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거미의 집짓기와 소화법

통일과정의 소설적 표현

 

 

황광수 黃光穗

문학평론가. 국민대 문예창작대학원 겸임교수. 주요 저서로 『삶과 역사적 진실』 『길 찾기, 길 만들기』 『소설과 진실』 등이 있음. clhwks@dreamwiz.com

 

 

1. 존재론적 난제들

 

“남북관계와 분단문제를 소재로 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6·15시대’의 의미를”논하라는 게 원고청탁자의 요청이었는데, 텍스트들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6·15시대의 ‘통일’주제 소설들을 논하는 쪽으로 기억이 굴절되어버렸다. 이것은 사실의 층위와 희망의 층위를 뒤섞어버린 나 자신의 의식상의 오류임에는 틀림없지만, 남북관계는 ‘분단’이라는 왜곡된 역사적 현실 위에 놓여 있기에 ‘통일’이라는 풀림의 과정을 거쳐야 할 관계로 여기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두 차원 사이에는 건너뛰기 어려운 간극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희석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분단—통일’문제를 창작의 모티프로 삼는 작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난제들, 다시 말해 분단으로 인한 심원한 간극과 견고한 체제의 틀을 메우고 녹여야 하는 이중의 난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통일’을 염두에 두고 깊이 들여다보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도 ‘분단체제’라는 이름의 강력한 전류가 흐르고 있다. 국내외의 정치적 차원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의 생활영역과 의식 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도 통일을 불가능한 꿈으로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통일을 일회적 사건이나 목표가 아닌 점진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인들도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통일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작가들에게 반드시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폈듯이 난제는 여전한데, 독자들의 눈높이는 턱없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통일에 관한 소설 쓰기는 모티프의 발견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민족’을 내세우는 것은 그것을 상상의 공동체 또는 폭력으로 치닫게 될 숙명을 안고 있는 혈연적 집단주의 정도로 여기는 지식인들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은 표현층위에 도사리고 있다. 통일 주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에 관련되는 것인만큼 그 표현이 사실을 드러내는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큰데, 그 대상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간극과 차이들, 그리고 일상에서는 포착되기 어려운 분단체제의 미세한 변화를 동반하는 동적인 과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주제의 글쓰기는 희박한 존재성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모순에 찬 현상—간극과 틀—에 도전하는 모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주제의 소설 창작은 허공에 거점을 마련하고 먹이의 딱딱한 껍질에 소화액을 주입하는 거미의 집짓기와 소화법(消化法)에 비유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근래에 발표된 작품들 속에 헛것들(귀신이나 비현실적 환상)의 등장이 부쩍 잦아지고 있는 현상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 사실과 진실의 변증법

 

‘분단—통일’은 우리 작가들이 줄기차게 매달려온 주제이다. 이 주제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의 확인 자체가 큰 의미를 띨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지만, 민주화의 진행과 더불어 작가들은 숨겨진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만으로는 제 몫을 다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주제는 90년대 중후반 이후 ‘북한사람과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발굴을 통해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왔을 뿐이다. 6·15 이후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경향성을 띠며 양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이 그려내는 북한의 현실은 아직은 파편적·표피적인 데 비해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은 전보다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는 남쪽의 억압적인 현실과 인권유린을 비판했던 작가들이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하는 강력한 항의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후명(尹厚明)의 『삼국유사 읽는 호텔』(랜덤하우스중앙 2005)도 그러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 북한방문단의 일원인 ‘나’는 북한주민의 삶의 모습이나 행위에서 낯섦과 이질감을 느끼거나 간간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회의하는 상념에 빠져든다. ‘나’는 결국 북한을 ‘이상한 나라’로, 호텔을 ‘수용소’처럼 느끼며 『삼국유사』 읽기에 빠져듦으로써 그곳의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의 읽기는, 독서는“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라는 바르뜨의 주장을 실감케 할 만큼 사유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의 신화와 종교와 문학이 심오한 미의식을 띠고 되살아난다. 그래서 먼 과거의 삶의 모습들은 그 자신의 충만한 존재감을 위해 탐색·탐미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읽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미의식은 사회주의적 이상이 남겨놓은 ‘남루’한 모습들을 더욱 초라해 보이게 만든다.

전성태(全成太)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문학수첩』 2005년 가을호)은 한폭의 눈 시린 풍경을 통해 북한주민들의 굶주림을 전경에 내세우고 있다.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객관적인 시각은 외딴 오두막에서 안내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과 긴장된 상황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다섯살 난 여자아이까지 포함하여 여섯 사람으로 이루어진 이 집단 속에 외부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 수 있는 통로는 오십대 중국교포 한 사람뿐이다. 그는 북한과 미국의 극한 대치상태를 두고 북한은 지금 미국과 두번째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의 아버지는“미국이 정말 우리를 칠까요?”하고 묻는다. 이 짤막한 대화는 지금 북한의 처지가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암시하고는 있지만, 이 작품은 가혹한 굶주림의 현실—애장터에 묻힌 아이들의 시체까지 먹으려고 도굴한다는—을 우리 눈앞에 바싹 당겨놓고 있다. 이처럼 사실성을 드러내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는 이 작품을 논하는 자리에서 방민호(方珉昊)는“필자는 지금 우리가 북한체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북한주민들의 인권과 생활의 권리를 옹호해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반도를 살아가는 문학인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문학인은 어떤 어려운 조건 아래서도 언제나 인권과 생명의 본의를 버리지 않는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요청을 덧붙이고 있다.(「공동체주의의 ‘국경’을 넘는 일」, 『실천문학』 2006년 봄호, 348면)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작품에 내재된 시각이 사실의 배후와 맥락, 즉 ‘사실의 사실’로서의 진실에 가닿아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권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만, 역사에 작용하는 복수(複數)의 힘들에 대한 폭넓은 고찰도 인권의 중요성을 실천적으로 인식하고 해결해가기 위한 전제가 된다. 그리고 남과 북의 역사를 동일한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내부의 비판을 통한 반성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상대방의 자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교류와 화해의 조건들을 쌓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내부비판’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김원일(金源一)의 『푸른 혼』(이룸 2005)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연작소설집은 유신체제를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이른바 ‘인혁당사건’을 다룬 여섯 편의 중단편소설들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다섯 편은 당사자들 자신의 삶과 죽음을 추적한 것이고, 나머지 한 편은 한 희생자의 아내가 저세상으로 뜬 남편에게 보내는 애절한 편지의 형식으로 씌어진 것이다.

작가는 분단체제의 비인간적 폭력을 직접 비판하기보다는 항소의 권리도 제대로 행사해보지 못한 채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여덟 사람의 꿈과 고난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여덟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그들의 ‘진보성’이 부정적인 현실을 정직하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것이고, 국가전복이나 적화통일과는 무관한 것이었음을 그들 자신의 소박한 삶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한다. 「청맹과니」의 주인공은 대구매일신문 기자 출신으로 청년시절 청구대학 학생과 서기로 일하면서 퇴근 뒤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때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현실에 비판적인 지식인과 사회운동가 들이 그의 주위에 꼬였다. 대학교수, 신문기자, 학교교사, 변호사에, 피난나와 실직상태인 고급 룸펜들은 술이 거나해지면 경찰서에 끌려가 치도곤을 맞거나 구속되기 알맞은 신소리를 겁없이 주절거렸다.”(255면) 한 지식인의 진보적 성향은 이처럼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행위는 1974년의 정치상황에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범죄로 변질되고, 당사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이들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여의남 평전」의 주인공은 죽음의 발소리가 다가오는 싯점에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 어린시절 아버지가 들려준 생불(生佛)이 된 고승의 이야기를 떠올린다.그러고 나서 그는 어머니가 준 동자상(童子像)을 입에 넣고 삼켜버린다. “그것이 처음에는 목구멍에 걸렸으나 몇차례 침을 삼키자 목울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238면) 이러한 서술은 ‘사형’이라는 말로 가볍게 처리되어버린 사람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되살려내면서 분단의식에 절어 있는 우리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든다. 작가는 이처럼 한이 깊은 삶을 추적하면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형장의 허공이나 천국에서 못다 이룬 꿈을 대화로 풀어내는 장면까지 뒤쫓고 있다.

정도상(鄭道相)의 인물들은 김원일의 ‘푸른 혼’들과는 달리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을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정도상은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해의 봄과 가을에 두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개 잡는 여자」(『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와 「그토록 긴 세월을」(『황해문화』 2000년 가을호)이 그것이다. 앞의 작품은 딸이 개를 잡아서 번 돈을 조금씩 훔쳐내 금강산 관광을 신청한 아버지에게 실은 북에 두고 온 아내가 따로 있었다는 줄거리로 전개된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달려드는 딸에게 사실은 금강산이 아니라 임신한 어린 아내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흥남부두가 보고 싶었을 뿐이라며 자신의 과거를 실토한다. 피비린내가 끼쳐오는 삶의 치열함과 반세기의 세월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그 처절한 그리움은 단순한 심리현상을 넘어선 실체성을 띠고 다가온다. 뒤의 작품은 황학동 시장에서 김밥장사를 하는, 주인공 ‘무열’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세번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 그러니까 네번째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무열이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사흘 동안 자고 간 남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알부자’가 된 후에도 아버지가 혹시나 간첩이 되어서라도 다시 찾아올까봐 가게를 처분하거나 개축하지도 못했고, 쉽게 죽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간절한 기다림 역시 가슴에 품은 돌덩이처럼 무겁고 견고해 보인다.

올해 발표된 「소소, 눈사람이 되다」(『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는 북한을 벗어나 중국땅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한국에 갈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젊은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여성은 세 개나 되는 이름을 갖고 있다. 본래의 이름 ‘충심’, 안마사 ‘미나’, 남한 출신 남자가 붙여준 ‘소소’. 이 이름들에는 세 굽이의 인생이 새겨져 있다. 인신매매단의 유혹에 빠져 중국에 건너가 강제결혼을 당한 후 탈출한 일, ‘비법월경자’라는 처지 때문에 오년간 모은 돈을 떼이고도 오히려 몸을 숨겨야 했던 일, 남한 남자와의 만남 등이 그것이다. 그녀는 결국 공동숙소에 몸을 의탁한 채 설거지나 청소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길”을 찾아나서게 된다.

앞의 두 작품은 분단으로 인한 그리움을 고질병처럼 앓으며 한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에 대한 보고이고, 마지막 작품은 북한을 탈출한 뒤 한국에 가게 될 날을 기다리는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세 인물들은 모두 간절한 기다림과 벗어나기 어려운 고통 속에 방치되어 있지만( ‘소소’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독립적인 삶의 의지를 드러내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전개과정은 중국내 탈북여성들의 삶의 전형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뒤바꿀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이나 능력도 지니지 못한 무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간절한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은 통일을 이루어갈 무수한 싹들이 피어나는, 더디지만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

 

 

3. 소재와 의식의 확장

 

분단은 한반도 위에 이념의 경계선을 분명히 그어놓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국외로 떠돌게 했다. 시인 정철훈(鄭喆熏)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자신의 가족사 한 부분을 장편소설로 써냈다. 『인간의 악보』(민음사 2006)가 그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 월북한 뒤 모스끄바에 유학한 한 예술가가 김일성을 비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망명하여 가족을 이루고 나서도 그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회한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담아냈다. 남쪽에 있는 고향을 다녀오고 나서 향수병이 도진 ‘한추민’은 북에서 온 동생의 편지를 읽은 뒤 탄광에서 혹사당하다 죽은 동생의 헛것 때문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얼음 속으로 꺼져들어 미라처럼 굳어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가 부모와 형제를 저버린 도피였을 뿐이며, 그 댓가를 치른 사람은 형제였다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상처받은 예술가의 영혼과 김일성 일인체제 사이의 길항관계에서 서사적 동력을 얻고 있다. 그러기에 이 소설을 관통하는 의식은 역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를 생명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예술가의 서정적 정신에 대한 풍부한 묘사가 경험적 사실에 대한 과잉해석과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잉태된 은유적 문체는 체험적 실체를 모호하게 하거나 주인공의 세계관을 즉물적으로 단순화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세계의 국경은 생각보다 훨씬 물렁거리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조—소 국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영속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너머에는 영속적이지 않은 어둠과 빛이 교차되는 다른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 죽음과 한 몸체로 연결된 썩은 물이 추민 앞에 놓여 있었다. 썩은 물에서 살아가는 소금쟁이와 물방개들.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허우적대는 물방개란 추민 자신이었다.”(142면) 정치적 현실과 개인의 관계가 이렇게 비유될 수밖에 없다면, 개인의 파멸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빚어내는 국가는 상처받은 영혼에 비추어보면 폭력적 기계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주인공의 비판의식은 정치적 허무주의로 변질된다.

중심인물이 지닌 정치의식의 성향에 비추어보면, 이대환(李大煥)의 장편소설 『붉은 고래』(현암사 2004)는 앞의 작품과 정반대편에 놓일 수 있다. 이 방대한 소설의 주인공 ‘허경욱’은 기나긴 세월 동안 분단의 톱니바퀴에 찢기면서도 결코 허무주의로 떨어지지 않는, 그래서 때로는 진보적 정치의식에 감전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역사적 시간대에 제각기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세 형제의 막내인 이 인물을 통해, 작가는 남과 북 양쪽을 모두 체험하고 민족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려는 순수한 열정이 분단체제 속에서 어떻게 왜곡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구성과 복잡다단한 인생항로를 추적하고 있기에, 작가는 허경욱이 50대 후반의 나이에 조카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술회하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회고와 여행의 결합’(「작가의 말」)이라 부르고 있는 이러한 서술방식은 대화를 통해 현재의 관점에서 주인공의 체험적 과거를 재음미하면서 세계사적 조망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채용되고 있다. 작가는 남과 북 두 체제의 비인간적 폭력성을 모두 폭로하고 있지만, 남한에서 피체—심문—옥살이를 겪는 과정을 통해 남한 군사정권의 성격을 드러내는 쪽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조카와 함께 펼쳐가는 폭넓은 대화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던 한반도 역사의 배후에 세계사적 조망을 잔잔히 깔아놓고 있다.

허경욱의 인생은 밀항선을 탈 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빗나감은 큰형이 일본에 유학 갔을 때부터 이미 시작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빗나감’의 과정은 분단체체가 한 개인의 자유의지를 변질시켜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독백—이 소설은 조카와의 대화, 아들과 딸에게 보내는 편지,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대화와 토론 등을 통해 다채롭게 전개되지만, 허경욱 한 사람의 회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독백의 다양한 변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만으로도 역사적 의미가 충만한 장편소설이 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천의식이 강한 허경욱은 분단체제를 통과하면서 간첩으로 가공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간 인물에 대한 회상을 통해 그것이 한 사람의 특수한 체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평양에 가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서울로 가서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했던, 자신의 조국은 하나이므로 양쪽을 고루 체험하고 싶다고 했던 백기백의 소망. 그러나 유신헌법의 서울에 와서 그것이 한낱 간첩으로 내몰리고 말았구나.”(816면) 그러나 체제 내부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들은 그저 간첩일 따름이고, 그 이미지는 중세의 ‘악마’에 맞먹을 만큼 악의 상징성을 띠게 된다는 점에서 보면 그들의 인생은 분단시대의 가장 참혹한 실패작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의 상징성은 당사자들 내면에까지 침윤되어 그들의 정서를 어둡게 물들이기도 한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허경욱의 조카는 작은아버지에게 남극탐험에 실패하고 가까스로 생환한 ‘인듀어런스호’의 일화를 들려준다. “만약 그들이 남극횡단에 성공했다면 그 역사적 사실이 기네스북의 한 기록처럼 남는 것으로 완결됐을 텐데, (…)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기가 오히려 (…) 더 가치로운 경험과 교훈으로 남게 됐습니다. 이 경우야말로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얼마나 더 고귀하고 아름답습니까?”(816면)

그러나 ‘과거—이상’과 ‘현재—자본주의’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사유를 통해 전개되고 있는만큼 이 작품의 서술은 작가의 의도가 간간이 삶의 구체성을 대체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길 정도로 강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이런 점은 표현과 읽기의 순환관계에 대한 좀더 치밀한 탐색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4. 낭만적 표현과 새로운 기법

 

강유일의 『피아노 소나타 1987』(민음사 2005)은 근래에 발표된 작품들 가운데 주제 또는 소재의 한계를 취재와 상상력을 통해 가장 능동적으로 돌파해낸 작품으로 보인다. 작가는 북한의 ‘혁명전사’에 의한 항공기 폭파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사건 자체의 사실성을 뛰어넘어 폭넓은 관계망을 구축하면서 주요 인물들의 성장배경과 내면까지 풍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많은 부분이 가해자인 ‘한세류’와 피해자인 ‘안누항’의 의식으로 교차 서술되고 있고, 나머지 부분은 간간이 등장하는 주변적 인물들의 회상을 통해 사건과 의미상의 결핍이 보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주관성의 미학은 항공기 폭파사건을 한편의 서사시로 환치한다. 시적인 문체, 등장인물들의 실존적 사유의 깊이, 음악적 아우라 속에서 화해의 꽃이 피어나는 모습 등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미적 쾌감을 제공하지만, 이 소설의 허구성을 허구 자체로 드러나게 한다. 그의 시적인 문체는 때때로 사건의 디테일을 눈부신 시각적 이미지로 환치하거나 긴 세월의 역사적 현상을 하나의 문장 속에 과감하게 압축하기도 한다. “정확히 사흘 후 유정의 시신에서는 폭발하듯 구더기 꽃이 활짝 폈다”(33면)나, “무려 40만 개의 폭탄이 평양에 투하됐을 때 수령은 이미 우리의 신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39면)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역사적 차원의 문제를 실존의 장으로 옮겨놓는 경향을 강하게 노출한다. 이것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예술적 심미안과 인간심리의 미세한 결들을 읽어내는 심리해석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한세류의 회의(懷疑)와 의식의 변화를 통해 북한체제를 비판하면서 휴머니티의 차원에서 화해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인물들의 차이와 현실적 존재감을 떨어뜨린다.

원산의 도살장을 연주장으로 삼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지휘자 파스칼—그의 할아버지는 갓 태어난 한세류가 맡겨진 고아원을 운영했었다—은 예술적 감수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적 사유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안누항은 자신을 불구로 만든 한세류를 직접 만나 그가 자신의 연주를 애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파스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세 사람 사이의 연관성에서 화해의 계기가 마련되고, 장엄한 음악이 울려퍼지게 된다. 파스칼은 평양행 비행기 안에서 「파르시팔」의 대본을 펼치고 조부가 남긴 인용문을 읽는다. “그대에게 상처를 준 이 창만이 그대의 상처를 고칠 수 있다.”(518면) 안누항은 한세류가 듣고 싶어했다는 베토벤의 「환희」를 떠올리며, 이 작품의 마지막 합창을 떠올린다. “인류여, 뒤엉키라! 휘감기라! 얼싸안으라! 포옹하라!”(512면)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가상의 공간 속에 감동적인 화합의 장을 빚어낸다. 안누항은“연주 내내 나는 내 왼쪽 어깨 위에 돋아오른 거대한 산맥 위에 삶 전체를 조망하는 장대한 독수리가 내려앉아 있는 듯한 장엄한 느낌과 만나고 있었다”(537면)고 회상한다. 그러나 ‘장엄한’이나 ‘장대한’같은 형용사의 쓰임새에서 드러나듯이 작가는 이 대목에서 자아도취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 독자들은 분단이 빚어낸 막막한 부재와 판타지가 빚어낸 화합의 장면 사이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작가가 미래의 언덕에 걸쳐놓은 구름다리는 무지갯빛 속에서 공허해 보인다. 문제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거점을 마련한 작가의 의도에서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자리에 놓인 ‘에필로그 3’의 끝문장은 그동안 쌓아온 화해의 허구성을 스스로 폭로한다. “동서독의 분단놀이는 끝났다.”(549면) 하지만 ‘놀이’가 과연 동독과 서독의 것이었을까? 작가는 세계사를 주도해온 가장 강력한 힘은 제쳐둔 채 그 무대에서 악역을 담당한 분단정권에 대해서만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실제의 항공기 폭파사건에서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강유일의 소설에서는 오른팔을 잃은 안누항 혼자 살아남아 민족화해의 화신으로 부활한다. 그녀는 ‘115명 사망’처럼 인명이 숫자로 처리되는 것에 대한 저항의 기호로서, 죽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오랜 세월을 음악적 단련 속에서 살아온 그 자신만큼 절실한 존재들임을 환기시켜준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성은 ‘저자의 말’을 통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역전되어버린다. “그 40년짜리 주문(呪文), 추문(醜聞)들로 이루어진 유토피아…… 다시 말하지만 지상낙원의 문을 여는 황금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던 당은 그들의 혁명전사들에게 살육(殺戮)의 기술을 가르쳤다.”(552면) 취재와 상상력만으로 메워질 수 없는 이러한 경향은 작가의 이념적 한계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분단체제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여러 비평들에서 확인되었듯이, 황석영(黃晳暎)의 『손님』(창비 2001)은 ‘분단—통일’주제 소설의 수준 높은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작가가 불법입북—망명—옥살이를 치러내며 오랜 구상 끝에 일구어낸 것인만큼, 이 작품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폭넓은 해석과 새로운 기법이 빼어나게 구사되고 있다. 작가 자신의 말처럼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을“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260면)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새로운 리얼리즘은 소재가 안고 있는 존재론적 간극을 뛰어넘고, 사실적 층위와 역사적 의미, 그리고 화해의 차원을 조화시켜 대척적인 자리에 놓여 있는 두 ‘손님’사이의 거리가 한껏 좁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손님’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두 외래사조에 대한 은유이다. 작가는 이 두 ‘손님’을 통해 우리의 역사무대에서 치러진 참혹한 살육의 장면을 보여주면서, 어쩌면 통일과정에서 또다시 겪을지 모를 충돌을 예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과거사가 된 그 사건을 지금까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까닭도 그 폭발의 위험성이 아직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는 화해에 대한 강력한 요청을 내장한 채 한바탕 살풀이굿을 치러줄 적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황해도 ‘진지노귀굿’열두 마당을 구성적 틀로 삼은 황석영의 선택은 절묘하다.

이 소설의 진행은 뉴욕에 거주하는 ‘류요섭’목사의 고향방문 과정을 따르고 있지만,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다양한 인물들이 헛것이 되어 알맞은 때와 장소에 출몰하여 그 사건의 다양한 측면들을 끌어들인다. 따라서 실존하는 인물들이나 헛것들은 그들 나름의 핏빛 기억들을 거느리고 사건의 전후관계를 확인시켜주면서 역사적 의미망과 화해의 장을 완성해간다. 두 ‘손님’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이 소설의 핵심적 내용은 한 사람의 의식의 흐름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다. 이 다양한 시각들은 한편으로는 북한지역 기독교의 역사와 생리—가장 먼저 받아들인 자들의 자긍과 독선—까지 여실히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개혁의 역사적 필연성과 그 과정을 통해 계급문제의 연원과 실상까지 밀도있게 그려내면서 두 ‘손님’과 그들을 맞이한 사람들의 생존방식이 어느 지점에서 왜 어떻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차근차근 짚어간다.

“저기가 내레 살던 동네다. 당초에는 장재이벌에 사드랬넌데 아부지가 동척에 땅 잃고 먼바우골서 소작 짓구 살았다.”(76면) 요섭의 형 ‘요한’에게 죽임을 당한 ‘순남이 아저씨’가 고향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슬그머니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동척 마름이었던 요섭의 아버지가 그의 입초시에 오르면서 일제시대 마름들의 행태가 성토되고, “일본놈덜 쳐없애야”한다는 것과 ‘무산자의 세상’이나 ‘평등’을 배우게 된 까닭은 주인집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렇게 기독청년들과 좌익 사이의 분열—반목—학살 과정이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해방 이후 전쟁기간까지 신천에서 번갈아 자행된 끔찍한 살육의 장면들이 그대로 떠오른다. 그리고 요섭의 고향방문이 끝나갈 무렵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재판정을 방불케 하는 자리에 모여 ‘화해 전에 따져보기’의 장을 펼쳐 보인다.

그런 다음, 학살이 끝나고 두 형제가 떠난 후 고향땅에 남겨진 기독교도들이 두 ‘손님’을 동시에 품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화해 가능성이 탐색된다. 이 기독교도들은 북한체제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지녔던 신앙을 재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요섭의 형수는 남편이 저지른 죄악을 떠올리며“하나님두 죄가 있다”(152면)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사람을 많이 죽인 그 사람도 사탄이 아니라 비뚤어진 신앙을 가졌을 뿐이고, 이제는 자신도 ‘하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요섭은“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내적 갈등을 지니고 계신 존재”인데, “사람의 신앙적 결단에 의해서만”다시 완전한 존재가 되고, 사람은 이런“하나님에게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거듭나게”된다고 말하며 형수를 위로한다. 그러자 형수는 예전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까닭은 남편이 남겨두고 간 죄책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깊은 죄 까탄에 나넌 믿음얼 살려내지 못해서요.”(155면) 이러한 회개야말로 진정한 화해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 상황 속에서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거친 뒤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두 이념의 원리에 대한 좀더 이성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요섭의 외삼촌은 양쪽이 모두 혈기 왕성한 청년들에게 이끌려갔기 때문에 반목의 골이 깊어졌다고 회상한다. 양쪽 모두 ‘열심당’이었기에 예전부터 살아오던 생활방식을 잊었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 ‘손님’이 극단적인 투쟁으로 치닫게 된 배경을 적절히 짚어내면서“지상의 일은 역시 물질에 근거하여 땀 흘려 근로하고 그것을 베풀고 남과 나누어 누리는 일이며, 그것이 정의로워야 하늘에 떳떳한 신앙을 돌릴 수 있는 법”(176면)이라고 말한다. 노동과 분배가 정의로워야 하늘에 떳떳할 수 있다는 이 말은 사회주의적 이상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롭게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살육과 그로 인한 반목은 체험적 깨우침과 이성적 성찰만으로는 화해에 이를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굿의 형식을 화해불능의 조건이 된 증오와 그것이 빚어낸 시공간적 거리를 메울 수 있는 상상적 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굿마당에서 일어난 화해가 실제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굿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텅 빈 듯한 공허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굿마당에서 이루어진 화해조차 자연스럽게 수용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역사적 기억은 참혹하고, 우리는 ‘빠른’화해의 강박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더딘’변화과정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공허를 메워가는 것은 결국 역사의 현장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몫이며, 작가들 역시 이러한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5. 마무리

 

분단—통일과 관련된 문제나 사안 들은 매우 복잡한 관계망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기에, 눈앞에 보이는 현상의 탐색만으로는 그 실체와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만큼 끊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 마디들을 연결하기 위한 상상력이 그 어떤 소재의 문학보다 많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민족적 차원에서의 통일이 일차적 목표로 상정될 경우에도 그것은 미래의 싯점에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문학의 주제로 채택될 때에는 남과 북의 차이 또는 이질성에 대한 상호이해와 접근의 과정을 삶의 형식과 내용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텅 빈 공간’처럼 의식될 수도 있다. 그것은 미래의 시간 속으로 뻗어가게 될 가상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 스며 있지 않은 것을 앞당겨서 그려내야 하는, 따라서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막막한 공간이기도 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두 가지 난제는 소설적 형상화에 여러가지 흠결을 남겨놓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주제의 추상성과 광대성은 독자들의 일상적 관심과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흥미를 이끌어내기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분야의 창작은 결국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어떻게 현재적 관심과 결합해낼 것인가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글쓰기는 백낙청의 지론처럼 분단체제의 극복을 통해 세계사를 한단계 발전시키는 데 동참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작가들이 자부심을 갖고 덤벼들어도 좋을 만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통일’주제 소설쓰기는 통일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