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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인숙 金仁淑

1963년 서울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칼날과 사랑』 『유리 구두』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그 여자의 자서전』, 장편 『먼길』 『우연』 등이 있음. sunis63@yahoo.co.kr

 

 

 

조동옥, 파비안느

 

 

수령옹주 묘지(墓誌)는 중앙박물관 도록 134면에 나와 있다. 고려 1335년 충숙왕 복위 4년의 것으로 기록된 이 묘지의 화보는 희고 매끈한 재질의 고급 종이로 묶인 도록 속에서 유독 거무튀튀하다. ‘고려시대의 묘지는 판석에 글을 쓸 면을 잘 다듬고 그 위에 지문을 음각한 것이 전형적이었다’고 도록은 설명한다. 그러니까 세로 86.5쎈티 가로 61쎈티의 검은색 지석(誌石)은 판석이란 소리다. 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판석이란 정보가 유의미할 것은 없다. 그녀가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은 그 검은 판석 위에 새겨진 흠집들이다. 보존상태가 나쁘지 않아, 들여다보면 생생히 살아나올 듯한 지문 위로 바람이 스쳐지나간 것 같은 흔적들이 대각선으로 넓고 좁게 그어져 있다. 날카로운 것에 긁힌 것 같은, 그래서 쇳소리를 낼 것 같은 흠집들은 아마도 인위적인 것일 터이다. 그러나 바람에 쓸린 듯한 대각선의 무늬들은 바람처럼 빠르고, 지속적이고, 거세게 보인다. 땅속에도 바람이 불까? 혹은 바람이 땅속에서 생성되는 것일까? 묘지는 ‘묘지석, 묘지명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사람의 성명과 경력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 또는 거기에 새긴 글을 일컫는다’라는 도록의 설명처럼 수령옹주의 묘지는 600년 이상을 땅속에 묻혀 있었다.

한뼘도 안되는 길이로 축소된 화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대원고려국고수령옹주묘지명’이라는 글자가 해독된다. 아래로 쏠린 바람의 결을 쫓아 그다음 줄이나 다시 그다음 줄까지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金氏爲貴族蓋起新羅之初…… 김씨는 귀족으로서 그 기원은 신라 초부터이다. 俗傳金樻降之自天取以爲姓又言自以小昊金天之後…… 시속에 전하기로는 금궤가 하늘에서 내려온 까닭으로 그것을 성으로 삼았다고도 하며…… 그녀는 묘지의 문장들을 해독할 수 있다. 한 역사정보 싸이트에서 지문의 국문 해제를 발견한 것은 그녀가 묘지의 글자를 한자 한자 찾아가며 스스로 완전히 해독한 이후의 일이었다. 비록 여러 군데에서 오역을 한 것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 오역이 전체의 뜻을 훼손시킨 것은 아니었다. 한문 실력이 일천한 그녀에게 몇백년 전의 글자들을 해독하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띄어쓰기도 없는 지문은 마치 무슨 암호 같았으므로 그것을 문장으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추리력뿐만이 아니라 상상력까지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한한 끈기로 한자 한자를 더듬어나갔고, 마침내 그녀가 필요로 하는 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迺所鍾愛當其遠送憂懣成疾自後時已時作至元統三年病殆藥不效越九月乙酉卒年五十五. 사랑하는 딸이 멀리 가니 근심과 번민으로 병이 생겼는데 그후 때로 더했다 때로 덜했다 하다가 원통 3년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하고 약도 효험이 없어 9월 을유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55세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환갑을 한 해 앞두고 세상을 떴다. 당신은 귀하게 태어나지도 못했고, 많은 자식을 두지도 못했으나 수령옹주보다는 몇해 더 세상을 살았다. 그녀가 어머니와 헤어진 지 16년이 되는 해였다. 그 열여섯 해 동안 그녀는 어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딸을 두고 멀리 가니 근심과 번민으로 병이 생겨 그후 때로 더했다 덜했다 하다가 세상을 떴을까. “어머니는 행복하게 살다 가셨습니다. 눈을 감으실 때 그분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분이 이제 이 세상과는 달리 편한 곳으로 가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식을 당신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편지에는 어머니의 죽음이 평화로웠다고 씌어 있었으나, 그녀로서는 대체 평화로운 죽음이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이 세상과는 달리 편한 곳으로’ 가셨다면 그분의 이 세상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고통과 번뇌와 고독과, 혹은 질병이었던 게 아닐까. 그녀는 편지지를 펼쳐놓은 책상 앞에 앉아 몇시간 동안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묘지의 글자들을 해독할 때면,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호흡을 완전히 정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하나의 글자가 풀리고 또 하나의 글자가 풀리고 마침내 모든 글자들이 풀렸으나,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앞…… 편지의 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호흡을 완전히 멈추고, 숨이 넘어갈 듯한 통증 속에서 생각했다. 어머니는 언제 어느 순간에 행복하였을까.

 

그녀가 땅에 묻힌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시기적으로만 말한다면, 분명 어머니와 헤어진 이후부터의 일이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 여고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은 도심 외곽에 건설된 단독주택 단지에 있었는데, 단지 내에는 부지만 조성되고 집은 지어지지 않은 공터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 공터를 가로질러오다가 그녀는 땅에 반쯤 묻혀 있는 참빗을 발견했다. 빗살 하나 빠지지 않은 멀쩡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 참빗으로 땅을 긁자 마치 머리카락에 촘촘히 박혀 있던 이와 서캐가 쏟아지듯 봄날의 잔 풀뿌리들이 흙 바깥으로 돋아났다. 참빗의 무엇이 그녀를 끌어당겼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그 참빗을 가지고 돌아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해에 그녀의 아버지는 집 앞마당에 감나무를 심었다. 젖은 땅에 삽날을 깊숙이 넣어 한 삽을 퍼내자 흙의 속살이 드러났다. 마치 삶은 감자 속살같이 김이 오르며 포실하게 부서질 듯한 흙속에는 자잘한 돌멩이들뿐 아니라 담배꽁초와 볼펜심 하나와 뜻밖에 손잡이가 사라진 망치머리 하나가 묻혀 있었다. 아버지가 멀리 던져버린 망치머리를 그녀는 얼른 달려가 주워 다시 책상 위 참빗 옆에 갖다두었다. 그녀가 다닌 여고는 바로 산 아래에 있었는데, 남들이 미적분을 공부하는 수학시간에 그녀는 홀로 뒷산에 올라가 땅을 팠다. 흙속에서는 찢겨진 종잇장이나 풍선조각 같은 것들이 나왔고, 여자팬티와 생리대도 나왔다. 그 시절 그녀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았다면 그녀는 서슴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큰 삽, 말하자면 포클레인 같은 걸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는 팔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파고, 파고, 또 파서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병증을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혼한 지 1년이 안돼 그녀를 아버지에게 떠맡기고 친정식구들이 살고 있는 브라질로 떠나버렸다. 그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단호하고 매몰차게 진행되었는지, 이미 이혼을 한 뒤였지만 아버지에게도 그 일은 상처가 되었다. 당신으로 말하자면 이혼할 당시 자식이고 뭐고 뒤도 안 돌아본 나쁜 아버지였으나, 난데없이 딸을 떠맡게 된 순간의 당혹감과 노여움이 어찌나 컸는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딸의 책상이 온갖 버려진 것들로 가득 찬 후에야 딸의 정상적이지 못한 집착을 발견했다. 사실, 그를 나쁜 아버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재혼한 아내 대신에 딸의 흙물 든 신발과 양말과 바짓단을 손으로 비벼 빨았다. 밤마다 목욕탕 하수구로 검붉은 흙물이 콸콸 흘러내려갔으나, 빨랫줄에 널린 그녀의 양말에는 여전히 흙물이 남아 있었다.

어느날 저녁,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공터에서 붉은색 비닐봉지가 비죽이 끄트머리만 드러낸 채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한이었고 땅은 꽝꽝 얼어 있었으나 그녀가 비닐봉지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기자마자 그것은 쑥, 소리를 낼 듯 빠져나왔다. 봉지 속에는 바짝 언 찹쌀떡이 들어 있었다. 그날은 수능 전날이었다. 그것은 무뚝뚝한 아버지가 기를 써서 생각해낸 농담이고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잠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늘 노력하는 타입의 사람이었고, 그건 새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반항하는 것보다는 협조하는 쪽을 택한 그녀도 다를 것은 없었다. 집안의 그런 분위기가 새어머니의 뱃속에까지 전해졌을까. 그녀의 이복동생은 태어나는 순간 너무나 조용하게 울어 산모와 의사와 간호사를 동시에 놀라게 했다. 어찌나 조용조용 우는지, 우는 게 아니라 마치 말을 하는 것 같았어. 새어머니의 말마따나, 아이는 순하고 영리하고 눈치가 밝았다. 그녀가 자기보다 열일곱살이나 어린 이복동생을 내려다볼 때면, 아기는 말을 건네듯 조용조용 울었다. 미안해, 내겐 지금 준비된 말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렇게 말을 건네듯, 조용조용……

 

고작 한 삽을 푸면 쏟아져나오는 마른 흙 묻은 잡동사니 대신에, 좀더 깊은 땅속의 젖어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였을 것이다. 당시 그녀가 만나던 남자는 그녀보다 늦은 졸업을 하면서 논문을 준비중이었는데, 그가 필요로 하는 논문의 자료 중에 묘지명이 있었다. 복사된 탁본을 보여주면서 남자가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이건, 땅속에 있던 거야. 무덤 속에 묻혀 있었지. 복사 상태가 나빴던 것인지, 아니면 지석 상태가 나빴던 것인지 복사된 탁본은 그냥 시커먼 흔적으로만 보였다. 남자는 그것이 백제시대 사람인 흑치상지의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자신도 그 탁본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무엇이 그녀를 매혹시켰던 것일까. 땅속이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무덤 속이라는 말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너무나 먼 과거의 이름, 백제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남자가 노트북의 자판을 탁탁 쳐가며 논문을 쓰는 동안 책상 아래에 쪼그려앉아 그 탁본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축축하고, 오래된 흙냄새를 풍겼다. 삽 따위로는 퍼낼 수 없는, 더 깊은 곳의 축축함…… 남자가 노트북을 탁 덮는 순간, 그녀는 관뚜껑이 덮이는 소리를 들었고, 축축하고 어두운 곳의 적요가 얼마나 완벽한 것인지를 알았다.

오래 사귀지는 않았으나, 그 남자는 그녀가 알았던 남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었다. 침대가 없는 방, 나란히 방바닥에 누워 남자는 속삭이곤 했다. 조선의 어떤 남자는 과거시험 답안지를 대필하는 일을 하고 살았대. 말하자면 사기를 치고 살았다는 건데, 그게 시신과 함께 묻어 영원히 기릴 만한 자랑이었을까? 남자가 말해준 ‘조선의 어떤 남자’는 조선 정조시대의 선비인 이가환이고, 그 묘지명을 쓴 사람은 노긍이다. 그런 사실을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방바닥에 나란히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남자에게 묘지명들의 내용을 들을 때, 그녀는 그 내용보다는 그것이 묻혀 있던 땅속에 매혹될 뿐이었다. 박지원은 자기 누이의 묘지명을 직접 썼어. 그런데 너무 눈물겨워. 누이가 죽고 난 다음에 그 남편은 “살길이 막막하여 어린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 궤짝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떠나가니……” 아무리 죽은 사람을 기리는 묘지명이라고 해도, 박지원 같은 사람은 역시 고통과 슬픔은 남겨진 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야.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녀가 대꾸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지. 남겨진 자는 너무 슬퍼서, 그 남겨진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도 그 슬픔에 기가 눌려서…… 말이 되지 못한 언어는 다만 죽은 자를 쫓아가거나 그 속에 같이 묻힐 뿐이지. 또 이런 묘지명이 있어,라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덕보 홍대용의 묘지명인데, 이것 좀 봐, 재미있는 구절이네. “처음에 서양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고 말했다. 하지만 땅이 돈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덕보는 오래전부터 지구가 한 번 돌아서 하루가 된다고 설명했다.” 홍대용이 갈릴레이보다 먼저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 같지 않니? 그랬다면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리면서까지, 지구는 돈다고 말했을 텐데.

때로는 그녀가 먼저 그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인상을 찌푸렸고, 그때까지 화제에 올리지 않은 묘지명을 간신히 떠올려내곤 했다. 아, 그래. 자기 마누라 묘지명을 쓴 남편도 있었어. 묘지명은, 그냥 별로야. 착하고 아름답고 살림 잘하고 시부모 잘 모신 그런 여자였다, 뭐 그런 식.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내의 이름은 누구였다,라고 묘지에 분명히 써넣었다는 거야. 여인들의 묘지에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냥 무슨 씨였다고 성만 밝히게 마련이지. 그런데 그 남편은 그러지 않았어. 그 말을 하면서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누웠다. 여전히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그는 말했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 그녀는 아주 오랜 후에야 그 묘지명이 누구의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조 의종 2년에 예부낭중을 지냈던 최루백의 아내 염씨의 묘지였다. 뜻밖에도 죽은 여인의 이름 ‘경애’는 그녀의 이름과 같았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 그녀는 헤어진 남자의 말을 다시 떠올렸고, 그와 헤어진 것을 처음으로 애통해했다. 그가 자신과 결혼을 꿈꾼 적이 다만 한순간이라도 있었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와 헤어진 후 그녀의 기억 속에는 그의 손만이 남았다. 손이 어찌나 크던지 손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을 전부 덮을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연애에 그런 큰 손이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어떻든 그 손에 매혹되었다. 같이 누워 있다 졸리기 시작하면 그녀는 그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잠이 들었다. 그의 손 위에서 어둠은 깊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자주 숨이 막혔고, 무슨 까닭인지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가슴 위로 내려앉아 그녀를 땅밑, 저 밑까지 내리눌렀다. 그러나 그 정도라면 괜찮았다. 더 큰 죄를 그런 정도의 작은 벌로 대속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간의 죄 속에 감춰진, 자신만이 아는 천벌을 받을 죄를 그렇게 감쪽같이 씻어버릴 수 있다면…… 손이 큰 그 남자와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령옹주 묘지의 탁본은 그 남자가 남겨놓은 짐 속에 들어 있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일회용 면도기 하나와 칫솔 하나, 그리고 복사용지들뿐이었다. 그 복사용지들 사이에 끼여 있던 수령옹주 묘지의 끝머리는 시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산도 장한 그 터요 물도 아름다운 그 물가로다 길한 조짐 있는 터에 무덤을 편안히 모셨으니 뉘 무덤에 누구의 부묘인가…… 천년 지난 뒷날에도 이 글 상고하는 이 있으리…… 그것은 죽은 옹주라기보다는 그 무덤에 바쳐진 시문 같았다. 천년 지난 뒷날…… 그 시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녀의 가슴속에 흙냄새를 불러일으켰다. 시문을 쓴 사람의 말은 확실히 틀리지 않았다. 육백칠십년이 흘러, 누군가는 흙속에 묻혀 있던 그 글을 읽고 듣고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령옹주는 1281년 충렬왕 8년에 태어났고 1335년 충숙왕 복위 4년에 죽었다. 그의 아비는 밀직승지였고, 어미는 판대부감집 딸이었다. 열네살에 혼인을 한 남편은 현종임금의 넷째 아들이며 문종과는 동모제인 평양공의 10대손이었다. 왕의 직접적인 혈통까지 닿자면 11대나 거슬러올라가야 하는 형편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왕족의 빛이 보잘것없었던 것은 아니다. 옹주는 비록 서른이 되기 전에 청상이 되기는 했지만, 잘 키운 아들의 덕으로 왕의 핏줄이 아니었음에도 ‘옹주’ 호칭을 하사받았다. 묘지에 의하면 ‘황경 2년 충숙왕이 즉위하던 날에 옹주의 맏아들 회완군이 왕을 좌우에 모시고 예법을 어기는 것이 없으니, 그 큰 은혜가 그 어미에게까지 미쳐서 이때에 옹주는 수령(壽寧)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이 명하여 옹주에게 달마다 녹을 내려 맏공주처럼 하게 하니, 이 역시 특별한 은혜였다고 묘지의 문장은 이어졌다. 이 특별한 은혜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묘지는 이러한 문장을 덧붙여놓는다. “김씨는 대군의 배필이었은즉 그 칭호를 종실(宗室)의 딸과 같이할 수 없으니, 옳지 않다고 말할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묘지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옹주는 여인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것임에 틀림없다. 왕의 혈통에 시집을 가 옹주가 되었으며, 대군인 아들 셋과 역시 옹주가 되는 딸 하나를 두었다. 여인으로서는 복된 삶이 아니었으랴. 그러나 묘지는 이 여인의 복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과 고통에 주목하고 있다.

 

연우(延祐) 지치(至治) 연간에 황제의 명령이 있어 왕씨의 딸을 찾았는데, 옹주의 딸이 뽑히는 축에 들어 지금 하남등처 행중서성좌승(河南等處行中書省左丞) 실열문(室烈問)에게 출가했으며, 정안옹주(靖安翁主)를 봉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의 자녀들이 뽑혀서 원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건너는 해가 없으며 왕실 친근의 귀한 집이라도 숨기지 못하고, 모자가 한번 이별하면 아득하게 만날 기약이 없으니, 슬픔이 뼈에 사무치고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나게까지 되는 자도 한두 명에 그치지 않았다(母子一離杳無會期痛入骨髓至於感疾隕謝者非止一二). 천하에서 지극히 원통한 일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으랴.

 

痛入骨髓, 통입골수, 아픔이 골수에 스며들다…… 그녀는 그 문장 위에 손가락을 얹어놓고, 두 번 세 번을 읽었다. 통입골수, 통입골수…… 그러니까 수령옹주는, 그 복받은 여인은 딸을 공녀로 빼앗긴 후 그 슬픔이 골수에 스며들어 끝내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옹주가 살았던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나라는 외적에게 짓밟히고, 딸들은 외적에게 몸을 주기 위해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가야 했다. 이 거대한 침탈 앞에서는 침략당한 나라의 작은 권력은 땅바닥에 내팽개쳐도 좋을 만큼 보잘것이 없었다. 훗날 공민왕의 외조부가 되는 홍규는 당시 막강하던 벼슬에도 불구하고 딸을 공녀명단에서 빼내지 못하자 차라리 중이나 되라고 머리를 깎아버렸다. 좀더 품질 좋은 고려여인을 원나라에 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원나라에서 온 왕비는 홍규의 배반에 분노하여 뼈를 부수고 재산을 몰수하고 원지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가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순간의 놀라움과 공포가 눈에 잡힐 듯하다. 홍규도 그랬겠지만 수령옹주에게도 빼앗기는 순간의 딸은 생명이고, 가진 것의 모두이며, 무엇보다도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통입골수…… 하늘이 무너져 뻥 뚫린 땅속으로 고꾸라져 처박히는 왕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 여인은 죽는 날까지도 딸을 만나지 못했다.

 

“나도 해줄 얘기가 있어.”

손이 큰 남자와 연애를 하던 시기에, 늘 그의 얘기만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녀도 가끔은 무슨 이야기든 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었다.

“오래전에, 굉장히 이상한 병에 걸린 적이 있어.”

논문을 쓰느라 지친 남자는 그녀의 얘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그녀의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저 혼자 부풀려졌다.

“어느날부터 배가 불러오는 거야. 나는 그때 겨우 열다섯살이었는데, 배가 자꾸 불러오니 얼마나 보기 흉했겠니. 아무리 적게 먹고, 나중에는 아예 굶고, 그래도 안되니까 하루 몇차례씩 토하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배는 계속 불러오는 거야. 혹시 이러다가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정말 겁이 나더라.”

“아들이었어? 딸이었어?”

잠든 줄 알았던 남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목소리로, 그러나 짐짓 진지한 척 물었다.

“몰라. 지금까지도 내가 궁금한 게 그거야. 예수님은 어떻게 아들로 태어났을까. 성령으로 잉태했는데, 어떻게 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어떻게 남자로 커서 여자들의 사랑을 받기까지 했을까.”

“아들이었니?”

“성령이었어.”

그녀가 아이를 낳은 것은 열여섯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스물여섯살이 아니라 열여섯살. 열네살에 늦은 초경을 시작하고, 바로 그 이듬해에 아이를 가져, 다시 그 이듬해에 떼어내지 못한 아이를 낳았다. 공교롭게도 그 모든 일은 부모의 이혼 전후에 일어나,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배가 불러오는 줄도 몰랐다. 그녀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본 것은 생후 열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열흘 후, 그녀는 아직도 출산 후의 출혈이 계속되는 아랫도리에 두꺼운 생리대를 차고, 아버지의 집으로 옮겼다. 무슨 일이 있었니? 묻는 아버지에게 그녀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에게와는 달리, 그녀는 훗날 남자와 잠을 자게 될 때에는 간혹 성령 이야기를 했다. 남자들은 그녀의 농담 실력이 별로라고 여겼으나, 그런 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죽음 같은 쎅스였다. 무덤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연구하는 남자와 쎅스를 할 때, 남자가 관뚜껑처럼 그녀의 몸을 누르면, 그녀는 흙속에 묻혀 비로소 편안해지는 꿈을 꾸었다. 쎅스의 절정에서 그녀는 스스로 묘지명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벌거벗은 몸과 순결한 숨결로, 조용히 속삭이는 그녀의 묘지명. 모든 생명은 땅속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가니, 연민과 아픔과, 생을 지켜온 모든 도도함과 거짓이 그러하리라.

 

어머니는 그녀와 헤어져 있던 16년간 단 한차례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러기 위해서 그녀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세월이 너무 흘러 다시는 아무것도 되돌이킬 수가 없게 된 이후였다. 애를 쓰면 어머니의 주소를 알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후에 날아온 편지에는, 그녀에게는 지워진 어머니의 16년이 기술되어 있다. 어머니의 삶이 낱낱이 들어 있는 편지는, 그리하여 마치 묘지명 같았는데, 포르투갈어로 씌어진 그 편지를 해독하기 위해 그녀는 묘지의 한자들을 해독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의 노력을 바쳐야만 했다. 편지를 받았을 때, 그녀는 기가 막혔고 세상에 이런 무례가 어디 있는가 싶었다. 한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쳐도, 빌어먹을, 영어도 아니고 포르투갈어라니! 편지를 쓴 장본인은 그녀가 그 편지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러나 어쩌면 편지를 쓴 사람 쪽이 오히려 더 누구에게도 편지 대필을 부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묘지명 같은 편지에는 어머니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파비안느, 그것이 그녀의 어머니가 브라질에서 쓰던 이름이었다.

“어머니가 이미 오래전에 떠나온, 당신의 나라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한번도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리움은 어머니에겐 치유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에도 바다에 등을 지고 앉으셨습니다. 그분에겐 브라질의 바다가 당신이 떠나온 땅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바다를 의미한다는 걸, 나는 이제 와서야 이해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해 내 생일날 저녁에 어머니가 흘린 눈물에 대해서도 지금은 이해합니다. 내 출생이 어머니에겐 슬픔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만은 당신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편지를 쓴 아이의 나이는 열여섯, 서양식 나이이니, 그녀와 어머니가 헤어진 햇수와 똑같은 나이이다. 그녀에겐 삭제된 세월이 그 아이에겐 전부이다. 그녀는 그 아이가 자신에게 답장을 요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무슨 수로 답장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포르투갈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데.

그녀는 기억할 수 있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들을 떠올렸다. 브라질의 바닷가에서 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녀의 기억 속에 겹쳐졌다. 17년 전, 아버지와 헤어진 후, 어머니는 방에 눕거나 앉아 있을 때에도, 심지어는 밥을 먹을 때에도 문쪽을 향해서는 앉지 않으려고 들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버리고 떠난 문이었다. 당신을 배반한 생을 향해서는 시선조차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녀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바늘에 손끝만 찔려도 눈이 붉어지던 여자였다. 젊어서는 가난한 수재로 알려졌으나 나이 들어서는 하급공무원에 불과하게 된 아버지가 아주 일찌감치부터 집 바깥으로만 떠도는 동안, 어머니는 당신 홀로 가난과 모욕과 싸워야만 했다. 시골 초등학교 선생의 딸로 태어나 가당찮게도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평생 꿈이었던 어머니, 때로는 가난이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으나, 때로는 모욕이 가난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린 그녀를 업고 저녁장을 보러 나간 어머니가 사소한 흥정 끝에 생선가게 주인과 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몸집이 크고 팔뚝이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가게 주인, 생선칼을 휘두르며 있는 대로 욕을 쏟아부어도 어머니는 턱끝만 들고 서 있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싸움이었다. 모욕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견디는 것뿐이었다. 비록 그 생선가게가 시장에서 가장 싼 가게이고, 지금 어머니의 수중에는 동태 한토막 살 정도의 돈밖에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그를 무시하고 멸시할 수가 있다. 그러나 모욕이 아니라 가난에 진 어머니, 마침내 가게 주인이 바닥에 내동댕이친 동태토막들을 집어들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동태토막을 집어올리는 뻔뻔한 여인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가 쳐다봐도 절대로 턱끝을 내리지 않는 도도한 여인이며, 그렇게 도도한 얼굴로 등에 업힌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욕을 끊이지 않고 주워섬기는, 세상에 둘도 없이 막돼먹은, 그러나 연약한 여인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당신의 고향을 찾아갔다. 아름다울 수도 행복할 수도 없었던 여행의 며칠 동안,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거나 먹을 것만 봐도 토하기부터 함으로써 어머니를 괴롭혔다. 당신 자신의 불행이 생의 모든 것을 압도해버린 순간이라고는 하더라도,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먹지 않는 자식을 견디는 것처럼 어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그녀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어머니가 약국에서 지어온 약도, 그녀는 전부 토해버렸다. 딸이 먹지 않는 것은 부모의 이혼에 대한 반항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딸의 밥그릇을 뺏어 양푼에다 쏟아부은 후, 자신의 것과 합쳐 비빈 2인분의 밥을 끼니마다 먹어치웠다. 그즈음처럼 어머니가 강해지기 위해 기를 쓴 시기도 없겠으나, 또한 그즈음처럼 어머니가 연약한 때도 없었을 것이다. 밤이면 어머니는 홀로 나가 술을 마셨고, 소주냄새를 풀풀 풍기며 돌아와 그녀에게 말했다. 야, 너 나 없으면 어찌 살래? 너 나 없어도 살 수 있겠냐? 그러면 이불을 돌돌 말고 앉은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게 엄마란 사람이 할 소리야? 어미가 술에 취해 그대로 잠에 빠져들면, 이번엔 딸이 가방 속에 숨겨두었던 소주병을 꺼내 안주도 없이 들이켰다.

어머니의 고향은 경주였는데,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떴고 형제들은 모두 이민을 가버려 고향이라고 해봐야 일가붙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방문할 수 있는 당숙과 사촌 육촌 들의 집을 다 들르고 나자, 더이상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녀는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오래 걸어서 능을 구경했다. 시내 중심이 아니라, 외곽의 그리 크지 않은 능 앞에서 모녀는 함께 사진도 찍었다. 폴라로이드로 찍은 그 사진이 희미한 형상으로부터 색깔과 형체를 드러냈을 때, 그녀는 자신과 어머니가 아닌 그 등뒤의 능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안에 뭐가 있을까? 어머니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을 바늘에 찔린 것처럼, 어머니의 눈가가 붉었다. 어머니는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죽은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있겠지. 죽은 사람도? 아니, 죽은 사람만 빼고. 죽은 사람은 다 흙으로 돌아가고, 남은 건 그 흙이 삭히지 못하는 것들이겠지.

말하자면 돌 같은 것……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 돌의 기록.

수령옹주는 왕가의 능에 묻히지 못했다. 그러나 묘지는 남았다. 그것은 경기도 개성에서 출토되어 일제 때까지는 이왕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손에 넣었던 탁본의 복사본에 씌어 있던 설명이다. 그러나 현재는 그 소재를 알 수 없음. 어디로 갔을까. 잘게 부서져 흙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어느 호사가의 창고 속에서 아직도 오래된 흙냄새를 풍기며 의연하게 침묵하고 있을까.

 

“어머니는 이곳에서 두번 결혼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세탁소를 하는 한국인, 또 한번은 그 세탁소에다 늘 옷을 맡기던 브라질 사람하고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세탁소에서 일을 하셨는데, 지금까지 어머니가 빠는 빨래만큼 흰 빨래는 없었다고 주위사람들은 말합니다. 늘 기운차신 분이었고 씩씩하셨습니다. 욕도 잘하셨지만, 그 욕 때문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 때문에 화가 난 어머니가 그 옷에 구멍을 내버렸을 때, 옷을 맡긴 사람은 사과를 받는 대신에 욕을 먹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어머니의 두번째 남편 루씨우였습니다. 비록 2년 정도의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룩이라곤 하나도 없는 옷을 입고 살 수 있었습니다. 두번 다 성공적인 결혼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장례식 때는 두 분 다 참석하셨습니다. 브라질 남편이 특히 많이 울었는데, 어머니를 한국말로 ‘개잡년’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브라질 사람들은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리고, 한국 사람들은 한꺼번에 울음을 멈춰버리는 에피쏘드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들 중 누구도 어머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머니의 브라질 남편 루씨우는 장례식 때까지도 그 말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싸움을 할 때거나 슬플 때는 물론이거니와 아주 기분이 좋을 때에도,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개잡년’이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당신 자신을 누구에게든 그렇게 말해야 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다만 어머니의 인생이 농담으로 가득 차 있던 삶이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신을 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어머니의 16년이 아니라 그녀의 16년, 그녀는 네댓 명쯤의 남자와 헤아릴 수 없는 횟수만큼 잠을 잤고, 그중의 두 남자와는 사랑을 했으며, 적어도 한 남자와는 하마터면 결혼을 할 뻔했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을 다녔으며 홈쇼핑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대학교 2학년 때에는 맹장염을 앓아 수술을 했고, 졸업 무렵에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넘어져 왼쪽 눈썹 한가운데를 여덟 바늘이나 꿰맨 적도 있다. 그러나 낙태의 경험은 없다. 그녀는 콘돔을 쓰지 않는 남자와는 결코 동침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른 16년, 편지를 쓴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의 16년, 그녀는 가난한 동네의 얼치기 피아노선생이었던 손이 아름다운 여자와 평생 박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눈이 깊은 남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대학교수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무원시험을 치를 때까지 그녀의 어머니가 홀로 살림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바쁜 어머니의 보살핌을 그리 많이 받지 못했다. 그녀는 피아노 다리 사이를 기어다니거나 피아노 의자를 붙들고 서서 어머니가 교습생들의 손등을 막대자로 때리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때로 어머니의 매질은 훈육의 정도를 넘어서 폭력의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두번째 매질이 떨어질 때는 겁먹은 교습생들이 재빨리 손등을 치워버린 자리에, 막대 자가 매섭게 후려친 건반 소리가 남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그 이빨 사이로, 어린 그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욕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아버지가 선생인 시골학교에서 유일하게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아이였다는 어머니…… 그러나 세월은, 오래전에는 그토록 예쁘고 도도했을 여자아이를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주물러놓았으니, 어머니는 어느 곳은 무르고 어느 곳은 퍼석하고 어느 곳은 너무 딱딱한 수제비반죽이 되어버렸다. 결혼을 하고, 딸을 낳고, 몇번의 유산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연약했고, 노여웠고, 순종적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났을 때, 모욕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삶을 위로한 건 당신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 말하자면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당시에 어머니에게 위로가 필요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는 것도 이해했다. 어머니는 밤마다 밖으로 나가 소주를 마셨고, 소주를 따라주는 남자들, 피아노를 치는 손인 당신의 손을 건반처럼 툭툭 두들겨주는 낯선 손가락들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몸에서 소주냄새에 뒤섞인, 낯선 남자의 정액냄새를 맡았다. 열다섯살 그녀에게 풍겨오던 낯선 남자의 정액냄새…… 그녀는 취해 잠든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 이제 곧 엄마의 배도 불러오게 되나요? 그렇다면 엄마, 삼거리에 있는 산부인과엔 가지 마세요. 그 의사는 열다섯살짜리 여자아이의 몸에 있는 것을 세상의 몹쓸 흉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이혼한 지 석달도 안된 여자의 몸에 있는 것도 흉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엄마의 아기를 키워줄게요. 약속할 수 있어요. 엄마가 내 뱃속의 것만 치워준다면, 치워서 아주 안 보이는 곳으로 옮겨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제부터 착한 아이가 될게요. 맹세코 그렇게 할게요.

 

묘지는 말이 남기지 못한 흔적이다. 평생을 다하여 말해도 다 말해지지 않는 것, 그것은 돌에 새겨진 글이 아니라, 그 돌이 묻힌 흙에 숨결로 남았다. 죽음 앞에서 끝내 다하지 못한 것들은 비통하였을까. 아들의 묘지명을 직접 구술하여 묘지로 남기게 했던 영조는, 뒤주에 가둬 죽인 아들에게 다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 남겼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느냐.”

손이 큰 남자가 그 묘지명을 읽어주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아비를 생각했을까. 밤마다 목욕탕 하수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흙물 든 양말을 빨던 아버지…… 아니면 그녀를 떠나간 어미를 생각했을까. 잊어버려라, 아무 일도 아니다,라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루가 지난 뒤에는, 잊어버릴 것도 없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라고 말했고 다시 하루가 지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니? 그녀에게 되물었다. 딸의 뱃속에서 아이를 꺼낸 것은 어머니였다.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소주냄새를 풍기며 밤늦어 돌아오던 어미는, 딸의 뱃속에서 아홉달 열달을 채워가며 자라나고 있던 생명에 대해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열여섯살 딸이 산통으로 비명을 지를 때, 어미는 딸의 입을 막으며 소리 지르지 말라고 이를 갈듯 속삭였다. 남들이 듣는다, 남들이 들어. 한낮의 고통스럽던 출산은 아랫도리의 깨어질 듯한 통증이 아니라, 온 집안을 꽝꽝 울리던 라디오 소리며, 그 굉음에 뒤섞인 어머니의 이를 가는 소리였다. 조용히 해라,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니 조용히 해.

어머니는 그 빨갛기만 한 생명의 핏덩어리를 그 자리에서 갖다버리지는 못했다. 생명이 더러운 물과 같고, 피와 숨결에 붙어 있는 것들이 그저 하찮은 쓰레기나 건더기에 불과한 것이기를 가장 간절히 바랐던 사람은 어쩌면 그녀보다도 그녀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도도한 여자답지 않게 그토록 욕설을 잘 내뱉곤 하던 어머니는, 그즈음의 며칠 동안은 한마디의 욕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는 대낮이거나 한밤중이거나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뛰어 건너가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팽개쳐진 아이 앞에 이르면 어미는 딸의 퉁퉁 분 젖 대신, 자신의 마른 젖을 물렸다. 아무 일도 아니다…… 어미는 빈 젖을 빨리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녀에게 성령 이야기를 해준 것도 바로 어머니였다.

너 아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어머니는 동정녀였어.

어머니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인간의 아이를 낳아 더이상은 위대해질 수 없는 어미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날 밤 내내 그녀의 이마에 얹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밤 내내 주문처럼 이어진 말들. 그녀가 태어나던 날의 기쁨, 그 빨갛고 쪼글쪼글한 얼굴이 비추던 무구한 빛, 마치 종소리 같던 첫 울음소리, 그리고 처음으로 뒤집기를 했을 때, 걸음마를 했을 때, 엄마라는 소리를 했을 때…… 

생은 온통 축복이었지. 너로 인하여 받은 기쁨은, 그후 내가 생으로부터 받은 모든 배반과 상처의 열배를 합쳐놓은 것보다도 크단다. 댓가로 치면,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을 너한테서 받았어. 얼마나 얼마나 예뻤는지, 사랑스러웠는지, 기뻤는지……

날 버릴 거냐고, 그녀가 어머니에게 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뱃속에서 나온 성령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세상의 모든 어미는 자식을 마땅히 구해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 얼마 동안 어머니의 눈은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붉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날카로운 바늘에 온몸이 찔리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쓴 아이가 궁금해하는 그녀의 열여섯 해, 그녀는 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으며, 연애를 하고, 여름이면 냉면을 먹고 겨울이면 군고구마를 먹었다. 영화를 봤고 옷을 사 입었으며 춤을 추러 다니기도 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녀는 앞으로 결혼을 할 것이며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 아이에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세월은 그녀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뻔뻔하다. 어느날 그녀는 오래 헤어졌던 친부모를 찾아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친엄마도 울고, 버려졌던 아이도 울고 심지어는 진행자까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수가 있나. 세상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나. 봄은 어떻게 가고 여름은 어떻게 오고 가을과 겨울은 또 어떻게 가고 오나.

그녀는 지난 16년 동안 결코 울지 않았으나, 나쁜 꿈은 끝없이 이어졌다. 꿈을 꿀 때마다 그녀는 어머니의 등을 보았다. 아무리 달려가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어머니는 16년 동안의 꿈속에서 한결같이 등과 뒤통수만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엄마,라고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으나 나쁜 꿈속, 그녀는 늘 입이 얼어붙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아기의 얼굴 때문이었다. 아이는 조용조용 웃으며, 그녀에게 조용조용 말했다. 미안해, 아직 내겐 준비된 말이 너무 없어서…… 너는 어디 있니? 그녀는 묻고 싶었다. 어느 곳, 어느 더러운 곳에 버려졌니. 그녀는 아이가 버려지지 않았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더 큰 죄로 자신을 씻어주어, 자신이 비로소 안전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간절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죽은 뒤 브라질에서 날아온 편지를 거듭하여 읽었다. 어머니의 인생은 농담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라고 말하는 말미에 이르면, 그녀는 번번이 숨이 막혔다.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포르투갈어라고는 한 글자도 알지 못하던 그녀이니 단어와 단어만을 연결해 읽은 편지를 오독하지 않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편지는 어머니의 삶이 웃기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번역이 오역이 아니라고 할 근거가 없는 것처럼, 오역이라고 말할 근거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쩐지 브라질에서의 어머니의 삶이 행복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기분이 나쁠 때나 슬플 때나, 심지어는 매우 기분이 좋을 때에도 ‘나는 개잡년이오’라고 말했다는 어머니…… 세상을 향한 그 욕설에서 느껴지는 통쾌함도 어쩌면 그녀 자신의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여 개관했을 때, 그녀는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장판처럼 인파로 북적거리는 박물관에 갔었다. 그 넓은 박물관의 전시실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그녀는 어느 곳에서도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도, 먹을 것을 파는 식당에도, 심지어는 로비와 복도에도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금석문 전시실을 찾아들어갈 수 있었는데, 행방불명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던 묘지는 탁본이 아니라 버젓한 실물로 거기에 전시되어 있었다. 무심코 팠던 흙속에서 아직 살과 뼈가 남아 있는 시신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세상에는 온갖 잘못된 정보들이 있다. 그렇더라도 실종과 등장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묘연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러했다. 그것은 과연 사라진 적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그것은 다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혹시 사라져 알 수 없는 곳을 떠돈 것은 그녀 자신의 시간이었던 걸까. 바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묘지는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설명서를 붙인 채 유리 안에 들어 있었다. 외적의 나라, 공녀로 끌려간 딸을 그리다 병들어 죽어간 어미의 기록…… “공녀를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딸과 부모가 옷자락을 부여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습니다. 근심걱정으로 기절하거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한 자도 있습니다. 이런 예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충숙왕 복위 4년에 이곡이란 사람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이다. 충숙왕 복위 4년은 1335년. 바로 수령옹주가 세상을 뜬 해고, 묘지가 땅속에 묻힌 해이기도 하다. 삽으로 퍼낸 땅속, 묘지 바로 옆, 그 젖은 흙속에 묻히며 묘지는 생각했을까.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 모든 것의 원인이며 모든 것의 결과이다,라고.

그날 박물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편지를 땅에 묻었다. 어느날 흙에 묻혀 있는 참빗을 발견했던, 옛날 살던 동네의 공터는 이제 주택단지가 되었다. 노란 불빛이 따듯하게 번져나오는 그곳의 집들에는 어미가 살 것이고 딸이 살 것이고, 그 딸의 머리에는 오래전 그녀의 머리에서 어머니가 참빗으로 긁어냈던 이와 같은 것도 살 것이다. 그리하여 땅에 묻혀지는 것들은 구태의연한 대로, 얼마나 많을 것인가. 오래전 그녀에게 흙을 파는 버릇이 있었을 때 그녀가 발견한 것들은, 볼펜심이나 담배꽁초나 망치머리 따위였다. 천년이나 이천년이 흘러 세월의 묵은 힘으로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그 쓸모없는 것들 옆에 그녀는 편지를 묻는다. 천년이 흐른 후, 누군가가 그 편지를 발견한다면, 그녀가 수령옹주의 묘지를 해독하기 위해 글자 한자 한자를 쪼아냈던 것처럼, 그 묵은 글자들을 해독하기 위해 밤을 새울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편지의 여백에 한 문장을 덧붙인다.

나의 아기야.

그러고는 미진하여, 다시 한 문장.

痛入骨髓, 통입골수.

아마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중앙박물관 금석문실에서 보았던 것이 다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람들의 줄에 밀리느라 한걸음 뒤로 물러선 자리에서 바라보았던 것…… 그것은 전시실의 유리에 비친 아이를 안은 어미의 모습이었다. 전시실 안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 아이를 안은 여인이 없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전시실 안을 두리번거려보았다. 정말 아이를 안은 여인이 있었다. 양쪽 팔에 아이 하나씩을 안고, 도도하지도 연약하지도 천박하지도 않게 웃고 있는 그 여인은, 그 씩씩한 팔을 흔들며 사람들을 지나 유리 안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16년 동안을 개잡년으로 보냈으나, 누구도 그를 개잡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 조동옥, 파비안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