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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개혁문화, 이렇게 만들자

 

재벌개혁, 어디까지 가야 하나

 

 

김진방 金鎭邦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공저로 『한국 5대 재벌 백서: 1995~1997』 『미국 자본주의 해부』 『유럽 자본주의 해부』 등이 있음. jkim@inha.ac.kr

 

 

재벌은 한국경제의 중심이다. 경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정치에 들어가는 엄청난 돈의 대부분이 재벌로부터 나온다. 재벌의 돈은 광고를 통해 언론에도 들어간다. 재벌은 대학도 움직인다. 한국에서 재벌이 없는 곳은 없다. 그러기에 재벌은 정책의 대상이고 운동의 대상이다.

경제위기 이후 개혁은 흐름이 되었다. 재벌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재벌에 관한 논의는 곧 재벌개혁에 관한 논의가 되었다. 재벌개혁이 정책과 운동의 목표가 되었다. 지양해야 할 것과 지향해야 할 것에 대한 주장이 무성했고 일부는 실행되었다. 그러나 논의와 주장은 종종 과학보다 이념을 앞세웠고, 실증보다 예단에 의존했으며, 논리보다 수사(修辭)에 치우쳤다. 좀더 차분하고 냉정한 분석이 요구되며 객관적이고 정량(定量)적인 검증이 요구된다.

분석은 평가를 동반하며 평가에는 기준이 있다. 실증적 분석도 다르지 않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기준이 언급된다. 첫째 기준은 효율성이다. 기업은 자본과 노동이 결합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조직이며, 그 효율성은 부가가치로 측정된다. 기업지배구조와 그것을 규정하는 제도와 법규는 이러한 기업의 존재이유에 부합해야 하고, 한 기업의 효율성이 아니라 전체 기업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둘째 기준은 안정성이다. 소득과 고용의 수준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동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소득과 고용의 갑작스런 축소가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를 경험했다. 마지막 기준은 경제력 집중이다.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으나 소수의 개인이나 가족이 한 사회가 가진 자산의 대부분을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운용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함께 밝혀둘 게 있다. 재벌이란 용어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때로는 총수 혹은 회장이라고 불리는 자연인과 그의 친인척을 가리킨다. 때로는 총수가 지배하는 기업들을 가리킨다. 때로는 한 개인 혹은 가족이 적은 소유로 많은 기업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재벌·재벌기업·재벌체제로 구분해서 쓰기도 한다.1 사실 ‘재벌개혁’도 ‘재벌체제개혁’으로 바꿔 쓰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재벌개혁’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한국경제의 성장과 위기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종종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의 성공사례로 거론된다.2국가는 노동자를 억압해 기업의 노동비용을 낮췄고, 은행을 통해 국민의 저축을 자의적으로 기업에 배분했으며,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들여온 해외차관도 같은 방식으로 기업에 배분했다. 기업은 국가로부터 자금과 규율을 함께 받았다. 수출 실적을 올려야 했고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도 이뤄야 했다. 이윤은 다시 투자해야 했고, 할 사업과 하지 않을 사업은 국가가 결정했다. 부실기업 처리도 국가가 주도했고 그 비용을 부담했다. 재벌이 커지면서 경제력이 집중되었고 정경유착의 폐단이 심해졌으나 고도성장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투입이 급증하고 규모의 경제가 작동했으며 필요한 기술은 외국에서 도입할 수 있었다.3

그러나 발전국가의 성공은 계속될 수 없었다.41970년대부터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국가 주도의 자원배분은 효력을 잃어갔다. 투입 위주의 성장도 선진국의 기술과 시장을 넘겨받을 수 있던 시기에나 가능했다.1980년대에는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국가의 노동억압이 어려워졌고 임금상승은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켰다. 국가는 재벌을 규제할 힘을 잃었는데, 제2금융권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재벌 스스로 국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관치금융에 길들여진 은행은 재벌을 통제할 의사조차 없었다. 외국 금융기관도 다르지 않았다. 재벌의 부도는 금융시장의 마비로 이어질 것이기에 정부가 막아주리라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재벌의 차입이 급증하고 과잉 중복투자는 기업부실과 금융부실로 이어졌으나 숨겨져 있었다.

새로운 규칙과 질서가 요구되었으나 마련되지 않았다. 국가의 강제도 사회적 합의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오히려 재벌과 국제금융자본에 떠밀린 정부는 금융의 자유화와 세계화를 무분별하게 추진하면서 금융감독마저 느슨하게 했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게 된 일부 금융기관은 무모한 해외투자에 나서기도 했다. 정부와 여당은 금융개혁과 노사개혁을 시도했으나 대립과 갈등만 심화시켰고, 한보와 기아의 부도와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를 목격하면서도 손을 놓고만 있었다. 마침내 외국의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단기성 외채가 쌓여 있어서 자금회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외환이 바닥나고 환율이 상승하면서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은 마비되었고 한국경제는 순식간에 공황에 휩싸였다.

 

 

국민과 노동자 부담의 구조조정

 

경제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IMF의 관리를 받으면서 과거의 부실을 처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개혁을 주도했는데, 우선 금융부실 처리작업에 착수했다. 일부는 부실 금융기관을 폐쇄하거나 매각하면서 그 빚을 국가가 갚고, 일부는 부실 금융기관에 국가가 출자해 지배주주가 되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돈은 대부분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빌렸다.1998년 5월에 64조원의 채권을 발행했고,2000년 12월에 추가로 40조원의 채권을 발행했다. 공공차관이나 국유재산 등으로도 21조원을 조달했다.5 이렇게 조달된 125조원은 1998년 국민총소득의 40%이며,4인 가족에 1천여만원의 부담이 되는 것이다.‘국민의 정부’가 국민의 돈으로 기업과 금융기관의 빚을 갚은 것이다.

정부는 금융부실 처리와 함께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했는데, 이것은 노동자에게 구조조정의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시장 유연화는 1990년대에 국가와 자본에 의해 꾸준히 추진된 것으로, 계약직 근로와 시간제 근로의 활성화도 함께 추진되었다. 국가와 자본의 이러한 시도는 경제위기를 맞아 한층 힘을 얻으면서 정리해고제의 조기 도입과 파견근로의 법제화로 실현되었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불안정한 고용을 의미한다. 임금근로자의 근속기간은 1995년의 6.8년에서 1999년의 5.5년으로 감소했고, 임금근로자 중 고용계약이 1년 미만인 임시직과 일용직의 비중이 1995년의 41.9%에서 1999년의 51.7%로 증가했다.6

물론 구조조정의 가장 큰 비용은 실직과 실업으로 인한 소득 감소다.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 은행의 임직원 수가 3분의 2로 줄었으며, 다른 금융기관과 기업에서도 대규모 인력감축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실업률은 1997년의 2.6%에서 1998년의 7.0%,1999년의 6.3%로 높아졌다. 이에 따른 비용의 대부분은 실직노동자가 부담했고 일부는 전체 노동자와 일반 국민이 실업보험 등을 통해 부담했다.

국민의 부담으로 금융부실을 해소하고 노동자의 부담으로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개혁’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방만한 투자와 경영으로 부실을 초래한 재벌은 어떤 비용을 치렀고 어떻게 바뀌었는가?

 

 

재벌의 사업구조 조정과 재무구조 개선

 

1998년 1월 13일 대통령당선자와 재벌총수의 회동을 거쳐 발표된 합의문에는 “불필요한 업종과 자산의 과감한 정리”를 통해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가 5대 재벌에 실제로 제안한 것은 사업교환이었다. 사업교환으로 단일 회사가 설립되면 자산매각이나 외자유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LG반도체를 인수·합병한 현대전자는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 협상은 대우의 구조조정을 늦추고 부실을 키웠을 뿐, 그 부실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현대와 삼성의 석유화학사업 통합이 무산되면서 현대석유화학도 ‘회사채 신속인수’와 같은 금융지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업교환은 시장독점과 경제력 집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현대·대우·한진의 현물출자로 설립된 한국철도차량은 2001년 대우중공업 보유지분을 인수한 현대자동차에 편입되었다. 삼성과 현대의 발전설비 및 선박엔진 사업은 한국중공업이 인수했는데, 한국중공업은 2002년 두산에 매각되었다. 현대석유화학은 채권단 출자전환을 거쳐 2003년 LG와 롯데에 매각되었다. 현대·삼성·대우의 항공기사업을 통합한 한국항공우주산업은 대우종합기계 보유지분을 한진에 매각하는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업종과 자산의 과감한 정리”는 없었으나 재무구조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7 재벌은 정부의 강제적 조치와 축소된 대출한도에 맞춰 차입을 줄여야 했고, 이 때문에 필요한 자금은 회사채를 발행해 조달했다. 주식도 발행했지만 계열사가 대부분을 인수했기에 실질적인 자본유입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98년 10월부터 금융기관의 동일계열 회사채 보유한도제가 실시되면서 상위 재벌의 회사채 발행은 줄어들게 되었다. 반면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경기가 회복되면서 주식발행이 증대했으며 실질적인 자본유입도 이루어졌다. 부채도 상당히 줄었다. 그 결과 대우를 제외한 4대 재벌 평균 부채비율이 1997년의 473%에서 1999년의 147%로 낮아졌다.81999년부터는 이익잉여금이 늘면서 부채비율은 더욱 낮아졌다.

6~30대 재벌의 부채비율도 1997년의 617%에서 1999년의 202%로 크게 낮아졌으며 2001년부터는 대부분 200%를 훨씬 밑돌게 되었는데,9 상위 재벌과 마찬가지로 차입을 줄이고 주식발행을 늘였기 때문이다.

재벌의 재무구조 개선은 정부의 강제적 조치와 강화된 금융규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금융위기를 경험한 재벌과 금융기관 및 투자자의 선택이기도 했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흔들리면서 금융기관은 기업대출을 줄이고 가계대출을 늘렸다.10 재벌은 부도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 재무의 안정성을 중시했고 모험적 투자를 꺼렸다. 그리고 주식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인이 새로운 투자자로 등장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해 재벌의 부채비율은 정부가 제시했던 200%보다도 훨씬 낮아진 것이다.

 

 

재벌개혁: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

 

재벌의 재무구조 개선이 정부의 요구인 동시에 재벌의 선택이었다면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성 강화’는 거의 전적으로 정부가 강요한 것이었다. 대통령당선자와 재벌총수의 합의문에도 명시된 이 두 조항은 재벌의 기득권을 축소하면서 기업가치를 높이고 자금조달비용을 낮추려는 조치인데 개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의 구체적 내용은 상법·외부감사법·증권거래법 등의 개정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는 증권거래법의 사외이사제도와 상법의 집중투표제처럼 유명무실한 것도 있으나11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면,1998년 12월 총수의 배상책임을 명시한 ‘업무집행지시자’ 조항이 상법에 신설되었다. 이사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충실의무’를 규정한 조항도 신설되었다.121998년 2월과 5월에는 증권거래법을 개정해서 소수주주권 행사요건을 완화했는데, 이로써 소수주주가 회사의 회계장부를 열람하거나 임원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일 등이 다소 쉬워졌다. 증권거래법 개정에는 공시의무 위반과 허위공시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또 1999년 11월에는 부실감사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기 위한 외부감사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이런 법률 개정도 금융감독원과 검찰의 엄정한 집행과 법원의 적극적인 해석에 의해 뒷받침돼야만 효력을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법원이 2001년 대우의 분식회계와 관련해 기소된 임원들에게 26조원의 추징금과 함께 중형을 선고한 것은 의미가 크다. 그렇지만 1998년 10월 시작된 삼성전자 주주대표소송에 대한 판결의 의미는 복잡하다.2003년 11월 2심판결에서 법원은 불법적인 정치자금 제공에 대해 이사의 배상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으며, 보유주식을 계열사에 적정가격보다 낮게 매각한 것을 민법에 규정된 ‘이사의 주의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규정했다.13그러나 저가매각에 따른 손실의 일부만을 이사들이 배상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매각을 결정한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사들은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한편으로 적극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소극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검찰은 자의적이기조차 하다. 검찰은 2003년 3월 SK 최태원 회장을 배임혐의로 기소했다. 최회장은 2002년 자신 소유의 워커힐 주식을 SKC&C가 보유하던 SK(주) 주식과 맞교환했는데, 이때 워커힐 주식을 적정가격보다 높게 평가해서 SKC&C에 716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다.2003년 6월 법원은 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검찰은 다른 재벌의 유사한 거래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삼성 계열사들이 10만원씩에 사들인 삼성에버랜드 주식을 이건희 회장 자녀들은 전환사채를 통해 7700원씩에 129만여주를 인수했다. 이 일은 1996년에 있었고 곧 알려졌으나 검찰은 2003년 12월에야 삼성에버랜드 이사들을 배임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앞서 검찰은 삼성SDS의 전환사채 발행에 대해서는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삼성SDS는 1999년 2월 전환사채를 발행해서 이건희 회장 자녀들이 1777만여주를 7150원씩에 인수하게 했는데 이 주식은 당시 장외에서 주당 5만5천원 내외로 거래되고 있었다.

이처럼 자의적인 집행과 소극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열거한 법률 개정은 중요한 변화의 시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삼성처럼 회사에 손실을 끼치면서 총수 가족의 재산을 불리는 일이나,SK처럼 1조5천억원의 분식회계를 하거나 회삿돈 1조원을 유용하는 일도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비자금을 만들어 수백억원을 정치인에게 건네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것이다. 증권집단소송법이 시행되는 2005년부터는 더욱 그럴 것이다.

 

 

재벌개혁의 의미와 한계

 

재벌의 소유구조는 재벌과 투자자의 선택 결과이며, 이 선택에서 투명성과 책임성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재벌의 소유구조는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의 의미와 한계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경제위기 이후 재벌의 소유구조는 어떻게 바뀌었으며, 바뀐 소유구조하에서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앞에서 말했듯이 재벌은 1998년과 1999년에 많은 주식을 발행했다. 이 사실은 자본금 변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4대 재벌 계열사들의 자본금 합계는 1997년의 14.3조원에서 1998년의 21.9조원을 거쳐 1999년의 32.1조원으로 증가했다.1997년까지 발행된 주식보다도 더 많은 주식이 2년 사이에 발행된 것이다.14 이 주식을 모두 외부투자자가 인수했다면 기존 주주의 지분율은 예전의 절반 이하로 낮아질 것이다. 그런데 4대 재벌 총수일가와 계열사의 지분율은 그다지 낮아지지 않았다.LG와 SK의 경우 계열사 지분율은 오히려 높아졌다.15 새로 발행된 주식의 많은 부분을 계열사가 인수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총수일가와 계열사의 지분율이 여전히 매우 높다는 것이다.1999년 말 4대 재벌 총수일가 지분율은 4.6%이고 계열사 지분율은 27.0%이다. 여기에 비영리법인·임원·우리사주조합 등의 지분을 보태면 38.7%이다. 나머지 61.3%는 수많은 국내외 투자자들이 나눠 갖고 있다. 그렇기에 주주총회에서 이사 선임을 포함한 모든 사항은 총수 뜻대로 결정된다. 즉 총수의 기업지배권은 절대적이며 다른 주주의 도전에도 안전하다. 방만한 투자와 부실경영으로 주식가격이 떨어지더라도 기업지배권을 잃을 염려는 없다. 아무리 투명성이 제고되고 책임성이 강화되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재벌은, 주주가 소송을 제기하고, 법원이 ‘주의의무’ 혹은 ‘충실의무’ 위반으로 판결할 만한 일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검찰이 배임혐의로 기소하고 법원이 유죄로 판결할 만한 일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이다.

투명성과 책임성은 재벌의 소유구조와 자본구조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투명성이 제고되고 책임성이 강화되면 외부주주의 이익이 침해될 가능성이 적어지므로 주식가격이 높아진다. 주식가격이 높다는 것은 차입이나 사채에 비해 주식이 외부자금 조달수단으로서 유리하다는 것이다.1999년 재벌이 많은 주식을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발행된 주식의 많은 부분을 계열사가 인수했다. 이것은 주식을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하면서도 기업지배권을 지키기 위한 재벌의 선택이었다. 기업지배권은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다란 가치를 갖는다. 검찰과 법원이 이사의 책임을 묻는 일에 소극적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재벌이 이러한 기업지배권을 포기할 리 없었다. 대규모 주식 발행 이후에도 재벌은 여전히 많은 기업을 절대적으로 지배한다.

요약하면, 투명성이 제고되고 책임성이 강화되면서 주식가격이 상승하고 주식발행이 늘었으나 일정부분은 계열사가 인수했기에 내부지분율은 그다지 낮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소유구조하에서 재벌의 기업지배권은 여전히 다른 주주의 도전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렇지만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로 인해 재벌이 외부 투자자에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는 어려워졌다.

 

 

외국인 주주의 재벌 규율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지만 재벌체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정책 중 외국인 주식보유 한도 폐지가 있다. 각 상장(上場)기업에 대한 전체 외국인 주식보유 한도는 1992년의 10%에서 1997년 11월의 26%로 높아졌으며, 외국인 1인당 한도는 같은 기간에 3%에서 7%로 높아졌다. 그러다가 1997년 12월에 55%와 50%로 각각 높아졌고,1998년 5월에 공공법인을 제외하고는 상장주식 보유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1998년 7월에는 비상장주식 투자도 자유화했다.

한도가 확대되거나 폐지되면서 외국인의 상장주식 보유가 빠르게 증가했다. 시가(時價)로 계산해서 총액은 1997년 말의 9조6천억원에서 1999년 말의 79조5천억원으로 늘어났고, 비중은 같은 기간 13.7%에서 21.7%로 상승했다. 이러한 외국인의 주식투자 증가가 있었기에 재벌이 많은 주식을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의 주식투자는 계속 증가해서 보유비중이 2000년 말의 30.2%를 거쳐 2001년의 36.6%,2002년의 36.0%에 이르렀다.16재벌별로는 2002년 말 현재 삼성 14개사 49.3%,LG12개사 23.4%,SK11개사 36.3%, 현대자동차 6개사 34.8%, 한진 7개사 15.1%, 현대 4개사 9.2%의 주식을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다.17

외국인의 상장주식 보유비중이 높긴 하지만 외국인 한사람이 5% 이상을 소유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2002년 말 현재 683개 상장회사 중 81개 회사에만 그러한 외국인 주주가 있다.18 따라서 36.0%의 주식이 수많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흩어져 보유되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외국인 주주도 대부분 소액주주인 것이다.

71.3%를 보유한 소액주주가 38.7%를 보유한 재벌을 이길 수 없다. 그렇지만 흩어져 있으면 떠나기 쉽다. 한꺼번에 떠나기도 쉽다. 재벌이 회사가치를 손상시킬 듯하면 소액주주들은 주식을 팔고 떠날 것이다. 특히 36.0%의 주식을 가진 외국인들이 재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주식가격이 떨어지더라도 재벌이 기업지배권을 잃는 일은 없겠지만 주식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어려워진다. 외부자금이 필요한 재벌이라면 막아야 할 일이다.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이 어렵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일부 재벌에 대해서는 ‘이탈’(exit)을 통한 규율이 이루질 수 있으며, 외국인 주주가 그러한 규율을 주도할 것이다.

 

 

시민단체의 재벌개혁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를 위한 법률 개정에는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주축이 된 시민운동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시민단체는 총수와 경영진의 불법행위를 검찰에 고발하고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시민단체가 이러한 운동에 나서게 된 데에는 투명성과 책임성에 소액주주의 이해가 걸려 있다는 점보다는 그것이 재벌의 문제인 동시에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재벌개혁을 위한 참여연대의 노력은 입법청원이나 고소에 국한되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소수주주권을 활용하여 구체적 사안에 대해 재벌의 책임을 추궁했다. 주주의 위임을 받아 회계장부를 열람하거나 주주총회에 참석하였으며 주주대표소송을 주도하기도 했다.1997년 제기된 국내 최초의 주주대표소송도 참여연대가 주도했고, 앞서 언급한 삼성전자 주주대표소송도 참여연대가 주도했다.이러한 활동은 소액주주운동으로 불리긴 하지만 역시 소수주주권을 활용한 재벌개혁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른 소수주주권 행사도 그렇지만 특히 주주대표소송은 공익적 성격이 강하다. 주주대표소송은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이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이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배상금은 소송을 제기한 주주가 아니라 회사에 지급된다. 소송에서 지면 피고의 재판비용까지 물어야 한다. 따라서 소액주주가 소송을 제기하면 잃을 것은 많고 얻을 것은 적다. 이러한 소송은 공익을 추구하는 운동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소송을 제기하고 판례를 만드는 일은 법률을 만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며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

 

 

과제와 전망

 

2003년 12월 증권집단소송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를 위한 입법은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재벌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증권집단소송법이 시행되면 이해당사자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가 다소 쉬워지겠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시민단체가 나서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 법은 주가조작·허위공시·분식회계·내부정보이용 등에만 적용되므로 여전히 많은 부분은 주주대표소송에 의존해야 한다. 검찰의 엄정한 집행과 법원의 적극적 판결을 촉구하는 일에도 시민단체가 앞장서야 한다.

더 어려운 과제들도 있다.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막는 것이 그중 하나인데,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광범위한 동의가 이뤄져 있다. 사실 ‘돈을 빌리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을 맡기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다.1997년 외환위기가 재벌 소유의 종금사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막기 어려운 것은 재벌의 거센 저항 때문으로, 이미 제2금융권을 장악한 재벌이 이를 쉽게 포기할 리는 없는 것이다.199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계열 금융회사를 통한 금융지배 방지”를 공언했던 ‘국민의 정부’는 오히려 공적 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을 한화에 넘겼다. 계열분리청구제 도입을 공약했던 ‘참여정부’도 슬그머니 물러나려 한다. 그래도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조속히 그리고 철저히 막아야 한다. 이는 경제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투명성과 책임성은 어떤 체제에서나 요구된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도 그러하다.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에서도 요구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에서도 요구된다. 발전국가체제로 되돌아가려 할 때도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재벌개혁 논의에서는 재벌 이후의 체제에 대한 구상이 미뤄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재벌개혁이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면 재벌해체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재벌이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가 주주자본주의로의 편향성을 가진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는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주주가치 극대화가 기업경영의 원리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주 및 투자자의 이탈을 통한 재벌규율이 어느정도 작동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투명성 제고와 책임성 강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시장 개방과 기업대출 축소의 결과이다.

그렇지만 주주 및 투자자를 위한 투명성과 책임성이 강조되면서 노동자를 위한 투명성과 책임성이 간과되었다는 지적은 옳다. 소수주주의 회계장부열람권은 강화되었으나 노동자에게 경영 및 재정에 대한 청문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무시되었다. 소수주주의 이사회 참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집중투표제 도입이 추진되었으나 노동자의 이사회 참여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평가가 엇갈리는만큼 주장도 다양하다. 소수주주의 규율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이미 지나치게 강화되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주주의 규율이 아닌 은행의 규율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최근에는 재벌을 외국인 주주로부터 지켜주면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노동자가 배제된 재벌개혁에 대한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 기업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자본뿐만 아니라 노동의 헌신(commitment)도 필요하므로 노동자의 경영 감시와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안들에 관한 사회적 선택이 재벌 이후의 체제를 규정할 것이다. 물론 아무런 사회적 선택도 이뤄지지 않고 완전히 시장에 맡겨질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재벌이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바뀔지를 예견하기는 더욱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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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원 「재벌체제의 발전과 모순」, 『동향과전망』 2001년 가을호.
  2. Meredith Woo-Cumings(ed.), The Developmental State,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3. Alice H.Amsden, Asi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4. 이병천·김균 엮음 『위기, 그리고 대전환』, 당대 1998.
  5. 재정경제부 『2002년 공적자금관리백서』,2002.
  6. 이 비중은 OECD 가입국 중 가장 높은 것이며, 다음으로 높은 오스트레일리아의 32%나 스페인의 27%보다도 크게 높은 것이다. 나머지 회원국은 대부분 20% 미만이다. 윤진호 외 『비정규노동자와 노동조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1.
  7. 김진방 「한국 재벌의 현황과 정책과제」, 『시민과세계』 4호(2003년 하반기호),406~18면.
  8. 부채비율은 한국신용평가(주)가 작성한 합산재무제표로 계산했다. 합산재무제표에는 금융보험사가 포함되지 않는다.
  9. 공정거래위원회 보도자료 「2000년도 대규모기업집단 지정」(2000.4.17), 「2001년도 대규모기업집단 지정」(2001.4.2), 「2002년도 출자총액제한대상 기업집단 지정」(2002.4.3) 참조.
  10. 한국은행의 금융자산부채잔액표에 의하면, 예금은행의 기업대출 규모는 줄지 않았으나 전체 대출 중 비중은 연말 기준 1997년 65.6%에서 1999년 62.1%를 거쳐 2001년 51.7%,2002년 48.3%로 감소했다.
  11. 사외이사제도의 핵심은 이사의 독립성이다. 미국에서는 최고경영자(CEO)로부터의 독립성이며, 한국에서는 총수로부터의 독립성이다. 그러나 사외이사도 사내이사와 마찬가지로 총수 뜻대로 선임하게 해놓았다. 집중투표제의 목적은 소수주주 편에서 경영을 감시할 이사도 함께 선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주주가 원할 경우에만 집중투표제를 실시하도록 해놓았기에 대부분의 회사에서 실시되지 않고 있다.
  12. 상법 제382조의 3항 ‘이사의 충실의무’는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13. 삼성전자는 1994년 4월 삼성종합화학 주식을 1만원씩에 인수해서 8개월 만에 2600원씩에 계열사에 팔았다. 삼성전자 이사들은 매도가격이 상속세법시행령에 의거해 결정되었으므로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4. 한 재벌의 계열사 자본금 합계는 다른 회사의 주식을 매수해서 편입할 때에도 증가한다. 현대의 기아자동차 인수와 LG반도체 인수가 그 예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LG반도체 인수는 LG의 자본금 감소를 동반한다.
  15. 김진방 「한국 재벌의 소유와 지배:1997~2002」, 『경제발전연구』 제9권 제2호,2003.
  16. 증권거래소 주식통계 「소유자별 주식소유분포」 참조. 이는 대부분의 OECD 국가들보다 높은 비율이다.1999년 기준 외국인의 자국 주식 보유비중은 일본 12.4%, 미국 6.4%, 프랑스 34.0%, 독일 15.6%, 영국 29.3%, 캐나다 7.0% 등이다. 벨기에·핀란드·스웨덴도 35%를 넘지 않는다. 네덜란드는 43.6%이다.(증권거래소 『주식』 2001년 4월호)
  17. 증권거래소 보도자료 「2003년 주요 그룹의 시가총액과 외국인 보유비중 현황」(2003.12.16).
  18. 증권거래소 보도자료 「상장법인 외국인 5%주주 현황 및 주가등락」(200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