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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문명은 자살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명의 붕괴』, 김영사 2005

 

 

장문석 張文碩

한양대 전임연구원, 서양사학 storic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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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라는 세 가지 품목을 중심으로 서양문명의 흥기를 설명하여 퓰리처상까지 거머쥔 작가가 이번에는 승리자들에서 패배자들로 관심을 돌려 문명의 붕괴를 설명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 Diamond)는 새 책에서 문명사회들이 환경재앙으로 말미암아 붕괴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문명의 붕괴』(Collapse, 강주헌 옮김)는 『총, 균, 쇠』와는 그 관심사가 정반대이지만 지리환경이 역사과정을 규정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문제의식의 연속선에 있다. 물론 그는 꽉 막힌 환경결정론자가 아니다. 그는 새 책에서 가혹한 환경조건을 지닌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대응임을 강조한다. 요컨대 문명의 흥망성쇠는 인간이 ‘행한 것’과 ‘행한 곳’의 변증법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문명의 붕괴에 대한 그의 결론은 명쾌하다. 문명은 타살되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는 것이다!

문명의 자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이스터 섬이다. 외계인 도래설까지 낳을 정도로 미스터리한 석상들을 남긴 이스터 사회는 무절제한 삼림 파괴로 생태적 파국을 맞고 붕괴했다.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묻는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한 그루의 나무를 베면서 뭐라고 말했을까?”(163면) 그러고는 별생각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생태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족장들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앞다투어 석상들의 머리에 어마어마한 돌을 얹어놓았고, 그럼으로써 나무들은 더 많이 잘려나갔다.

이스터 섬 이외에도 다이아몬드는 마야와 아나싸지 문명 등 여러 사례를 다루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는 노르웨이령 그린란드의 사례 분석이다. 그에 따르면, 노르웨이인들은 유럽인이자 기독교도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이누이트(에스키모)의 ‘야만적인’생존법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이것이 결국 생태적 파국을 면치 못하고 굶어죽게 된 원인이 되었다. 거꾸로 말하면 노르웨이인들이 붕괴라는 비극을 면하기 위해서는 환경조건에 맞게 문화적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바꾸어야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문화적(사회적) 생존을 고집하는 만큼 생물학적 생존을 고려하라! 이 명제야말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환경을 위해 문화를 바꾸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 쉽지는 않을 터이다. 문화적 가치는 필경 사회적 체제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환경보존을 위해 핵심가치들을 기꺼이 포기한 고무적인 사례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는 낡은 체제의 중력에서 해방될 때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가령 폴리네시아 원주민사회의 권력 과시를 위한 경쟁체제와 현대 미국사회의 이윤 추구를 위한 경쟁체제를 바꾸지 않으면서 환경자원의 남용과 낭비를 근원적으로 막을 길은 없다. 그리고 체제를 바꾼다는 말은 곧 사회적 위계에 대한 도전과 사회적 균형의 파괴를 의미하며, 따라서 환경보존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만큼이나 사회적 관계를 바꿀 정치적 역량일 것이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이런 점들을 별로 숙고하지 않는다. 지나치리만치 낙관적인 것이다.

과연 “신중한 낙관주의자”(717면)로서의 그의 면모는 문명의 생존 사례들에 대한 분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가령 그는 토꾸가와(德川) 시대 일본의 사례를 보면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삼림통제를 실시하여 생태적 파국을 면한 엘리뜨층의 현명한 태도를 찬양한다. 그런가 하면 파푸아뉴기니의 다국적 석유회사 셰브런(Chevron)의 환경친화적 기업경영을 하나의 본보기로 내세운다. 요컨대 토꾸까와의 쇼오군(將軍)이나 셰브런의 CEO는 다이아몬드 같은 생태학적 계몽사상가가 그렇게도 갈망하는 계몽군주인 것이다.

물론 그가 정부와 기업이 주도하는 상의하달 과정만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뉴기니 고원지대와 남태평양의 티코피아 섬의 하의상달식 환경보존 사례들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하의상달 과정이 주로 소규모 사회에만 적합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의의를 축소한다. 그렇기는 해도 환경문제에 대한 하의상달식 접근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령 티코피아 섬 사람들은 족장들의 권력 과시용으로 행해지던 돼지 사육을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환경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화전농법을 버리고 과수원 경작을 채택하는 등 혁신에 대한 높은 사회적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된 데는 확실히 모든 주민이 섬 전체의 생존과 이익의 관점에서 “족장에게 조언하거나 비판을 가”(411면)할 수 있는 민주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요컨대 티코피아의 사례는 권력과 자원의 유연한 사회적 재분배 체제가 생태적 파국을 막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사실 이와 같은 교훈에는 중요한 논점이 숨어 있다. 즉 환경재앙은 사회 붕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경재앙을 막음으로써 사회를 보존하기보다는 사회를 개선함으로써 환경재앙을 막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구별은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그렇게 구별해야만 다이아몬드의 진보적 생태주의에서 보수적 요소들을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보수주의는 이 세상이 일종의 폴더(polder, 해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간척지)라는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폴더는 항상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그 안의 사람들은 내부의 사회적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고 싸움을 벌이다가도 폴더 자체가 물에 휩쓸리는 위협 앞에서는 단결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범람에 맞서 폴더 자체를 보존하는 생태적 과정에 비하면 폴더 내부의 사회적 과정은 사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개선이 생태적 안전을 보장하는 전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물론 폴더에서 높은 곳을 차지한 이들은 그런 개선에 반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이아몬드가 제안하듯이, 사회적 개선이 그들의 이익에도 부합하리라는 점을 끈질기게 설득할뿐더러 소비자운동 등의 형태로 부단히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린란드에서처럼 그들은 “최후에 굶어죽는 특권”(387면)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생태학적 ‘구체제’와 절연하기 위해서는 온정주의적 계몽군주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혁명가들도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