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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중혁 소설집 『펭귄뉴스』, 문학과지성사 2006

‘낭비’의 윤리와 ‘압축’의 윤리

 

 

손정수 孫禎秀

문학평론가, 계명대 교수 sonjs@kmu.ac.kr

 

 

김중혁(金重赫)의 첫 소설집의 표제작이자 그의 첫 소설이기도 한 「펭귄뉴스」는 지하군 게릴라(펭귄뉴스)와 진압군이 대치하고 있는 어느 미래의 전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지하군의 저항은 ‘비트’(beat)를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그것을 필사적으로 전파한다는, 다분히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김중혁 초기 소설에서 알레고리는 구체적 현실을 지시하도록 설정된 것이 아니기에, 그런 방식의 독해를 통해 생산해낼 수 있는 의미는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현실—작품의 반영 도식에서 벗어나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정신분석학적 모델을 활용해볼 수 있는 근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 독법에 의하면, 입대하여 진압군의 병사가 된 ‘찬기’는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좇아 결국 지하군의 일원이 된 ‘나’(동재)의 분신이다. 지리멸렬한 일상에서의 애인 ‘소희’는 상상계 속에서 ‘앨리슨’이라는 암호명의 매력적인 지하군 여성으로 탈바꿈된다. ‘나’는 분신 찬기를 진압군으로 보내고 애인 소희를 일상 속에 남겨둔 채 앨리슨과 함께 ‘펭귄뉴스’의 세계로 뛰어든다. 개별적인 개체들을 통약하는 언어씨스템이 상징계라면, 그 개체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으로 내재하고 있는 리듬을 의미하는 ‘비트’는 상징계에 맞서는 상상계의 유력한 무기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소설의 알레고리적 구도는 현실비판을 과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상상계와 상징계 두 범주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궁극적으로는 상징계를 거부하고 상상계를 지향하는 자아의 심리를 구조화하기 위해 차용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대립이 두번째 작품 「사백미터 마라톤」에서는 학교(상징계)와 폐허가 된 자동차 정비소(상상계)의 구도로 치환되어 있다. 달려야 하는 거리에 따라 속도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속도에 따라 달리는 거리를 결정하는 전환이 일어나는 것은 ‘나’가 정비소에서 각자의 속도(비트)에 맞춰 춤을 추는 ‘스피드클럽’의 아이들을 목격하고 난 이후이다. 이렇게 보면 ‘스피드클럽’은 ‘펭귄뉴스’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김중혁이 2000년대의 새로운 소설적 흐름의 본류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은 초기작들의 대립구도에서 상징계의 축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펭귄뉴스’와 ‘스피드클럽’만이 남은 세계가 그것이다. 상징계와의 갈등에 투여되었던 리비도를 회수하여 상상계로 전이시킴으로써 김중혁 소설은 더 가벼워지는 한편 더 세련된 형식을 갖추게 된다. 김중혁식으로 말하자면 이제야 제대로 된 ‘압축’이 일어난 것이다.(이러한 방식은 사회적 차원의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기 위해 상상계의 욕망을 부정하고 보편언어를 탐구하는 ‘낭비’를 윤리라고 생각했던 이전 시대의 어떤 열정과 대비된다.)

이와 동시에 ‘비트’라는 음악적 차원은 그 장르적 구속을 벗어나 좀더 확대된 다른 차원의 행위들로 변형되어나간다. 「바나나 주식회사」의 자전거 타기, 「회색 괴물」의 타자기에 대한 페티시즘, 「무용지물 박물관」의 디자인, 「멍청한 유비쿼터스」의 해킹,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의 개념 발명,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의 지도 제작 등이 그것인데, 이들 행위는 모두 상징계의 일반화하는 힘을 벗어나 상상계 내부의 고유한 리듬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초기 소설의 ‘비트’에 대응되는 행위들이다. 초기 소설들과 비교해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에서는 그러한 행위들의 의미가 상징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외적 관련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수집, 발명, 제작 등 일종의 마니아적인 취미활동의 방식을 통해 자체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마니아적 취미활동들의 동기와 존재근거는 상징계의 차원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꼭 자전거이거나 타자기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메이비의 무용지물 박물관’이나 ‘에스키모의 지도’처럼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세계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도 상징계보다는 상상계 쪽에 가깝다. 이 어둠의 감각 속에서 상상계는 상징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실재와 마주하는바, 궁극적으로 김중혁 소설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이처럼 실재와 직접 마주하는 상상계의 행위들이 그 과정의 마지막에서 결국 상징계의 방식과 대비를 드러내게 된다는 점에 김중혁 소설의 특징이 있다.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상징계의 차원이 비어 있는 형식으로 소설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김중혁의 소설에는 인물들이 수행하는 자발적 행위들과 상징계의 보편언어 사이의 오차에 대한 자의식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작중인물들이 일상적 현실의 관습적 행위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과격한 비판으로 치닫지 않고 다만 자신이 지향하는 행위를 묵묵히 수행해나가는 것 또한 이 자의식과 관련될 터이다. 김중혁 소설의 인물들이 구현하는 윤리는 이 자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 지도와 마음속 지도의 오차를 측정하면서 미지의 길을 찾아가는 김중혁 소설의 인물들의 행위는 바로 이 윤리를 상징적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행위가 공통적으로 예술에 대한 메타포로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자의식은 양쪽 모두에 시선을 던지는 균형감각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김중혁의 균형은 대립되는 두 대상을 절충하거나 상위의 보편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 사이에 난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마련된다. “그래서 세상은 다시 세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어진다. A와 B와 A도 B도 아닌, 나 같은 사람으로”(「그녀의 무중력 진공관」, 『문학판』 2002년 여름호, 160면)라든지 “난 여태껏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밖에 만나보질 못했어. 비트가 느껴지는 인간과 비트가 느껴지지 않는 인간, 이렇게 두 종류뿐이었지. 그런데 당신에게서는 좀 다른 비트가 느껴져”(「펭귄뉴스」, 343면) 같은 대목들이 그와 같은 추구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타자에 통합되지도, 타자를 통합하지도 않는 방향, 그러면서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마련하는 방향, 그것을 일러 ‘압축’의 윤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압축’의 윤리에 의거한 이 균형감은 자칫 한없이 무거워질 수도 있는 주제를 윤리적 비장함이 거세된 작가 특유의 가벼움으로 처리할 수 있게 만드는 근거이자, 창조가 아닌 조립과 응용이라는 DJ리믹스 같은 글쓰기를 고백하는 일종의 허무적 인식 속에서도 윤리적 자아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지 않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압축’의 윤리에는 상징계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기에 자아 이상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장치가 없다. 윤리적 자아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의지가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윤리형식은 나르씨씨즘적 주체의 일반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바나나 주식회사」에서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에 이르는 김중혁의 소설들은 상징계가 부재하는 상상계의 형상화라는 점에서 동시대 젊은 작가들과 함께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 내재된 윤리적 자의식은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의 오차에 대한 자의식이 없거나 약한, 그러하기에 상상계 속의 질주로 일관된 다른 젊은 작가들의 소설과 구별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 2000년대의 새로운 작가군에서 김중혁이 차지하는 고유한 자리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