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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후기 朴後氣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 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 galapagos@empal.com
도두리
마을에 비가 내렸어요
마당엔 잔디처럼 이끼가 돋고
비에 젖은 개들의 축축한 눈빛만이
처마밑에서 어슬렁거렸어요
지붕 위로 천둥과 어둠이 내리고
두꺼비집을 만지던 사내의 젖은 몸이
시커멓게 타버렸어요
죽은 사내가 포도나무 덩굴 아래
울타리 근처로 질질 끌려갔어요
둑이 무너지고
미군부대에서 울리는 납빛 싸이렌 소리가
잠든 마을을 흔들어 깨웠어요
죽음이 도처에서 범람했어요
석유를 머금은 불빛들이 수런거리며
도랑을 따라 바쁘게 바깥뜰로 흘러갔어요
밤새 도랑물에 아랫도리를 씻긴 풀들이
齒根 같은 밑동을 하얗게 드러내며 쑥스럽게 웃었고
우기의 한때를 지나가는 구름은
웅덩이에 고인 물빛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어린 포도열매가 비바람에 떨어져
상한 얼굴을 흙속에 묻은 채 울고 있었어요
비가 그치고
미군부대 철조망 사이로 남몰래
펩시콜라를 건네주던 아버지의 손이
줄 끊어진 연처럼 팔랑거렸어요
아버지는
어린 나를 문득문득 뒤돌아보게 만드는,
내 발목을 집어삼킨 물구덩이 같았어요
*도두리: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있는 마을이름.
움직이는 별
이삿짐을 꾸린다
좀더 넓은 집을 원했으므로,
나는 차갑고 어두운
우주 저편의 저밀도 지대를 향해
짐 실은 트럭을 몰고 간다
도시가 팽창을 멈추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불러오는 풍선의 표면에 들러붙은 티끌처럼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져가고,
변두리의 버스종점이 市 경계를 넘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듯
젖은 눈망울 반짝이는 어린것들을 이끌고
더욱 깊숙한 어둠속으로
나는 달려간다
뒤돌아보면, 불 꺼진 내가 살던 집
눈감은 창문이여 안녕
나는 이제 더이상
처절한 고양이 울음소리에도
잠든 네 몸을 흔들어깨울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호롱을 떠난 불빛과 같고
다만, 검은 그을음 같은 구름만이
뒤돌아보는 별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가린다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멀어져가는 별들의 뒷모습처럼
보일 듯 말 듯 위태롭게 빛날지라도
과녁
대문은
짙은 어둠속에서도
잘 보이는 푸른 과녁
하루 일을 마친 나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피곤한 살이다
집은
대문을 꽉 다물고 있다
술 취한 내가 비틀거리며
파란 대문에 몸을 기댄다
발껍질 같은 구두가
힘없이 벗겨진다
검은 구두는
냄새나는 발가락의 집이다
닳아빠진 신발의 복도 끝에는
곰팡이 핀 발가락들이 모여산다
검은 구두의 입이
복숭아뼈를 갉아먹고 있다
대문은 나를 지탱하고
나는 집을 지탱한다
어둠속에서
목련 몇송이 담장 귀퉁이에 박혀
입 벌려 하품하고 있다
발을 헛디딘 바람이
대문 앞 쓰레기봉투에 담긴다
자꾸 부스럭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