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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W. 바우어 『찬란한 오후』, 성균관대출판부 2003

인간 삶의 외연과 실재를 덮는 역설의 코드

 

 

윤꽃님

시인, 충남대 강사 ymo98@hanmail.net

 

 

찬란한오후

독일 극작가, 볼프강 바우어(Wolfgang Bauer)가 쓴 『찬란한 오후』(Magic Afternoon, 정민영 옮김)는 단숨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얇은 한편의 희곡이다. 읽는 동안 킬킬대면서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을 생각하면 그렇게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밀폐된 공간, 혹은 지정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방에 22세에서 30세 사이에 있는 네 사람, 즉 작가인 찰리와 조, 그리고 찰리의 여자 친구 비르지트와 조의 여자친구 모니카가 어느 찬란한 여름날의 오후를 자욱한 연기 속에 암울하게 보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속에 동반되어 있는 의도적으로 어질러진 물건들, 즉 커다란 침대, 바닥에 있는 레코드 플레이어, 작은 탁자 하나, 정원용 의자 몇개, 등받이가 없는 보조의자, 장롱, 의자와 탁자, 그리고 바닥에 널려 있는 수많은 레코드 판, 포도주, 맥주병, 커다란 창문 하나 등은 함께 널브러져 있는 등장인물들만큼이나 암울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에게 인간의 일상은 무의미한 삶의 연속으로 파악되고 돌발적인 사건의 조각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단지 방안에서 빈둥거리며, 거울이나 보고 머리나 매만지며,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팝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그리고 대마초를 피우고 점차 격한 행동으로 발전되어 가벼운 건드림에서 구타로, 그리고 다시 과격한 폭력에서 성적 폭력으로, 그리고 또다시 욕설과 함께 싸우고 할퀴는 전쟁으로 변모되어 마침내 모니카의 코뼈가 부러지고, 또 마침내 비르지트가 칼로 조를 찌름으로써 뜻하지 않은 살인으로 끝나게 된다.

이들은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이고 있는 상황을 연출할 뿐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람마저 죽이고 자신들의 인생마저 스스로 처단해버린다. 그래서 찬란한 오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달리 진정으로 빛나는 밝은 오후가 아니라 실은 이러한 인간 내면의 암흑성을 덮는 역설적 코드로 변하게 된다. 이 공간이 상징하는 세상 속에서 이상은 찬란한 오후를 꿈꾸게 되지만 현실은 찬란한 오후의 부재가 되는 셈이다. 새가 지저귀는 화창한 여름날의 외면 속에 감추어진 추레해질 대로 추레해지고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지저분한 내면의 병치는 카메라의 앵글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아래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강가로 내려가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거창하게 사회나 현실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문명의 화장품과 도덕과 예의의 옷으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인간 외면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보면 발견할 수 있는 인간 내면에 들끓는 원시와 부정적 본능의 코드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 나오는 무인도에 떨어진 아이들의 상황처럼 정해진 일정기간 동안 문명과 차단된 상황에서 진짜 실력(?) 발휘되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성·야만성·야비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그런 상황 말이다. 이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창밖의 폭우가 상징하는 그런 험악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표출될 수 있는 인간의 야수적 본성 말이다.

그런데 더 우울한 것은 이 작품에는 인간 내면의 문제성뿐만 아니라 사회나 현실 문제까지 병치되어 있어 『파리대왕』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핵심』처럼 내부와 외부의 암흑성을 동시에 겹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탈식민주의의 고전적 문제작으로 높이 평가받는 『어둠의 핵심』에서 콩고 강을 따라 정글 깊숙이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과 그 오지의 중심에 실제 존재하는 어둠이 내리는 검은 강물이, 역사적 현실과 제국주의의 어두운 핵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서서히 표출되는 인간의 어두운 욕망,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암흑성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외적 현실은 시대적 상황에 있어서 식민주의를 건설하던 시기를 넘어 이미 우리와 동시대에 있는 후기자본주의에 와 있다는 점에서 『어둠의 핵심』과는 다르다.

우리가 처한 현실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이 작품에 나타나는 외적인 요소들,말하자면 젊은 세대가 직면한 현실, 극도로 발달된 문명, 사회적 억압, 그리고 자본주의가 감각적으로 제공하는 음악·영화·담배·섹스, 이것은 등장인물들의 의식을 혼란시켜 결국은 “삶이란 담배와 같은 습관” 혹은 “게으름은 이 세상의 원동력”(24면)이라는 찰리의 말처럼 이들을 습관적으로 권태롭게 할 뿐 아니라 수동적인 게으름의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이 무질서와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여기는 무료함은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이들의 정신이 아니라 육체와 감각을 자극하는 매체를 갈구하도록 한다. 이들은 제정신을 잃고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기고 싶은 욕구로 흥분제와 환각제를 찾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쏟아내는 욕설과 폭력과 성적인 충동은 바로 이러한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순덩어리 같은 사회의 기형화된 현상인 이 거대한 기계는 삶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죽여버린다. 삶의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이 결국은 우연과 돌발성을 통해 바로 파격적인 자기파괴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희곡은 이러한 내용의 심각성 내지는 우울성과 달리, 작품 안에서 펼쳐지는 언어의 재미, 대화의 가벼움과 통속성 그리고 현재성 때문에 읽는 내내 웃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일상 대화에서 적나라하게 쓰이는 언어들, 사투리와 비어와 은어가 난무하는 발언들, 그리고 마치 컴퓨터의 채팅방에서 친구랑 얘기하는 것 같은 이 작품을 읽으면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이런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충분히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번역이 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극을 보지 않아도, 읽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상황과 인물들의 내면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적절히 선택된 비어나 속어들이 작품의 분위기를 활력있게 함을 느낄 수 있다.

읽는 동안에 독자가 만끽할 수 있는 이러한 즐거움은 저자인 볼프강 바우어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독특한 작품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관객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극작론을 가진 바우어는 메씨지가 비록 침울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희극적 요소를 채택해 관객의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한다. 일종의 놀이로서의 연극 혹은 희곡, 이를 통해 그는 동시대적 상황에 처한 관객 내지 독자에게 삶의 기쁨을 일깨워주고, 이 기쁨을 통해 행복감을 증대시키고 싶어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흘러가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다수의 우리 또한 아웃싸이더로서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무의미성과 역사인식의 부재 속에 있다는 점을 그가 정확히 간파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찰리가 장롱 안으로 들어가 숨는 것으로 작품이 끝난 것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찰리로 대변되는 우리는 결국 세상의 아웃싸이더이며, 세상에서 살아갈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머물던 어머니의 자궁 같은, 혹은 따스한 온실 같은 장롱 속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적으로 부모님에게 의존한 채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 인물은 어쩌면 애초부터 세상에 나올 능력이 안되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온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는 늘 온실로의 회귀를 꿈꿀 뿐이다. 온실 밖의 늠름한 나무를 꿈꾸기에는 이미 늦었을 뿐 아니라, 온실 밖의 매서운 바람을 스스로 만들었음을 알아차리기에도 너무도 어리석고 미약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이미 지난해 서울에서 공연된 작품이지만(백은아 연출, 알과핵 소극장,2003년 10월 2일~10월 19일) 다시 책으로 출간됨으로써 희곡 작품도 연극을 통한 감상만이 아니라 읽을거리에 있어 하나의 장르로서 충분히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빛날 수 있다는 걸 절감하게 해준다. 서술형의 소설이나 압축된 시와 달리 대화와 대화의 징검다리를 통해 펼쳐지는 이야기와 사건, 이미지의 형상화는 바로 희곡 세계의 신선한 참맛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