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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6·15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동아시아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네트워크로
현무암 玄武岩
토오꾜오대학 대학원 정보학쎈터 조수(助手). 저서로 『韓國のデジタル·デモクラシ一』(한국의 디지털민주주의), 논문으로 「東アジアのコリアン·ネットワ一ク: その歷史的生成」(동아시아 코리안 네트워크의 역사적 생성) 등이 있음. gen@iii.u-tokyo.ac.jp
1. 들어가며
한반도는 ‘진정한 국민국가’를 이루기도 전에 탈민족이라는 새로운 조류에 휩쓸리고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내재적인 비판이 제기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동아시아공동체라는 지역통합의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양자는 지구화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하는데,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또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를 것을 요구받고 있다.
우리는 단일한 국민국가로의 통일을 향한 욕망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일방적인 통일이 야기할 통일부담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염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통일로 인해, 글로벌 씨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북한이 내부의 식민지가 될까봐 우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국민국가가 아닌 다른 창의적인 방식으로 점진적인 통합을 이루어간다고 해도 상호신뢰를 회복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냉전 붕괴 후에 소련·중국과 국교가 수립되면서 만나게 된 한국의 본국민과 재외동포의 관계가 언어적·경제적 차별에 따른 서열구조로 규정되곤 하는 현실에 비추어보았을 때, ‘동포애’만으로 북한주민들이 동등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리라고는 믿기 힘들다.
흔히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현실적인 방향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리고 최근의 통일논의가 남북한과 재외동포를 아우르는 새로운 민족통합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한국과 재외동포가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통일을 향한 도정에 돌입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재외동포를 한민족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러한 통합과정은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남북의 통합이라는 과제를 어떠한 식으로든 추진해가야 하는 상황에서 재외동포의 존재와 그들과의 관계설정이 다문화적인 풍토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그렇다고 재외동포를 남북통일의 리트머스지로 보거나 그들을 통해 다문화주의의 교육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이 글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한반도 중심주의적인 한민족공동체론을 재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반도를 중심에 놓는 재외동포 정책에서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한국어 교육이 중요한 과제가 되며, 재외동포들을 통일과정에 활용가능하거나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존재로 보게 된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목표로 하는 한 재외동포 연구단체는 중국조선족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을 ‘반세기간 단절되었던 한민족의 재결합이라는 민족사적 쾌거’로 여긴다. 이처럼 재외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민족의식을 상실한 가난한 북방의 동포를 계몽한다는 우월의식이 드러난다. 노동인력을 들여올 때 한국어시험을 실시하여 이주노동자를 줄이고 조선족의 입국을 용이하게 하자는 지원단체의 주장도 폐쇄적인 민족중심주의에 다름아니다.
재외동포를 자원적인 존재로 보거나 시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 것이다. 사실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재내(在內)’와 ‘재외(在外)’간의 교류는 늘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재내’와 ‘재외’는 언제든지 전이가능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인적 이동이 활발해질수록 양자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질 것이다.
탈영토적인 한민족의 연대가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이 통일과정의 근간을 이루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지역협력체를 엮어나가는 데 기여하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본국과 재외동포의 관계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즉 한민족의 연대는 사회적·역사적 장소를 빼앗긴 디아스포라(diaspora)의 존재가 부정되지 않는 관계가 가능한 공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온전히 이룩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아니라 ‘네트워크’로서의 한민족이란 발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글은 코리안 네트워크의 역사적 궤적을 검토하여 그 근거를 확보하는 데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2. 동아시아의 코리안 네트워크
일제는 한반도를 영토적으로 점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민족 전체를 제국신민에 포섭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일본이 영향력을 끼치면서도 통치권을 완전하게 행사하지 못했던 제국의 외연부에 존재하는 한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은 재외한인을 ‘일본신민 조선인’으로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공작을 추진했다. 제국신민이 아닌 한인의 존재는 한반도지배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제국의 발판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배의 물리적 장치로 식민지에 확장된 철도·해운·우편 등의 인프라와 제국의 통치권력은 그 의도에 반하여 대항네트워크를 수반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대항네트워크는 각각의 한인사회를 연결하여 사람과 정보의 유통경로가 되었다. 이를 통해 반일운동과 독립사상 및 근대적 공화사상이 한반도에 파급되었다.
예컨대 1900년대 중반부터 극동 러시아에서 발행된 해조신문(海朝新聞), 대동공보(大東共報), 권업신문(勸業新聞) 등과 미주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등 한인사회의 한글신문들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논설과 기사를 서로 전재하기도 하고 지면논쟁도 벌였는데, 이는 당시 국경을 넘어선 한인들의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신문지법(新聞紙法)’에 의해 언론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시기에 재외 한인사회의 신문은 본국의 신문을 대신하여 애국계몽과 독립사상의 진원지가 되어 당시 형성중이던 한국의 민족주의를 주도했다.
이처럼 제국의 지배에 대항하는 코리안 네트워크는 제국적인 질서형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동아시아를 지향했다. 물론 이들이 공유한 기본적인 목표는 조선의 독립과 국민국가 수립이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폭력행위가 ‘동아(東亞)’의 연대와 해방이라는 명목하에 반복되고, 조선과 중국, 대만의 항일운동·민족자결권에 응답하려 한 일본의 사상가나 사회주의자,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까지도 이런 폭력의 연쇄에 끌려들어간 것을 상기한다면,1 한민족의 대항네트워크에서 조선독립을 초월하는 지역연대의 지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동아시아공동체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다시금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주목받으면서 한민족공동체론이 부상하고 있다. 한반도의 통일방안으로 제기된 ‘한민족공동체’논의는 1990년대 들어 세계화시대의 민족적 생존전략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된다. 재외동포 또한 그러한 세계화전략의 일익을 담당하는 존재로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최근 ‘한민족공동체’ 혹은 ‘한민족네트워크공동체’라는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식민지시기와 냉전기, 그리고 탈냉전의 지구화시대에 코리안 네트워크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과연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가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한민족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여 지역통합의 미래구상을 엮어갈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이 네트워크로서의 코리안의 모습이다. 그것은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민족공동체를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시각이다. 최근의 한민족공동체론은 지구화시대에 대응하는 민족적 전략이라는 미래의 비전으로서 구상되는 경우가 많다.2 그러나 이러한 미래지향형의 ‘공동체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논의로는 20세기 각지에서 한인들이 형성해온 관계성을 놓쳐버리게 된다. 즉, 재외동포의 독립운동을 제외하면 식민지시기의 본국과 재외동포 간의 활발한 교류나 사람의 이동이 제한된 냉전기에 국민국가 씨스템을 헤쳐나가면서 전개된 비합법적·운동적인 네트워크는 무시되는 것이다.3 이러한 코리안 네트워크는 단순히 민족공동체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적 의미를 넘는 동아시아지역의 탈국가적인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한반도중심주의’의 상대화이다. 한민족공동체론에서 공동체의 의미에는 한민족 동포가 그 아이덴티티를 기초로 해서 집단의 연대와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적의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백낙청(白樂晴)이 제기한 다국적·다언어 민족공동체로서의 다층적 아이덴티티로 구성되는 재외동포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동질적인 한민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로 흡수할 것만 흡수하고 나머지 일탈된 것은 주변화해버린다. 유랑하는 재외동포는 조국의 발전에 공헌해야 하는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해외에 이주한 한인들은 단순히 근대에 휘말려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씨스템에 능동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다양한 형태로 조국건설에 참여했다. 한민족의 민족주의는 한반도의 사람들과 해외이주자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한민족의 연대를 공동체 형성이라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네트워크로 볼 때 동아시아에서 역사적·공간적으로 전개된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또한 주변적이고 열등한 존재로서의 재외한인상을 불식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 동아시아공동체의 정치적·경제적 구상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연대의 조건이 되는 개방성과 시민성을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3. 규범으로서의 공동체
한민족공동체론은 지구화에 의해 국민국가의 규정성이 상대화되는 과정에서 새로 ‘발견’된 한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통해 지구화에 대응하는 국경을 넘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부상하고 있다.
국경을 넘는 공동체라 해도 그것이 공동체인 이상, 기본원리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사회)적인 인간관계에서 구하게 된다. 강대기(姜大基)는 게마인샤프트적인 정신과 인간관계가 현대 공동체 개념의 준거틀이 된다고 한다.4 그렇다고 공동체론이 자기완결적이고 대면적·정서적인 폐쇄 공동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개방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민족공동체 논의 역시 열린 민족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규범적 개념으로서 탈공간적 영역이나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삼는다면 한민족공동체라는 개념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한민족의 관계성은 공동체라는 이념형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며, 이러한 연대의 경험을 성찰하기 위해서 네트워크의 개념이 필요하다. 또한 한민족의 연대가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지역주의에 대해 상호간 이해를 높이고 평화의 비전을 제시하여 시민적 개방성과 연대성을 지향하는 입장이라면, 공동체가 아닌 네트워크로서의 모색이 요구되는 것이다.
최근 한민족공동체의 논의나 실천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답하지 못하는 듯하다. 재외동포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향후의 전망도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민족이라는 총체적 가치와 거기에서 얻어지는 아이덴티티가 전제되는 공동체 개념을 재고하지 않고, 그것을 지구화시대의 민족적 연대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이상화하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를 규범적 실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자유주의의 파급이 그것에 반대하는 공동체주의의 등장을 초래해 양자간에 논쟁이 일어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자유주의가 의거하는 것이 ‘정의론’에 입각한 ‘자유로운 선택을 행하는 의사주체로서의 인격 개념’인데, 공동체주의자는 그것이 사회에서 유리된 자아를 전제로 한다고 비판한다. 그에 대응해서 제시한 주체 개념이 공동체적 유대를 구성요소로 하는 타자와의 상호의존적인 자아, 즉 ‘위치지어진 자아’이며, 그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 ‘공동체의 공통선’이다.5
이처럼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신보다 큰 집단에 집합적인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귀속되어 그 사회를 지지하는 ‘좋은 의미’의 민족주의가 불가결하다는 것이다.6 한민족공동체론은 이러한 ‘좋은 의미’의 민족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식민지시대의 저항민족주의 혹은 ‘침략적’이지 않은 역사가 ‘좋은 의미’의민족주의로서 공동체의 공통선을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편의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열린’ ‘건전한’ ‘이성적’등의 이상화된 수사어는 계기만 주어지면 ‘닫힌’ ‘퇴행적인’ ‘비이성적’으로 변할 수 있다. 다른 가치를 흡수해버리는 ‘공동체의 공통선’은 현실적으로 이미 다국적·다언어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아이덴티티로 구성되는 코리안 사회에도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쎈은 공동체나 사회적 아이덴티티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롤즈(J.Rawls)의 정의론에 기대어 공동체주의를 비판한다. 거기에서 쎈은 공동체적 아이덴티티가 선택되는 것인지 아니면 발견되는 것인지를 물음으로써, 사회적 아이덴티티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귀속하는 복수의 아이덴티티가 서로 경합하거나 갈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 공동체로서의 코리안 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본국인이나 재외동포에게 있어서도 지구화시대에 ‘발견’된 것일 것이다. 단 이러한 ‘발견’된 아이덴티티는 본국에서는 자명한 것일지라도 다국적·다언어적인 코리안으로서는 쎈이 지적한 대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덴티티의 경합과 갈등은 발견된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실제로 표면화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한민족공동체의 성원이 되는 재외동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옌뼨(延邊)의 조선족은 민족자치주를 중심으로 독자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왔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의 ‘조선말’이나 고려인의 ‘고려말’은 한반도, 특히 한국과의 연속성을 증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단절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균질적인 문화적·언어적 공간을 형성하는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의심치 않는 ‘고국’의 사람들로부터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이 누구냐 하는 질문을 받고, 한국의 조선족들은 자신들이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민과 조선족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 조선족을 희화화해서 문제가 된 KBS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과, 이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재한조선족이 개설한 싸이트 ‘안티 연변총각’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다. 이 싸이트 게시판에서 프로그램의 반대파와 옹호파는 격렬하게 충돌했는데, 인터넷을 통해 영역을 횡단하는 가상적 대화공간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먼저 본국민과 디아스포라가 대결하는 장이 되어버렸다.8 결국 조선족의 목소리는 압도적 다수자에 의해 봉쇄되어, 그 담론공간은 지배적인 공공영역에서부터 배제되어버렸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민족 관념이 탈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민족적인 연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재외동포법’에서처럼 민족성원들의 법적 자격이 우여곡절 속에 정비되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적 결합을 추진하는 것은 자유주의 입장에서 보면 용인되지 않는다. 코리안 네트워크론은 이러한 ‘자유주의’의 비판에 대응하는 논리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한민족공동체 구상은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 의해 그 혈통적 폐쇄성이 문제시되고 있다.
임지현(林志弦)은 이주노동자를 제쳐두고 재외교포를 우선시하는 ‘재외동포법’이 한국의 혈통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재외동포가 대한민국 정부에 납세나 국방 등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지 묻고는, 한민족공동체에서 재외교포보다 이주노동자의 기여도가 높은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 이는 시민적 공공성이라는 관점에서는 타당한 의견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민족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재외동포의 역사와 현실을 도외시한 댓가주의적 발상으로, 결국은 한반도중심적인 한민족공동체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코리안 네트워크를 바라보면 한민족의 표상과 공간은 본국의 사람들에게만 독점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방후 남한에는 많은 재외동포들이 귀환했지만 당시 정부는 만주동포들이 개척한 농지를 확보하여 현지에 정주하기를 원했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사할린 잔류 한국인들의 귀환에 소극적이었던 한국정부의 책임은 막중하다. 재일동포는 조국의 분단상황에 얽매여 있지만 지금도 해방 당시에 필적하는 본국적 소유자 수를 유지하고 있다. 임지현의 비판에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사할린동포나 정주(定住) 사회에서 의무를 다하면서도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재일동포 등 분단된 본국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4. 공동체에서 네트워크로
최근에 ‘한민족네트워크공동체’라는 말이 사용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민족공동체론에도 네트워크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민족공동체론도 네트워크의 의미를 나름대로 활용한, 새로운 관계성으로 구성되는 민족간의 소통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로 1990년대 후반에 급격히 보급된 인터넷 등 정보 테크놀로지에 의해 네트워크의 의미가 힘을 받게 되는데, 한민족네트워크공동체론도 결국은 한반도중심주의와 기술결정론이 투영된 결과이다. 즉 자발적이고 분산적인 코리안의 네트워크라기보다 본국의 ‘한민족’을 정점에 놓은 삼각형의 계급구조를 상정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최근의 네트워크론에서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형성되어 자립적·상호작용적이고 분권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는 측면이 강조된다. 한민족네트워크공동체의 논의에서는 개방성과 포용적 자세가 요청되지만, 대개는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이나 한국어교육의 강화가 강조된다. 재일동포 1세의 재산을 국내기업이 가져오게 하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네트워크의 의미가 무색해진다.10
네트워크 개념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예로 화교 네트워크를 들 수 있다. 이를 한민족공동체의 미래상으로 이상화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네트워크가 가장 실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경제활동의 측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중요한 움직임에 틀림없지만, 코리안 네트워크는 화교 네트워크와는 달리 경제분야를 넘어 정치적 (혹은 시민사회) 네트워크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네트워크의 성격규정에 있어서 경제적 합리성이 기본원리가 아니라는 것은 중요하다. 민족의 네트워크라고 해도 자본을 우선시하기보다 가치지향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국가적 차원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시민사회에 기반한 연대의 관점에서 추진하는 작업이 시민성을 담보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언론기관과 NGO등 시민단체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듯이, 민주화의 경험을 통해 생겨난 시민적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지닌 것이 코리안 네트워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에 힘입어 코리안 네트워크는 동아시아 지역통합의 시점에서 볼 때 탈국가적인 행위자의 연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특히 네트워크로서의 코리안이 주목받게 된 것은 일제에 대항하는 재외동포가 본국과 ‘기맥(氣脈)을 통해’조선 내지(內地)의 독립운동과 연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재외한인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던 식민지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개벽』(1925년 8월)이 마련한 재외동포 특집에서는 “동포 전체의 협동분투”를 요구하며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리는 재내동포가 재외동포를 잊고 일할 수 없고 재외동포가 또한 재내동포를 버리고 승리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내외가 합하여 내에서 못하는 일은 외에서 하고 외에서 못하는 일은 내에서 하여 피차 협동공진하지 아니하면 안될 줄로 압니다.”
식민지조선에서 재외한인에 대한 재외동포로서의 인식이 조선이라는 ‘내지’를 만들고, ‘내지’와 재외동포가 일체가 됨으로써 조선민족을 부각시켰다. 일본은 이러한 기사에 정간처분으로 대응했다. 이렇듯 당시는 조선의 독립이 최대 과제이기는 했어도, 국권회복 운동의 주도권은 식민지하에서 정치적 중심성이 없었던 ‘내지’(즉 본국)보다 제국의 외연부에 있었다. 즉 네트워크의 자립성과 분권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분단상황을 안고 있지만 ‘국민국가’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한민족 최대의 커뮤니티인 한국이 네트워크의 결절점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이 단절된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중심성을 표명함으로써 네트워크를 한반도중심의 공동체로 전환해버리고 있다. 이것은 한민족공동체에 다름아니다.
물론 당분간은 네트워크의 결절점이 흡인력을 가지고 사람과 정보의 이동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가 차원이든 민간 차원이든 현재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식민지시대의 독립운동은 물론이거니와 해방후 남북의 건국과정, 그리고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참여한 역사를 보면 재외동포의 역할이 단지 ‘공헌’으로만 치부될 것이 아니다. 미래지향의 공동체 개념으로는 시야에 놓을 수 없는 재외동포와 본국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긴 시간지평에서 코리안 네트워크의 탈중심성과 쌍방향성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5. ‘在日’과 코리안 네트워크
마지막으로 코리안 네트워크에 있어서 재일동포의 위치를 살펴봄으로써 통일과 동아시아의 새로운 연대의 조건이 되는 개방성과 시민성의 의미를 되새겨보기로 한다. 1990년대 들어 일본사회에서의 ‘在日’(자이니찌) 혹은 본국과의 관계에서의 재일동포라는 기존의 범주를 넘어 동아시아에서의 지역적인 존재로 새롭게 자신을 재정의함으로써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20년의 역사를 가진 원코리아(One Korea) 페스티벌은 2000년 오오사까 대회에서 ‘21세기 원코리아와 동아시아’를 주요 테마로 하고, 이듬해 토오꾜오에서 열린 대회에서도 ‘아시아공동체’를 표방하는 등 재일동포와 동아시아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지식인층에서도 재일코리안 문제를 고려할 때 동아시아적 시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2004년 ‘경계에서 공생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설립된 코리아NGO쎈터는 민족교육의 확대와 코리안 네트워크의 형성, 그리고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실 재일동포의 위치는 동아시아라는 관점에서 고찰할 때 더욱 명확해진다. 무엇보다도 재일동포는 일본시민과 연대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리고 지금 한일연대를 넘어 아시아연대로서 재일동포의 의미가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마이너리티나 재외교포로서의 ‘在日’이 아니라, 영국에서 ‘블랙’이라는 개념이 에스닉(ethnic) 집단의 의미를 넘어 이민자 연대를 형성할 때 사용되는 것처럼, 구식민지 출신자로서 정주국과 타협하는 데 멈추지 않고 좀더 보편적인 인권을 가지고 권리 개념을 넓혀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코리안 네트워크로서의 ‘在日’은 일본사회에서 키워온 다민족적이고 시민적인 운동역량을 통해 본국으로도 향한다. 앞에서 언급한 원코리아 페스티벌에는 최근 한국에서도 게스트가 초청되고 재외동포단체도 참가자를 모집하여 참여시키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참가자들이 ‘在日’이 표방하는 ‘원코리아’에 대해서는 위화감을 드러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오끼나와 문화 혹은 일본의 마쯔리(축제) 문화와 혼합하는 원코리아 페스티벌이 이질적인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요컨대 거기에는 그들이 기대한 ‘한민족의 민족문화’는 없는 것이다. 주류문화나 다른 에스닉 소수집단과 다문화적으로 공생함으로써 민족적일 수 있는 ‘在日’의 외침은 비단 일본 주류사회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배타적 풍조는 관료적인 정책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의식구조에도 깊이 박혀 있다. 재중동포에게는 언어적·문화적 동질성을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위화감을 드러내는 이중성을 보여왔다. 유도선수로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조국’에 갔으나 폐쇄적 풍토 때문에 결국 귀화하여 일본 국가대표를 지낸 한 재일동포는 ‘귀화하고 나서야 한국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민족과 국가가 동일시되는 본국에서 내셔널 아이덴티티는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것이다. 하지만 재외동포에게 아이덴티티의 획득은 자신과의 격투의 과정이다.
남북의 통합이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남북이 경제 격차를 줄여나가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지향한다는 통일 로드맵에 대한 합의는 어느정도 공유되고 있다. 그것이 국민국가가 아니라 복합국가·연방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강고한 아이덴티티는 오히려 이 구상에 역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아이덴티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구축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재외동포는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아이덴티티의 다수성과 유연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과제가 재외동포와의 관계는 물론 통일을 전망하는 과정에서 떠오르고 있다.
언젠가는 실현될 통일 후의 한반도는 글로벌경제에 통합된 남쪽이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국가제도의 많은 부분이 국제표준인 한국을 중심으로 재구축되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국기·국가 등 통일 후의 새로운 상징은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의미하는데, 통일기 사용이 합의된 민족행사에서 태극기가 입장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수언론이 비난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국가상징의 재창조, 즉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구축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국가적 상징은 재창조한다고 해도 통일과정에서 북한이 미치는 제도적 영향은 언어나 문화적인 측면으로만 제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북일조약’에 한일조약이 담아내지 못했던 역사의식이 반영된다면 통일 후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북한 주민에게 커다란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최근 일본이 우경화되고 있다고는 하나, 현재의 역사인식은 그간의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한일조약 당시(1965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진했다. 물론 국가적 차원의 영향력도 있었으나, 강제연행에 대한 연구의 학문적인 토대를 마련한 것은 재일동포 학자이며,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등의 단체도 지속적인 연구와 조사활동을 벌여왔다.
이러한 성과가 2002년 북일정상회담의 평양선언에서 ‘반성’과 ‘사죄’라는 표현으로 포함되었지만, 거기에 더하여 ‘보상’이라는 역사인식이 반영된 ‘북일조약’이 체결된다면, 그것은 북일관계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남북관계, 나아가 통일 후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외교가 국익을 추구하는 한 그 실현 여부는 미지수이다. 다만 재일동포사회는 일본의 시민사회와 더불어 북일간 관계개선과 제대로 된 과거청산을 통한 국교수립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재일동포와의 연대는 한일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통일과정에서 남북의 새로운 아이덴티티 구축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으로 자립하는 것과 민족적으로 사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재외코리안은 보여주고 있다. 재일동포가 민족교육이나 문화활동을 통해 민족적으로 사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공동체적인 실체를 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함이다. ‘분단선보다 가혹한 국경’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대립해온 재일동포사회이기에 6·15정상회담 소식에는 환호했고,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누구보다도 침통해했다. 통일의 열망은 본국민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그 작업 또한 재외동포와 함께하고 있음을 코리안 네트워크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연대의 한축으로 코리안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그것이 목적을 달리하는 다른 네트워크와 다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개방성을 가질 때, 동아시아의 지역통합이라는 지형 속에서 통일시대를 대비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네트워크가 일체성의 공간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의 ‘사이’로서, 언어·행위에 의한 나타남과 그것에 대한 일정의 응답이 있는 친밀권을 형성한다면11 자연스럽게 ‘한민족공동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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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米谷匡史 「ポスト東アジア: 新たな連帶の條件」, 『現代思想』 2005년 6월호, 75면.↩
- 예컨대 정영훈은 ‘글로벌 경쟁’을 헤쳐나갈 대안으로 한민족공동체론이 힘을 얻고 있다고 지적한다(정영훈 「한민족공동체의 이상과 과제」, 『근현대사강좌』 제13호, 2002, 9면).↩
- 제주도와 오오사까는 해방후에도 식민지시대의 네트워크가 이어져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해왔다. 1950년대 후반부터 ‘사할린귀환재일한국인회’가 한국과 사할린을 이어주는 활동을 벌인 것이나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일본의 전후보상문제를 선구적으로 제기한 것도 냉전시대의 네트워크로 볼 수 있다.↩
- 강대기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가능한가』, 아카넷 2004, 48면.↩
- 靑木孝平 『コミュニタリアリズムへ: 家族·私的所有·國家の社會學』, 社會評論社 2002, 51~56면.↩
- 杉田敦 『權力の系譜學: フ一コ一以後の政治理論に向けて』, 岩波書店 1998, 174~75면.↩
- アマルティア·セン 『アイデンティティに先行する理性』(細見和志譯), 關西學院大學出版會 2003. (AmartyaSen, ReasonbeforeIdentity, OxfordUniv. Press 1999.)↩
- 이 게시판의 담론을 분석한 졸고 「浮遊するディアスポラ: 「延邊チョンガ」をめぐる中國朝鮮族のアイデンティティ·ポリティクス」, 東京大學大學院情報學環紀要 『情報學硏究』 69호, 2005 참고.↩
- 임지현 『이념의 속살』, 삼인 2001, 191면.↩
- 김용호 외 『민족통합의 새로운 개념과 전략』(한림대출판부 2002)의 논의 참조.↩
- 친밀권(親密圈)에 대해서는 齋藤純一 『親密圈のポリティクス』, ナカニシヤ出版 200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