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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세끼노 타다시 『조선미술사』

두 개의 미술사, 하나의 시선

 

윤세진 尹世珍

서울대·한국외대 강사 colorcloud@naver.com

 

 

에카르트-조선미술사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1884~1974)는 독일 카톨릭 베네딕트 교단의 선교사로서,1909년에 한국에 파송된 이후 20년 동안(1909~28) 체류하면서 조선의 언어와 역사는 물론, 민속·무용·미술 등 조선예술 전반에 대한 여러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조선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1929)는 미술사 전반에 대한 이해와 한국 체류 기간에 수집한 여러 자료들을 바탕으로 탄생된, 에카르트의 ‘역작’이라 할 만하다. 파란 눈의 낯선 이방인이, 현실적으로 질식당하고 있던 조선의 미술에 지대한 ‘애정’을 보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찌 보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애정’의 질이다. 그의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권영필 옮김, 열화당 2003)에서 저자의 말에 의하면 “동아시아 미술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지난 세기말 빈 박람회에서 있었던 일본의 공예품 전시를 통해서였고, 러일전쟁으로 한층 더 고조되었다”(9면)고 한다. 이 회고에서도 드러나지만, 서구에 동아시아의 미술이 인식된 것은 ‘박람회’라는 시각적 장(場)을 통해서였다. 동아시아 미술은 바로 이 공간 속에서 ‘자포니즘’(Japonism)과 더불어 도래한 것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참고한 문헌들로 미루어볼 때, 그의 조선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두 가지 모태가 되었던 것이 1910년대 전후의 독일 미학과,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일본제국주의의 발굴 및 조사사업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신사적·양식사적 분석을 통해 민족적 양식을 규정하고자 했던 당시 독일 미학 및 미술사학의 영향과, 효과적인 지배를 위한 일본제국주의의 ‘고고학적’ 연구가 없었다면 에카르트의 ‘사랑’은 결실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는 한 ‘서양인’이 어떤 ‘동양미술’을 바라본 순수한 인식의 결과물이 아니라,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미술’로서 표상된 동양, 그리고 타자화된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인의 시선과 타자화된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제국주의의 시선이 중첩되어 있는 중층적 텍스트인 것이다. 조선미술에 대한 그의 ‘사랑’이 텍스트 곳곳에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사랑’을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는 ‘조선미술사’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동아시아 미술사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동아시아(와 그 부분인 조선) 미술사의 근본적 특성 중 하나는 ‘창조성’이 아니라 ‘모방성’이며, 따라서 그것은 서양미술의 ‘이상성’을 결여하고 있고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아시아 미술에서 (…) 오랜 세월 동안 흘러내려온 것을 유지하는 전통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 전통을 포기하거나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쇠약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은 이미 필연적으로 예술적 붕괴를 자기 내부에 갖고 있었던 것이다.”(22면)

또한 그가 보기에, 유럽의 종교(기독교) 미술은 혁신을 거듭하며 도약해왔지만, 동아시아의 종교(유교, 불교) 미술은 모든 것을 ‘조상’이나 ‘허무’로 환원하려는 종교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예술을 질식시켰다.

“이 나라에서는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창조적인 예술성을 나타내는 그 어떤 기념물에 맞닥뜨리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다. 이 나라는 정말로 죽어버린 것처럼 보이고, 유럽인의 눈을 가지고 보면 실제로 그러하다. 유럽의 기독교 나라에는 모든 마을마다 교회가 있고, 산뜻한 모양의 집들은 자기 마을의 양식 안에서 각각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때때로 풍경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조선에서도 마을들은 서로 닮았다. 변화가 거의 없고, 아무런 활기도 없다. 절망적인 철학에서, 생활의 모든 기쁨을 죽여버리는 조상숭배에서, 그리고 불교의 염세적인 교리에서 솟아난 절망적인 침체가 자리하고 있다.”(58면)

“고딕 양식과 불탑 미술에서 확인되는 기본적 원칙은 계속적인 상방(上方) 지향의 경향이다.(…) 양자의 미술형식을 비교해보면, 동아시아 미술에서는 발전속도가 느린 점과 어떤 종류의 발상이 빈곤함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고딕양식이 시종일관하게 궁극적인 표현 가능성을 계속 구축해나가는 데 비해, 탑 건축은 정신적인 불모를 나타내고 있다.”(105면)

에카르트에게 ‘조선미술의 특질’은 이러한 전제, 즉 동양문화에 대한 서양문화의 우월성 위에서만 논의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 우월한 문명인에게는 “작고 더구나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으로 찌들어 있는 이 나라”(373면) 조선에서 생산된 ‘소박한’ 미술이 ‘오만한’ 중국미술이나 ‘개인적이고 전투적인’(216면) 일본미술보다 훨씬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사랑으로 충만한’ 그가 할 일은 “그러한 미술품의 존재를 기쁨과 사랑으로써 이해하고 인정”(22면)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자, 조선의 미술은 우월한 서양미술의 코드로 ‘덧대지기’(재코드화) 시작한다.‘절제된 고전적인 아름다움’ ‘고전적인 좌우대칭성’ ‘고전적인 선의 운영’ ‘간결하고 절도 있는 억제된 표현’ 등등 그가 거론한 조선미술의 특질은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 ‘위대한 고요함과 단순함’으로 규정했던 그리스 미술의 특질과 닮아 있다. 실제로 그는 “조선미술의 제반 형태들에서는 이상하게도 그리스 고전양식 및 간다라 양식을 느끼게 된다”(216면)라고 고백하며, 조선미술의 미는 “오로지 그리스 고전미술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은 온화함과 절제”(375면)라고 극찬한다. 모든 미술의 이상이 완벽한 비례와 균형을 추구했던 그리스 미술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예찬인 셈이다.

그러나 에카르트가 조선미술의 특질을 무엇으로 규정했는가 하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아름다움’을 인지할 때마다 그 정점은 늘 서양적인 것으로 환원된다는 사실, 다시 말해 조선미술(나아가 동양미술)이 갖는 차이들을 서양미술사의 언표들을 통해 서양의 것과 동일화하려는 그의 무의식적 ‘의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에카르트와 세끼노 타다시(關野貞)의 『조선미술사』는 절묘하게 공명한다.

상처입은 타자에 ‘미의 시선’을 건넨다는 점에서 에카르트의 태도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세끼노 타다시에게는 바로 이 시선이 결여되었다. 에카르트는 『조선미술사』의 결론을 ‘조선미술의 특질’로 대신했으며, 야나기 무네요시 역시 조선미술의 미감(美感)을 규정하는 데 많은 논의를 할애했다. 그러나 세끼노 타다시는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1932; 심우성 옮김, 동문선 2003)에서 이럴 필요성이 없었다. 미술사가라기보다는 ‘고고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주의자’였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차이를 갖는 타자’가 아니라 ‘동일자가 되어야 할 타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은 ‘서양화되어야 할 타자’인 동시에 ‘일본화되어야 할 타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세끼노 타다시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던 에카르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조선을 사랑했던 자와 조선을 지배했던 자 사이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지배’와 ‘소유욕’은 때때로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채 나타나는 법이므로.

그러므로 에카르트와 세끼노 타다시를 윤리적 차원에서 ‘심판’할 수 있는 틀은 없다. 밥 딜런이 노래한 대로 중요한 것은 ‘심판’이 아니라 ‘청소’다. 그들이 규정한 조선미술의 특질, 기원, 연속성,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복합적 권력인 ‘전통’에서 자유로워질 일이다.‘왜곡된 역사’ 혹은 ‘상처받은 역사’에 괴로워하거나 그들의 정반대편으로 달려가 그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전통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모두를 잊을 일이다. 전지구적 세계질서(새로운 ‘제국’)가 문화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이 시대, 그러나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무규정적이고 불확정한 이 문화의 공간 속에서도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근대적 무의식으로서의 ‘전통’과 맞서는 것. 이런 의미에서,80여년 전의 텍스트를 ‘지금, 여기’에서 읽는 일은 좀더 가벼워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프란츠 파농의 말처럼,

“우리가 와야 할 곳은 민중이 살고 있는 바로 그 은밀한 불안정성의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