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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

김영하의 『검은 꽃』과 홍석중의 『황진이』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저서로 『문학의 귀환』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1. 하위자집단의 반란

 

최근 역사물이 대유행이다. 「다모(茶母)」(2003)에서 시작하여 「대장금(大長今)」(2004)으로 이어진 사극열(史劇熱)에는 새로운 역사감각이 준동하고 있다. 궁중암투극으로 시종하던 기존 역사물에서는 전경(前景)으로 나서기 어려운 다모나 궁녀 또는 의녀(醫女) 같은 하위자들이 드라마의 축으로 떠오른 것은 중세 기사도소설(romance)이 근대 ‘부르주아 서사시’(novel)로 이행한 변화에 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왕실과 양반관인층이 지배하던 궁정사극을 일거에 해체한 이 하위자 반란은 단지 때늦은 부르주아혁명일까? 최근 역사물에 또렷이 드러난 반란적 성격은 2002년 월드컵에 신화처럼 출현하여 마침내 참여정부를 출범시킨 대중의 문화적 폭발과 일정하게 연락될 것이다.‘구텐베르크 은하계’와 경쟁하는 ‘인터넷 은하계’, 이 미지의 영토에 익숙한 이 ‘대중’은 왕년의 ‘민중’ 즉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기획에 기초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민중이 아니다. 그것은 민중을 계승하는 한편, 민중의 전위적 성격을 다시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적 전위가 새로운 지배집단으로 전향하는 것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 경계심을 공유하고 있는 새로운 대중 또는 새로운 민중은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문화부문에서 뚜렷한 새로운 역사감각은 역사소설에서 이미 징후를 드러낸 바 있다. 그 앞장에 선 작가가 김탁환(金琸桓)이다. 그는, 우리 민족주의서사를 대표하는 이순신(李舜臣) 이야기를 탈신화화한 『불멸』(전4권,1998) 이후, 『홍길동전(洪吉童傳)』보다 더 소설적인 작자 허균(許筠) 이야기를 ‘복원’한 『허균, 최후의 19일』(전2권,1999), 그리고 명·청 교체기의 격동 속에서 좌절한 광해군 기획의 전말을 새로 쓴 『압록강』(전7권,2000~ 2001)에 이르는 “조선중기 비극 3부작”1의 완결을 통해, 외롭게 그럼에도 집요하게 이 작업을 추진해왔다. 이 고독한 작업은 또하나의 ‘주변인’ 김훈(金薰)의 가세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역시 이순신에서 취재한 『칼의 노래』(2001)가 그해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노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애독서로 선전되면서, 뜻밖에도 베스트쎌러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 작품은 『불멸』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이순신의 탈영웅화를 한 극점까지 끌고 간 소설이다. 그런데 ‘나, 이순신’의 긴 독백으로 점철된 이 소설에서 독자가 만나는 인물은 이순신인가? 그것은 ‘김훈의 이순신’, 아니 이순신의 의상을 입은 작가 자신일지도 모른다. 김훈은 뛰어난 복화술사(腹話術師)다. 안팎의 적의에 맞서 절대고독 속에서 전쟁을 수행한 비극적 무인의 황량한 내면풍경을 통해서 작가는 역사를 사적(私的)으로 전유한다. 작가는 말한다.“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2 이 멋진 발언의 속뜻은 무엇인가? 작가는 수상 인터뷰에서 이 발언을 감싸고 있는 의고적 감상주의를 벗고 솔직하게 고백한다.“이 작품을 쓰게 된 힘은 이 세상에 대한 증오감”(『조선일보』 2001년 11월 7일자)이라고. 기실 이 작품의 반영웅주의는 영웅주의와 은밀히 제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순신의 집합적 표상을 개체화하는 해체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강잉(强仍)히 놓지 않으려는 『불멸』과 차별된다. 『칼의 노래』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이순신』(1931)과 닮았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이순신의 순교자적 면모를 부각함으로써 조선에 저주를 퍼붓는 이 작품에서 이광수는 어느 틈에 ‘식민지시대의 이순신’으로 자신을 축성(祝聖)한다. 물론 『칼의 노래』는 역사의 사적 전유를 민족주의로 포장한 춘원풍(春園風)과는 차별되는 작품이지만, 역사영웅을 작가의 입마개로 바꾸는 변신술은 공통적이다. 이 점에서 『칼의 노래』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한 허무주의에 기초한 행동주의에 대한 경계를 애독자 특히 노대통령에게 환기하는 고언(苦言)이 인터넷에 떠도는 것도 흥미롭다.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감각들이 21세기 벽두의 한국사회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 또한 우리 시대 넋의 한 모습일 터이다.

그런데 대중적 역사극과 역사소설에서 보이는 새로운 경향의 근원에 이은성(李恩成)의 허준(許浚) 이야기가 놓인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의료전문가로 떠오른 허준 이야기를 처음으로 창안한 사극 「집념」(1975~76)의 각본을 집필한 그는 그 소설화에 착수, 『동의보감』을 1984년부터 연재하는 도중 1988년 별세하였다. 이 미완의 소설이 창비에서 출간되고(1990) 때마침 이 소설에 의거하여 다시 드라마로 꾸며지면서(1991) 소설과 사극 모두 공전(空前)의 열기에 휩싸임으로써 작가의 소설적 죽음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반체제적이든 체제적이든 남성영웅들의 투쟁을 축으로 삼는 사극과 역사소설의 캐넌(canon)을 파괴하고 ‘권력의 교체서사’ 사이에서 실종된 허준 같은 인물의 숨은 영웅주의를 드러낸 이은성은 역사적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문화코드로 과거를 재창안하는 퓨전사극 또는 새 역사소설의 길을 열었다.3 허준 이야기에서는 보조자에 지나지 않던 의녀가 어의(御醫)로 등극한 「대장금」이나, 질서에 대한 도전과 그 수호라는 지극히 남성적인 세계의 가장 깊은 안쪽에 위치한 규방을 규찰하는 특수임무에나 투입되는 다모가 무협멜로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상승한 「다모」는 허준 이야기를 한층 하방(下放)한 것이다. 물론 후자에는 황석영(黃晳暎)의 의적소설 『장길산(張吉山)』(1974~84)도 물리지만, ‘큰 이야기’로부터 ‘작은 이야기’로 코드를 바꾼 이은성이 더 직접적 원천으로 될 것이다. 남성주인공 중심에서 그 하위자인 여성주인공 중심으로 전환한 것도 그렇거니와, 허준보다 기록이 영성(零星)함으로써 상상의 자유를 더욱 누리는 퓨전사극의 등장은 하위자 반란이 새로운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역사영웅의 정전을 해체한 김탁환과 김훈의 작업도 속종으로는 하위자 반란과 기맥(氣脈)을 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통속소설과 본격소설의 중간지대에서 대중의 새로운 역사감각을 담아낸 이은성의 위치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이 흥미로운 역사전쟁에 대해 한편에서는 원본으로서의 역사 또는 대문자 역사가 한줌의 ‘얄푸른 연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 역사로부터의 탈주에 환호한다. 과연 이 전쟁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나는 최근 두 편의 역사소설, 김영하(金英夏)의 『검은 꽃』과 홍석중(洪錫重)의 『황진이』를 흥미롭게 읽었다. 두 작품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대한제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1905년 4월) 제물포항을 떠나 아득한 미주대륙으로 팔려간 멕시코 노동이민의 집단적 운명을 추적한 전자와, ‘조숙한 근대인’ 황진이(黃眞伊)의 초상을 16세기 개성이란 ‘장소의 혼’ 속에 재창안한 후자. 김영하가 1980년대 문학의 과잉사회성에 대한 반란을 주도한 1990년대 남한 신세대작가의 하나라면, 홍석중은 남한에도 잘 알려진 (북)조선의 중진작가다. 특히 『임꺽정(林巨正)』(1928~40)을 통해 의적소설의 길을 연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의 무거운 전통으로부터 대담하게 이탈한 후자는 최근 남한을 떠도는 역사감각이 북에서도 함께 작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남과 북은 역시 둘이면서 하나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도 근본적 질문을 자제하지 않는 본격문학의 응전이라는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두 작품을 자상하게 검토하는 것은 우리 시대, 비평의 즐거운 임무일 터이다.

 

 

2. 집합적 자서전의 형식

 

역사로부터 실종한 멕시코 노동이민의 운명을 다룬 김영하의 『검은 꽃』(문학동네 2003)은 분명 민족서사시를 꿈꾸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멕시코는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멀다. 하와이 노동이민(1902~1905)이 20세기 한미관계의 복합 속에서 모국과의 인연이 단절되지 않은 집단이라면, 그 뻣센 에네껜(henequen,어저귀,龍舌蘭)농장으로 팔려간 멕시코 노동이민은 역사의 블랙홀로 사라진 ‘버림받은 백성’이다. 나라가 버린 또는 나라를 버린 1033명의 기민(棄民)들을 운반한 일포드(Ilford)호는 화물선이었다.4화물선에 짐짝처럼 실려 노예처럼 팔려간 이 사건, 귀환의 고리를 잃어버린 분절성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란 말조차도 호사스러운 이 참담한 사건은 역사적 의미의 생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중도적 주인공’을 축으로, 한 시대의 상층과 하층을 동시에 조망함으로써 총체성을 지향하는 루카치(G.Lukács)의 역사소설 모형은 이 소설과 거의 무관하다. 작가는 주인공이 부재하는 이 집단의 이야기를 집합적 자서전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렇다고 뤼씨앙 골드만(Lucien Goldmann)이 지적한, 주인공중심 19세기 소설의 20세기적 변형의 하나인 집단적 주인공 소설도 아니다. 이 경향을 대표하는 벽초의 『임꺽정』이 잘 보여주듯이, 청석골에 모여든 의적은 당대 사회와의 불화라는 들끓는 분노를 공유한 불온한 집단인 데 반해, 『검은 꽃』의 이민단은 도망자들이다. 가슴마다 다른 꿈을 안고 이민선에 까마귀떼처럼 몰려 긴 항해 끝에 멕시코의 어저귀농장들로 뿔뿔이 흩어진 이 기민은 역사적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不姙)의 집단인 것이다. 루카치와 골드만의 소설모형들을 비켜간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최근 역사소설의 경향에 동참한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경향성에서 이탈한다. 이 작품에서 역사는 살아 있다.20세기 초의 격동하는 과거가 한국소설로는 드물게도 세계사적 차원에서 자신의 고유한 빛깔로 생생하다. 과거가 충실한 존재감으로 재현됨으로써 현재와 마주 세워지는 이 소설은 그래서 단순한 소문자 역사로 미끄러지지 않는다. 소문자 역사의 삽화들을 퍼즐 맞추듯 치밀하게 축조함으로써 대문자 역사의 의미를 근원에서 다시 묻는 이 소설은 대문자와 소문자를 횡단하는 새 역사소설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러일전쟁(1904~1905)의 와중에서 고국을 떠나 멕시코의 어저귀농장에 팔려가기까지 3년간의 생활을 그린 제1부(1~52장),1910년 폭발한 멕시코혁명 전후(前後)를 배경으로 그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간 이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제2부(53~76장),1916년, 멕시코혁명의 여파로 번진 과떼말라혁명에 참여한 44인의 한인용병들의 ‘신대한(新大韓)’ 건설의 전말(顚末)을 기록한 제3부(제77장), 그리고 살아남은 이민들의 후일담을 점묘적으로 보고한 짤막한 에필로그. 얼핏 보면 이민선의 출발로부터 신대한의 건국과 파멸이라는 절정을 향한 순탄한 연대기적 구성이지만, 내부의 결을 살피면 이야기의 선형성(線形性)이 곳곳에서 파열한다. 우선 부의 구성이 비대칭적이다. 가장 긴 제1부로부터 점점 축소되어 제3부는 단 한장으로 그친다. 과떼말라 밀림에 건설되었다가 흔적없이 사라진 신대한 이야기라는 절정이자 파국, 이 소실점을 향해 소설 전체가 휘우뚱한 바로끄적 구성이다. 각 부를 구성하는 장의 길이도 들쭉날쭉이다. 부로서는 가장 짧은 제3부를 구성하는 제77장은 장 가운데 가장 길다. 작가는 이같이 장과 부의 비대칭성을 의식적으로 조직한 모자이크적 구성을 실험함으로써 리얼리즘 서사와 모더니즘 서사를 횡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와 인물 들을 초기 설정하는 앞부분 읽기가 폐롭다. 우선 제목이 수수께끼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제목에 대한 그 어떤 암시도 없다.‘검은 꽃’, 이 불길한 제목은 이 작품의 성취와 어긋나는 일종의 뱀다리다. 정사(正史)에서 침묵당한 소문자 역사의 파국을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역사의 꿈을 강렬히 환기하는 이 작품은 물론 기존 역사소설의 틀에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역사허무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제목에 대한 의문은 제사(題詞)에 다시 걸린다.

 

그는 예전의 믿음으로 돌아가 옛날 방식으로 사느니/차라리 가난한 주인의 노예가 되어 흙을 파며 산다든가/또는 다른 끔찍한 일을 견디는 편이/훨씬 낫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플라톤 『국가』에서

 

이는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어느 번역본인지 너무 의역되었다. 그 대목은 이렇다.

 

아니면 호메로스의 처지가 되어, ‘땅뙈기조차 없는 사람의 농노로서 남의 머슴살이를’ 몹시도 바랄 것으로,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鎗젼(판단)을 가지며’(doxazein) 그런 식으로 사느니보다는 무슨 일이든 겪어내려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5

 

이는 인용문에 보이듯 호메로스를 물고 있다. 오뒤쎄우스가 저승에 가서, 사후에도 죽은 자들의 통치자로 영광스러운 아킬레우스를 위로하자 아킬레우스는 탄식한다.

 

죽음에 대해 나를 위로하려 들지 마시오, 영광스런 오뒤세우스여.

나는 이미 죽은 모든 사자(死者)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시골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가산도 많지 않은 다른 사람 밑에서 품팔이를 하고 싶소.6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아킬레우스의 탄식 대목을 끌어다가 동굴에서 풀려난 죄수가 동굴 밖의 삶이 아무리 낯설더라도 다시는 동굴 속의 눈먼 행복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변증하였다. 이때 “동굴 안은 가시적인 현상의 세계를,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실재(實在)의 세계를 각기 비유한 것이다.”(박종현 역주,447면) 그런데 이처럼 진리의 빛에 쏘인 사람(즉 철학자)이 다시 동굴로 돌아가 “혼의 등정”을 이루지 못한 동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지(主旨)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영역본 278면). 김영하가 이 대목을 제사로 삼은 속셈은 아마도 근대라는 불의 세례를 받은 멕시코 난민들의 근원적인 고향상실을 강조하는 데 있을 터인데, 그것은 플라톤과 썩 어울리지 않는다.

작품은 신대한의 최후를 알리는 용병대장 이정의 죽음을 제시한 짤막한 서두(1부 제1장)로 시작된다. 그리곤 11년 전 이민들이 모여든 제물포항으로 플래시백하는 낯익은 영화적 전환을 보이는데, 이 장(1부 제2장)은 특히 사실들이 부정확하다. 만주군 총사령관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巖)를 성을 빼고 이름만 호칭한 것은 차치하고 대한제국의 성립과 미·서(美西)전쟁의 발발시기가 맞지 않는다. 제물포를 일본인 거류지와 일본 영사관을 제외하면 볼품없는 “황량한 항구”(13면)로 설정한 것도 그렇다. 개항 20여년이 넘는 1905년이면 인천은, 서울을 향한 비수 같은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제국주의 열강이 다투어 진출하여 이미 작은 중국, 작은 일본, 그리고 작은 서양을 품은 ‘식민지’ 국제항으로 흥청거릴 때가 아닌가?

이후 인물들을 소설 속에 처음 앉히는 대목들에서도 갸우뚱한 부분이 없지 않다. 박광수(바오로) 신부의 성당 이탈은 지나치다(1부 5~6장). 일찍이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檳榔)신학교에 유학한 바오로가 당진(唐津) 사람들의 교회공격에 겁먹어 주교7의 간곡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민선에 올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이 시기에 성당을 박해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개항 이후 천주교는 곧 권력으로 이동했다. 왕궁을 내려다보는 종현(鍾峴)에 성당을 건설한 것(명동성당은 1892년에 정초식을 가졌다)은 그 상징인데,1905년 무렵 천주교의 위치는 이미 공고했다.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분노한 백성들이 봉기한 제주민란(1901)은 희귀한 예외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바오로를 이민선에 태우려면 다른 설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민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은 이종도를 황제의 사촌(37면)으로 지정한 것도 과잉이다(1부 제11장). 아무리 왕조의 황혼이라고 해도 고종의 지친(至親)이 난민에 드는 것은 실감에서 먼 일이다. 더구나 “어서 서양의 문물을 배”(24면)우기 위해 이민선에 오른 것은 너무 순진하다(1부 제7장). 김영하가 멕시코 이민을 처음으로 다룬 이해조(李海朝)의 『월하가인(月下佳人)』(1911)을 참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충청도 목계(木溪)의 양반 심진사가 갑오년에 봉기한 농민군을 피해 서울로 이사, 서당 훈장으로 연명하다가 그나마도 신식학교에 학생들을 뺏기고 곤궁하던 차에 친구의 권유로 이민선에 몸을 싣는 과정이 아주 사실적인데,8허황하기 짝이 없는 이종도와는 천양지차다.

이런 크고 작은 어긋남이 1부 초반에서 단속(斷續)된다. 일본을 개항케 한 미국의 쿠로후네(黑船)가 ‘구로카네’(27면)로 오기되었고(1부 제8장), 태평양의 명명자는 중국인이다(1부 제12장).“중국인들은 일찍이 이 바다를 클 태(太), 평평할 평(平), 바다 양(洋)자를 합하여 ‘태평양’이라 불렀다.”(40~41면) 그러나 이 대양에 ‘잔잔한 바다’(Oceano Pacifico)라고 이름붙인 자는 마젤란(Magellan)이다. 중국인이 최초의 명명자라면 아시아가 서양 또는 아서양(亞西洋) 일본에 의한 불의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민선에 오른 일군의 군인들을 초기 설정하는 대목에서도 의심스런 점들은 다시 발견된다(1부 제26장). 서기중을 ‘종성진위대’(83면)로 지정한 것은 아마도 경성진위대의 착오일 것이다. 함경북도에는 종성(鍾城)이 아니라 경성(鏡城)에 진위대를 두었다.9 그리고 이 함경도 군인들이 “단발령에 반대하는 의병들 쫓아다”(83면)녔다고 자조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촉발된 1895년의 을미의병은 주로 경기 이남에서 봉기했다가 사그라든 근왕적(勤王的) 동원이었기 때문에 이 함경도 군인들까지 투입했을 듯싶지 않다. 역사소설은 이래서 쓰기 어렵다. 더구나 한국사는 미시사 분야가 덜 발달했기 때문에 생활이라는 육체성의 두터운 획득을 근간으로 삼는 소설장르에서는 더욱 큰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뒤로 갈수록, 다시 말하면 조선적 흔적들이 지워지면서, 인물들이 작가의 조종술 너머 자신의 생존권을 독자적으로 획득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그 분수령이 한달간의 긴 항해생활이다.“바다에 떠 있는 영국의 영토”(36면), 이 거대한 강철화물선에서 유구한 왕조의 질서는 일거에 녹아내린다. 남진우(南眞祐)는 해설에서 이를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상징하는 “새로운 창세기”(331면)라고 지적했는데, 구질서의 강제적 해체과정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지 싶다. 김이정이 불로 이글거리는 이 배의 거대한 주방을 보고 ‘지옥’을 연상했듯이(46면), 이민단은 묵시록적 풍경을 건너 새로운 지옥 멕시코에 상륙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소설은 한국소설의 새로운 영토로 들어선다. 농장들로 팔려간 이민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고한 그 솜씨도 뛰어나지만 농장주들을 개체화하는 데 이 작품의 진정한 새로움이 있다. 특히 첸체 농장주 돈 까를로스 메넴과 부에나비스따 농장주 이그나시오 벨라스께스의 형상은 얼마나 뛰어난가? 바스끄 출신 건달에서 프랑스군 장교가 되어 꼭두각시 황제 막시밀리안을 따라 멕시코에 건너와 지주로 상승한 아버지와 메스띠소(mestizo,스페인 사람과 인디오의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넴이나(1부 제33장), 예수회 수도사로 멕시코에 건너와 사설군대를 조직, 인디오들의 신앙과 가차없는 투쟁을 벌인 호세의 후손답게 근본주의 신앙을 광적으로 밀어붙이는 벨라스께스, 모두 멕시코의 권력을 독점한 가추삐네스(Gachupines,스페인 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가 아니라 일종의 진골 또는 육두품에 준하는 끄레올레스(Creoles,스페인 혈통으로 멕시코에서 태어난 사람들)다. 이 둘은 멕시코혁명에서 다른 길을 걷는다. 영리한 메넴은 더 높은 신분상승을 위해 혁명에 기웃거리다 금세 꼬리를 내리고, 후자는 “지주들의 십자군”(271면)으로서 장렬히 반혁명에 순교한다.

바로 이 농장주들을 매개로 각기 다른 길로 멕시코혁명의 불길에 싸여가는 이민들의 모습을 그려낸 제2부에서 작품은 정채(精彩)를 발한다.1911년 마데로(Madero)가 이끈 혁명군에 의해 디아스(Díaz)독재가 붕괴함으로써 20세기를 여는 최초의 혁명, 멕시코혁명은 일단 성공한다. 그러나 망명하는 디아스가 “마데로는 호랑이를 풀어놓은 거야”(252면)라고 예언했듯이, 멕시코혁명은 이내 전국시대로 돌입한다. 혁명의 민중적 성격을 대표하는 에밀리아노 사빠따(Emiliano Zapata)와 빤초 비야(Pancho Villa), 그 부르주아적 성격을 대변하는 까란사(Carranza)와 오브레곤(Obregon), 두 진영 사이의 일진일퇴가 흥미진진하다. 작가는 김이정을 빤초 비야의 북부군에, 이정의 애인 이연수(이종도의 딸)가 기구한 유전을 거쳐 마지막으로 안착하는 남편, 대한제국 군인 출신의 박정훈을 오브레곤의 군대에 배치함으로써 멕시코혁명의 핵심에 육박한다. 산적 출신의 까막눈으로 멕시코혁명의 살아 있는 전설로 된 빤초 비야의 질풍노도의 기마대가 기관총과 참호와 가시철조망으로 엄호한 오브레곤의 산문적 보병대에 의해 궤멸되는 1915년 셀라야 전투(The battle of Celaya)10, 멕시코혁명의 운명을 가른 이 전투의 삽화(제73장)는 민중적 낭만주의에 대한 부르주아 리얼리즘의 승리를 묘파한 압권이다. 디아스독재에 대한 투쟁에서 시작된 멕시코혁명이 부르주아적 재편으로 귀결되는 결정적 모퉁이를 포착하는 작가의 눈이 서늘하기 짝이 없다.

이 소설을 일관되게 지배하는 화두는 나라다. 이민들은 나라를 버렸다. 그런데 멕시코에서도 나라는 악령처럼 쫓아다닌다. 요시다가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260면)라고 이정에게 반문하듯이,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떨어진 이후 이민들은 공적(公的)으로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더구나 새로운 거주지로 선택한 멕시코가 ‘새 나라 만들기’에 돌입함으로써 이민들은 다시 격동한다. 아무리 전사로 참여했어도 이민들에게 멕시코혁명은 남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의 타자로부터 탈출하여 근대적 주체로 태어날 마지막 실험이 작품의 최후를 장식하는 신대한 이야기다. 신대한은 멸망했다. 근대적 주체의 탄생은 또다시 좌절했다. 신대한 이야기는 건국신화를 탈신화화하는 단지 포스트주의적 종말론인가? 이 작품은 귀향을 축으로 삼는 오뒤쎄이아적 서사를 뒤집고 있다. 그럼에도 반(反)오뒤쎄이아적 탈향의 서사를 통해서 오뒤쎄이아에 대한 강한 향수를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역설이 숨쉰다. 근대적 주체의 탄생이 끊임없이 유예되는 것은 김이정과 이연수의 연애가 끝없이 지연되는 것과 깊이 조응한다. 우리 소설이 창조한 가장 독창적인 여성의 하나인 이연수의 후일담은 외제니 그랑데(Eugenie Grandet)의 노년만큼 황폐한 것이다. 애인과 남편을 잃고 고리대금업자가 되어 “어떤 자선사업도 벌이지 않고, 어떤 종교에도 의탁하지 않고, 오직 갈퀴처럼 돈을 긁어들이는 일에만 전념했다”(320면). 연애의 끝없는 지연 속에 사막 같은 여생을 견딘 그녀의 삶이야말로 나라의 꿈을 강렬히 환기하는 아픈 표상이 아닐까?

 

 

3. 조숙한 자유인의 초상

 

홍석중의 『황진이』(평양: 문학예술출판사 2002) 이전에도 황진이를 다룬 소설이 없지 않았다.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황진이』(1935년 연재,1938년 출간)는 첫 시도다. 그런데 상허의 작품치고는 범작에 그쳤다. 그후 최인호(崔仁浩)가 단편 「황진이」 1·2(1972)를 발표했지만, 역시 종작이 없는 작품이고, 최근 이 과제에 도전한 김탁환의 『나, 황진이』(2002)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연구보고서에 가깝다. 나는 벽초의 『임꺽정』에 나오는 황진이의 모습을 사랑한다.11 비록 이 장편의 작은 삽화에 불과하지만 벽초는 화담(花潭)써클의 마담, 황진이를 잊을 수 없는 카메오(cameo)로 부조(浮彫)하는 일류의 터치를 보여주었던 터다.

벽초는 고전적 자본주의시대의 주인공중심 소설(novel)을 사회주의적 지향을 머금은 집단적 주인공 소설로 재창안하였다. 그리고 이 모형은 이후 남북의 역사소설 또는 대하소설의 한 준거로서 작동한다. 그런데 홍석중은 다시, 조부(祖父)의 모형을 주인공중심 개인전으로 분해한다. 이는 다시 근대소설로 돌아가는 것인가? 일면 그렇다. 규방에서 몰래 거리로 나선 황진이는 마음으로 절규한다.“오 자유여! 자유로운 귀신이 묶이운 신선보다 낫고 여윈 자유가 살진 종살이보다 낫다.”(78면) 아킬레우스의 탄식대목을 연상시키는 이 외침은 아버지 황진사의 감추인 추악에 접촉되면서 극렬한 우상파괴로 발전한다.“절대적인 것이 선언되는 곳에서 진리는 죽어버린다. 위인이나 성현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선행과 놀라운 덕행과 신비한 기적들, 사실은 그것들 모두가 (…) 위선과 거짓에 불과한 것.”(140면) 이 작품에도 최근 남한의 역사소설에서처럼 반영웅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황진이라는 인물이 복합적이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그녀는 일면 루카치적 의미의 ‘문제아적 주인공’이다. 양반신분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하여 천민 기생으로 하강한 특이한 경력을 지닌 그녀는 신분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문제아다. 그 때문에 춘향이처럼 신분상승을 도모하지 않는다. 근대소설의 비옥한 토양인 쥘리앙 쏘렐(Julien Sorel)의 욕망을 공유하지 않는 황진이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사실 쏘렐의 질주를 이해하다가도 우리는 문득 끔찍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하는데, 신분상승에 목숨을 건 춘향이의 집심(執心) 또한 버금가는 것이다. 신분상승을 중개자로 우회하여 실현하려는 ‘타락’을 거절함으로써 ‘욕망의 삼각형’이 구성되지 않는 황진이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물론 다른 차원의 ‘욕망의 삼각형’은 존재한다. 돈 후안(Don Juan)의 여성편력이 모성탐구이듯이, 이 여성 돈 후안의 남성편력은 아버지 또는 남성에 대한 복수의 형식을 빈 아비찾기의 한 형태다. 그녀는 편력의 끝에서 화담을 만난다. 그런데 그것이 성적 관계가 부정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연애영웅의 연애가 쎅스의 부정을 통해 절정에 이르는 역설! 바로 이 지점에서 황진이는 단순한 근대소설의 주인공에서 이탈한다. 체제와 반체제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면제된 하위자 황진이는 근대소설의 주인공을 넘어서는 곳에 둥지를 튼 독특한 성격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영웅도, 계급의 영도자도 아닌,이 모든 남성적 세계를 조롱하는 무정부주의적 자유를 온몸으로 시현(示現)했던 16세기에 돌출한 이 조숙한 여성에 대한 작가의 간절한 관심은 최근 북조선 문학의 변화의 징조를 예각적으로 드러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의 반영웅주의가 여성주의와 제휴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역사소설의 주인공을 거의 독점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여성주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황진사 부인이 편지에서 여자로 태어난 운명을 한탄하고 있듯이(138~39면), 작가도 이 점을 명백히 의식한다. 그런데 실제로 소설에서는 황진이의 여성적 지표들에 대한 강조가 지나치다. 전승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듯이, 그녀는 치장에 무심한 반미인적(反美人的) 기행에 거침이 없던 것이다. 유몽인(柳夢寅)은 심지어 ‘임협인(任俠人)’ 즉 협객으로 본다.12 그녀의 여성성은 남성성과 교착하는 것인데,산과 물을 함께 노래한 그녀의 시조들은 이 착종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대표적인 작품을 잠깐 보자.“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ᄒᆞ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ᄒᆞ니 쉬여간들 엇더리.” 자신을 ‘빈 산’으로 남자는 물로 비유한 이 시는 전통적인 이미지의 전도를 보인다. 그런데 모든 물줄기를 품어안는 산은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이다. 어쩌면 그 복합은 황진이의 중성성의 표출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황진이의 그런 면모가 생략된 것은 아쉽지만, 최근 남한의 사극들에 하위자 여성들이 횡행하는 것과 기맥을 통하고 있는 점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3편으로 구성돼 있다. 양반집 고명딸에서 기생으로 전신(轉身)하는 고비까지 서술한 제1편 ‘초혼’(전26장), 남성에게 복수하는 편력 끝에 아버지요 스승이자 애인인 화담을 만나는 데 이르는 제2편 ‘송도삼절’(전26장), 파국 속에 송도를 떠나는 데서 끝나는 제3편 ‘달빛 속에 촉혼은 운다’(전20장), 그리고 3편의 끝에 붙인 ‘그후의 이야기’(전1장). 작가는 각 편의 시간적 배경을 밝히고 있다.1편은 ‘1534년, 갑오년’ 즉 중종 29년이고,2편은 ‘1539년, 기해년’ 즉 중종 34년,3편은 ‘1539년(기해년) 겨울에서 1540년(경자년) 봄까지’ 즉 중종 34~35년, 그리고 후일담은 ‘1546년, 병오년 가을’ 즉 명종 2년이다.

이제 작가가 황진이를 어떻게 재창안하고 있는지 구체적 경로를 따라가보자. 그녀는 소설의 서두에서 “황진사댁의 고명딸”(13면)로 제시된다. 비록 아버지 황진사는 “진이가 일곱살이 되는 신사년(1524년 중종 19년―필자)”에 “작고”했지만(14면) 그녀는 어머니의 엄격한 보호 아래 반가의 규수로 고이고이 자라난다. 서울 윤승지댁의 도령과 혼인을 약조하는 데까지 그녀의 삶은 순조롭다. 그런데 윤승지댁으로부터 파혼이라는 청천벽력의 기별을 받는 데 이르러 그녀의 숨은 신분이 드러난다. 그녀의 생모는 황진사 부인이 “시집올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교전비”(131면) 현금이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도학군자지만 실은 “아주 흉악한 색마”(133면)인 황진사에게 농락되어 임신한 것을 황진사 부인이 딸의 전정(前程)을 위해 곁을 떠날 것을 강박하여 황진이의 신분이 보호되었던 터다. 그리운 딸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려고 병든 몸으로 “천리 밖 남도 끝에서 올라”(55면)와 송도 청교방 색주가에 몸을 붙였다 죽는 생모의 감상적 운명을 인지하고 황진이는 스스로 양반신분에서 걸어내려가 기생에 투신한다.

작가는 황진이를 가족로맨스를 뒤집은 모세(Moses)형으로 설정하였다.“아이가 부모를 고귀한 신분으로 바꿔버리는 상상”에 기반한 기본형이거나,“형제자매들을 서자(庶子)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영웅이자 주인공인 자신은 합법성을 얻는” 변형이거나를 막론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아이의 발달과정에 조응하는 가족로맨스13의 일반적 형태에 비추어 모세전승을 분석한 프로이트는 모세가 이스라엘 노예의 자식이 아니라 “이집트인(어쩌면 귀족)”14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추론한바, 이 작품에도 모세전승의 그런 무리가 엿보인다. 가족로맨스의 전복이 자연스럽지 못한데다가 위선에 대한 작가의 분노로 말미암아 황진사와 그 부인의 형상에는 정치성이 과잉이고, 황진이와 그 생모의 형상에는 생기가 부족이다. 기존 전승을 홀대한 결과다. 황진이 어미의 신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나는 그 이름에서 출발하고 싶다. 그녀의 이름 현금(玄琴)은 거문고를 뜻한다. 허균은 황진이가 공금선가(工琴善歌,거문고에 공교롭고 소리를 잘함)라고 찬양했다. 송도 아전 진복(陳福)이 황진이의 근족(近族)이라고 기록함으로써 그녀의 신분을 암시한 이덕형(李德泂)은 그 출생담을 알린다.18살 때, 병부교(兵部橋) 밑에 빨래갔다 황진사의 그윽한 눈길과 멋진 노래에 반해 황진이를 낳은 현금의 연애담은 근사한 것이다.15 이로써 미루건대 딸 못지않게 대담한 여성, 현금은 송도 중인 가계의 예능인이 아닐까 싶다. 이 풋풋한 전승에 비하면 이 소설의 초기설정은 너무 음울해서 감상에 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황진이의 본격적인 남성편력을 그린 제2편은 흥미진진하다. 양반들의 세계가 내재적 시각으로 파악되는데, 특히 황진이와 수작하는 송도 유수(留守) 김희열은 이 소설의 한 축을 구성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황진이와 김희열의 연합 속에 그녀의 우상파괴활동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제주목사의 사주 아래 기생 애랑이 군자인 체하는 배비장을 유혹해 망신주는 『배비장전(裵裨將傳)』과 상호텍스트성을 이루고 있다. 종실(宗室) 벽계수(碧溪守)와 지족선사(知足禪師)와 화담, 세 인물과 대거리하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세워나가는 과정이 충실하다. 그런데 지족 이야기는 사실주의의 기율을 너무 의식해서 오히려 덜 자연스럽다. 황진이를 연모하다 하인들에게 무릿매를 맞고 그녀를 잊으려고 긴 면벽수행에 들어가 생불소리를 듣는 것으로 이면을 붙인 이 설정 역시 위선에 대한 작가의 분노에 강박되었다(283~85면). 선비의 세계에 대한 곡진한 이해에 비할 때,“큰스님(주지)”(282면)의 예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불교에 대해서는 데면데면하다.16 그리고 화담 이야기도 화담써클의 집합적 호흡 속에 문맥화되지 않고 외따로 놀아 좀 추상적이다. 고려의 터전으로서 조선왕조의 예교질서에 대한 저항이 내면화된 송도라는 장소 가운데서도 특히 형제자매 같은 우애의 세계로 따사로운 화담써클의 자리는 희귀하게 보호된 일종의 시민적 영토인데, 이 점이 잘 부각되지 못해 아쉽다.

작품은 황진이·김희열 연합이 균열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게임을 즐기듯 진이의 자발적 투항을 인내하던 김희열은 그녀의 약점을 기화(奇貨)로 수치심에 전율하는 진이를 강간한다. 표면으로는 자발적이지만 실제는 비자발적인 이 결합은 그녀가 권력에 자신의 육체를 봉헌하는 것이기에 화담의 예와 달리 쎅스가 성취되는 순간 둘의 관계는 파열하는 것이다. 그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 남주인공 ‘놈이’다. 황진사댁의 하인으로 진이와 함께 자란 놈이는 계급적 자의식을 타고난 불온한 민중이지만 그녀에게만은 지순한 사랑을 바치는 수호천사다. 이 작품에서도 둘의 연애는 무한히 지연된다. 단 한번의 성적 결합에서도 연애는 부재한다. 그녀는 기생으로 전신하기를 결심하면서 놈이에게 몸을 줌으로써17 양반 고명딸의 정체성을 반납하는데 놈이는 이 제의(祭儀)에 선택된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성(性)은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균열짓는다. 이탈과 복귀를 거듭하던 놈이는 진이의 수호천사직을 벗어버리고 결국 화적패의 두목으로 물러앉는다. 『홍길동전』『임꺽정』『장길산』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이 인물을 통해서 작품은 의적소설을 품는 것인데, 아주 퇴행적 모습이다. 놈이가 괴똥이를 살리기 위해, 아니 진이를 보호하기 위해, 관에 자현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약간은 허탈한 결말을 짓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화적당은 연애의 좌절이 흘러들어간 피난처에 지나지 않는바, 이 설정에는 화적패를 혁명가로 오해하지 않는 리얼리즘이 작동하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기존 의적소설에 대한 비판이 승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놈이를 매개로 하층민의 세계가 풍부하게 펼쳐지는데, 이 점에서 황진이는 일종의 중도적 주인공이다. 물론 황진이는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에 허구적 인물인 중도적 주인공이 될 자격이 미달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녀의 삶이 워낙 박명에 싸여 있어 허구적 설정의 여지가 크기 때문에 작가의 역사의식에 의해 중도적 주인공으로 재창안되지 못하란 법도 없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16세기 조선사회의 상하층을 아울러 조망할 축으로 그녀를 중도적 주인공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역사소설은 루카치형에서 이탈한다. 놈이의 허무한 죽음과 함께 진이는 결국 송도를 떠나 종적없이 떠돈다. 어둠에 묻힌 여생을 섬광처럼 비추는 마지막장 ‘그후의 이야기’는 송도를 떠난 뒤 황진이의 후일담을 보고한다. 금강산 입구 안교리댁 노마님의 칠순잔치에 선전관 출신 가객 이사종(李士宗)18과 함께 거지꼴로 홀연 나타나 노래와 춤으로 좌중을 압도하곤 다시 현실 너머로 사라져간 삽화 속에 그녀의 면모가 생생하다. 산수(山水)에 숨어 “하늘을 지붕 삼고 수풀을 벽으로 삼아 천지간에 방랑하는 계집”(523면)을 자처하는 그녀는 결국 ‘방외인(方外人,임형택林熒澤의 개념)’을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삼았다.“산수유람이란 넋이나 혼을 가지고 하는”(526면) 것이라고 이사종이 토로하듯이, 양반에서 기생으로 다시 방외인으로 이동한 황진이는 체제와 반체제의 텍스트 바깥으로 이탈함으로써 도가적 소요유(逍遙遊)의 경계를 거닌다. 화담마저 부정되는 이 절대자유의 경지! 이 지점에서 작품은 신분사회 또는 계급사회의 질곡에 대한 침통한 숙고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현존 사회주의 너머로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주인공중심 소설답게 정통적 사실주의의 수법을 십분 활용하였다. 인물들의 성격을 축조하는 방식이나 이야기판을 짜나가는 구성도 정통적이다. 제1편이 발단이라면 제2편은 전개, 제3편은 절정과 결말에 해당하니 충실한 3단 구성이다. 그런데 오직 사실주의로만 시종한 것은 아니다. 소설 곳곳에 사실주의의 흐름을 차단하는 장들이 배치되어 있다.1편 제5장의 말미에 황진이의 긴 독백이 문득 삽입되더니 제15장은 아예 장 전체가 그녀의 1인칭 독백이다. 제21장은 황진사 부인의 긴 편지로, 제24장은 황진이의 짧은 독백으로 이루어졌다.2편에서도 이러한 실험은 계속된다. 제8장은 황진이의 긴 독백, 제12장은 놈이의 긴 편지, 제21장은 황진이의 긴 일기. 그리고 3편은 제6장에 황진이의 긴 독백을 두었다. 황진이의 독백(1편 제5장)에서 시작하여 역시 그녀의 독백(3편 제6장)으로 마감한 이 장치는 일종의 소격효과를 겨눈다. 물론 독백·편지·일기 같은 고백적 장르들을 삽입한 이 실험이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고백의 감상성이 때론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1인칭 서사들을 요소요소에 묻어 3인칭 서사의 통일성 또는 사실주의적 환상의 평면성을 구원하려는 작가의 실험은 주목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실험보다 더욱 종요로운 것이 두터운 장소감각이다. 이 작품에서 개성은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되듯이 골목골목이 되살아난다. 그 골목들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문화사적 추억과 풍속이 함께 인간화함으로써 이 작품의 소설적 육체성을 두텁게 받치고 있다. 『임꺽정』에서 중세 조선의 총체를 기억하고자 한 벽초를 이어 작가는 송도에 집중한 가장 탁월한 인문지리서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곳에는 벽초와 함께 구보(仇甫)가 산보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천변풍경』(1936~37) 『갑오농민전쟁』(1977~86)에서 서울의 근대풍경을 탐구한 박태원(朴泰遠)은 우리 소설에 장소감각을 도입하여 사실주의 서사의 평면성을 타개한 선구자이자 일인자인데, 홍석중은 서울과 평양이 아닌 개성, 반수도적(反首都的) 기풍이 농후한 이 도시를 선택, 분권주의적 상상력을 실험함으로써 21세기 북조선 소설, 나아가 남북문학 전체에 말을 걸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소통이 금지된 남북문학이 이면에서는 변화의 싹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것이다. 분단 이후 형성된 자신의 문학적 전통의 독자성에 기반하여 이제는 의식적 소통 속에 남북문학이 함께 한반도 또는 조선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문학 건설의 새 시대로 나아갈 때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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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탁환 「작가의 말」, 『압록강』 1, 열음사 2001,9면.
  2. 김훈 「책머리에」, 『칼의 노래』 1, 생각의 나무 2001,12면.
  3. 그러나 하위자 반란이 성공담이라는 대중코드에 제약되고 있는 점은 명백히 기억되어야 한다.“고백된 하나의 작은 악이 감춰진 많은 악에 대한 승인을 구제”(Roland Barthe, Mythologies, trans. by Annette Lavers, New York: Hill and Wang 1972, 42면)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체제서사로 떨어지는 한계까지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 최근 이 배의 사진과 기초항목이 공개되었다. 영국기선회사(Britain Steamship Co.Ld.) 소유의 일포드호는 1901년 영국 뉴카슬에서 건조된 총 4266톤의 강철선이다. 오인환·공정자 「발굴자료로 본 구한말 멕시코 이민사」, 『신동아』 2003년 10월호 601면.
  5. 플라톤 『국가·政體』(박종현 역주), 서광사 1997, 452면.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한 이 대목은 난삽하다. 영역본(Plato, The Republic, trans by H. D. P. Lee, Penguin Books 1970, 281면)이 간명하다.
  6. 호메로스 『오뒤세이아』(천병희 옮김), 단국대출판부 1996,177면.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된 이 한글판과 함께 영역본도 참고했다. Homer, The Odyssey, trans. by E. V. Rieu, Penguin Books 1958, 184면.
  7. 이 작품에서는 주교의 이름을 시몬 블랑쉬(21면)라고 밝히고 있는데, 비슷한 이름으로는 7대 주교 블랑 백(J. M. G. Blanc, 白圭三)이 있다. 그런데 그는 이미 1890년 사망하고 뮈뗄(Mutel, 閔孝德)이 8대 주교로 계승하였다(柳弘烈 『한국천주교회사』, 가톨릭출판사 1962, 1073면).
  8. 최원식 「신소설과 노동이민」, 『한국근대소설사론』, 창작사 1986,272~81면.
  9. 陸士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399면.
  10.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혁명의 부르주아적 주도권을 장악한 오브레곤은 뒤에 대통령이 되었다. 자영 목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우수한 기술자로도 활약한 그는 1912년 3백명의 목장주들로 구성된 ‘부자부대’(the Rich Man’s Battalion)를 조직하여 혁명에 뛰어들었다. Eric R. Wolf, Peasant Wars of the Twentieth Century, Harper & Row 1999, 39면.
  11. 최원식 「동지(冬至)에 대한 단상: 황진이와 서화담」, 『문학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1,322면.
  12. 李能和 『朝鮮解語花史』,東洋書院 1927,105면.
  13. 프로이트 「가족로맨스」,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프로이트전집 9』(김정일 옮김), 열린책들 1998,59~60면.
  14. 프로이트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 『종교의 기원: 프로이트전집 16』(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8,21면.
  15. 이능화, 앞의 책 104~106면.
  16. 주지는 살림중〔事判僧〕의 우두머리지 수행이 높은 큰스님이 아니다.
  17. 이 장면에서 진이가 놈이에게 ‘기둥서방’이 돼달라고 청하는데(162면), 이는 의문이다. 이능화에 의하면 서울기생은 유부기(有夫妓, 기둥서방을 둔 기생)고 지방기생은 무부이유모(無夫而有母, 기둥서방이 없고 기생어멈이 있음), 즉 무부기(無夫妓)다. 이능화, 앞의 책 139면.
  18. 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는 다른 전승을 유몽인(柳夢寅)이 전한다. 이사종과의 연애는 쎅스로 남성을 시험하는 벽계수·지족·화담 이야기와는 달리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황진이 최고의 연애담의 하나다. 이능화, 앞의 책 1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