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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환상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서는가

박민규와 조하형의 소설

 

 

차미령 車美怜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절망의 시대, 소설의 희망」 등이 있음. kirugi@dreamwiz.com

 

 

1

 

2000년대도 그 중반을 넘어서면서 지난 연대와는 구별되는 2000년대 소설의 지형도가 차츰 윤곽을 잡아가는 느낌이다. 배수아, 은희경, 김연수, 김경욱 등 이른바 ‘90년대 작가’들이 연대를 격해서 스스로를 갱신해나가는 움직임이 뚜렷하고, 박민규, 윤성희, 김애란, 조하형, 편혜영 등 2000년대 들어 첫책을 상재한 신진들이 내놓은 소설 또한 선배작가들의 그것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특히 작년은 시와 소설을 막론하고 새롭게 등장한 신인들이 구사하는 새로운 스타일에 평단의 관심이 집중된 해로 기록될 만하다. 소설에 국한해서 보자면, ‘상상력의 서사’ ‘무중력 공간’ ‘우주적 상상력의 지대’ ‘탈현실적 상상력의 문법’1 등 기존의 소설 통념에서 파격적으로 자유로운 서사문법을 조명하는 비평적 움직임이 여러 각도에서 활기를 띠었던 것이다.

장르문학인 SF소설과 판타지소설 혹은 인터넷 유머나 만화, 동화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온 이야기들을 이제 본격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냉장고 속에 미국을 포함한 세계를 넣으면 따뜻한 카스테라가 되어 있으니(박민규 「카스테라」,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이즈음 젊은 소설이 환상문법을 빌려 누리고 있는 서사적 자유는 유례없이 낯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더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그 현실적 연원이다. 모든 상상력의 기원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자유로운 환상과 견고한 현실 간의 관련성은 좀더 숙고될 필요가 있다. 현실에 고통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소설 속 인물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서사적 자유분방함과 유희적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현실에서의 자신은 너무나 왜소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인물들의 인식의 근저에, 부정적 현실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변화 혹은 개선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이 자리하고 있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가늠해볼 수 있다.

나날의 삶에서나 소설에서나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볼 때, 현재를 관통하는 비관적 세계관의 핵심이 세계의 불변성에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변하지 않는 세계란,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기에 더더욱 고통스럽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고 인간을 굴종적으로 만드는 세계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알리바이다. 세계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된 경우 인간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론적 현실에서 벗어난다면, 나로 인해 세계가 변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환상은 세계의 불변성을 가로지른다. 그래서 자유롭다. 과연 박민규는 환상공간에서 선택지를 내놓기 시작한다. ‘세계의 인스톨을 유지할 것이냐 언인스톨할 것이냐.’(『핑퐁』,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2006년 봄호) 미래의 환상세계에 자신의 공간을 건설한 조하형 역시 비슷한 질문을 거듭한다. “삶에 대한 질문도, 하나밖에 없어. 어떤 태양 아래 설 것인가, 하는 거.”(『키메라의 아침』, 열림원 2004, 158면) 적응할 것이냐 바꿀 것이냐, 타협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현실의 거울 이미지로서의 환상에서 세계를 위반하는 힘과 종종 조우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지만, 환상은 이 지점에서 문제를 닫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활짝 열어놓게 된다. 환상 속에서 발아한 진실한 욕망의 목소리를 부정적인 현실의 지형도를 변경하고자 하는 의지로 전환시켜야 할 책임이 그 바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젊은 소설에 만개한 상상력과 이에 토대한 환상의 맥락을 이 글에서는 박민규와 조하형의 소설을 중심으로 짚어본다. 이 작가들이 구사하는 파격적인 스타일에서 장르문학의 자취라든가 전자(電子)적 글쓰기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이들의 미학적 실험을 근본적으로 추동하는 것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의식이다. 2000년대 젊은 소설의 가능성을 짚어보는 이 글에서 두 작가의 최근작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라는 사실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2

 

상상의 씨나리오에 의지해 주어진 초라한 현실로부터 비스듬히 비켜나가는 방법적 전략은 이즈음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2 이를테면, 처치 곤란한 냉장고를 인격화하여 그 전생이 훌리건이었으리라 상상하고 그 냉장고가 뿜어내는 엄청난 소음을 고독을 무마하는 위안의 소리로 치환함으로써 누추한 일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재맥락화하는(「카스테라」) 박민규(朴玟奎)의 주인공을 보라. 현실을 뒤집는 화자의 상상이 능청스럽게 제시된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예서 그치지 않는다.

「카스테라」의 서두에서 작가는“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14면)라는 화자의 진술을 무심히 부려놓고 있는데, 자신의 판단과 세계의 양태는 무관한 것임을 애써 강조하는 이 진술은 뒤집어보자면 현실을 전제하면서 그것의 논리를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냐구?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15면)라는 문답에서 그 물음 또한 화자의 관념이 승인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에둘러 환기하기는 마찬가지다. 『카스테라』에 묶인 소설들은 때로 매우 비현실적으로 읽히지만 그것은 어느정도 과장과 능청의 효과일 뿐, 현실이 ‘처음부터’해체되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보다는 대체로 서사의 전반부에서는 현실논리와 대비되는 개인의 특수한 관념만을 부각시켜가다가 어느 순간 주체의 인식 범주의 문제에서 이탈해 비현실적 서사로 도약해나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표제작 「카스테라」에서도 ‘냉장의 시각’으로 ‘세계의 부패’를 확인하기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화자의 관념이다. 그러나 그후, 아버지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데 성공하는 화자의 모습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대로의 절차라 함은 말 그대로 ①문을 연다 ②아버지를 넣는다 ③문을 닫는다 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버지를 냉장고에 넣는 데 성공했다.”(27면) 박민규 소설의 환상적 장치는 이렇게 하여 시작된다.

미국과 학교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더니 맥도널드와 학교가 사라졌다는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 들려오고, 중국을 냉장고에 넣을 때 미처 같이 들어가지 못한 중국인 두명이 호프집을 찾아와 화를 내는 등 독자를 당황케 하는 사건들이 거듭되지만, 「카스테라」 속에는 이 모든 비현실적 사건들이 주인공(혹은 그가 속한 집단)의 망상(혹은 환각)적 경험임을 확인케 하는 지표가 전무하다. 화자의 주관적 상상이 객관 현실의 틈입으로 와해되거나 혹은 객관 현실에 비추어볼 때 그것이 자신만의 주관에 불과했음을 ‘어떤 식으로든’서사 속에 기입해놓는 경우, 소설은 제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에 의해 직조되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객관 현실(사회적 현실)과 주관적 관념(심리적 현실)이라는 대립축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박민규는 이 점에 있어 특징적인데, 그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인물 개인의 주관성 즉, 정신의 산물로 환원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주인공이 친구 B와 함께 UFO를 타고 나타난 너구리를 목격하는 것이나, 「코리언 스텐더즈」의 선배와 화자가 외계인의 습격에 동분서주하는 것, 나아가 『핑퐁』의 인물들이 탁구계가 지구와 폐합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 속에 있다. 어느 순간 현실에서 비현실로 도약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사건은 작중인물들에게는 어디까지나 명백한 현실로서 주어지며, 박민규 소설의 독특한 효과는 바로 이 사건의 ‘확실성’, 곧 인물들의 경험을 그들의 머릿속 관념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전통적인 소설문법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렇게 환상을 마음대로 부려놓은 듯한 박민규식 스타일이 꽤 불편할 것이다. 비교적 전통문법에 충실한, 그래서 예외적인 「갑을고시원 체류기」라면 몰라도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와 같은 소설은 거북하게, 말하자면 황당한 ‘공상’정도로 받아들이기 쉬울 듯하다. 이 경우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조금 더 열린 독자라면 이러한 환상적 서사를 알레고리로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예컨대 외계인의 습격으로 망가진 논밭(「코리언 스텐더즈」)은 피폐한 농촌을 알레고리화한 것이라는 식으로. 그렇다면 대왕오징어의 기습은? 개복치 모양을 한 지구는? UFO를 타고 온 너구리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오리배들은? 알레고리적 독해는 안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박민규 소설의 환상성을 순화하고 길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박민규 소설에 있어서만큼은, 설명불가능한 것이 설명가능하게 되는 순간 특유의 전복적인 감각이 쉽게 휘발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박민규 소설은 작가가 알레고리적 효과를 의식하고 또 의도할 때보다는, 엉뚱한 다른 것 속으로 미끄러지는 환유 속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의미화의 안정성을 교란해나갈 때 더 충만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이 활력에 비하자면, 환상적 서사를 시작하기 전에 화자의 관념을 펼쳐놓은 뒤 알레고리적 진술을 말미에 배치하여 소격효과를 노리는 전략은 앞으로 더이상의 깊이가 확보되지 않고서는 의도한 효과를 얻기 어려워진 듯하다.

우리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기발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연상, 거침없는 환상 공간으로의 비약,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소설적 에너지를 긍정한다고 해서, 박민규 소설과 한국적 현실의 무관성 내지 비연루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특히 최근의 소설계에서 박민규라는 작가가, IMF이후 평균적인 한국인의 비루한 현실을 가장 자각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러하다. 주인공들의 면면이나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핍진하게 그려내려는 태도는 그가 현재적 삶의 리얼한 감각에 그 누구보다 충실한 작가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예컨대“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74면) 같은 문장이 전해주는 실감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목격하는 것으로 나날을 연명해야 하는 지하철 푸시맨의 슬픔을 아우르며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의 위력 속으로 순식간에 직핍해 들어간다. 이렇듯 숨 막히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대응이자 방법적 전략으로 고안된 것이 예의 환상이거니와, 현재의 박민규는 이를 다양한 각도로 실험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 하나는 먼저, 우주로 나가봤더니 지구는 개복치더라는(「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식으로 ‘지구는 둥그니까’유의 현실적 논리가 우주적 관점에서 과연 옳은 것이냐는 즉, 현실의 자동화된 의식을 비틀어 보는 데 주안점이 놓여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카스테라』에 묶인 소설들에서 아무래도 주류를 이루는 것은 현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기보다는 현실의 결핍에 보완적으로 기능하는 환상이다. 「카스테라」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등 환상성이 가장 효과적으로 서사에 개입하고 있는 소설들의 결말처리 방식을 보라. 카스테라, 기린, 너구리 등 아주 익숙한 것들을 아주 낯설고 비현실적인 위치에 가져다놓음으로써 빚어지는 그 환상은, 현실에 지친 인간들을 가만히 다독여주는 동시에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환기하면서 애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데 성공한다. 요컨대 이 소설들의 주인공은 현실에서 충족하기 어려운 것들을 소박하게나마 대리 충족함으로써 그들을 억누르는 무거운 현실을 잠시나마 우회해가는데, 이들이 자신 앞에 주어진 놀라운 (비)현실에 크게 의혹을 품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환상을 끝으로 소설이 일단락된다는 점은 박민규 소설의 현재적 면모에서 짚어둘 만한 특징이다. 너구리가 등을 밀어주어도, 기린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아도, 따뜻한 카스테라 한조각의 맛을 보아도, 환상에서 다시 되돌아온 현실이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박민규 소설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민규가 거대한 현실과 씨름하기를 멈추고 환상 속으로 도피하려 한다는 불만은 작금의 상황이나 또 그 환상 속에 녹록히 담겨 있는 비애감의 깊이로 볼 때 지나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환상이 부조리한 세계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정신적 의지와 그 세계를 수락하기 직전의 통과제의적 매개 양자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은 지적해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까지가 그가 모색하는 환상의 진로의 전부일까. 최근 연재가 마무리된 『핑퐁』에서는 환상이 좀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왕따’당한 중학생들의 고단한 삶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던 작가는 환상세계로 도약한 뒤 인물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게 한다. “언인스톨?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213~14면) 세계라는 프로그램을 삭제하라는 이 충격적인 명령은 비록 담담한 어조로 기술되고 있기는 하나, 프로그램 자체를 아예 삭제하는 식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세계에 대한 극도의 부정의식을 드러낸다. 『핑퐁』의 현실세계는 애써 생존해야 할 이유 자체를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인물들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은 더할 수 없이 그악해 그 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현실에서는, 없다. 세계가 ‘깜박’하고 외면해버린 화자와 ‘모아이’는 자동화된 기계처럼 그 폭력 앞에 무참히 몸을 내어주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세계를 언인스톨하라는 명령은 일견 전능해 보이지만 그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런 환상을 낳게 한 부정적 현실의 전능함이다. 환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나’가 살아가야 할 곳은 여전히 현실이며, 그것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언젠가는 이 세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 아래서만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환상 속 결단과 현실 속 폭력의 이 어두운 깊이는 박민규의 현실관이 가닿은 막다른 한 지점을 암시한다. 『핑퐁』에서 박민규가 보여준 저 도저한 부정의식이 견고한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방향으로 물꼬를 트게 될지 아니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비관주의의 늪으로 빠져들게 될지, 앞으로의 진로가 주목되면서도 염려되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박민규의 책들을 처음 펼쳤을 때 외견상의 특징 중 하나는 단락이 바뀔 때마다 한줄씩 띄어져 있는 것인데, 이를 비롯해 인터넷 글쓰기의 영향이라 짐작되는 흔적은 그의 소설 곳곳에 스며 있다.3 조하형의 장편소설 『키메라의 아침』 역시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작품을 이루고 있는 많은 텍스트 블록(textblock)들이다. 전체 텍스트는 132개의 텍스트 블록으로 나뉘어 있고 이들 각각이 적게는 2개, 많게는 10개씩 묶인 총 40개의 하위텍스트들이 『키메라의 아침』의 골격을 이룬다. 본문에 삽입된 무수한 링크(link)들은 한 텍스트 블록의 끝에 있거나 텍스트 블록 안의 단어나 문장 뒤에 위치하여 다른 텍스트 블록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한다. 이렇게 링크를 따라 이동한 텍스트 블록은 대개 이동하기 전의 텍스트 블록에서는 부차적으로 다뤄진 사건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서사를 계속적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빚어내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동하기 전 텍스트 블록의 주석 역할에 그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결국 본문에서 어떤 링크를 먼저 선택하느냐는 독자에게 달려 있으며 그 선택에 따라 이야기는 일단 분산되는데, 아무 내용 없이 여러 개의 링크 표시만 되어 있는 텍스트 블록 16—7은 『키메라의 아침』의 이러한 형식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키메라의 아침』에서 하나의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미끄러져갈 때, 이야기는 통합되지 않고 그 자체로는 완전할 수 없는 또다른 이야기를 향해 분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상당히 까다로우며 완독한 후에도 그 얼개를 맞춰가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나마 텍스트 블록들을 묶어내는 40개의 하위텍스트들이 몇개를 제외하고는 동일한 촛점의 화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게끔 한 것이 작가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최소한의 배려라면 배려겠다. 그러나 『키메라의 아침』은 텍스트 블록의 수가 무수한 조합이 가능할 정도로 많지는 않으며, 링크로 연결된 텍스트 블록들이 그 연결순서에 따라 매번 다른 서사적 연관성을 가지는 것도 아니어서 최종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이야기의 다양성은 기대할 수 없다. 요컨대 작가는 텍스트 블록과 링크라는 복잡하고 다소 생소한 장치를 종이책 속으로 끌어들이되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핵심적 특징인 서사의 다양성을 꾀하는 대신 텍스트 전체를 무수한 파편들의 꼴라주로 만드는 길을 택함으로써, 이런 형식 자체가 뒤섞인 텍스트의 시공간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환상적 장치가 되게끔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키메라의 아침』의 이러한 형식적 특질이, 하나의 개체이기는 하되 다른 개체들의 특성이 희한하게 꼴라주된 이른바 ‘키메라’들의 이야기라는 내용적 측면과 맞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키메라의 아침』의 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키메라들이 장악한 미래의 환상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작가는 미래소설의 외관을 빌려 테크놀로지와 생명공학의 진전으로 인해 발달된 미래를 예측하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현재의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 위기의식을 미래로 투영하는 데 집중한다. 진화론적으로 날개 달린 인간이 태어날 확률을 따져볼 때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SF가 구사하는 정교한 외삽법과 『키메라의 아침』의 상상력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이 분야의 고전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84』 등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현재의 다른 판본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조하형의 이러한 전략이 그 자체로 낯설다고는 할 수 없다.

현실에 대한 논평이라는 점에서 『키메라의 아침』을 짚어갈 때 특히 흥미로운 것은, 텍스트의 현싯점으로부터 약 70여년 전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조인’이, 그 날개를 접고 지상으로 복귀하면서 혼란한 과도기가 마무리되는 과정이다. “구인류가 어떤 식으로 세계를 망쳐왔는지 똑똑히 보았고, 하늘 저편에서 막연하게 그들의 나라를 꿈꾸기 시작했”(70~71면)던 최초의 조인들은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했지만 이들의 반역의 에너지는 체제를 바꾸는 혁명적 전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종내는 기존체제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린다. 부정적 현실세계에 대한 강력한 저항체이자 대안의 가능성으로 기대된 조인들이 매스미디어의 분열전략과 자본의 상품화전략에 포획되어 지상에 완전히 안착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조인이 출현한 후에도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는 이 미래사회가 그 발전의 뒤편으로 폐기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인류들이 장악한 세계에서 도태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구인류의 참담한 현실이다.

조인들의 날개가 현실의 벽 앞에 좌초하고 오히려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동력으로 재포장되었다는 이 미래세계의 이야기에서 변혁의 시대를 관통해 오늘날에 이른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키메라의 아침』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가라는 질문을 뚝심있게 끝까지 밀고 나간다. 진보와 발전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온갖 ‘진화’의 방향으로 내달려온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그 세계에 속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는가. 오히려 그 속의 인간들은 네모난 변종 수박처럼 진화의 속도에 적응하기 위해 매일같이 몸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야만 한다. 그래서 『키메라의 아침』에서 미래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표현하는 말이 ‘미친, 새로운’이다. 텍스트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게 되는 ‘미친,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는 예의 ‘날개’를 포함하여 모든 새로운 것들을 훨씬 더 빠르게 상투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야 마는 이 세계의 진화방식을 표상한다. 결국 관건은 상투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미친 새로움’을 역으로 확보해내는 길밖에는 없으며, 조하형의 파격적 상상력과 미학적 기획 역시 이 점을 겨냥하고 있다.

상투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조차 상투적이 되었다는 이중의 회의론 앞에서 작가가 보기에 견고한 세계를 균열케 하는 최초의 토대는, 이미 결정된 현실의 필연성을 교란시키는 일상의 카오스를 되살려내는 것이다. 정신병원이라는 광기의 공간과 시청후각적 혼돈이 지속되는 노인촌이라는 신비의 공간이 바로 그 카오스의 무대로 고안되고 있으며, 이 공간을 자신의 삶터로 삼은 이 세계의 낙오자들은 현실에 처절히 절망했다는 점에서 변혁 가능성의 담지자로 설정된다. 이 낙오자들의 고통스런 절규가 한데 뭉쳐 견고한 세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라는 모색의 지점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점이 『키메라의 아침』의 손꼽을 만한 미덕이다.

이들의 간절한 소망은 그러나 불행히도 끝내 세상을 바꾸는 데 이르지는 못한다.『키메라의 아침』의 사실상의 대단원은 텍스트의 한가운데 위치한 텍스트 블록 16—4인데 미래세계는 여전히 조인들의 시대이고, 구인류 ‘김철수’는 바로크풍 공중벤치에서 공중의 조인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서도 벽타기를 거듭하던 김철수의 행위가 말해주는 것처럼 텍스트 속의 인물들이 광기어린 시도를 거듭하여 어떤 극단에 이른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만 하다. 견고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했던 이들이 그 극단에서 내놓은 답안 두개가 여기 있다. 그 하나는“완벽하게 순응함으로써, 그것의 강제성을 무화시켜버리는”(144면) ‘박영구’의 쌍둥이 누이 ‘박영자’의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체제에 저항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조차도 그 세계가 설계한 각본의 일부라는 사실에 절망한 그녀가 세계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상연되는 비극적 무대, 곧 그녀 자신을 끝장내버리는 것밖에는 없다. 그녀는 일견 도저한 허무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세계를 거스르겠다는 최후의 욕망만은 끝내 양보하지 않는다. 바로 그 욕망까지를 포함해 그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넘겨줌으로써 역으로 자신을 실현해내는 자멸의 희곡이, 그녀에게는 세계가 지정한 씨나리오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희화화하면서 그것의 바깥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하나는 박영구의 방식이다. 텍스트 속 인물들이 지나온 과도기를 뼈아프게 정리하는,“날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73면)라는 ‘날개의 아포리아’는 박영구와 ‘독고영감’등 『키메라의 아침』의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군을 광기의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즉 그들의 망상은 조인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이 변하지 않았느냐는, 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중심으로 똬리를 튼다. 독고영감이 처음 기술하고 박영구가 이어쓰는 「닭에 관한 노트」는 닭을 날게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담고 있으며 서술자 역시 친절하게 이것이 망상에 불과함을 여러번 반복해서 일러준다. 그러나 불구의 날개를 가진 닭이라는 대상을 향해 투자되는 그들의 망상을 따라가다보면 의외의 기묘한 에너지와 만나게 된다.

그들의 망상 속에는, 세계를 지배담론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 자신과 세계의 관련성을 탐구하고 세계의 문제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해결하려는 무시 못할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힘있는 세계가 개인을 포섭하거나 광기로 몰아 배제하는 방식 역시 편집증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아울러 정상적 사고와 비정상적 사고를 가르는 경계 역시 그 지배담론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까지 기억한다면, 독고영감과 박영구의 모색은 무력한 개인이 절대적 세계에 대항하는 저항담론의 한 형태를 예비한다. 닭은 당연히, 날지 못하지만 그 집요한 노력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특히 박영구는 닭의 실패를 통해 세계의 균열 앞에 선 자의 공포와 불안이라는 자기 속의 모순을 읽어내기에 이르는 것이다. 의지대로 되지 않는 세계는 인간에게 공포로 육박하지만, 모든 것이 예측가능하게 전개되는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 또한 자유를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에게 불안을 안겨준다. 지배담론이 체제의 소외자들에게 불어넣은“자기기만이나 자기혐오”(225면) 없이 자신의 불구의 날개와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그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박영구가 제시하는 답이다. 텍스트 블록 33 전체가 할애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장렬한 최후에서 박영구는“생애 처음으로 날아올랐다.”(264면) 트럭에 치여 죽으며 6.8초간을……

 

 

4

 

……환상 속으로 달려가면 현실에서와 달리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박민규와 조하형의 소설을 살펴보면, 실상은 반대에 가깝다. 매순간 숨통을 죄어오는 듯 답답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작가들에게 희망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되기 쉽다. 허무와 냉소의 문턱 바로 앞에서 거짓 희망을 불어넣는 것보다는 현실의 좌절과 절망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쓰는 것이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하는 가장 빠른 길인지도 모르겠다. 바야흐로 ‘바깥은 없다’는 말이 어디서나 쉽게 회자되는 세상인 것이다. 그 앞의 수식어가 신자유주의가 되든,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되든, 세계체제가 되든 누구나 쉽게 바깥은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소설은 늘 바깥을 꿈꾼다. 그 바깥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면, 작가들의 무대는 지구 바깥이 될 수도, 현재의 바깥이 될 수도 있다. UFO와 변형괴물이 느닷없이 등장하는 세계이거나 다리가 네개 달린 닭과 클론 봉황이 동시에 출몰하는 세계라도 괜찮다. 단 그 상상력이 지금 이곳에 대한 고통스런 숙고를 담고 있을 때에만, 자유롭게 펼쳐놓은 환상은 현실을 몰각하게 하는 유혹적인 방편이 아니라 현실 저 너머를 모색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두 작가의 소설들을 환대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환기하고 싶은 것은, 상상력의 확장이 그 자체로 현실 인식의 깊이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상력에만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현실인식은 오히려 앙상하고 진부한 레토릭의 차원에 머무르게 될 위험이 있다. 소설의 정형이 있다는 고정관념도, 소설의 리얼리티는 특정한 방식으로만 달성된다는 고정관념도, 소설의 무대는 늘 ‘지금 이곳’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깨나가는 것이 작가의 몫이다. 그러니 이 역시 한번쯤은 의심해볼 수 있겠다. 한번 만들어지면 되돌아보기 쉽지 않은 고정관념으로서의 세계관 말이다. 부정적인 현실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비관적인 세계관은 현재로서는 가장 깨기 힘든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현실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기 전에 먼저 진실로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뼈아프게 자문해보는 것이 옳은 순서일 것이다. 결단 속에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무한한 책임을 감당하는 순간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순간임을, 그리고 그 순간은 세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거스르고자 하는 의지로써 열어가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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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영채 「상상력과 허풍의 미래」, 『문학동네』 2005년 봄호;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 『문학과사회』 2005년 여름호; 손정수 「두 가지 잉여가 드러내는 징후들」, 『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 심진경 「탈현실의 문법과 상상력에 관한 질문들」, 『문예중앙』 2005년 가을호.
  2. 이에 대해서는 김영찬 「방법론적 상상제국의 아이들」, 웹진 『문장』 2006년 4월호 참조.
  3. 이 자세한 양상에 대해서는 서영인 「‘슈퍼’한 세상을 향해 날리는 적막한 유머」, 『실천문학』 2005년 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