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죠지 몬비오 『도둑맞은 세계화』, 창비 2006
세계화를 히치하이킹하는 상상력
안수찬 安秀燦
한겨레신문 기자 ahn@hani.co.kr
이 책은 ‘평등한 세계를 개척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사실은 이 책의 예고편이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다. 『은하수…』가 나온 건 1970년대 브레튼우즈 체제 해체 직후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막 시작되는 찰나였다. ‘우주인들이 폭파시켜버린 지구’라는 그 책의 첫 대목은 세계화의 파국적 결말에 대한 경고였다. 삶과 우주의 근본을 물으며 지구 종말을 되돌리려 했던 주인공 아서 덴트는 세계화시대의 인류를 이끌 메시아였다. 그 ‘복음’을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감 잡는 데 젬병인 21세기 지구인들을 보다 못해, 죠지 몬비오(George Monbiot)가 『도둑맞은 세계화: 지구민주주의 선언』(The Age of Consent, 황정아 옮김)을 펴냈다. 더 쉽고 분명한 언어로 안내서를 새로 쓴 것이다. 우주니 외계인이니 하는 말은 싹 집어치웠다. 대신 ‘세계화의 굴레를 벗어나는 히치하이킹’방법에 충실했다. 덕분에 히치하이커들은 명확한 메씨지를 이해하게 됐다—인류가 멸망하기 전에 이 세계화의 흐름을 되돌려야 한다. 이제 저들의 우주선을 잡아타라! 그 우주선의 이름은 각각 UN, IMF, WTO이다. 위세에 기죽지 마라. 일단 관제실만 장악하면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저들의 스페이스쉽(space-ship)이 지구를 구할 우리의 피스쉽(peace-ship)이다!
새 안내서의 특징은 이렇다. 우선 쉽다. 『도둑맞은 세계화』는 주체 형성의 문제, 이념적 지향의 문제 등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질문도 간단하게, 해답도 간단하게, 그러면 모든 사태가 분명해질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책 첫장에는 사회주의자, 자율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지역화론자 등의 안내를 신뢰하지 말라는 경고도 실었는데, 그들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느라 중요한 길목에서 표지판을 하나씩 빼먹은 경우다.
개념 설명 대신 정책 제안에 주력한 것이 두번째 특징이다. “만일 당신이 슬로건으로 정책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 나는 지금 당신의 시간을 허비하는 셈”이다(8면). 그러니까 “만국의 다중(multitude)이여 자율적으로 저항하라”는 슬로건의 네그리(A. Negri), “만국의 피억압자여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파국적 붕괴를 재촉하라”는 슬로건의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죠지 몬비오와 큰 상관이 없다. 슬로건으로 일관한 네그리와 월러스틴의 안내서는 그래서 지금 뭘 어찌하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세계화를 ‘히치하이킹’하면서 국경을 넘어선 저항의 전략을 고민했다는 점이 비슷하긴 하다. 지구촌 속속들이 인민의 통치를 뿌리내려야 한다고 보는 점에선 뜨로쯔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이 책을 뜨로쯔끼, 월러스틴, 네그리를 섞어놓은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히치하이커들이 열광하는 것은 ‘상상’의 힘이지 ‘추상’의 힘이 아니다. 이 안내서는 상상력을 가진 자에게만 축복을 내린다.
몬비오가 달아놓은 안내표지 가운데 백미는 UN을 히치하이킹하는 전략이다. UN이 뭔가. 세계인민을 대표하는 기구이다,라고 말하면 길 가던 개가 웃는다. UN은 가증스럽게도 유인원별에서 온 외계인임을 얼굴에 다 드러내고 다니는 죠지 부시의 경비업체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다만 일련의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세계인민의 이해를 집행하겠다는 최초의 발상은 ‘히치하이킹’할 만하다.
그럼 이제 진짜 세계의회를 만들자. 우선 지구의 모든 성인에게 한장씩 투표권을 주자. 1천만명당 1명씩 모두 600명 정도의 세계의회 의원을 뽑자. 선거구는 인구비례에 따른다. 국경 단위의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은 없다. 서로 다른 국적의 인민도 한 선거구에 섞일 것이다. 어차피 각국 정부로부터 자유로운 의회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다.
감당이 안된다고? 그러고도 히치하이커냐. 상상력 좀 발휘해라. 우선 이미 존재하는 반지구화 운동가들의 세계사회포럼을 둥지 삼자. 여기서 중립적인 선거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어떤 나라는 기를 쓰고 선거를 막을 것이다. 겁먹지 마라. 지하선거로 하면 된다. 해당 인민이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와 치르는 ‘망명선거’도 고려할 수 있다.
지구적 총선과 세계의회 운영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 등에 손 벌려서는 안된다. 가진 건 존엄뿐이고 잃을 건 풍찬노숙(風餐露宿)인 만국의 히치하이커들이 헝그리정신을 잃는다면 이 전략은 끝장이다. 세계의회 기금 마련을 위한 복권 발행은 어떤가. 사행심 조장이 찜찜하면 한번 더 상상력을 발휘하자. 세계무역 불균형을 구조화시키는 IMF를 히치하이킹해서 ‘국제청산연맹’으로 탈바꿈시키면 된다. 무역적자국이 지불하는 이자와 무역흑자국이 쌓아둔 수지를 몰수하는 게 국제청산연맹의 일이다. 여기서 얻은 기금은 세계의회 운영경비로 쓸 수 있다. 세계의회는 권력의 의지를 관철시킬 ‘총칼’이 없지만, 상관없다. 대신 세계인민을 실질적으로 대표한다는 도덕적 권위가 있다.
이런 발상을 포함해 WTO를 공정무역기구로 재편하는 경로와 미래상까지 내놓는 ‘안내서’는 일찍이 없었다. 200여면 대부분이 실제 히치하이킹을 감행하기 위한 작전도이다. 공론이 아닌 ‘실현’에 대한 갈망이 몬비오를 얼마나 짓눌렀는지 이렇게 적고 있다. “(지배가) 작동하는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지구적) 독재는 일말의 위험도 느끼지 않은 채, (우리가) 쓴 글을 읽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232면) 그러니까 “어느 세월에 세상을 뒤엎겠느냐”며 히치하이커들을 향해 코웃음치는 저 ‘오너드라이버’들의 괄시가 지긋지긋하다는 이야기다.
이 책이 안내서인 동시에 ‘복음서’라는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인 대목은 따로 있다. 민주화된 세계기구를 통해 국가와 자본을 길들이자던 몬비오는 마지막 순간, ‘믿음의 힘’을 말한다. “혁명가의 첫번째 자격조건이 상상력”이기에 “(권력의) 전능함과 난공불락성과 정당성을 믿지 않게 될 때,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 제국은 하룻밤 사이에도 무너질 수 있다.”(234~35면) 그러니 저들의 우주선을 뺏어 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나서라!
다만 나는 그 복음 뒤에 꼬리표를 붙이고 싶다. 정부나 자본의 반동을 어떻게 이겨낼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민주화된 세계기구’들 역시 결국엔 권력게임의 장으로 변질될 것 같다. 꿈꾸고 행동하라는 이야긴데, 한국의 히치하이커들은 제 손으로 뽑은 민주정부가 부당한 자유무역협정(FTA)을 거부하게 할 힘도 없다. 80년대 표현을 빌리자면, 몬비오는 혁명론을 갖추느라 ‘조직론’을 빼먹은 듯하다. 혹시 혁명론 자체가 부실한 탓이 아닌지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
어찌 됐건 히치하이킹은 불가측성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이 책은 ‘안내서’이다. 길을 가는 건 각자의 몫이다. 그 가운데 누군가 다시 새 안내서를 쓸 것이다. 한국의 히치하이커들에겐 몬비오의 안내서 자체가 새롭다. 전지구적 장치를 장악할 때 비로소 세계가 변한다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전제 아래, 그 경로를 세심하게 파고들어 정책대안을 내놓는 자세가 부럽다. 그러니 두려움과 의심이 많아 쑥덕거리기만 하는 한국의 히치하이커들아, 길바닥에서 평생 풍찬노숙할 테냐, 아니면 한번 히칭하이킹해볼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