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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규원 吳圭原
1941년 경남 삼랑진 출생. 196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등이 있음.
하늘과 두께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허공과 구멍
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새가 혼자 날면 허공은 새가 됩니다 새의 속도가 됩니다
새가 지붕에 앉으면 새의 속도의 끝이 됩니다 허공은 새가 앉은 지붕이 됩니다
지붕 밑의 거미가 됩니다 거미줄에 날개 한쪽만 남은 잠자리가 됩니다
지붕 밑에 창이 있으면 허공은 창이 있는 집이 됩니다
방 안에 침대가 있으면 허공은 침대가 됩니다
침대 위에 남녀가 껴안고 있으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입술이 되고 가슴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여자의 발가락이 되고 발톱이 되고 남자의 발바닥이 됩니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이 되고 침대 바퀴에 깔린 꼬불꼬불한 음모가 됩니다
침대 위의 벽에 시계가 있으면 시계가 되고 멈춘 시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허공은 사람이 되지 않고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 들어갈 관이 되고 뚜껑이 꽝 닫히는 소리가 되고 땅속이 되고 땅속에 묻혀서는 봉분이 됩니다
인부들이 일손을 털고 돌아가면 허공은 돌아가는 인부가 되어 뿔뿔이 흩어집니다
상주가 봉분을 떠나면 묘지를 떠나는 상주가 됩니다
흩어져 있는 담배꽁초와 페트병과 신문지와 누구의 주머니에서 잘못 나온 구겨진 천원짜리와 부서진 각목과 함께 비로소 혼자만의 오롯한 봉분이 됩니다
얼마 후 새로 생긴 봉분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라져 잠시 놀라는 뱀이 됩니다
뱀이 두리번거리며 봉분을 돌아서 돌틈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사라지면 허공은 어두운 구멍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 앞에서 발을 멈춘 빛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을 가까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새가 됩니다
강과 둑
강과 둑 사이 강의 물과 둑의 길 사이 강의 물과 강의 물소리 사이 그림자를 내려놓고 서 있는 미루나무와 미루나무의 그림자를 몸에 붙이고 누워 있는 둑 사이 미루나무에 붙어서 강으로 가는 길을 보고 있는 한 사내와 강물을 밟고서 강 건너의 길을 보고 있는 망아지 사이 망아지와 낭미초 사이 낭미초와 들찔레 사이 들찔레 위의 허공과 물 위의 허공 사이 그림자가 먼저 가 있는 강 건너를 향해 퍼득퍼득 날고 있는 새 두 마리와 허덕허덕 강을 건너오는 나비 한 마리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