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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천운영을 읽는 한가지 방식

 

 

김영희 金英姬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영문학. 저서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이 있음. KimYounghee@webmail.kaist.ac.kr

 

 

1

 

천운영(千雲寧)은 데뷔작 「바늘」(2000)에서부터 평단의 상당한 주목을 받아왔다. 그로테스크한 인물과 이미지의 과감한 구사, 정밀한 묘사와 세목에 대한 단단한 장악력을 보여주는 천운영의 소설은 가령 욕망과 권력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자연스럽게 촉발하는 동시에 또 그것을 잘 견뎌내는 텍스트”1로 인정받는다. 실제로 그의 소설 가운데 일부, 특히 「눈보라콘」 같은 작품은 원초적 결핍과 그 심리적 영향에 대한 서사를 통해 말하자면 라깡(J.Lacan)의 부재로서의 욕망론을 거의 ‘의도적’으로 환기하다시피 한다.

딱히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천운영의 작품들은 대개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만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서 어떤 면에서는 이미 우리 문단에서 낯익은 담론이 되어버린 욕망의 서사에 새로움을 불어넣는다. 천운영에게서 두드러지는 점은 욕망의 탐구가 기성관념들에 대한 뒤집기 및 해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천운영의 작품들에는 남녀 성역할의 도치와 전복을 비롯하여 기존의 이분법적 대립들, 가령 인간과 동물, 부성과 모성, 미와 추, 정신과 육체 등의 대립을 뒤집고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세목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런 전복을 통해 욕망은 그 폭력적인 생명력을, 섬뜩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욕망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은 ‘통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밀려나거나 일탈한 인물들에 기울이는 관심의 성격과 맞닿아 있다. 천운영의 인물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주변적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불우한 편이며, 친밀한 가족관계에서 거의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이런 인물들이 처한 현실적인 조건을 배면에 담기는 하지만, 천운영의 관심은 사회적 불의나 주변적 인물들의 삶의 애환에 있지 않다. 아니, 그들의 삶을 주시하되 천운영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억눌린 생명력의 뒤틀린 모습과 그 파괴적이고 필연적인 분출이다.

천운영은 감정이입을 최대한 절제하고 거리를 둔 시선으로 이를 그려나간다.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여러 평자들이 눈여겨본 바, 천운영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다시피 하는 세밀한 묘사이다. 그것은 단순히 묘사를 위한 묘사라기보다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부조해내는 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디테일에 대한 집요한 천착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리얼리즘의 세부묘사와 딱히 일치하지 않는 면모를 띠는 것이 이채로우며, 이와 관련해서는 세밀한 묘사가 오히려 ‘환상성’을 자아내는 효과를 지닌다는 지적2이 나온 바도 있다. 그의 묘사는 대상에 밀착하여 느린 속도로 촬영하는 카메라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고, 대상을 굴절시키는 특정한 주관적인 시각을 계속 의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후자는 주로 대상에 중첩된 강렬한 이미지에서 두드러지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각도 자체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관찰이든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천운영의 묘사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각각 극대화하면서 결합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작품의 의미체계를 세목에까지 단단하게 관철해나가고자 하는 작가적 의지가 배어 있으며, 이는 전복과 해체의 시도와도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문법을 해체하는 것은 어떤 작가에게나 하나의 도전이지만, 명백하게 도치와 전복의 방법을 채용하고 그 실현을 목표로 삼는 작품들에서 작가는 좀더 의식적으로 의미군(관념)을 작동시키게 된다. 천운영의 묘사가 갖는 이러한 교묘한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녀의 작품세계의 성격과 성취를 가늠하는 데 있어 중요해지는데, 이를 몇몇 주요작품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2

 

천운영의 세밀한 묘사는 대체로 인물들의 동작, 특히 무엇을 먹거나 무슨 작업을 하는 동작을 그려낼 때 두드러지는데, 가령 문신을 새긴다거나 소머리를 가른다거나 곰장어를 잡는다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닭뼈를 발라내는 장면들이 그렇다. 이런 대목들은 동작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있는 그대로 상세히 모사(模寫)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여기에는 작가 나름의 대상에 대한 강한 통제가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것은 객관적 묘사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넘어서 대상에 대한 주관적 축조가 두드러지는 영역으로 진입한다.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바늘」을 보자.

 

여덟 개의 바늘을 알코올램프에 달구어 각각의 바늘귀에 명주실을 꿴다. 바늘끝에서부터 0.5센티미터가 남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명주실을 감는다. 명주실을 감을 때는 실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잉크가 뭉치거나 한꺼번에 나오는 일이 없다. 바늘귀 부분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1센티미터 정도 맨몸으로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명주실에 먼저 베네치안 레드를 묻힌다.(천운영 소설집 『바늘』, 창작과비평사 2001,14면. 이후 이 작품집에서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함)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를 그려달라는 한 남자의 요구를 받고 화자가 밑그림을 완성한 후 색을 넣기 위해 준비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객관적’ 서술임이 분명하며 마치 문신지침서처럼 짐짓 건조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조차 경험 많은 전문가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성과 노련함이 배어 있고 이 점은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이슬이라고 부른다”(같은 곳)라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좀더 분명해진다. 치밀한 준비 끝에 색을 넣기 시작하는 순간, 문신과정의 ‘객관적’ 묘사에 문신사의 ‘주관성’이 좀더 긴밀하게 개입해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주인공을 포함한 ‘우리’의 경험 속에 내포된 삶의 양상들, 말하자면 욕망과 언어, 통제와 권력의 복합적인 의식들이 작업과정 묘사에 결합된다. 잉크가 바늘끝을 따라 살갗의 틈 속으로 스며들 때 화자는 “마치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밖으로 시원하게 나와주는 듯한 기분”(같은 곳)을 느끼며 이후 문신작업은 정확하고도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이윽고 문신이 완성되자 화자의 시선은 다시 탐닉하듯 골리앗거미에 머문다. 그러나 이때 화자를 사로잡는 것은 ‘선명하게 드러난’ 골리앗거미의 외양 자체라기보다, 화자 자신의 ‘주관적’ 공상이다.(골리앗거미의 생김새는 사실 작품에서 내내 매우 선별적으로만 그려진다.)

 

살갗에 묻은 잉크와 피를 닦아내자 문신의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골리앗거미는 풍요로운 식사를 마치고 밀림 속에서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나는 어느새 밀림 속에 숨은 한마리 거미가 된다. 가느다란 여덟 개의 다리로 아침햇살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미줄에 미끄러지듯 걷는 거미. 발끝에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부주의한 청색 나비 한마리가 내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청색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나는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 다리에 난 섬세한 털로 먹잇감을 부드럽게 감싼다. 남자의 몸을 애무하듯, 여린 과일을 만지듯 부드럽게. 그리고 주삿바늘을 꽂듯 나비의 몸통에 촉수를 박는 그 순간.(15면)

 

골리앗거미에 자신을 투사하며 거미줄에 걸린 나비의 몸에 촉수를 박아넣는 거미의 환상에 빠져드는 이 대목은, 말하자면 작가의 의도가 섬세하고도 강한 촉수를 내미는 대목이다.‘아침햇살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미줄에 미끄러지듯 걷는’ 모습에 매료되는 화자의 나르시시즘과 나비의 몸통에 ‘주삿바늘을 꽂’아넣는 순간의 잔혹한 쾌감이 결합되면서, 화자의 뒤틀린 성적 욕망, 탐미적 파괴욕이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문신사로서 남성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수동적 처지는 그것대로 여전하지만, 화자는 이같은 환상을 통해 문신작업을 타자와 세계를 장악하고 자신의 성적 에너지를 투여하는 관능의 통로로 바꾸어낸다.

독자로 하여금 거미에 대한 화자의 몰입을 마치 촉감하듯이 함께 느끼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디테일에 대한 천운영의 천착이 가지는 강점이다. 기실 문신과정에 대한 묘사에서 이미 독자들은 숨막히는 문신현장을 간접체험한 바 있으며, 나비를 사냥하는 거미의 동작에는 문신의 전과정이 축약되어 겹쳐진다. 관능적이고 잔혹한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이 읽는이를 마력처럼 끌어당기고 거미의 환상과 그 심상의 공격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데는, 이같은 간접체험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에는, 마치 문신과정이 그러하듯 호흡의 완급을 조절하며 의미를 각인해나가는 작가의 강하고도 미세한 통제가 작용하고 있다. 이런 성공적인 대목들에서 천운영의 묘사는 (의도에 짙게 배어 있는) 관념을 배제하지도 그것에 지배되지도 않는 균형에 도달한다.

「바늘」에 담겨 있는 예술에 대한 언급들은 작가의 이같은 성취가 상당한 의식적인 추구에 기초한 것임을 암시해준다. 문신작업이라든가 어머니의 바느질만 하더라도 예술활동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지만, 예술에 대한 언급이 좀더 직접적으로 표명되는 대목은 전쟁박물관 장면에서다. 이 장면 자체는 서사의 흐름에서 보자면 좀 느닷없고 작위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귀주대첩 그림에 대한 화자의 반응은 어머니가 현파스님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의 심경으로는 그런대로 방불하거니와, 한사람의 예술가로서 화자가 예술에 대해 갖는 확신을 보여준다. 전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게 그려진 귀주대첩 그림을 보며 화자는 거의 생리적인 메스꺼움을 느낀다.“인정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한 전쟁은 이렇게 수묵화로 그려진 풍경화가 아니라 원색의 고통과 절규로 점철된 사실화다.”(21면)

이런 발언을 곧장 작가 자신의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실화’에 대한 지향은 이 작품 자체에서도 뿜어나오는 듯하다.‘사실화’에 대한 추구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사실주의의 기본적인 지향과도 통한다. 문신과정의 묘사는 이런 사실주의적 기율을 일면 철저히 밀고 나아감으로써 그 기율의 힘을 재생해내는 듯하다. 그러나 그 재생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의미의 사실화와는 달리 강한 암시성과 환상과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면에도 주목해야겠다. 그러할 때, 과연 이 ‘사실화’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대로 남는다. 천운영에게 있어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세목에 대한 집중이며, 세목들을 전체적인 의미체계 속에 끌어들이는 작가의 장악력이다. 다시 말해 천운영의 작품세계는 날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강한 예술적 통제를 특징으로 하며, 그런 면에서는 일종의 ‘양식화(樣式畵)’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실에의 추구와 양식성의 양립이 실재에 육박하려는 시도에 얼마나 부응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바늘」에서도 이같은 양식적인 의지가 두드러진다.‘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골리앗거미의 형상은 작품 전체의 구성원리를 대변하는데, 옆집 남자와 화자인 여자라는 대칭적인 인물 설정은 그 한 예다.(이런 식의 인물설정은 천운영의 소설에서 거듭 나타난다.) 옆집 남자는 ‘추한’ 외모의 여자와는 달리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19면) 얼굴을 하고 있고, 여자가 규범적인 여성성에서 배제되어 있다면 남자는 거꾸로 규범적 남성성을 결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승강기를 축으로 반을 접는다면 (…) 골리앗거미의 보각처럼”(같은 곳) 여자와 남자는 한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대칭적 형상들은 단순한 일치나 대립이 아니라, 좀더 미묘하고 복합적인 접점들을 형성해낸다. 여자는 육식에 탐닉하지만 ‘하얀 쌀밥’을 곁들여 먹는 것을 선호하며, 남자를 만나고 난 다음 고기를 굽다가 문득 “아주 민감한 한숨을 내쉬게 하는 부드럽고 달콤한 슈크림빵”(31면)을 떠올리는 대목은 육식에의 탐닉이 부드러움을 박탈당한 자의 복수이자 자기처벌 행위가 아닌가 하는 암시를 불러일으킨다. 여자가 자기의 분신이자 상징인 ‘바늘’을 남자에게 새겨주는 마지막 귀결에서도, 비록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33면)고 마무리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두 세계가 통합되었다는 느낌보다는 이같은 일종의 공모가 지닌 허망함이나 근원적인 무력함이 짙게 배어나온다. 파괴적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이 지닌 진정성과 위험을 동시에 보아내는 작가의 시선에는 단순한 대립설정이나 그것의 뒤집기, 다시 말해 단순한 양식화(樣式化)에만 그치지 않는 추구가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3

 

그러나 「바늘」이 지나친 양식화의 폐해에서 말끔히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무엇보다 남자의 형상 자체가 정해진 구도에 따라 조립된 인물 같은 느낌이 짙으며, 대칭구도의 한 변주인 어머니와 현파스님의 이야기 또한 그런 점이 없지 않다.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외상이 딸의 파괴성의 연원이라면, 부드러움에 대한 딸의 억압된 선망 또한 부재하는 어머니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곧고 부드럽던 엄마의 손끝”(16면)에는 매정하게 딸과 갈라서는 무서움, 즉 ‘바늘’의 날카로운 파괴성이 진작부터 숨어 있으며, 이런 점이 이 작품에 단순 대립구도를 넘어서는 긴장감을 주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현파스님의 관계가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어서, 어머니가 현파스님에 대해 품은 것으로 되어 있는 살의가 작품에서 충분한 내용을 얻기보다는, 파괴적으로 분출하는 억압된 욕망으로서 바늘이 갖는 상징성을 다시 ‘보여주는’ 데 그치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이 작품에서 서사적인 요소가 충분히 탄탄하지는 못하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그렇다면 여러모로 「바늘」의 필치를 이어받고 있고 문제의식도 유사한 그 다음 작품인 「숨」이 「바늘」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지나친 양식화와 통제가 주는 숨막히는 듯한 미학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요소가 「숨」에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선 「숨」에서는 생활현장의 실감이 좀더 전면적이고 긴밀하게 ‘기괴함’의 효과를 통제하고 심지어 변형해낸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마장동 축산시장이라는 구체적인 배경과 거기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입됨으로써, 무엇보다도 서사가 강화되며 이야기의 흐름이 좀더 자연스러워진다. 이 작품에서 할머니는 어떤 점에서 육식성과 생명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상징하는 인물로 양식화되어 있으며, 포식자로서의 할머니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에 강렬한 인상을 부여하는 요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할머니의 그로테스크한 면모는 다른 이웃의 시선에 의해서 얼마간 완화된다. 내장집 기호네가 볼 때 할머니는 고기의 맛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어디 고기 좋아라 하는 사람치고 내장 맛 모르는 사람 있당가? 서울것들이야 장국맹키로 순, 살코기에 무시나 넣고 끓일 줄 알제, 이 맛은 당최 모른당게. 그래도 할매맹키로 고기 좋아라 하고 내장도 자주 찾고 하니께 내가 특별히 이녁 좋아하는 데 골라주지 않는가?”(45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런 대목들이 기실 이 작품의 그로테스크한 세계에 일상세계의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바늘」에서도 화투판을 전전해온 노름꾼 남자의 일화가 어느정도 그런 효과를 내지만 좀 생경하게 삽입된 느낌이라면, 「숨」에서는 이런 일화들이 서사 속에 좀더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기호네가 할머니에게 표시하는 공감에는 내장집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마저 배어 있으며, 축산시장의 ‘피비린내’에서 벗어나고 싶은 화자의 경우에도 이런 자부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서사의 강화는 이 작품에서 묘사의 충일함을 더해주기도 한다. 작업공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바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숨」에서도 그 특장(特長)을 여실히 발휘한다. 화자는 소머리 가르는 전문가인데, 암소 머리 하나를 고르고 작업대에 올려놓는 데서부터, 장갑을 끼고 접칼을 들고 첫칼을 꽂고 살을 발라내고 가죽을 분리하는 공정이 거의 두 페이지에 걸쳐 면밀하게 그려진다.

 

새 면장갑을 낀다. 머리 하나만 갈라도 장갑은 피로 범벅이 된다. 그러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장갑을 벗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젖은 장갑에 달라붙는 칼자루와 칼날의 느낌이 좋다.접칼을 쥐고 작업대에 바싹 붙어선다. 소의 잘린 목과 손에 들린 접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아직도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코거울을 향해 칼끝을 들이댄다. 커다란 콧구멍에서 뜨거운 숨이 뿜어져나올 것 같다.(47면)

 

얼핏 보아 「바늘」의 문신공정을 그릴 때와 별 차이가 없는 기술방법이다. 베떼랑다운 전문성과 자긍심이 배어 있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이 묘사에는 상대적이지만 문신준비 대목의 건조한 문체와는 좀 다른 인간미와 긴박감이 어려 있다. 가령, ‘달라붙는 칼자루와 칼날의 느낌’을 좋아하는 소머리 전문가와 ‘커다란 콧구멍에서 뜨거운 숨이 뿜어져나올’ 것 같은 소머리 사이에 형성되는 팽팽한 긴장감에는, 문신하는 여자와 문신당하는 남자 사이의 관계에서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인 교류마저 느껴진다. 아울러 화자는 소머리를 가른 지 십년이 넘은 지금까지 “원망의 고함을 지르는 생생한 초식동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단단하고 다소 공격적으로 보이는 뿔만 바라보며 머리를 가”르는(48면) 것으로 되어 있다. 단순히 기계적인 노동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해체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일정한 존중심이 엿보이는 이같은 묘사들에는, 이 작업을 혐오하지도 미화하지도 않고 사람살이의 한 축도처럼 그려내고자 하는 작가의 시선이 살아 있다고 보인다. 실제에 밀착하려는 천운영의 결연한 작가적 의지와 공력이 힘든 일상의 삶과 맺어지는 곳에서 「숨」의 세밀화 대목은 「바늘」의 미학주의와는 또다른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부분의 묘사력은 도입부의 할머니의 형상화와 비교해보아도 돋보이는 면이 있다. 도입부의 묘사에서도 천운영 특유의 장기가 어김없이 발휘됨은 물론이다. 할머니의 머리카락과 굽은 등에 촛점을 맞춘 묘사는 육식동물을 닮은 할머니의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할머니를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손자의 심경에도 자연히 관심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도롱뇽 눈알 등을 넣어 묘약을 만드는 마녀나 뱀의 비유를 더하는 것은 이미 부각된 선명한 이미지를 흐리는 불필요한 처리라 하겠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지가 지나친 결과 선명한 양식화를 오히려 해친 셈이다.(화자가 소에 물을 먹이다가 단속반에게 들켜 도주하는 장면에서, 북소리·밀림·들소떼 따위의 이미지들을 동원하는 대목도 의도에 부합될지언정 좀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할머니의 ‘육식성’과 미연으로 대변되는 ‘초식성’의 대립틀과 그 중간에 놓인 화자의 갈등임은 분명하다. 생명에 대한 집착만 남은 할머니가 주인공 손자에게 “골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마른행주로 핏기를 제거한 다음 얇은 막을 벗겨내지도 않고 선 채로 집어먹”(37면)는 공포의 포식자처럼 비친다면, 미연은 끝없이 따뜻하게 품어안는 어머니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같은 대립적 인물설정이 천운영 특유의 강한 양식화의 의지와 결합되어 있음은 쉽게 짐작이 가는데, 이것이 어떻게 종합 혹은 극복되는가 하는 문제가 작품의 성과를 따지는 데 있어 중요하겠다. 일단 작품 자체의 결말은 육식성과 초식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즉 숨)을 통해 결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작은 동물이나 큰 동물이나, 육식동물이나 초식동물이나, 코끼리나 쥐나…… 모두들 오억번 정도 숨을 쉰다지요”(57면)라는 미연의 발언을 통해서 다소 직접적으로 표명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은 관념적인 차원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며, 사실 목숨 붙이고 사는 모든 것을 감싸안음으로써 대립 자체를 무화하는 것은, 무슨 종합이라기보다는 초식성 자체가 지닌 특징이라고도 하겠다. 오히려 작품 자체는, 생명에 대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양식화된 이원적 대립을 넘어선 살아 있는 인간관계를 되살려냄으로써, 그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기호네의 다른 시선도 단순한 대립틀을 흩뜨리는 역할을 하지만,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관계 역시 화자 자신이 할머니에게 들씌우는 갖가지 부정적 이미지로 다 고정되지는 않는다. 손자가 미연을 인사시킬 겸 집에 데려왔을 때 할머니의 반응은 “침입자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와 노여움”(51면)일색이며 이것은 다름아닌 육식동물의 영역보존 욕구와 닮아 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집착과 그악스러움을 말하는 이런 화자의 진술 너머로, 기댈 곳이라고는 손자 하나밖에 없는 할머니의 처지가 그것대로 실감되기도 한다. 화자 또한 이것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음은 도주하는 장면에서 다름아닌 할머니의 무력한 영상을 떠올리는 데서 드러난다.

 

만약 이대로 멀리 떠나 숨어지낼 수만 있다면…… 그러면 할머니는 어떻게 될까?

순간 내 앞에 광활한 벌판이 펼쳐졌다. 휑한 벌판 위에 먹잇감을 구하지 못해 홀로 죽어가는 노쇠하고 병약한 사자가 누워 있다. 어디선가 검은 부리의 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파리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멀리서 하이에나떼가 주위를 살피며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그림을 지우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55면)

 

이 장면에서 화자의 심회가 직접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피를 생각하는 순간 곧바로 할머니를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할머니에 대한 간단치 않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손자는 끔찍해하면서도 할머니의 육식에 대한 요구를 지성스럽게 받들어온 인물이며, 송치를 구해달라는 무리한 요구에 응하는 것도 단순히 결혼승락을 받아내려는 계산만은 아니다.“숨을 쉴 때마다 늙은 고양이처럼 마른 바람소리가 나기 시작한”(45면)다는 진술에서도 드러나듯, 실제로 할머니의 기력이 쇠진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연에게 할머니와 대립되는 세계를 투사하고 거기로 도피하고자 하는 화자의 욕망은 그것대로 엄연하지만, 할머니와의 삶이 주는 무게와 실감 속에는 이같은 이분법적 설정을 흔들고 나아가서 그것의 극복을 지향하는 힘이 있다. 「숨」에서 배경이 되는 구체적인 생활현장의 묘사는 단순히 배경에 머물지 않는 영향력을 작품 전반에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4

 

「바늘」과 「숨」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난 바 있는 천운영의 특징적인 면모들은 이후 작품들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모티프들이 선명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월경」에서는 「바늘」에서 추구된 바 남녀 성관념의 도치를 둘러싼 문제를 야심적으로 추적해들어가며, 「당신의 바다」나 「행복고물상」, 그리고 어느정도는 「눈보라콘」도 하층생활인의 삶의 현장을 그 내부에서 구현해내려는 「숨」의 세계를 잇고 있다. 물론 이같은 시도가 실제로 얼마나 충실히 구현되었는가 하는 물음은 각기 따로 물어야 할 것이지만,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바늘』이라는 작품집 전체를 의미있는 문학적 도전으로 만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당신의 바다」나 「행복고물상」이 좀더 안정적인 성취에 해당한다면, 「월경」과 「눈보라콘」은 의도의 과잉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아닌가 한다. 천운영의 미덕과 위험을 점검해보자는 취지에서 뒤의 두 작품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월경」은 분명 문제적인 작품인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성과 욕망의 문제에 접근하는 대담한 발상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그 시도가 완전히 성공적이지는 못하다는 점에서도 역시 문제성을 띠고 있지 않나 한다. 이 작품은 여성성을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에 관음증적인 선망을 보이는 한 여성화자의 심리를 파고든다. 어머니의 간음과 아버지의 어머니 살해를 목격한 화자는 의식적으로 어머니를 부정하고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며(파국 이전에도 어머니는 화자에게 차갑고 먼 존재였고, 모성적 보살핌은 오히려 아버지에게서 얻어진다), 그 결과 여성성뿐 아니라 성장 자체를 거부하는 기형적인 삶을 살고 있다. 화자가 현재 유일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은 밥집 여종업원인 ‘계집’인데 화자는 내면화된 아버지(남성)의 시선을 통해 ‘계집’을 관찰하고 감시한다. 그러나 계집에 대한 화자의 애증복합에는 억눌린 만큼 더욱 집요한 어머니에 대한 선망이 들어 있다.

남성적 시선의 내면화, 여성성에 대한 거부와 매료라는 설정 자체는 정신분석적 접근의 매력적인 대상이 될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품 속에서 구현되는가 하는 것인데, ‘계집’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지만, 여성화자의 형상은 아무래도 작위적인 느낌이 짙다. 다음 구절을 보자.

 

계집이 치마를 모으고 앉아 땅바닥에 손을 짚어가며 머리카락을 찾는 동안 나는 셔츠 사이로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훔쳐본다.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계집은 제법 탱글탱글한 가슴을 유지하고 있다. 가슴도 가슴이지만 계집의 엉덩이는 정말 탐스럽다. 표주박 두 개를 나란히 놓은 듯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톡 불거지는 모습이 여간 아니다.(69~70면)

 

이 대목만 따로 읽고 화자가 스무살을 앞둔 여성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3 물론 화자에게 내면화된 남성의 시선을 드러내려는 의도적 처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톡 불거지는 모습이 여간 아니다’ 식의 어투는 지나친 게 아닌가 싶다.‘계집’이라는 호칭과 이런 서술이 이어지면서, 읽어나가다가 문득 화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혼란스러워지기도 하는데, 이는 시각의 ‘전도’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지나쳐서 문제를 일으킨 경우라 하겠다. 열너덧살 되는 아이가 이십대 후반의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를 고용하여 먹고산다는 식의 설정도 의도의 과잉과 서사의 허술함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가 될 만하다.4

「월경」이 작가의 의도가 앞서면서 화자가 생기를 잃고 ‘심리학적 사례’에 가까워진 경우라면, 「눈보라콘」 역시 추상적인 관념이 승하여 문제를 야기한 경우다. 가령,“눈보라콘 속에는 부라보콘을 향한 욕망과 열망이 들어 있다. 눈보라콘도 나처럼 부라보콘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눈보라콘이 부라보콘의 대용물밖에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보라콘에는 다른 가짜들과는 구분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99면) 같은 구절은 화자인 아이의 생각을 기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어휘에서부터 작가의 개입이 역력하다. 이런 정답조의 의미부여를 절제하고 나중에 나오는 ‘소녀’와의 대화만으로 처리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이같은 관념적인 진술들이 성에 눈떠가는 사춘기 소년다운 생각이나 대화와 뒤섞여 있다.

실상 부라보콘 먹기에 대한 관찰은 이 작품 전체의 핵심을 이루는데, 화자의 ‘훔쳐먹는 상상’을 따라가는 다음 대목은 천운영 특유의 묘사력과 그 문제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전체를 휘어잡게 만든 원뿔형의 부라보콘은 냉정한 육체를 가졌다. 그러나 내가 손에 쥐는 순간 그 차가운 몸뚱이는 뜨거운 잔상을 남기며 맹렬히 안겨온다. 표면에 생긴 물방울이 손금 사이사이로 스며들면 다른 손바닥에도 슬그머니 땀이 찬다. 비밀의 문을 열듯 조심스럽게 옷을 벗겨낸다. 돋을새김이 되어 있는 콘의 표면은 소름이 살짝 돋은 발가벗은 여자의 몸처럼 안쓰럽기까지 하다. 아이스크림의 질감을 훼손하지 않을 정도로 바삭바삭하면서 촉촉한, 그 어떤 콘도 따라올 수 없는 아슬아슬한 균형감각. 나는 부라보콘 맨살을 아주 세심히 쓰다듬는다.(91면)

 

부라보콘에 투여된 성적인 호기심과 욕구가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되고 있고 여기에는 모성에 대한 갈구도 숨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동원된 감각들에 비해 실감은 약하다. 바꿔 말해, 여기서 드러나는 감수성이란 온전히 소년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작가가 바깥에서 부여한 관념의 소산에 더 가깝다. 가령 ‘냉정한 육체’ 같은 표현도 좀 거슬리지만, ‘소름이 살짝 돋은 발가벗은 여자의 몸처럼 안쓰럽기까지 하다’ 같은 대목에는 과잉개입의 혐의가 물씬 풍긴다.

뜯어 읽어보면 「눈보라콘」에는 어머니의 형상이라든가 소년의 성장을 둘러싼 흥미로운 대목들도 많다. 여기서 그같은 문제들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나, 천운영의 작품에서 관념의 지배가 묘사의 충일성을 훼손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 점이 작품의 성취에 중요한 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지적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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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몇몇 문제작을 중심으로 그 성취와 관련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적어보았다. 그러나 평가라는 것 자체가 주관성의 지배를 아주 벗어날 수는 없고, 이 글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을 두고 나누는 대화에 참여하는 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작품 전체를 다각도로 살피기보다는 대체로 천운영의 특징적인 묘사법에 한정해서 논의한 셈이지만, 그런 가운데 묘사가 관념이나 서사 같은 소설의 다른 요소들과 맺어지는 방식이라든가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구조와 갖는 관계도 어느정도는 함께 짚어보고자 하였다. 이 글에서 좀더 상세히 거론한 「바늘」이나 「숨」은 천운영의 묘사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면서 밀도있는 작품세계를 창출해낸 행복한 경우라 할 것이다.

이 두 작품은 천운영의 작품 가운데서도 초기작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후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초창기의 밀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첫 작품집 『바늘』이 새롭게 다가온 데는 「당신의 바다」나 「행복고물상」 같은 수작들의 뒷받침도 있는 것이다. 신인으로서의 패기나 자기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은 『바늘』 이후 부지런히 발표하고 있는 작품들에서도 여전하다. 「멍게 뒷맛」(『파라21』 2003년 가을호)은 예의 이원적 구도를 시선과 소유욕의 문제와 결합시켜 깊이있게 파고드는 완력을 보여주며, 「입김」(『실천문학』 2003년 겨울호)은 사회현실과 인간심리를 결합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숨」이나 「행복고물상」의 문제의식을 좀더 확대해나간 면이 있다. 그런가 하면 「명랑」(『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에서는 사람살이에 대한 좀더 공감어린 시선이 비교적 촘촘한 심리묘사에 뒷받침되어 흔한 감상(感傷)을 벗어난다. 이들에도 아쉬움은 없지 않다. 가령 「입김」에서 ‘바른생활맨’의 이야기가 서툴게 끼어든 느낌이라면, 「명랑」에서는 할머니의 ‘버선발’에 집중한 일종의 ‘작업공정’ 묘사에 작가가 너무 탐닉하는 듯하다.그렇기는 하지만, 최근작들은 우리가 천운영이라는 빼어난 신인에게 거는 기대와 신뢰감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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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진우 「늑대의 후예」, 『문학동네』 2003년 여름호 254면.
  2. 황도경 「환상 속으로 탈주하라: 천운영, 이평재, 강영숙의 소설」,『문학동네』 2002년 여름호.
  3. 이 대목이 남성 서술자의 서술처럼 느껴진다는 지적은 심진경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로지르는 섹슈얼리티의 모험과 위반」(『문학인』 2002년 겨울호 57면)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4. 작품이 꼭 ‘현실적인’ 인물 형상이나 이야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법은 없겠고, 은행나무나 달빛 등의 선명한 이미지들은 이 작품에 신화적인 분위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실생활적인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면서 신화적인 서사에 더 치중하는 편이 나았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