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계간평 │ 소설
지하실의 윤리에서 항성의 상상력까지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기억의 권리와 부끄러움의 윤리
오랜만에 문예지에서 만나는 이청준(李淸俊)의 단편 「지하실」(『문학과사회』 2005년 겨울호)은 웅숭깊은 성찰의 공간을 마련해두고 있다. 기억의 정치학과 이어져 있는 그 성찰의 공간은 현실적인 맥락에서 뜨거운 화두를 품고 있다. 과거사 정리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진통은 현재적이며,‘나쁜 소수’와‘순결한 다수’의 이분법을 문제삼는 시각을 두고 저간의 논의 역시 치열하다. 이 지점에서 문학의 몫을 떠올려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억의 정치학 이전에 기억의 기술(記述/技術)을 둘러싼 자기 검열과 검증이야말로 문학, 더 정확히는 근대소설의 중요한 근거이고, 체제의 악과 관련된 역사적 갈등이 최종적으로 기입되는 곳 또한 근대소설의 발명이자 터전인 인간 내면이기 때문이다. 가장 섬세한 수준에서 기억의 기원과 발생, 기만과 은폐의 책략을 추적해‘부끄러움’이라는 반성과 해방의 영역을 창출하는 일을 오늘의 한국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러므로 괜한 부추김일 수 없다.
「지하실」은 노년의 화자가 어릴 적 살던 고향 옛집을 개축하게 되면서 지하실에 얽힌 기억의 책략을 반성적으로 곱씹는 작품이다. 기억의 다른 쪽 끝을 붙잡고 있는 집안 손위‘성조씨’와 주고받는 성동격서, 허허실실의 고난도 대화나 에두르고 에두르며 조금씩 기억의 실체와 반성의 정점에 다가서는 지적 추리의 펼침에서 이청준 소설의 품격과 깊이를 새삼 확인하는 즐거움이 크다. 관념 우위의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젊은 소설’에서 맛보기 힘든 통찰과 지혜의 세계라 해도 좋겠다.
옛집 개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엌 한쪽의 작은 광 바닥에 숨겨져 있는 지하실의 복원이 문제가 된다. 일제 말기 화자의 아버지가 만든 그 공간은 강제공출을 피해 곡물 따위를 숨기는 장소로 유용하게 쓰였으나 화자가 기억하는 가장 위태롭고 은밀한 내력은“사람의 생사 갈림길을 숨겨 안”았던 일이다. 동란 초기의 여름날 인민군 점령기의 고향 마을에서 집안 재종조 어른의 목숨을 그 지하실이 살렸던 것. 그날 밤 사람들을 이끌고 화자의 집으로 들이닥쳐 부엌 광을 뒤진 인물(병삼씨)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만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을망정 그날의 일은 화자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지하실의 내력으로 간직되어 있었다. 옛집 개축 일을 떠맡은 성조씨(재종조 어른의 손자)가 왠지 내켜하지 않는 기색을 보임에도 굳이 이참에 지하실까지 복원했으면 하는 마음을 화자가 조심스럽게 품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이쯤 소설의 발단부를 요약해본 데서 짐작이 가듯, 그 지하실은 그렇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기억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같은 해 가을, 이번에는 지난 석달간‘마을위원회’책임자였던 화자의 친구‘윤호’의 아버지가 다시 바뀐 세상에서 그 지하실을 은신처로 삼았다가“오늘 이 집 정제간에 목숨을 부지해볼까 했더니, 차마 못할 노릇 같아 그냥 간다”는 말을 남기고 제 발로 죽음의 길로 걸어갔던 것. 바로 이“원죄처럼 어두운 기억”이 화자로 하여금 오랜 세월 고향집을 외면하며 살아오게 했고, 그 기억을 굳이 회피하면서 자랑스럽고 떳떳한 지하실의 내력만을 자신의 것으로 되새기고자 했던 것인데, 자의적인 기억의 책략에 계속 어깃장을 놓는 성조씨를 통해 화자는 명암과 영욕을 함께 간직한 지하실의 실체에 닫아두었던 기억의 문을 연다.“지하실을 복원하여 어느 한쪽을 들춰내면 당연히 다른 한쪽도 따라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자의적 선택이 불가능한 내 기억의 권리 밖 일이었다.”
어두운 실재의 대면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것은 자기보존을 위한 주체의 있을 수 있는 책략이겠지만, 그 책략에 대한 반성의 포기는 그 주체의 자기보존을 왜소화할 뿐이다. 기억의 권리를 타자나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사유하게 됨으로써 화자는 이제 자기기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라면 이 소설이 특별히 기억의 정치학에 의미있는 문학적 틈새를 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하실의 복원을 둘러싼 성조씨와의 미묘한 심리전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두 가지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다. 집안 재종조 어른이 지하실에 숨어 있던 그날 밤, 사람들을 이끌고 부엌 광을 뒤진 병삼씨가 사실은 그 지하실의 존재를 감추어 어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짐짓 그런 식의 위장행동을 했다는 것. 두번째는 더 충격적인데, 윤호 아버지가 지하실에 숨었다가 자기 발로 다시 나온 이유에 대해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이 품고 있던 의심의 한가닥이 바로 화자 모자(母子)를 겨냥하고 있었다는 것. 기억의 근거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을 포함하지 않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즐겁게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 사실 모두 오해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전자가 자신들(화자와 어머니)의 두 귀로 들은 체험의 직접성으로부터 진실의 오해 가능성을 원천부터 봉쇄하고 있었다면, 후자 역시 사실에 대한 조회 없이 막연한 개연성만으로 진실을 추단하고 있었던 것. 이 대목에서 진실은 이미 오인(오해)을 하나의 전제로 품고 있으며,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라깡(J. Lacan)의 논의를 굳이 참조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진실의 존재기반이란 살얼음 같은 것이며 자기보존의 책략이 수반되게 마련인 개인적 기억의 개입은 기억의 권리 안팎에 대한 자기성찰과 오해 가능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지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설의 전언은, 제자리를 맴도는 듯하지만 조금씩 우회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사유의 진로 덕분에도 각별히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해서“눈길을 바꿔 보면 세상일이란 사람 따라 세월 따라 다 그렇게 달라 보이는 법이여!”라는 성조씨의 마지막 입막음까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권리에 대한 엄정함이나 진실 확정의 어려움이 침묵의 배려와 상호 관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영역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세상일’전체에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데는 「지하실」의 사려와 지혜를 품으면서도 또다른 차원의 기억의 정치학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침묵과 관용은 역사의 실증주의적 타락 앞에 의도하지 않은 방조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는 친구이자 어른스런 형이었던 윤호에 대한 애틋한 기억과 지하실에 얽힌 착잡한 기억을 함께, 다시 그것들이 있던 자리로 되돌려보냄으로써 기억과 망각의 숨바꼭질에 작은 매듭을 짓는다. 그 매듭이 숨기고 있는 게 부끄러움의 마음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소설은“무참한 흑빛으로 변해 있”는 성조씨의 표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그 너머에서 정작 무참해지고 있는 것은 화자‘나’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좋은 문학이 끊임없이 기억과 망각의 숨바꼭질로부터, 지하실의 어둠으로부터 불러내야 할 진실의 표정이며, 기억의 정치학이 망각해서는 안될 중요한 윤리의 심급일 것이다.
2. 이야기와 소설의 아이러니
이청준의 작품으로 이 글을 시작하기도 했거니와 지난 계절에는 연륜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소설세계의 활기가 반갑다. 그 가운데서 김원일(金源一)은 새롭게 연재를 시작한 장편 『전갈』(『실천문학』 2005년 겨울호)말고도 두 편의 작품을 더 발표했다. 인혁당 사건을 사실의 곡진한 수용 이상으로 견고한 리얼리즘의 세계에 안착시킨 연작소설집 『푸른 혼』(이룸 2005)의 출간이 얼마 전의 일이니 작가의 쉼없는 열정이 놀랍다. 「오마니별」(『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과 「동백꽃 지다」(『현대문학』 2006년 1월호)는 둘 다 작가의 본령인 분단문학의 계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1·4후퇴의 피란길과 용초도 포로수용소가 각각의 주요한 서사공간이고 이산의 문제가 공통적으로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다. 숨막히는 역사적 비극의 무게말고도 앞선 작품들의 압력이 이중으로 전제되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선 셈인데, 작가는 과연 어떤 문학적 신개지를 찾아낸 것일까. 하고 보면 그간 남북관계의 변화 또한 엄청나다. 평화적 교류와 공존의 온기는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일상의 감각 속에 충분히 녹아들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 7,80년대 분단문학이 감당해야 했던 역사적 무게를 돌아보면 낯선 느낌이 들 정도이다. 정치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금제라는 분단문학의 주요한 대립항이 사라진 지점에서‘분단’은 한국소설 속에 어떻게 수용되고 있을까. 김원일의 두 작품은 그 변화하는 한 풍경을 보여준다.
우선, 지난 시대 분단문학이 내면화하고 있던 정치성의 영토가 많이 사라진 듯하다. 작가 역시 그런 압력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이야기’다. 그렇다고 수난의 인생유전을 담고 있는 이야기가 허술하다거나 느슨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오랜 장인적 공력이 빛나는 대목이 많다. 문제는 이야기의 핍진함이나 감동이 곧바로 소설의 그것으로 치환될 위험이 전보다 증대했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구조화하고 적절한 아이러니의 거리 속에 두는 노력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점을 작가가 의식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테지만, 「오마니별」과 「동백꽃 지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그 성과에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피란길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은 충격으로 어린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채 전쟁고아로 평생을 살아온 한 노인이 죽은 줄 알았던 누이와 반세기를 넘어 혈연을 확인하고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마니별」은 주인공인‘조노인’의 캐릭터를 그 실제 인생의 비극성으로부터 일정하게 분리해놓는 아이러니한 묘사에 성공함으로써 감상적 동일시를 적절하게 견제하고 있다. 조노인은 분단문학의 이른바‘진지한’인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 어느 면 너무 답답한 생활세계 속에 갇혀 있거나 희화화된 인물로 그려져 있어 독자는 그를 비극의 무대가 아니라 희극의 무대에서 만나는 것 같은 착각에 싸인다. 이것이 그의 수난과 비극을 역설적으로 더 크게 곱씹게 하는 세련된 소설적 고안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조노인의 상실된 기억의 밑바닥에서 기적처럼 끌어올려진 한마디 말,‘오마니별’을 통해 남매가 서로를 확인하고 만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감동을 과연 소설의 그것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부정의 계기가 개입될 수 없는 절대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동백꽃 지다」의 경우도‘이야기’는 강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용초도 포로수용소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며 전쟁의 한복판을 지나온 주인공‘김노인’의 수난사는 기억을 잃고 창졸간에 전쟁고아가 된 「오마니별」의 조노인 못지않게 고비고비의 곡절이 깊고 아프다. 맨정신으로 헤쳐온 그 세월은 차라리 더 신산했을 수도 있겠다. 용초도 민박집‘민이네’를 앞에 두고 하룻밤 야화로 펼쳐지는 곡절 많은 인생담은 반공과 친공으로 갈린 포로수용소의 처절한 실상이나 미군의 무책임한 방기를 증언하고 수용소 담벼락을 사이에 둔 이산의 슬픔과 거기에 얽힌 김노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크고 넘친다. 그러나 「동백꽃 지다」의 소설적 근거가 마련되는 곳은 이야기의 숭고한 크기를 냉연한 시간의 아이러니로 뒤집는 사소한 지점들이다. 두 가지만 말해보자. 용초도 앞바다에서 김노인이 친공포로‘송시혁’의 누이‘송순임’과 후일을 기약하는 장면.“기다릴 테니 오년 후 삼월 첫주에 여게서 만나자꼬. 그때 못 만나면 또 오년 기다려 다시 용초도로 오겠다고 (…) 왜 그런 쓸데없는 말만 소리쳤을꼬. 어디든 정착하는 대로 금릉군 구성면 평전리로 연락하라고, 그 말이 핵심인데 말여. 순진때기 바보, 맹꽁이 같은 녀석하고선, 겨우 씨부린 말이 철부지 기집아들 연애편지질도 아이고, 귀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만 정신없이 외쳐댔으이……”이 순진한 미망의 세계를 포로수용소를 둘러싼 이런저런 비극의 역사와 대면시키는 감각이야말로 「동백꽃 지다」의 소설적 리얼리티가 이야기의 지배를 뚫고 새롭게 생성되는 대목이 아닐까. 역사와 시간의 횡포가‘귀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에서 차라리 선연한 역설의 웃음으로 전경화되는 느낌이다. 여기에, 김노인의 인생유전에 귀를 기울이던 민이네가 노인과 송순임의 후일담에 인간적 질투의 마음으로 개입하는 대목들이 살갑게 더해지면서 「동백꽃 지다」는 현재적 감각의 소설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두 작품 모두 지난 시기 고난의 역사에 대한 소설적 보고(報告)를 넘어서는 문학적 풍성함이나 주제의 강렬함에서는 아쉬운 느낌이 없지 않다. 이 아쉬움은 『노을』의 작가 김원일이기에 더한지도 모른다. 동시에 두 작품은 캐내고 일구어야 할 인간적·역사적 진실과 소설적 가능성이 그곳에 여전하다는 점을 새삼 환기시킨다. 분단의 역사성이나 현재성을 숙고하는 새로운 사유틀과 함께 다양한 문학적 상상력의 개발은‘분단문학’의 유효성과 무관하게 현재진행형의 요구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체험 세대’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3. 낭만주의자의 자기심화
윤대녕(尹大寧)의 소설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낭만주의자의 시선을 유지해왔다. 덧없고 실망스런 외관 너머 충일한 실재의 존재를 꿈꾸는 그의 시선은 문학 그 자체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념의 오랜 매혹과도 연결되면서 우리 문학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세계를 신선하게 부활시켰다. 여기에 자아와 내면으로의 복귀가 새삼스럽게 강조된 90년대 문학의 한 흐름이 관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윤대녕의 경우는 작가 개인의 성향과 자질에 특별한 방점이 주어져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낭만주의자의 힘이란 무엇보다 내부의 비전이나 감각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인만큼, 지속적인 자기심화의 부담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얼마간 정체의 시기를 통과하는 것 같았던 윤대녕의 소설세계가 보이는 최근의 변모가 더 반가운 것도 그래서다. 근자에 발표된 「탱자」(『문학과사회』 2004년 겨울호), 「낙타 주머니」(『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에서 작가가 공히 시선을 넘기고 있는 곳은 죽음 혹은 소멸의 시간인 듯한데, 그것이 특별하다기보다는 소설 화자의 한발쯤 물러난 관찰의 자리가 빚어내는 건조한 시선의 거리와 말하고 싶은 것을 조용히 누르고 있는 듯한 절제의 언어에서 비롯되는 품격의 각별함에 눈길이 간다. 삶의 어쩌지 못할 심연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그 문학적 힘이 작가의 특장이기도 했던 낯선 세계의 돌연한 현현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수수한 묘사나 시간의 권리에 대한 겸손한 수용을 통해 한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윤대녕 소설의 깊어진 차원을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들의 저녁」(『현대문학』 2006년 1월호)에서도 그 심연의 환기는 절제와 여백이 돋보이는 담담한 소설적 흐름에 실려 있다. 소설은‘미선’과‘정연’, 두 사촌자매가 운동권 출신의 고단한 독신 중년‘해운’과 나눈 십년 어간의 엇갈리는 인연을 해운의 친구인 소설 화자‘나’의 시점으로 띄엄띄엄 시간을 건너뛰고 이으며 북한산 자락의 풍경과 함께 전하고 있다. 인연의 안타까움과 구차함, 세상살이의 막막한 질곡 등이 현실적 사연 이상의 독특한 질감 속에 펼쳐진다. 물론, 그 질감이 소설 안에서 성찰의 공간을 생성시키는 힘일 것이다. 한동안 종적을 몰랐던 해운을 북한산 하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화자는 이혼녀 미선이 아이를 데리고 해운과 살림을 차린 진관사 아래 산마을 단칸방까지 동행, 점심을 얻어먹고 한나절을 보낸다. 그 길가 문간방에 객식구까지 네 사람이 비좁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풍경은 아름답다. 그곳에는 정연, 미선, 해운 세 사람의 엇갈리는 사랑의 인연을 두고 화자가 떠올린‘삶의 굴레’라는 관념조차도 감히 어쩔 수 없는 삶의 생생한 현재가 포착되어 있다. 누추하면 누추한 대로 어디에든 삶을 꾸려가는 나름의 질서와 위엄이 있게 마련이라면,“감옥 같은 방”에 차려진 밥상이 그러할 것이다. 유기농 오리쌀로 지은 기름진 밥에다 안집의 김장독에서 나온 묵은 김치, 멸치가 잘 우러난 아욱국과 식초냄새 좋은 오이무침에 멸치볶음이 올려진 소찬이자 성찬인 밥상. 그 밥상 겸 술상은 아이의 책상이기도 한 것이지만, 부엌 문간에 걸린“조롱 속의 새”도 그 질서의 표상으로 손색이 없다. 그 새는 정연과 해운 사이 덧없는 약속의 증표였던 것. 이 포기될 수 없는 생활의 공간이‘삶의 굴레’라는 관념과 마주보고 있는 장면을 그려냄으로써 작가는 누옥의 단칸방을 둘러싼 진관사 주변의 여름 저녁 한때를 견딜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두달 전 바로 지척의 북한산 자락에서 해운과 미선을 찾고 있던 정연의 절망을 그것은 조롱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몇년 뒤 겨울 초입의 저녁, 화자는 우연찮은 계기로 정연과 함께 진관사 아래 그 집까지 가게 된다. 두 사람이 살던 길가 방이며 대문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그 폐허의 문밖에서 문득 밥 냄새를 떠올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아득한 감각이 또 있을까. 뒤이어, 사정을 모르는 정연이“빈집을 들여다보면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요”하고“목이 막힌 소리로 중얼거렸다”는 대목에서‘목 막힘’의 정체는 드러나 있지 않은 채로 투명한 울림을 얻는다. 그 울림은 빈집을 사이에 둔 정연과 해운의 엇갈림을 더 큰 슬픔의 지평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년 전 월곡동에 밥집을 차렸다는 미선과 해운의 후일담이나 정연의‘목 막힘’은‘삶의 굴레’를 포함하면서 넘어간다. 이것은 고단하고 험한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드물게 공평한 감각이다. 소설의 마지막, 빈집 건너편 밭둑에서 북한산의 저녁 하늘 위로 한 노인이 날리고 있는 연은 그 넘어감의 이미지로 자연스럽다. 노인의 몫이어야 했겠지만 환상 혹은 환영(幻影)이어도 무방하리라,“북한산성 쪽 하늘에 등불처럼 드높이 떠 있”는 그 방패연은. 이 조용한 환상 뒤에“남의 빈집 앞”을 떠나“어기적어기적”다시 세상의 저녁 속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그리 옹색하지 않다. 물론 윤대녕의 이런 소설세계가 현실에 대한 복잡한 산문적 탐구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둠으로써 인생파적 서정의 좁은 단면에 국한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우리들의 저녁」에서 확인한 소설적 성취는 그런 우려보다 한국소설의 다양한 세계 파악에 윤대녕의 기여가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기에 족하지 싶다.
4. 불지옥의 시선
권여선(權汝宣)이 「가을이 오면」(『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에서 한 여성 내면의 참혹한 지옥도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 부정의 강렬함이 놀랍다. 여성성에 덧씌워진 기만과 허위를 맹렬한 적의로 까발리는 그 지옥도의 풍경은 과연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계가 숨쉬고 살 만한 곳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이 소설이 기만적 여성성의 감옥에 갇혀 침몰하는 한 여성인물의 참담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세계의 정상성을 근본에서 심문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심한 알레르기 질환을 앓고 있는 스물여섯살‘로라’라는 여성이 그 지옥도의 분열증적 주체다.‘우아한’이름과 달리 외모에 대한 강박과 어머니에 대한 적의로 그녀는 거의 자폐적 삶을 살고 있다. 늦은 나이에 전문대에 들어가 허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무더운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이 여성은 여름이면 한층 심해지는 알레르기 증세로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 발진으로 뒤덮인다. 한여름 정오 무렵의 재래 시장통을 지갑 하나만 들고 무작정 돌아다니다 뜨겁게 달구어진 옥탑방으로 쓰러질 듯 돌아오는 이 여성의 자학과 그 아래 숨어 있는 엄청난 적의와 공격성을 소설은 한편의 부조리극처럼 펼쳐 보인다. 부조리극이라고 했거니와, 시장통에서의 혼절을 계기로 우연히 알게 된 한 남자와 옥탑방에서 우스꽝스러운 김치볶음밥 시연을 앞에 두고 벌이는 기이한 2인극에서 독자는 자신의 정상적인 삶의 감각이 심문당한다는 느낌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남자는 대뜸 반말로 관계의 지배자가 되어 있는데 여자는 다만 죄스러울 뿐이다.
기름 없어, 기름? 네. 김 없지? 네. 깨도 없지? 네. 계란도 없고, 응? 계속되는 남자의 질문에 부정적으로만 답변해야 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죄스러웠다. 냉장고가 없어서……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겨울이면 있었을까? 남자의 가벼운 코웃음이라니. 집에 남자 없이 자란 그녀가 일찍이 들어본 적조차 없는 경이로운 소리였다. (부분 생략—인용자)
남자의 잘생긴 외모, 짙고 숱 많은 속눈썹, 겨드랑이의 톡 쏘는 듯한 시큼한 땀냄새에만 그녀의 자폐적 감각은 열려 있다. 물론 남자의 손톱에 까맣게 낀 때도 보기는 본다. 나중에 그녀의 공격성이 폭발할 때 그것은‘일개 노숙자’의 증거가 될 것이다. 계몽의 신화가 구축해놓은 인간/동물, 남성/여성의 서열극이 이 부조리극의 후경에“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으로 드러누워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부조리극이 풍기는 묘한 해방의 기운이다. 그것은 그 자체, 문명화된 세계의 은폐된 단면을 날것 그대로 제시한다. 그“웃음보다 불가해한 고통”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잠시 현실 개선의 요구와는 무관한 지점에서 인간 내부의 자연을 관음(觀淫)한다. 이 불편한 모순의 감각화가 얼굴 위의 진물처럼 이물스럽고 선연하다. 여기에, 가을 배춧국을 먹으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여자의 어머니가 벌이는 또 한편의 부조리극을 통해 여자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지옥도가 폭발하는 광경은 그 적의의 대상인 어머니의 일그러진 모성적‘우아’나 이제 한갓 좀도둑 노숙자에 불과한 남자의 실상 역시 지독한 결여의 실재라는 점에서‘가을이 오면’의 가정을 가망없는 상태로 전시한다.“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증오를 불태워보기로 했다. (…)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옥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그 불지옥의 시선은 작가가 보여준 낯설고 강렬한 언어감각과 함께 한동안 잊을 수 없는 지독한 여름의 풍경으로 남을 듯하다. 그래, 가을이 오면……
5. 현실을 환기하는 상상의 힘
최근 한국소설의 다양한 진화와 변모와 관련해서 젊은 세대의 소설적 체험이 과도하게 앞세대와 단절적인 차원에서 논의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단절의 차원이 그만한 정치적·사회문화적인 배경이나 체험 수용의 매체적 급변과 연결되어 있고 상상력과 소설언어의 변화 또한 상당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한국소설의 세대간 소통을 어렵게 할 정도로‘단절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문학사에서 확인된 소설 장르 본연의 유연성이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다양한 이질적 차원을 생산하고 수용해온 그간 한국소설의 이력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 김애란(金愛爛)의 소설세계는 체험과 소설언어 모두에서 그 세대적 차이를 선명히하면서도 한국소설의 어떤 세대와도 소통될 수 있는 보편적 공감의 영역을 높은 수준에서 보여주는 유력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상이 아버지든 편의점이든 혹은 잠 못 이루는 자기든 김애란 소설의 언어와 상상법이 기왕의 소설적 관습을 상쾌하게 뒤집는 자리가 선행 관념의 개입을 뿌리치는 투명한 현실 대면의 노력과 등을 맞대고 있으며 환상의 개발 또한 현실 맥락의 정교한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소통의 근거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에서 김애란은 현실과 상상의 좀더 조화롭고 절실한 접점 하나를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안정적인 사회 진입이 거의 예외적인 틈새가 되어버린 오늘의 우울한 청년 현실에 대한 뛰어난 사실적 보고이기도 한 이 작품은 동시에 그 이상의 울림을 빚어내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여기에, 삶에서‘나아진다는 것’과‘지나간다는 것’의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의정부 북부행 열차의 진행 리듬과 겹쳐낸 상상력의 개가가 있다. 서른 번에 이르는 취업 낙방 경력과 대학 때부터 쌓아온 학원강사 3년차의 이력이 전부인 스물여섯살 대졸 실업여성이 소설의 화자‘나’. 몇군데 학원면접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정부 북부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방, 노량진을 지나며 그녀는 7년 전 노량진 재수학원 시절을 떠올린다. 그 시절‘노량진’은 더 나은 삶의 지점으로 가는 길에 잠시 지나가는 곳이 아니었던가. 독서실 책상에 유치한 포스트잇 표어와 일년치 계획표를 써붙이고 비좁고 딱딱한 바닥에서‘연필처럼’잠을 잤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그러나 현실은 어땠을까. 대학시절 내내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려고 보습학원 강사를 했고 서른 번의 취업 낙방 끝에 다시 학원강사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화자는 그 노량진을 지나며 묻는다.“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지나가고 있는 중’인 것일까.”왜 노량진은 정말‘지나가기만’하는 곳이 되지 못하는가.“대체 나아진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는 또다른 자문을 앞에 포함하고 있는 이 질문의 문학적 신선함은, 질문의 좌표가 이 소설이 놀라운 언어감각으로 묘파해낸‘IMF세대’만의 막힌 성장의 현실 너머, 더 큰 현실의 자장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지금—이곳에서 무수한‘노량진들’을 매일 지나가고 있는 모두의 현실인 것.“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어왔다. 한 여자가 내 발을 밟고 소리를 질렀다.‘밀지 마요!’”다들 노량진을 지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 그들의‘노량진’을‘지나가고’있는 것일까. 적어도 지금 의정부 북부행 열차에 스물여섯 가난한 청춘을 싣고 있는‘정아영’이라는 여성의 자리에서 보면 이 질문에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의 반짝임밖에 없으리라. 이것은 절대 한갓진 우주적 상상력의 개진이 아니다. 실제로도“어디선가 아득히‘아영아, 내 손 잡아’”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는가. 재수 시절, 유명강사의 수강증을 끊기 위해 전날 밤부터 늘어선 천여명의 줄 속에서 밀려 쓰러지기 직전, 남자친구 민석의‘아득한’목소리가 바로 그렇게 그녀를 구원했던 것.‘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며 반짝거렸기 때문에 대학에 떨어질 수도 있는 법’이라면 사정은 더욱더 그러하리라. 해서, 노량진과 의정부 북부행 열차, 그리고 우주 먼 곳 이름모를 항성의 반짝임으로 이루어낸 김애란 소설의 일견 순진하고 무력해 보이는 상상의 연대(連帶)는 바로 그 무력함과 순진함의 표정으로 우리 모두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이곳 현실의 어둠을 역설적으로 더 크고 무섭게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