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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가흠 白佳欽
1974년 전북 익산 출생.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가 있음. gahuim@nate.com
웰컴, 베이비!
1
아이는 옷장 안에 숨어 있다. 떨어져나간 자물쇠 구멍에 눈을 붙이고 막 정사를 시작하려는 중년 남녀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아이는 들키지 않고 능숙하게 훔쳐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이는 옷장 안에 숨어 있는 몇시간 동안 전혀 움직이지도 부스럭거리지도 않는다. 아이의 참을성은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다. 침대 위의 남자와 여자는 옷장 안 아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는 필사적으로 욕망의 끝을 향해 몰두한다. 남자는 여자의 늘어진 젖가슴과 처진 뱃살 사이를 파고든다. 아이는 허망하게 허물어지는 육체의 끝을 무뚝뚝하게 바라본다.
대낮의 정사로 지친 중년들은 곧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고 아이는 자물쇠 구멍으로 잠든 중년의 남녀를 무심히 바라본다.
오메, 오메.
오메, 오메.
갑자기 옷장에서 튀어나온 아이 때문에 중년 남녀는 혼비백산이 된다. 아이가 우뚝 서서 여자가 내뱉은 비명을 비웃으며 중년 남녀를 빤히 쳐다본다. 놀란 중년들이 잽싸게 도망가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아이는 객실문에 어떤 자물쇠가 걸려 있는지 파악한 다음 능숙하게 문을 열고 사라진다. 객실에서 아이에게 당하는 대부분이 그렇듯 중년 남녀는 아이가 사라진 뒤에야 상황파악을 한다. 중년들은 서둘러 옷을 입고 방을 나선다.
중년의 남자는 카운터에서 점잖은 불만을 쏟아내지만 모텔 주인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
아직 애인데요, 뭘. 너무 불쾌해하지 마세요, 손님.
2
웰컴 모텔은 어느 동네에나 있는 오래된 그저그런 모텔이다. 담벼락에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작은 간판을 따라가다보면 후미진 골목길 끝에 부끄러운 듯 웰컴 모텔은 서 있다. 막다른 골목길에 나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숨어 있던 널찍한 마당이 사람들에게 웰컴, 사시사철 만개한 꽃이 부끄러운 미소를 살며시 머금고 드나드는 쌍쌍의 커플에게 웰컴, 한다. 낡았지만 육중한 오층짜리 건물은 아직도 위엄있어 보이고 넓은 마당에 키 작은 나무들과 꽃밭은 근래에 보기 드문 운치를 간직하고 있다.
3
모텔 주인 미스터 홍이 마지못해 아이를 건성으로 찾는다. 오래된 모텔은 아이가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너무 많다. 미스터 홍은 아이 이름을 몇번 부르더니 카운터로 들어가버린다. 난감해하며 서 있던 여자가 남자를 잡아끈다.
오메, 오메.
어디선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둘러 마당을 나서던 중년들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이를 찾아낼 리가 없다. 중년의 남자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4
야, 밑에 가서 밥 좀 얻어와라.
니가 갔다 오세요.
201호에는 부부가 장기투숙하고 있다. 침대는 남편이 조금만 뒤척여도 낡은 스프링이 튀어오를 것처럼 삐걱거린다. 남편이 침대에 누운 채로 슬쩍 고개를 돌려 아내를 노려본다. 만삭의 아내는 힘겹게 발톱을 깎는다. 남편이 아내를 흘겨보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방 한쪽 구석에는 휴대용 버너와 지저분한 냄비, 빨래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뚜껑 없는 냄비에는 라면 가닥이 말라붙어 있다. 구더기가 스멀스멀 기어나올 것만 같다.
만삭의 아내는 가쁜 숨을 내쉬며 정성을 다해 발톱을 깎고 매니큐어를 바른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잔뜩 심술난 사람 같다. 한눈에 보아도 지독한 임신중독증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밥 굶을래? 애기도 밥을 먹어야 하지 않겠냐?
지랄하셔요, 미친놈께서는.
시발년. 남편한테 하는 소리 봐라.
남편은 일부러 화난 척 말하지만 별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다. 켜놓은 텔레비전만 무심히 바라본다. 음식 썩는 냄새와 담배 냄새, 퀴퀴한 빨래 냄새에 질식할 것 같지만 그런 것에 부부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
배고픈데……
나도 고프세요.
5
부부는 돈이 떨어진 지 오래다. 동네 PC방들은 상금 일이십만원을 내걸고 동네 게임대회를 개최하곤 하는데 그것을 따라 부부는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상금을 타먹는 것도 한두번이지 외지에서 온 부부는 상금 킬러로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대회가 열려도 부부의 참가를 받아주는 PC방은 없었다. 만삭의 몸 때문에 여기저기 떠도는 것도 힘에 부쳤다. 어쨌든 부부는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니가 가야 좀더 불쌍해 보이잖아, 이년아.
쪽이 팔리셔요, 이 몸은.
남편은 꼼짝 않고 천장만 멍하니 바라본다. 남편과 아내는 아직 앳되고 어린 나이지만 이번이 네번째 출산이다. 부부에게 잦은 임신은 먹고사는 데 너무 거추장스러운 과정이었다. 고아원 동갑내기인 둘은 열여섯에 처음 아이를 갖게 되자 고아원을 나왔다. 첫째아이는 자신들이 자란 고아원에 버렸다.
6
어둠이 깔리고 웰컴 모텔의 네온싸인이 낡은 동네를 밝힌다. 미스터 홍이 모텔을 맡은 후 바꾼 것이라곤 네온싸인이 전부다. 네온싸인은 크고 현란하다. 낡은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내 어디에서도 보일 만큼 웅장하다. 야트막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 한가운데 웰컴 모텔은 성처럼 솟아 있다.
웰컴 모텔은 지어진 지 이십년이 넘은 건물이다. 건물도 사람과 똑같이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건물이 나이를 먹을수록 불편함은 늘어가지만 반대로 편해지는 것도 있다. 사람들이 잊지 않고 웰컴 모텔을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웰컴 모텔은 딱 한번 이름과 주인이 바뀌었다. 원래는‘삼양여관’이었는데 당시 잘나가던 중소기업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당시엔 시내에서 가장 크고 현대식인 여관이었다. 객실에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그럴듯했다. 건물 주변의 작은 골목길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고 모텔은 단층짜리 기와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동네를 지배하는 성처럼 보였다.
7
201호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화들짝 놀란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뭔 일이시대?
돈 달라고 그러는 건가?
모르셔요, 나도.
전화가 끊겼다가 다시 울린다.
아이, 시방 짜증나셔.
받아봐, 방에 있는 거 아는 모양인데.
개자식님, 꼭 이런 일은 날 시키셔요.
아내가 남편을 노려보며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든다.
밥 먹었어?
미스터 홍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흐른다. 젊은 부부는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이 없다.
내려와서 밥 먹어. 남편도 있지?
괜찮으셔요…… 근데, 무슨 일이시대?
그냥, 밥 먹자는 거야. 얼른 내려와.
남편은 벌떡 일어나 앉아 고개를 흔들고 아내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아내의 손은 퉁퉁 부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다. 손이 많이 불편한 듯 퉁퉁한 양손을 애써 주물러본다.
어쩌시지?
어쩌긴, 일단 밥은 먹어야지.
남편은 벌써 발에 슬리퍼를 꿰고 있다. 아내도 침대를 짚고 힘들게 몸을 일으킨다.
8
이렇게 얻어만 먹어서리……
남편이 잽싸게 자리를 잡고 앉으며 멋쩍게 중얼거린다. 아내는 뒤뚱거리며 남편 옆에 질펀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는다.
니들 아직도 안 갔냐? 오늘까지 나가라고 분명히 내가 얘기한 거 같은데.
재영이 못마땅한 듯 젊은 부부를 바라보지만 부부는 못 들은 척 차려진 밥상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김치찌개뿐인데, 같이 먹자고 불렀어.
미스터 홍이 밥을 푸며 눈으로 재영을 달랜다.
인간들아, 왜 사니?
어린 남편이 슬쩍 재영을 노려본다.
그냥 가래도, 이렇게 염치를 뭉개나?
주인도 아니면서……
자기야, 그만 해.
미스터 홍이 재영의 말을 가로막는다. 만삭의 아내는 아랑곳없이 숟가락을 든다.
밥상에서 이바구가 많으셔요. 아저씨, 진지하세요.
아내가 밥을 우겨넣으며 남는 입 사이로 말을 뱉는다. 웰컴 모텔 식구들이 101호에 모여 소박한 저녁식사를 한다. 부부는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밥이어서 식탐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남편은 재영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찌개에서 돼지고기를 골라 자기 밥 위에 수북이 쌓아놓고 먹는다. 아내도 주린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재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둘을 바라본다. 미스터 홍이 살짝 재영의 옆구리를 찌른다.
형, 제발 저런 애들 좀 거두지 마. 저렇게 처먹다가 획 사라질 것들……
9
삼양여관은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동안 지칠 줄 모르는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신도시 계획에서 밀려난 구시가지는 폐허에 가까운 지경이 되었고 여관도 함께 사장되어갔다. 여관 주인은 주위의 집들을 사들여 주차장을 만들고 여관시설도 신식으로 교체할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동네 주민들이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땅값에 질려 여관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정들었던 곳을 떠났다. 이후 동네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처럼 여관도 함께 늙어갔다. 삼양여관은 몇년 동안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유령처럼 서 있었다. 여관을 인수한 새 주인도 나타나지 않았고 변화와 개발을 원치 않는 늙은 주민들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삼양여관은 동네에 늘어나는 빈집 중 가장 큰 집에 불과했다. 동네는 급격하게 쇠락해갔다.
10
근데 아이는 어디 가셨대?
퉁퉁 부은 산모가 입을 오물거리며 건성으로 묻는다. 남편이 살짝 아내를 보며 눈을 흘긴다. 아내는 미스터 홍의 손을 힐끔거린다.
무슨 남자 손이 이리 이뿌시대. 질투님이 다 나려고 하시네.
살갗이 투명해 실핏줄이 선연한 손을 아내는 부러운 듯 바라본다.
여기 어디 있겠지.
하여간 이 자식은. 내가 좀 찾아볼까?
찾는다고 찾아지는 놈이니? 그냥 둬. 배고프면 기어나오겠지.
소박한 식사는 십분이 채 되지 않아 끝이 난다. 아직 밥을 다 먹지 못한 아내를 남편이 일어서며 슬쩍 타박한다. 아내는 꾸역꾸역 남은 밥을 밀어넣느라 정신이 없다. 남편이 잘 먹었다는 말도 없이 방을 나선다. 만삭의 아내도 인사도 없이 스윽 방을 빠져나간다.
짜증나. 몇개월째야 벌써. ……형, 그냥 둘 거야?
예정일이 얼마 안 남은 거 같지? 몸이 너무 붓는 거 같아 걱정이네.
11
오래된 여관은 몇년 전만 해도 질 좋은 포르노를 틀어주는 곳으로 유명했다. 남학생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여관비를 마련하고 좁은 방에 열댓명씩 들어앉아 밤새도록 포르노를 감상했다. 가끔은 슬쩍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터질 것 같은 성욕을 해결하기도 했고 손으로 서로서로의 것을 애무해주기도 했다. 요즘도 웰컴 모텔에서는 포르노를 원하는 손님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구닥다리 포르노를 틀어준다. 인위적이거나 아주 극적인 그것이 그리워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다.
날이 저물면 사람들은 하나둘 모텔로 모여든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해가 지길 기다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헤매다 웰컴 모텔에 안착한다. 대부분 남자손님은 돈을 지불하고 숙박계를 후다닥 대충 쓰고, 여자들은 두세 걸음 떨어져 딴청을 피운다. 모텔이 고스란히 80년대를 간직하고 있으니 그들 또한 80년대식 수줍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12
재영이 몇초 차이로 들어온 두 커플에게 나란히 붙은 방을 내준다. 한쌍은 중년 남녀이고 나머지 한쌍은 단골 재수생들이다.
모텔 주변은 밤이 되자 그나마 있던 활력도 사라진다. 이렇다 할 유흥시설이 없기 때문에 거리엔 인적마저 드물다. 이미 상권이 죽은 지 오래인 이곳에는, 신도시로 이사할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낸 가난하고 늙은 주민만이 각자의 집에서 우두커니 밤을 지킨다. 웰컴 모텔의 네온싸인만이 유령도시 같은 적막한 동네를 뜬눈으로 지켜본다.
13
문이 열리며 제복을 입은 경찰이 들어선다. 재영은 카운터 작은 창으로 그들을 멀뚱히 쳐다본다.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요? 이놈 이 집 애 아뇨?
재영이 소리쳐 미스터 홍을 부른다.
아이를 붙잡고 있는 경찰은 아이가 어찌나 억세게 대드는지 진땀을 뺀다. 재영은 귀찮다는 듯 카운터 안으로 사라진다.
아저씨가 보호자요? 무슨 애를 이따위로 키우는 거요?
애 놔줘요. 싫다잖아요, 아저씨.
미스터 홍은 머리를 풀어 다시 묶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입에 고무줄을 물고 긴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모은다. 재영도 카운터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무심히 쳐다본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아이가 자기를 잡고 있었던 경찰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마구잡이로 날린다. 경찰이 손으로 아이의 주먹을 이리저리 비켜내느라 애쓴다.
친자식 아니라고 하던데 자기 자식 아니라고 너무 막 키우는 거 아뇨?
미스터 홍이 경찰을 빤히 바라본다.
계속 구경만 할 거요?
용수야, 그만.
미스터 홍이 말하자 아이는 주먹질을 멈추고 횡 하니 사라진다.
돈 가지고 경찰서로 오세요.
돈이요?
재영이 놀라 껴든다.
애가 훔친 중국집 오토바이가 작살나서 물어줘야 하니까.
………
근데 애엄마가 여기 안 사는 거요? 애가 일러준 대로 전화했는데 엄마가 오겠다고 했다가 안 오는 바람에 반나절을 기다렸잖소. 진즉에 여기 산다고 얘기해줬음 편했을 것을.
아니, 애엄마가 온다니요?
잠자코 있던 재영이 카운터 창문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인 참견을 하기 시작한다. 미스터 홍이 재영을 보고 손을 내젓자, 재영은 카운터 안으로 사라진다.
알았으니까 돌아가세요. 내일 뵐게요.
봅시다. 그럼.
경찰이 모텔을 휙 둘러보며 발길을 돌린다.
하나도 안 변했어. 옛날에 여기서 포르노 참 많이 봤는데……
경찰이 돌아가고 모텔은 다시 적막해진다. 미스터 홍의 곱상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진다.
14
미스터 홍은 재수생들이 황급히 정사를 치르고 나간 객실을 청소하러 올라간다. 50여개의 방이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방은 몇개 되지 않는다. 가끔 4층이나 5층 방을 요구하는 손님이 있을 때만 빼고는 2, 3층 객실만으로도 모텔 운영은 순조롭다. 204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직 남아 있는 젊은 남녀의 열기가 문 사이로 빠져나간다. 형광등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어둠침침한 빛을 발한다. 방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고 아무것도 사용한 흔적이 없다. 욕실 구석에 던져져 있는 타월과 물기 가득한 바닥만이 방금 사람이 왔다 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다. 여기저기 타일이 떨어져나간 곳을 씨멘트로 대충 칠해놓아 욕실은 지저분해 보인다. 60촉 전구는 너무 넓은 욕실을 밝히기에 안쓰럽다. 미스터 홍은 맥없이 세면대에 물을 세게 틀어놓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미스터 홍의 시선이 욕실 구석 휴지통에 멈춘다. 둘둘 말린 생리대가 버려져 있다. 미스터 홍은 젖은 수건을 손에 쥐고 방을 둘러본다. 모든 게 놓아둔 그대로다.
이불을 들춰본 미스터 홍은 도망치듯 모텔을 나서던 단골 재수생들을 떠올린다. 걷어낸 이불 밑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남아 있다. 급히 수건으로 지우려고 했는지 핏방울은 오히려 넓게 번져 있다. 시트에 핏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썼을 그들의 세심함에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미스터 홍은 창가로 가서 창밖을 내다본다. 기와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를 멍하니 바라본다. 네온싸인에 비친 낡은 기와지붕과 슬레이트, 빛바랜 플라스틱 청기와와 홍기와가 깜박이며 그의 눈을 어지럽힌다.
15
저리 좀 비키시지. 나 힘든데.
아내가 남편을 밀치며 힘겹게 자리에 눕는다.
배가 왜 이리 살살 아프시지?
그러게 작작 좀 처먹지.
아내가 자신의 배를 살살 문지른다. 남편이 아내의 손을 뺏어 자기 바짓가랑이에 집어넣는다.
배 아프시다니까. 넌 자나깨나 그 생각밖에 안 나시나?
아내는 손을 빼내려 하지만 남편은 더욱 우악스럽게 손을 잡아끈다.
임신 지겹네, 정말.
개자식님, 다 너 때문이시지.
아내는 남편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손놀림을 멈추진 않는다.
잠깐.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옷장문을 열어젖힌다. 아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어 있다.
이 자식 자는 척하는 거 봐.
아이가 가늘게 실눈을 뜨고 윽박지르는 남편을 올려다본다.
진짜 잠든 모양이니 그만두시지. 애시잖아, 아직.
애는 무슨. 너 생각 안 나? 우리 처음 했을 때가 얘보다 한두살 많았을 때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이런 데 숨어서 맨날 훔쳐보겠어? 이걸 죽일 수도 없고, 정말……
틈을 타서 아이가 잽싸게 도망친다. 남편은 잡아봐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야, 나 배가 많이 아프시다.
가서 똥 싸. 에이 그 새끼 때문에 기분 더럽네. 게임이나 하러 가자. 기분도 엿 같은데.
진통이신가? 귀찮아 죽으시겠네. 다시 임신만 시켜봐, 시발님.
진통은 무슨. 너 애 한두번 낳냐? 아직 멀었잖아.
정확히 모르시지, 예정일도.
너 안 갈 거야? 나 혼자 간다.
……같이 가시지. 심심하셔.
가려면 얼른 일어나.
아내가 몸을 일으키며 남편을 따라나선다. 뒤뚱뒤뚱 벽을 짚으며 PC방을 가기 위해 외출준비를 한다. 남편은 그 시간도 기다리기 지루한지 방을 나가버린다.
16
아이가 재영에게 붙들려 야단을 맞는다. 아이는 듣는지 마는지 계속 딴청이다. 재영은 타이르기도 하고 혼도 내보지만 언제나 힘이 빠지는 것은 아이가 아니다.
배 안 고파?
미스터 홍이 어느새 세탁물을 들고 내려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형이 용수한테 너무 모질지 못해.
재영이 미스터 홍을 측은한 듯이 바라본다.
……그 사람 많이 닮았지?
그만 해, 재영아. 그런 거 아니잖아.
난 아직도 형이 그 사람 못 잊는 거 같아서…… 가끔 화가 나네.
미스터 홍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재영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미스터 홍의 가녀린 손만 바라본다.
……205호도 나갔어. 얼른 청소해.
재영이 터벅터벅 카운터로 들어간다. 미스터 홍은 핏방울이 번진 침대시트를 만지작거린다.
17
201호 아내가 벽을 짚으며 힘들게 계단을 내려온다. 어린 아내를 발견한 미스터 홍이 얼른 뛰어가 부축한다.
어디 가?
……PC방에 가시려고.
미스터 홍이 걸음을 멈추고 여자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어린 아내는 한손으로 자기 배를 받치고 나머지 손으로는 벽을 짚으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게임하러? 이 몸으로?
심심하시잖아요. 상관은 마시지……
여자는 걸음을 서두르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빨리 벗어나고 싶은 듯 안간힘을 쓴다.
너 예정일이 언제지? 한참 남았다고 들은 거 같은데 어째 좀 불안해, 요즘 너.
걱정하는 건 고마우시긴 한데, 아저씨 일이나 하시지.
만삭의 여자가 모텔을 나선다. 미스터 홍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뒤뚱거리는 어린 여자의 뒷모습이 골목길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지켜본다.
18
한밤중에 재영이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동네는 쥐죽은 듯 조용하고 과부하 걸린 네온싸인의 전기음이 동네를 깨우려 한다. 시간은 아침을 향해 가지만 모텔에 든 손님은 초저녁에 다녀간 두쌍과 사십대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전부다. 며칠이 멀다 하고 드나드는 고등학생들도 없다. PC방에 간 201호 부부도 돌아오지 않는다.
재영이 모텔에 온 지 일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긴 밤의 무료함에는 익숙지 못하다. 재영은 무료할 때면 밖으로 나와 마당을 뱅글뱅글 돌곤 한다. 어떤 날은 백바퀴를 돌 때도 있고 마음이 좋지 않은 날에는 밤새 천바퀴를 돌기도 한다.
재영이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 때문에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혼자 투숙한 사십대 남자가 여자를 찾는다.
재영은 수 다방에 전화를 걸어 여자를 부른다. 전화를 건 지 십분이 채 되지 않아서 여자가 도착한다.
너 새로 왔나보다. 이름이 뭐냐?
수빈일 찾아주세요. 잘 좀 부탁해, 오빠.
하는 거 봐서. 몇살인데?
스물이요.
수빈의 애교에도 아랑곳없이 재영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수빈의 얼굴에는 보통 스무살이 가지는 기대감, 긴장된 설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피곤에 절어 여유로워 보이려고 애쓰는 표정만 가득하다.
커피 쟁반을 든 여자가 계단을 올라가다가 되돌아온다.
오빠, 콘돔 좀. 깜빡했네.
재영이 퉁명스럽게 콘돔을 내준다.
너무 시간 재촉하지 말고. 알지?
19
아이는 밤늦도록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곧 생일인데 갖고 싶은 선물 없어?
………
아이는 학교에도 가지 않는다. 미스터 홍은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강요하는 법이 없다.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고 학교에 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아이 등 뒤에서 이따금 미스터 홍이 말을 걸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졸린 눈을 비비며 TV를 본다.
아이는 새벽이 되어서야 옷장으로 기어들어가 웅크리고 잠을 잔다. 옷장은 크고 넓어서 아이가 발을 뻗고 잘 수 있다. 두툼한 이불도 깔려 있어서 아늑하다. 미스터 홍은 아이의 얼굴에서 오래전 그를 본다. 십년 전에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직도 보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번씩 주저앉고 마는 미스터 홍이다. 가만히 옷장 문을 닫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가 잠결에 고개를 돌리며 몸을 더 작게 웅크린다.
미스터 홍도 방구석에 몸을 작게 웅크리고 눕는다.
20
재영은 동이 트기 시작하자 네온싸인을 끄고서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미명은 언제나 똑같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금세 찬란한 햇빛에 묻히고 만다. 201호 부부는 밤새 게임을 하는지 돌아오지 않았고 204호에 들어간 여자도 나오지 않는다.
재영이 가만히 미스터 홍 옆에 눕는다. 미스터 홍은 벽을 향한 채 새우처럼 등을 말고 자고 있다. 재영이 뒤에서 꼭 껴안으며 미스터 홍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손을 집어넣는다. 미스터 홍이 귀찮다는 듯이 몸을 더욱 움츠린다. 재영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재영이 미스터 홍을 자기 쪽으로 돌아눕게 하려고 애쓴다. 재영은 온몸에 사정없이 키스를 퍼붓지만 미스터 홍은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잠에서 깬 그였지만, 재영의 손과 키스를 제지하지도 반응을 보이지도 않고 그냥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내버려둔다. 재영이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미스터 홍의 바지도 벗기려 하자 미스터 홍이 가만히 자신의 몸을 일으킨다.
재영아.
재영이 얼굴을 미스터 홍의 사타구니에 묻으며 고꾸라진다.
형, 힘들어.
미스터 홍이 가만히 재영의 등을 쓸어내린다. 미스터 홍은 곧 재영이 이곳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많은 애인들이 그러했듯이 재영도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힘들어하지 말고 가. 오래 버텨주어서 고마워.
재영이 미스터 홍의 품에서 숨죽이고 가만히 있다가 격렬하게 몸을 파고든다. 미스터 홍의 바지를 벗기고 윗도리도 우악스럽게 벗겨낸다. 미스터 홍은 가만히 재영을 쳐다보기만 한다.
재영아.
미스터 홍이 나지막하게 재영을 부른다. 재영이 막 미스터 홍의 물방울무늬 팬티를 벗겨내려고 할 때 잠에서 깬 아이가 재영을 밀치며 사이를 가로막는다. 재영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다. 미스터 홍이 아이를 가만히 끌어안고 자리에 눕는다. 아이는 미스터 홍의 품에서 금세 다시 잠이 든다. 아이를 안고 누워 있는 미스터 홍과 고개를 숙인 재영의 눈이 잠깐 반짝 마주친다. 재영이 후다닥 옷을 입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미스터 홍은 아이의 머리를 오래도록 쓰다듬으며 늦은 잠을 청한다.
21
날이 훤히 밝고서야 부부는 PC방을 나와 모텔로 향한다. 남편은 느릿느릿 벽을 짚으며 걷는 아내를 기다릴 수 없어 모텔 골목으로 사라지고 없다. 아내는 하루하루 무거워지는 자신의 몸이 짜증스럽기만 하다.
정말, 시발님이셔.
아내가 푸념처럼 남편을 욕한다. 겨우 모텔 마당까지 오고서야 가만히 멈춰서 호흡을 크게 한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찬찬히 마당을 둘러본다. 이름모를 꽃들과 키 작은 나무들이 담을 따라 빼곡하게 늘어앉아 아내를 바라본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작은 텃밭도 있다. 상추와 배추 같은 것들이 줄맞춰 심겨 있다.
아내는 온힘을 다해 계단을 오른다. 심한 진통이 자꾸 아내의 발을 부여잡지만 묵묵히 참으며 배를 감싸쥐고 걸음을 옮긴다. 카운터에 앉아 잔소리를 늘어놓는 재영도 보이지 않아서 꼭 빈집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힘겹게 201호에 도달해서 막 문을 여는데 맞은편 204호에서 수빈이 커피 쟁반을 들고 살금살금 소리내지 않고 나온다. 돌아서는 수빈과 눈이 마주친다.
엄마야.
수빈이 놀라서 뒤로 움찔한다. 둘은 아주 잠깐 서로를 빤히 바라본다.
22
재영이 씩씩거리며 카운터에 앉는다. 모든 게 넓고 큼직큼직한 모텔의 다른 시설과는 달리 카운터는 채 한평이 안된다. 작은 상자 안의 재영이 턱을 괴고 얼굴을 감싸쥔다.
오빠, 나 이제 가.
수빈이 카운터 창문을 살짝 두드리며 이만원을 내려놓는다. 화대에서 10퍼센트를 떼게 돼 있고 다방에서도 많은 돈을 뗄 게 분명하니 실제로 여자가 갖는 돈은 몇만원 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안 갔냐?
꼬셔서 긴밤 끊었지요. 근데 204호 아저씨 좀 이상해.
재영이 여자가 내민 돈을 손으로 밀어낸다.
왜 그래. 내가 맘에 안 들어?
돈은 됐고 이리 좀 들어와.
재영이 카운터 창문으로 수빈의 손을 잡아끈다.
아야. 이리 어떻게 들어가. 손을 놔야 들어가지.
수빈이 좁은 카운터 안으로 들어오고 재영은 작은 창문을 소리나게 닫는다. 재영이 허리춤을 풀어내린다.
오빠도 참. 우리 계약하는 거지? 다른 애 부르면 안돼.
재영은 눈을 감은 채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빈이 재영의 성기를 손에 쥐는데 카운터 문이 활짝 열린다. 미스터 홍이 당황해서 가만히 문을 닫는다.
누구야?
재영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수빈의 머리를 사타구니로 끌어당긴다.
23
이른 아침 미스터 홍이 아이의 엄마와 마주하고 앉았다. 미스터 홍은 묵묵히 여자가 내뱉는 말을 듣고 있다. 미스터 홍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욕을 섞어 내뱉는 여자의 얘기를 듣고만 있다. 아이는 옷장 안에 숨어 떨어져나간 자물쇠 구멍으로 방 안을 엿본다.
학교도 안 보낸다며?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냐?
………
내가 못 키운다는 거 잘 알잖아. 남편이 알면 나 끝장이야. 잘 알지? 그러니 가슴 철렁이게 하는 일 좀 만들지 말자.
………
그 사람이 죽으면서 유산을 자기한테 남긴 건 다 이유가 있어서 아니겠어? 내 맘 이해하지? 난 돈 한푼 못 받은 거 알지?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여자는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둔다.
살았을 때도 죽어서도 사랑받은 건 당신이니까 당신이 책임져.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잘 키우라는 말은 안할게. 그러니 무슨 사고가 나더라도 내게는 연락 안했으면 좋겠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부탁하자. 진심으로.
……근데, 용수가 엄마를 많이 그리워하는 거 같아요.
자기가 엄마 하면 되잖아. 원래 그러고 싶은 거 아녔어? 연락하지 마.
여자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데 옷장에서 아이가 나온다. 여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방을 나선다.
인사라도 받고…… 용수야, 얼른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아이가 어정쩡하게 여자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숙인다. 여자가 힐끔 돌아보더니 방을 나간다. 아이와 미스터 홍은 멍하니 여자가 사라진 문을 바라본다.
24
201호 아내는 진통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몸을 뒤척인다. 진통이 확실하지만 병원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한다. 아내는 그냥 어떻게 잘되겠지 생각한다. 남편의 말대로 저녁 먹은 게 탈이 난 것인지도 몰라 오래도록 변기 위에 앉아 있다.
야, 시발님. 좀 일어나봐. 나 배 많이 아프셔.
아내가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로 남편을 부르지만 이미 잠에 곯아떨어진 남편이 들을 리 없다. 아내는 변기 위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배도 일찍 불러오고 통증도 자주 있어 뭔가 예감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아내는 애써 모른 척했다. 애만 낳게 되면 다시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기운을 내서 휴지통을 집어들어 화장실 문 밖으로 집어던진다.
에이 진짜. 뭐야.
남편이 잠에 취해 건성으로 묻는다.
이리 좀 오셔. 애가 나오시려나봐.
남편이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화장실 문 앞에 선다. 눈을 비비며 한심한 듯 아내를 내려다본다.
변기에 앉아서 애 낳냐? 자는 사람 깨우고 지랄이.
남편이 아내를 보더니 획 침대로 돌아가 눕는다.
아내는 뭔가 말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다. 아내도 반신반의한다. 진통이 주기적으로 오긴 하지만 애가 나올 때의 그것처럼 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내는 변비를 앓고 있던 터라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살짝 힘을 준다. 순간 묵직한 것이 변기 안으로 툭 떨어진다. 아내가 허망하게 밑을 내려다본다.
야, 야. 나 애 낳으셨어.
남편이 뭉그적대며 화장실로 다시 간다. 아내가 변기에서 아이를 꺼내고 있다.
에이, 진짜.
남편이 달려가 아이를 받아든다.
거꾸로 들고 등을 치셔. 애기 우시게.
남편이 아내가 시키는 대로 아이를 토닥이자 아이는 막혔던 울음을 토해낸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남편은 갓 태어난 아이를 씻기기 시작한다. 샤워기를 틀어 따뜻한 물로 아이 몸에 묻은 양수와 피를 씻어낸다.
야, 야, 야.
왜?
………
아내는 변기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일회용 면도기로 탯줄을 끊고 있다.
왜 그러시는데?
시발, 애가 눈하고 귀가 없어.
25
모텔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한밤중이다. 미스터 홍은 아침에 못 잔 잠을 자느라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다. 미스터 홍은 일어나서 옷장문부터 열어보지만 아이는 없다. 미스터 홍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묶으며 밖으로 나간다.
재영을 부르고 아이를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미스터 홍은 마당으로 나가 꽃밭과 텃밭에 물을 주고 이제 강해지기 시작하는 햇볕을 쬔다. 눈을 살짝 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따뜻하고 강렬한 환영이 눈을 어지럽힌다. 한참을 앉아 있어도 재영도, 아이도 나타나지 않는다. 미스터 홍은 재영과 아이를 찾기 시작하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다. 미스터 홍은 객실 복도를 걸어다니며 아이와 재영의 이름을 부르지만 어두컴컴한 복도의 적막함만 되돌아온다.
미스터 홍은 카운터에서 재영이 써놓고 간 편지를 발견한다. 미스터 홍이 손가락 끝으로 편지를 만져보지만 뜯어서 읽지는 않는다. 하얀 편지봉투에 눈이 부셔 눈앞이 침침해진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만 구슬프게 들려온다.
미스터 홍은 밥을 짓고 201호에 전화를 건다. 지난 저녁 허겁지겁 밥을 몰아넣던 부부가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201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도 밀린 숙박비 때문일 것이라고 미스터 홍은 생각한다.
미스터 홍이 201호 문을 두드려보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다. 어디선가 구슬픈 고양이 울음소리만 들려온다. 미스터 홍은 가만히 문에 귀를 대본다. 문은 잠겨 있다. 미스터 홍이 열쇠를 가져와 허겁지겁 문을 따고 들어간다. 역한 냄새가 문 밖으로 빠져나간다. 젊은 부부는 온데간데없고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미스터 홍이 침대 이불 밑에서 수건으로 둘둘 말려 있는 갓난아이를 발견한다. 입만 정상인 갓난아이는 이불을 걷어내자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미스터 홍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이를 안긴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아이 울음소리는 더욱 우렁차지고 미스터 홍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미스터 홍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얼른 웃통을 벗고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콩알만한 젖꼭지를 아이 입에 물린다. 갓난아이는 빈 젖을 물자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친다. 순해진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자 미스터 홍의 얼굴에도 웃음이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한다.
26
아이는 옷장 안에 숨어 방 안을 훔쳐본다. 204호 남자는 벽에 걸린 선풍기에 목을 맨다. 사지를 뒤틀고 떨더니 사타구니에 오줌을 지린다. 아이는 자물쇠가 떨어져나간 구멍에 눈을 대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