상에 대한 작가의 탐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작품들의 서술주체가 동일한 인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소설집은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욕망’의 인류학적 근원으로부터 현대사회의 억압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요소와 성질 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그려낸다. 낯선 욕망의 분출에서 비롯된 깊이에의 모험은, 자신만의 ‘갇힌 시간’을 벗어나 한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쳐보려는 유혹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탈들로써 우리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다양한 욕망을 끌어내는 환상적 실험을 통해 편견 없는 인간으로 새롭게 조탁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자신의 ‘불륜’ 행위와 그것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서술자 사이에 스크린을 설치해두고 ‘순수한 불륜’을 다양한 층위에서 살핀 후, 마침내 폭력과 공포로 지배되는 공간에서 순수한 사랑의 가능성 또는 불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만 경계가 지워지는 욕망의 상(像)이 드러난다.
마지막의 두 작품은 ‘강 어귀 바다 물결’이란 큰 제목에 묶여 있지만, 그는 아직 타인의 난바다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이 소설집에서 타인은 미래의 가능태로만 잠복해 있다. 이인성은 싸르트르(J.-P. Sartre)처럼 ‘타인의 시선’을 지옥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현실을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선험적 구조로 여기지도 않는 듯하다. 타인은 가까스로 이루어낸 내적 통일성을 흐트려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가봐야만 알 어떤 다른 삶”(82면)을 향해 돛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3
이인성이 분할되거나 포획되기 어려운 ‘욕망’과 씨름하는 동안, 최인석(崔仁碩)은 구체적인 현실에 신화적 보편성을 결합하는 매우 독특한 실험에 나선다. 네 편의 연작 중편소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나의 鬼神』의 무대는 ‘달동네’이지만, 그것은 무속ㆍ민담ㆍ신화와 결합되면서 매우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감싸이게 된다. 철거당할 운명에 놓인 ‘달동네’의 현실공간은, 작가 자신 또는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그려지거나, 그곳에 최초로 터를 잡은 ‘염소 할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역사가 오롯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세계는 신화적 요소와 결합하면서 원초적 감성이 지배하는 이차적 상징세계로 변화된다. 신화적 세계는 순진성을 잃지 않은 어린아이들이나 본성을 잃지 않은 할머니 같은 인물들을 통해 현실계로 침투해 들어온다. 「염소 할매」를 제외한 세 편의 이야기들에는 세 아이들이 서술주체로 등장한다. 이들은 무속ㆍ민담ㆍ신화를 매개하는 중개자들이며, 그들 자신만의 영토인 망루에서 그들이 속해서는 안될 달동네를 내려다본다. 「내 사랑 나의 귀신」에서는 송전 철탑이, 「직녀 내 사랑」에서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내 사랑 나의 암놈」에서는 교회의 첨탑이 각기 무속과 민담과 신화를 매개하는 중개탑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내려다보는 망루가 되고 있다. 이 망루들에 오르면, 그들은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된다.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된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전도된다. 게다가 「직녀 내 사랑」의 ‘한정수’는 괴물이 되고 싶어하고, 「내 사랑 나의 암놈」의 ‘솔개’는 실제로 날짐승과 비슷한 괴물의 형상으로 변신해간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나의 鬼神』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분할되어 있는 소설공간인가? 꼼꼼히 읽어보면, 이 소설은 이원론적인 세계라기보다는 두 방향으로 뻗어가는 이질적인 욕망들을 하나의 구도 속에서 통일시키고 있는 은유적 공간이다. 이 아이들의 도피적 일탈의 근원은 그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의 고통이기에, 그들이 빚어내는 환상의 크기와 강도는 달동네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고통의 크기와 강도에 비례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소설에 흘러들어 삶의 공간에 슬프도록 아름다운 광경을 풀어놓는 신화적 세계는 비극적 정조에 의해 확장된 심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도시이며 영토인 한정수의 느티나무가 무려 여섯 면에 걸쳐 눈부시게 아름다운 형상을 얻고 있는 것도, 허구한 날 싸움질을 하며 급기야 가스통을 터뜨려 서로를 죽이고야 마는 아비ㆍ어미가 만들어내는 지옥 같은 집안 분위기 때문이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마다 여러 곳에서 반복되는 넋두리도 마찬가지이다. “양 같은 범이 살고 범 같은 양이 사는 곳, 금 같은 돌이 나고 돌 같은 금이 나는 곳, 꽃 같은 비가 내리고 비 같은 꽃이 피어나는 곳”은 신화적 세계에 투사된 현실이 빚어내는 역설적 공간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망루에서 내려다보는 세계는 자신들이 몸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공간이거나 악귀 ‘상류(相柳)’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자신이 신화적 세계에서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솔개’는 “까마득한 날로부터의 오랜 적을 다시 한번 쓰러뜨리기 위해서”(193면) 이땅에 왔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신화적 세계는 선과 악이 끝없이 갈마드는 무한한 동일성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말미에 놓인 구원에 대한 신화적 암시는, 신화의 순환적 구조로 인해 그대로 악무한(惡無限)에 대한 암시로 환치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인석이 이러한 세계를 자신의 소설 속에 끌어들인 것은 어쩌면 ‘계급전선’의 문제를 현실 내부에서 해결하기 어렵다는 90년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될 수 없는 모순으로서의 선과 악의 문제로 환원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결국 “상류란 놈이 교활하여 어디에나 존재하면서도 어디에서도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193면)듯이 악은 신화 속으로 숨어버리고 사람들은 죽어서야 ‘유도(幽都)’나 ‘플래닛 X’로 날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솔개처럼 자유롭다”(250면)로 끝나는 이 소설의 여운은 어딘지 공허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소설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강렬한 비판과 항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일탈의 공간은 구조적으로 타인이 부정되는 세계이므로, 죽음에 임박한 솔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는 무한히 내가 아닌 것들 속으로, 타인들 속으로, 이 세계로 흩어져버릴 수도 있”(193면)다는 말은 설교처럼 당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80년대식 리얼리즘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 환상적 리얼리즘은 과거의 소설들에 식상한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면서 현실을 중층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실험이다. 그러나 패러디의 남용은 어딘지 모르게 교양과 지식을 동원하여 너무나 많은 내용을 함축하려는 의도 때문에 구체적인 현실의 모서리가 모지라져버린 듯 중성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4
하성란(河成蘭)의 『옆집 여자』는 정교하고 치밀하다. 우선 동일한 분량으로 씌어진 열 편의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어 외형적으로 정갈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각 편의 첫 문장부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단문들이다. “507호에 새 이웃이 이사를 왔어요.”(12면) “정전사고는 어젯밤 열두시 십분경에 일어났다.”(38면) “자명종이 울리지 않는 아침이었다.”(64면) “너의 시계는 세시 십사분에서 멈췄다.”(116면) 등등. 이 짧은 문장들은, 다 읽고 나서 다시 보면, 그 자체가 사건의 핵심이거나 사건에 내포된 의미에 대한 강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작가의 시선은 사건들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지점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리고 그의 문장들은 일상의 잡다한 일과 사물, 그리고 인물들의 행위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가면서도 무비카메라가 만들어낸 영상처럼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빠르게 만들어낸다. 작가의 정서적 개입은 물론 철저하게 차단된다. 일상의 한 국면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강렬한 정서적 반응과 반성적 사유를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서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이다. 인물, 사물, 언어 들은 각기 추호의 부풀림도 없이 빈틈없는 관계망을 이룬다. 그러나 기하학적 균형과 정확성을 느끼게 하는 이러한 구성과 서술은 한 번의 파열 또는 균열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이렇게 하성란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는 일상은 먼저 무의미할 만큼 지루하게 반복되는 평면적 껍질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들은 대개 그들 자신의 자각 여부와는 관계없이 삶의 특수한 국면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쳇바퀴를 돌리는 듯한 일상 속에서 근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끼게 되어 한동안 그들 나름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루어간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허울을 쓴 수동적 의존성은 의도적으로 배신당하거나 사고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러고 보면, 일상의 굳은 껍질들 아래에는 사회 내부에 잠복해 있는 구조적 모순과 각 개인들 자신의 실존적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우리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태의 반전 또는 전복은 물리적인 원인과 사회적 관계망이라는 상황적 원인의 결합으로 생겨난다. 하성란은 이러한 두 조건을 하나의 세계 속에 자연스럽게 결합시킨다. 교통사고의 현장을 보여주는 「양파」의 첫 장면에서 경찰은 뒤집힌 승용차의 내부에서 분홍색 욕실화와 회칼을 발견하고 이 사고의 원인을 차에 탔던 남녀의 동반자살로 추정한다. 이러한 오인조차도 우리 사회의 풍속도에 대한 암시성을 띠는 것이지만, 소설의 내용은 물론 이러한 추정과는 무관하다. 일상적 안정감을 상징하는 듯한 욕실화와 위기의 서슬처럼 보이는 날카로운 회칼은 그 자체로서도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배치를 보여주지만, 이 사물들은 횟집에서 일하는 남자의 필수품일 뿐만 아니라 여자와의 우연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매개로서도 활용되며, 둘 사이의 관계에 짙은 불안감을 안겨주는 암시적 효과를 빚어내는 것이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봉투들을 가져와 꼼꼼히 점검하고 그 목록들을 만들어가는 기이한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곰팡이꽃」은 그 줄거리와는 무관하게 일종의 사회학적 방법으로 우리 시대 소비생활의 내면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관심은 다른 소설들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된다. 정전사고의 원인을 조사하다가, 전신주의 디딤쇠에 옷가지들을 하나씩 걸쳐둔 후 맨 꼭대기에 팬티를 걸어두고 “태초의 인간 아담의 모습”(41면)으로 사라져버린 사내의 삶을 추적하게 되는 「깃발」,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에 마음속에 살의를 품은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함께 사진을 찍는 「즐거운 소풍」, 사회에 나와 처음 만났던 사람들이 타락한 모습으로 재회하게 되는 「치약」 등은 전문가들이 보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특수영역의 언어와 지식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삶의 양상과 구조화된 배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소설들에서 일상의 표층에 균열을 가져오는 파탄들은 「올콩」에서처럼 깨어진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신에 대한 환멸과 함께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허술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반추하게 한다. 그러기에, 하늘을 날기를 꿈꾸던 여자아이가 한쪽 다리를 잃은 후에야 몸의 반쪽만이라도 “영원히 허공에 떠 있을 수 있”(140면)게 되는 아이러니를 통해 사회화 과정이 영원히 지체되는 경우를 보여주는 「촛농 날개」나, 성인이 되어가는 문턱에서 생긴 사고(강간)로 인해 기억을 상실하고 꿈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게 되는 처녀를 그리고 있는 「악몽」은 앞의 소설들과 대비되는 의미론적 구도에 놓임으로써 이 소설집에 균형감을 조성하고 있다.
평범해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채 우리 시대의 권태로운 짐을 하나씩 나누어 짊어지고 있는 인물들의 연장선에서 발자끄(H. de Balzac)의 ‘인간극’이 자연스레 떠오르기에, 하성란의 인간탐구는 더 지속되어도 좋을 듯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그는 일상의 껍질들을 하나하나 벗겨간다. 그리고 성실한 조사와 관찰을 통해 현실구성의 요소들 하나하나에 물질적 근거를 확보해가며 단단해 보이는 현실의 표층을 선명하게 그려냄으로써 균열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균열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틈 사이로만 우리의 사유는 펼쳐지고 내일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5
개성적 편차가 매우 큰 세 작가의 소설집들을 편린만 살펴보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심이 크게 다른 만큼 이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소설집들은 ‘표면’을 중심축으로 하는 하나의 구도 속에 놓일 수는 있다. 사건들이 발생하는 표면을 일상이라 한다면, 이인성은 그 아래쪽 심층을 파헤치고 있고, 최인석은 그 위쪽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쳐가고 있으며, 하성란은 일상이라는 표면 자체의 각질에 균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구도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환상’과 ‘타인’이라는 두 주제를 놓고 세 작가의 성향을 간단히 대비해보기로 한다.
이 소설집들은 부분적으로든 전면적으로든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학적 주제가 되어 있는 ‘환상’을 문제삼고 있다. 이인성은 성장기의 소년이 자신의 낯선 욕망과 마주칠 때 환각에 빠져 ‘하수구’와 같은 어두운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지워버리려 하거나 환상적 탈놀이를 통해 잠재된 욕망들의 난장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 또는 환상 들은 일탈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주체가 성장해가면서 마주치거나 확인해야 하는 심리적 근원에 대한 천착의 결과이다. 이와 달리, 최인석은 신화적 환상을 통해 우리 현실에 내재해 있는 절망적인 악의 존재를 고발한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환상의 크기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온 사회적 고통의 크기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현실계로 환원될 수 없는 인물들로 인해 소설의 결말이 신화적 구원에 대한 암시로 흐르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신화적 공간으로 끌고나가는 방법상의 부작용을 낳는다. 하성란은 「악몽」에서 유일하게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데, 주인공의 살인은 강간과는 달리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는 충격과 분노가 빚어낸 환상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평범한 인물들의 내면에 도사린 치사량의 독성이, 충격적인 사건이 만들어낸 틈새로 틈입해 들어오는 심리적 리얼리티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끝으로, 우리의 삶을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타인’의 존재를 이 작가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욕망이라는 하나의 자장에 들어 있어 타자화되기 어려운 성적인 상대역들을 제외하면, 『강 어귀에 섬 하나』에 나오는 타인들은 「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에서 어머니에게 폭언을 퍼붓는 ‘주인년’과 「마지막 연애의 상상」에서 조직을 대신하는 익명의 사람들뿐이다. 이 작가의 관심이 행위의 원동력이 되는 욕망의 탐구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가가 타인의 난바다로 나설 때 그의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밀도있는 문체에 어떠한 변화가 생길지 관심이 쏠린다. 최인석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을 제외한 수많은 인물들이 타인이지만, 신화적 공간으로 상정된 망루에서 내려다보는 그들은 대부분이 타락한 인간이거나 악의 화신 들이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들은 신화적 세계로 이월될 수밖에 없다. 하성란의 수많은 타인들은 배신성과 악의를 품고 있거나 타락한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과 동일한 차원에서 삶의 현실을 촘촘히 구성하고 있어 세계 자체와 등가적인 존재들로 보인다. 그러기에 균열을 예비하고 있는 그의 소설세계에는 작으면서도 확실한 희망의 싹이 담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