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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미령 金美伶
1975년 부산 출생.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potzzi@hanmail.net
때늦은 예감
참기름병이며 보리쌀 등속이 가득 실린 짐보따릴 두고
화장실을 다녀와보니
방금 전에 있던 버스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터미널 바닥엔 무심한 검은 기름때
검표원은 딴 데 알아보라는 듯 멀뚱히 쳐다보고
차를 기다리며 조는 사람들 희멀겋게 분 어묵 같다
다시 나와도 차는 없다
오줌내 지린 컴컴한 화장실에서 몸 떨고 나와보니
바뀐 하늘
막대걸레 뒹구는 짐칸에 한쪽 귀퉁이가 축축이 젖은
펼치기 민망한 나의 보따리
저 혼자 멀리 가고 있다
어이없이 맑은 저녁이다
금방 가버린 것은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이다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은 이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저만치 풀을 뜯던 소가 뒷다리를 끌어다 귀 뒤를 긁고 있었다
배추 속잎같이 아득하고 희부연 저녁이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고도 왠지
담담했던 이른 저녁, 그 희미한 경계
너무 멀리 가버린 것들이지만 이제야 알 것 같은
때늦은 예감들이 잔잔한 슬픔으로 밀려온다
제일건강원
목욕탕 가는 길에 딱지 같은 문을 단 가게들을 지나다보면
제일건강원이 먼저 백발노인처럼
길가에 나와 앉아 있다
깨끗한 내부 어딘가에 마그마라도 끓이는 듯
갇힌 힘이 거리에까지 미치는 것인데
이곳을 지나면 이따금 왼쪽 늑골 아래
까만 분꽃씨만한 것이 만져지는 것 같다
뿔 달린 것이나 깊은 데 숨어사는 것이
폭 고면 약이 되듯이
내 독한 자의식도 시간이 흐르면
뭉근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일까
늙은 호박더미 사이로 보이는 저녁 그림자 같은 것이
먼데서 흘러온 노란 겹눈의 흑염소처럼
영혼의 안쪽을 통과해보듯
유리문을 오래 들여다보며 서 있게 한다
화장터처럼 굳게 잠긴 기계들 속
독경하듯 끓는 물 위에서 자글거리다 가라앉는 몸들
딱딱한 것의 가장 속엣것이 진물처럼 흘러나오듯
내 작은 멍울도 깊숙이 잠겨들며
오랜 기억들이 스르르 몸을 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