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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형식실험의 역설

김연수의 특이한 서사적 행로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대중문화 속의 소설과 영화」 「우리 시대의 사랑·성·환경 이야기」 등이 있음. englhkwn@ijnc.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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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세대는 자신의 고유한 문학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한국문학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 김연수(金衍洙)만큼 이런 요구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는 작가는 드문 듯하다. 그가 흔히 90년대 ‘신세대문학’의 기수로 꼽히는 것도 이런 세대적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970년생인 김연수가 창작활동을 시작한 1994년에는 80년대의 격렬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가두시위나 분신과 고문 같은 엄혹한 상황―은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 하나의 풍문이나 전설로 바뀌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그 직전에 일어난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은 좋든 싫든 엄연했던 객관적 세계 혹은 현실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듯한 충격적인 경험을 안겨주었다.

90년대 초반 민주화 투쟁의 퇴조와 맞물려 갑작스레 찾아온 디지털 소비자본주의의 일상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권의 돌연사는 많은 작가들에게 그러했듯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앞선 세대 작가들, 특히 80년대 리얼리즘 작가들의 세계관을 분명히 거부한 것은 90년대에 등단한 다른 신세대 작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객관적 현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주관적인 내 몸뚱어리의 경험을 무한히 세계의 지평까지 확장시키려는 욕망”을 자기 문학의 기원이라고 밝힐 때,[1. 김연수 「소수의 문학성이지 감각이 아니다」, 『작가세계』 1999년 봄호 302면.] 혹은 장편 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세계사 1994)의 「작가의 말」에서 “나는 비로소 세계라고 하는 객관적인 구조체가 두렵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없다. 세계는 없는 것이다”(354면)라고 토로할 때, 그는 8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대전제였던 객관적 세계 즉 현실에 대해, 그것이 하나의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식론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김연수의 특이한 점은 김영하나 하성란과 같은 신세대 작가들이 80년대를 시효가 만료된 과거로 받아들이고 90년대의 문화적 현실에 몰두할 수 있었다면, 그는 그럴 수 없었다는 점이다.“90년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고 90년대가 오기 전에 죽은 자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스무 살』, 문학동네 2000,227면)라는 작중화자의 발언처럼,90년대의 사람들이란 80년대와 그 이전의 진짜배기 삶이 사라진 후에 겉돌고 있는 유령들이라는 생각이 그의 의식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특이한 시대인식 덕분에 김연수의 초기작품에는 어떤 화해하기 힘든 모순이 존재한다. 김연수의 발상을 빌려서 말하자면,80년대적인 영혼이 90년대적인 예술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의 서사적 행로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하는 것도 따져보면 이런 특이한 모순 때문인 듯하다. 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와 최근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문학동네 2002) 사이의 현격한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식론에서 출발했으되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적 편력과 서사적 실험을 거치는 동안 출발점과는 반대방향의 어느 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문학 텍스트에서 ‘세계’를 추방하고 순전한 허구의 언어적 구성물을 보여주겠다며 출발한 그가 (‘객관적’이라는 형용사는 붙일 수 없을지는 몰라도) 하나의 ‘세계’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어쩌면 이 작가의 선명한 입장표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처음부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식론과는 다른 무엇이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종종 그의 서사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내용과 형식이 어긋나는 현상은 텍스트 바깥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강렬한 애착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은밀한 일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동일한 작가가 썼다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의 지적 편력, 특히 소설관의 경우에도, 작가의 입장표명과 작품의 구체적 면면 사이에는 어떤 괴리가 존재한다. 그는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의 서두에서 한때 매혹됐던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에서 벗어나 한국문학사를 만나면서 “그제야 나는 맥락이 없는 세계가 참으로 나약한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10면)고 밝힌다. 하지만 이런 선언적 각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한국문학보다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듯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쿨’(cool)한 포즈를 취하는 무라까미 하루끼 유의 병폐에서도 시원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보다는 오히려 리얼리즘 예술에 더 가까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단편 연작을 씀으로써 한국문학사의 맥락에 확실히 접속한 것 또한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외국문학을 거쳐 한국문학으로 들어오는 우회적 경로, 이것이 김연수의 또하나 남다른 점이다. 이 글은 김연수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보다는 형식적 측면에 치중하여 데뷔작에서 최근작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특이한 서사적 행로를 추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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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첫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는 전통적 소설서사의 관행에 어긋나는 새로운 발상과 기법으로 가득하다. 마치 70,80년대 리얼리즘 소설이 강조하던 형식적 규칙들을 모조리 깨뜨려보는 실험을 하는 듯하다.작가는 이 소설이 하나의 허구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소설에 대한 논의를 작품의 핵심적인 일부로 끌어들인다. 작중에 작가로 등장하는 ‘나’(김연수)가 쓴 소설을 (80년대 맑스주의 세계관과 예술론을 지닌)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스승인 서원기가 논평하는 장이 간간이 삽입되며, 말미에는 이 둘과 등장인물 3명이 이 작품의 공과를 논하는 좌담회까지 열린다. 소설쓰기에 대한 고민을 소설의 소재로 삼는 이른바 메타픽션(metafiction)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소설의 주된 내용 역시 파격적인데, 냉전 이후 한국의 주도권을 놓고 유신 재건세력과 모종의 탈근대적 신민족주의 세력이 대결한다는 황당한 가상 역사를 기둥 줄거리로 설정하고, 이에 연루된 최민식과 송찬명이라는 두 청년의 좌충우돌을 보여준다. 장면들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느닷없이 바뀌고 등장인물들의 말장난과 대화는 썰렁하기만 하다. 이 소설에 현실이 있다면 그것은 서원기의 말대로 “만화의 현실일 뿐”(45면)이다. 이런 실험적 형식들이 겨냥하는 주된 표적은 물론 반영론적 리얼리즘이다. 특히 신민족주의 세력이 국민개조 프로그램으로 구축한 ‘허구를 반영하는 현실이론’이란 것은 반영론적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패러디하는 기제로 활용된다.

묘한 것은 권위에 의한 어떤 경계를 무너뜨릴 때는 무릇 신이 나게 마련인데 김연수의 이 작품에서는 그런 해체의 신명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영론적 리얼리즘을 통째로 뒤집고 조롱하는 발상들이 통쾌하기는커녕 어쩐지 찝찔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가령, 서원기가 작중의 작가 김연수가 쓴 소설을 비판하는 대목은 맑스주의적 반영론에 대한 하나의 패러디로 의도된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 자신의 과도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작가 김연수의 자의식적 반론으로도 해석될 수가 있다. 서원기는 패러디 대상임에 틀림없지만, 작가 김연수의 도플갱어(Doppelgänger,분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김연수의 이런 양면적 세대의식으로 말미암아 이 소설은 파격적인 형식실험에도 불구하고 통렬한 맛이 없고 어정쩡한 느낌을 주고 만다.[2. 이 소설의 문제점을 “우화적 구도라면 더 철저하게 만화를 향해 나아가든지, 아니면 정치적 알레고리가 요구하는 논리적 정합성과 개연성을 확보해야만 했다”고 지적한 서영채의 논평은 정곡을 찔렀다고 본다(서영채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문학동네』 2002년 봄호 321면).] 게다가, 국내외 정세라든지 문학에 대한 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생각들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와 구성이 정교하지 못해 별다른 예술적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한마디로 기발한 아이디어는 많은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느낌이다.

두번째 장편 『7번국도』(문학동네 1997)는 데뷔작에 비해 분량도 적은데다가 언어도 꽤 정제되어 있어 한결 쌈박한 느낌을 준다. 이 소설에서도 형식실험은 계속되지만, 그 상당부분은 리처드 브로티건(Richard Brautigan)의 『미국의 송어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 1967)에서 그대로 차용된 듯하다. 우선 책의 제목인 ‘7번국도’는 ‘미국의 송어낚시’의 경우처럼 한가지 고정된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전된다.7번국도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포항을 거쳐 속초에 이르는 동해안을 따라가는 도로이지만, 화자는 이것을 화분에 기르다 죽여버린 나무(뒈져버린 7번국), 동해지방에 나도는 수인성 전염병(7번국도 ),UFO에 납치되었다는 주인이 운영하는 까페(카페 7번국),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잃고 월급날마다 창고형 백화점에서 아기용품을 사는 사람(7번국도),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는 편지를 배달하는 할아버지(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7번국) 등등에 붙여서 사용한다.

이 수법이 언어와 지시대상, 나아가 씨니피앙(記標)과 씨니피에(記意)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자의적이라는 쏘쒸르(Ferdinand de Saussure)적 언어관의 소산임을 알아차리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7번국도’라는 씨니피앙을 그 씨니피에로부터 떼어내어 어떤 다른 씨니피에와 결합시킨 듯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작위적인 어법이 어떤 예술적 효과를 거두느냐이다. 쏘쒸르의 언어관을 물려받은 야콥슨(Roman Jakobson)에 따르면 김연수는 환유(metonymy)적 양식이 지배적인 산문의 맥락에서 시의 지배적인 양식인 은유(metaphor)를 사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은유가 시적 효과를 자아내기 위해서는 두 결합항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나 등가성이 있어야 한다. 앞서 거론한 ‘7번국도’의 은유적 사용에는―세상의 주류에서 소외되고 상실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희미하게 스며들어 있지만―두 결합항 사이의 유사성이 너무나 미약하고 자의적이라서 어떤 유의미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두 결합항 사이의 은유적 유사성보다는 무수한 의미들 사이의 상호텍스트성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7번국도가 길이라는 데 착안하여,“길은 세상의 어떤 의미에로든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서로 참조하고 서로 연결되며 끝없이 넓은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34면)라는 보르헤스(Jorge Louis Borges)적인 발상이 좀더 그럴듯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이 작품에 얼마나 구현되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작품의 구체적 맥락에서 7번국도의 의미 변전은 어떤 예술적 효과를 자아내기보다는 괜스레 혼란을 준다는 느낌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송어낚시’의 경우에는 그 의미의 변전이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면이 있기에 ‘7번국도’의 경우처럼 뜬금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또한 ‘미국의 송어낚시’가 환기하는 문화적 폭은 ‘7번국도’보다 훨씬 광범위하기 때문에, 그만큼 깊은 상징적인 울림을 준다.

이밖에도 파편화된 짤막한 장들이 순서없이 배치된 점이라든지 이야기를 꺼내고 끝내는 방식에서도 『7번국도』는 『미국의 송어낚시』를 빼닮았다. 심심찮게 시를 끌어들여 산문과 운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도 공통점이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과 인물의 면면을 짚어보면 양자는 판이하다. 주요 등장인물인 화자, 재현, 서연, 세희는 이런저런 과거의 상처―‘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대변되는 모든 가부장적 권위로 인한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왼손이 마비되어 기타를 치지 못하던 재현이 7번국도 여행으로 왼손 마비가 풀리게 되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세희가 일본인 아버지와 화해하면서 애엄마가 되기로 마음먹는 밝은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분위기는 왠지 우중충하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기가 불가능한 듯이 보이던 젊은 남녀들이 나중에 가서 희망을 갖게 되는 결말은 석연치 않다. 또하나의 문제점은 남녀간의 관계 묘사, 특히 정사장면의 처리에서 무라까미 하루끼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이다. 가령 서연이 재현을 사랑함에도 ‘정상적’인 정사를 거부하고 손이나 입으로 사정을 시켜준다는 대목을 접하면 무라까미 하루끼의 『노르웨이 숲(ノルウェイの森)』(1987)의 설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비틀즈를 비롯한 대중음악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공통적이다. 한국의 90년대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일본의 70년대 초의 방식과 이렇게 닮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7번국도』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브로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 및 하루끼의 『노르웨이 숲』과 문화사적 맥락에서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작품은 1960년대 후반 미국과 일본의 사회변혁운동(이른바 1968년 혁명)과 각각 관련이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미국 1968년 혁명의 토대였던 저항문화의 맥락에서 태어났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한편에는 미국의 순진성과 자연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지만 상승하는 저항문화 특유의 유연한 유머와 기지가 번득인다. 이 작품이 파편화된 형식을 취하면서도 생태주의를 통한 문명비판이라는 주제로 수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저항문화적 활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노르웨이 숲』은 일본판 1968년혁명인 ‘전공투(全共鬪)’ 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을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으나,20년 후의 싯점에서 기억을 통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사회운동이나 혁명의 영향이 철저히 거세된다. 간간이 언급되는 사회적·정치적 사건은 주인공 화자와 나오꼬, 미도리 사이의 감미로운 사랑과 상실의 멜로드라마를 좀더 실감나게 하는 배경으로만 활용될 뿐이다. 일본에서 이 소설이 기록적인 베스트쎌러가 된 데는 사회변혁에의 꿈을 접어버린 소시민들의 향수를 달래면서 그들의 죄책감은 덜어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두 소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7번국도』는 한국의 사회변혁운동과 관련해서 어떤 지점에 서 있을까. 『미국의 송어낚시』의 여러 형식들을 차용했으되 사회변혁이나 저항문화적 활력이 없기에 그만큼 유연하고 참신한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노르웨이 숲』처럼 감미로운 위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 까닭은 하루끼가 남녀관계를 다루는 솜씨가 김연수보다 낫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김연수가 80년대의 민주화투쟁 시절 이후 사회변혁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서도 90년대의 소비문화적 현실에 체념적으로 탐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7번국도』는 내용과 형식이 어긋나는 실패작이지만, 하루끼의 『노르웨이 숲』보다는 정직하고 건강한 작품인 것이다.

『스무 살』에 실린 8편의 단편들은 1994년 등단 이후부터 1997년 IMF 직전까지 발표한 것들이기 때문에 『7번국도』보다 전에 씌어졌거나 동시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단편들이 초기의 두 장편보다 훨씬 세련되게 보인다. 비교적 제한된 범위에서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것이니만큼 단편에서는 좀더 정교한 구성을 취할 수 있거니와, 「작가 후기」에서 작가가 “1997년부터 지금[2000년 초–인용자]까지 나는 이 소설들을 고치느라 세월을 보냈다”(292면)고 밝힌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발표 후 개선된 점도 상당할 것이다.8편의 단편들은 다채로운 성향을 보여주는데, 다만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표제로 묶인 3편의 연작 단편―「중세의 가을」 「카르타필루스」 「기억의 어두운 방」―은 『7번국도』의 연장선에 있고 그와 비슷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카르타필루스」에서도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165면)라고 말하는 서연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하나의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고,90년대를 마치 연옥의 터널처럼 표현하는 대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연작 단편들에는 주목할 만한 새로운 면이 있는데, 그것은 「기억의 어두운 방」에서 화자가 고씨동굴에서 겪은 경험을 계기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대목이다.

 

이미 죽었으되, 살아가는 것들은 이제 다시는 죽지 않는다. 아버지도 죽고 J형도 죽지만, 동굴을 지나온 나는 죽지 못하는 운명이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착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의 존재를 믿었고 예수 당대에 죽었지만, 몇몇은 죽지 못하고 영원히 떠도는 것이다. 마치 껍질을 벗어버린 오징어처럼, 동포를 배반하고 살아남은 변절자처럼. 한번 죽어 다시 죽지 못하는 중음신의 넋처럼! (203면)

 

이런 발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80년대 민주화투쟁에서 살아남은 90년대 사람들을,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 없는 유령처럼 인식하는 대목은 『7번국도』를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나온다.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동굴을 지나온 나는 죽지 못하는 운명”이라는 구절에서의 ‘동굴’의 의미이다. 김연수는 엘리아데(M.Eliade)의 ‘입문’의 의미―새로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한다는 것―를 통해 “동굴을 지나온 사람은 (…)‘입문’했으며 그는 ‘죽었고’ 이제는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같은 곳)고 선언한다. 이 구절은 작가가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을 새로운 존재로 도약하는 계기로 전화한 대목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부활이란 다름아닌 작가로서의 부활이다.

 

이제 영원히 죽지 않는 운명이 되어, 마치 납골당에 걸린 사진 속의 운명이 되어 소설 속에서 영원히 스스로 지나왔던 동굴 저편 멀리에서 장관을 이루며 서로 얽히고 설켜들어가는 현실의 모습을 동경하면서 ‘나’는 중음신의 몸으로 소설이라는 공간 속을 떠돌게 된 것이다.(205면)

 

「중세의 가을」에서 화자가 미로 같은 복도를 통과한 후에 도달한 어느 건물 지하층의 납골당 같은 방에는 최남선, 이광수, 김소월, 염상섭 등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거기서 ‘복도’의 의미는 이 ‘동굴’과 다르지 않다. 「중세의 가을」에서 화자는 “이 복도만 지나고 나면 나에게 의미있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릴 것이다. 복도 저편에는 다른 세계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156면)고 생각한다. 이 연작에서 ‘복도’와 ‘동굴’은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흔히 그렇듯이 어떤 결정적인 경계를 나타내며, 저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관을 이루며 서로 얽히고 설켜들어가는 현실’이 이쪽에는 ‘소설이라는 공간’이 있는 셈이다. 화자는 이제 다시는 현실로 돌아갈 수 없는 소설이라는 텍스트 공간 속으로 들어가 앞서 간 한국문학의 대가들 대열에 합류한다. 현실의 세계를 포기하는 대신 이광수나 염상섭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이다. 한마디로 ‘죽지 않는 인간’ 연작은 김연수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죽지 않는 인간’ 연작은 김연수가 어떻게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운명처럼 가기로 했는지를 일러주는 흥미로운 소설이지만, 작품으로서 설득력은 약한 편이다.‘터널’ ‘복도’ ‘동굴’과 같은 기다란 구멍들이 운명적인 경계가 된다는 보르헤스적인 발상에 공감하지 않으면 이 작품의 구성은 유지되기 힘든 것이다. 현실의 세계와 문학텍스트의 세계를 양자택일의 관계로 설정해야 하는 이유도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텍스트 바깥에 장관을 이루는 현실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식론과는 차이가 있다.

『스무 살』에는 앞의 연작들보다 형식적으로 뛰어난 단편들이 여럿 있다.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은 보르헤스적인 추리적 상상력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작품이다. 추리적 상상력에 걸맞게 작품 자체가 충분히 추상화되면서 언어와 구성이 정교해진 것 외에도 김연수의 양면적인 세대적 자의식이 배제되어 있어 어떤 뜬금없는 균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이 소설은 선풍기를 폐기하는 인물과 희귀본을 유폐하는 공야장 노인,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글쓰기를 추구하는 소설가 화자가 삼각구도를 이루며, 앞의 두 사람이 자신이 애써서 만든 기발한 선풍기, 또는 훔쳐서까지 수집한 희귀본을 스스로 유폐하려는 행위가 결국 소설가의 글쓰기가 안고 있는 딜레마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뭔가 진귀한 원본에의 집착이 사물이 본래 지닌 기능과 가능성을 죽여버린다는 깨달음이다. 세상사람들의 희귀한 것에의 집착은 상술에 의해 물욕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주사위 두 개가 같은 수가 나오면 맥주 500cc와 최고의 안주요리를 무료로 제공하는 ‘고양이 요람’이라는 이색적인 술집의 에피소드가 작품 속에 통합되는 것도 이 지점에서이다. 화자와 그의 친구의 추리에서 보듯 서른여섯 번이나 와야지 최고의 요리를 공짜로 먹을 수 있는데, ‘나머지 서른다섯 명 중에 다섯 명’은 최고의 요리가 뭔지 궁금해서 돈을 주고 시켜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도서관 사서가 공야장 노인의 희귀본을 빼돌리려다가 그를 살해하게 되는 것도 진본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애착과 물욕이 합쳐진 결과이다. 막상 ‘고양이 요람’의 최고 안주는 아무 맛도 없었듯이 희귀본에 무슨 진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기억력이 무궁무진한 공야장 노인이나 선풍기를 폐기하는 사람 같은 인물에다 정교한 추리적 구성과 뜻밖의 결말 등 보르헤스적인 장기를 고루 보여주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보르헤스적 예술을 선보였다는 사실을 제한다면 한국문학의 맥락에서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소설의 등장인물에서부터 상황설정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한국적인 면이 있는가? 보르헤스류의 환상문학을 두고 무슨 국적 타령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환상이나 상상에도 국적과 번지수가 있는 것이 문학이다. 이 점에서 환상성이 김연수 특유의 세대적 자의식과 결합된 「마지막 롤러코스터」나 「뒈져버린 도플갱어」가 형식적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더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은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1954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얼핏 집안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화자에게는 재식이라는 이복동생이 있는데 적서(嫡庶)의 차별 때문에 재식은 집을 나가고 이로 인해 화자의 집안은 정적이 감돌면서 부모와 화자 모두 죄책감에 시달린다. 화자는 어머니의 종용으로 재식을 찾아갔다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뜨(René Magritte)의 「빛의 제국」을 연상시키는 광경을 발견하고 재식과 자신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인식하면서 동생과 화해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이런 집안 이야기 못지않게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위계질서와 적서차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집안 이야기가 하나의 축이라면 독일과 한국, 서양과 동양의 서열에 얽힌 이야기가 다른 하나의 축인 것이다. 미술 공부를 하러 독일에 유학갔다가 잠깐 귀국한 화자는 독일에서 자신이 생각한 미의 기준과 한국사람들의 미의 기준이 판이함을 발견한다.

 

독일에 있을 때, 나는 매끈하게 생긴 서양인의 모습을 보고 동양인은 얼굴이나 신체구조에서 보편적인 미에 미달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동창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가 나는 곤욕을 치렀다. 그 친구는 내게 완전히 양물이 들었다며 의식은 물론 신체구조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보편성이 곧 서양의 보편성이 되는 이유를 밝혀보라고 떼를 썼다.(…) 그 친구의 주장이란, 그렇다면 우리 식대로 살자라는 방식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미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득 이제 와 이들의 대화를 엿들으니 그 우리 식이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었다. 보편성은 지리적인 위치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독점(獨占)의 자리에 서서 편재(遍在)를 양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119~20면)

 

화자는 서구적 보편주의를 믿고 있으며, 이런 눈으로 ‘우리 식대로 살자’라는 (북한 사람들을 포함한) 한국인들의 편협한 지역주의를 폄훼하고 있다. 하지만 화자가 생각하는 보편주의란 서구중심적 위계질서가 만들어낸 허상이기에 진실을 거꾸로 보는 쪽은 오히려 화자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인들의 ‘우리 식대로 살자’라는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화자 집안의 가부장적 위계질서(적서차별)와 보편주의의 가면을 쓴 근대적 서구중심주의적 위계질서(인종차별)를 겹쳐놓은 것인데, 절묘한 것은 화자가 두 위계질서에 대해 허위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작품 전반에 구조적인 아이러니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가령, 앞의 인용문에서 “보편성은 지리적인 위치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독점(獨占)의 자리에 서서 편재(遍在)를 양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대목은 ‘우리 식대로 살자’는 한국인들 쪽에서 화자를 공격하는 말로도 사용될 수 있다.

두 위계질서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파헤치는 솜씨도 눈여겨볼 만하다. 재식은 독일어를 공부해서 국비로 유학가려는 계획을 세운다.“재식에게 독일이란 자신을 당당하게 만드는 먼 곳”(112면)이며,이는 곧 적서차별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근대 서구의 중심국가가 주변부의 주민에게 전근대적인 위계질서에서 벗어나는 대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독일로 유학가는 쪽은 화자이며, 재식은 서울의 변두리로 물러나 자기 식대로 살아간다. 문제는 이런 위계질서들과 르네 마그리뜨의 「빛의 제국」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이다. 그 실마리는 화자가 한때 독일어 공부용으로 읽었던 잡지에 재식이 끼워놓은 「빛의 제국」 그림에 관한 기사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주어진다. 재식이 밑줄을 쳐놓은 구절은 마그리뜨가 미셸 푸꼬(Michel Foucault)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닮음과 비슷함이라는 단어들을 통하여 당신은 세계와 우리 자신들이 전혀 새롭게 존재하는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15면)

 

이 대목의 좀더 정확한 번역은 “닮음비슷함이라는 단어들을 통하여 당신은 세계와 우리 자신들의 전혀 낯선 존재형태를 강력하게 시사할 수 있었습니다”이다. 또한 이 대목 바로 앞에서 마그리뜨가 “당신의 책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1966)의 독해와 관련된 이런 몇몇 생각들”이라고 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3. Michel Foucault, This Is Not A Pipe, Trans. and Ed. by James Harknes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57면 참조.] 푸꼬의 주저에서 ‘닮음’(Resemblance)과 ‘비슷함’(Similitude)의 분별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양자가 모두 결과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을 갖고 있으나, 전자는 원본과 반영물 사이의 위계적 질서를, 후자는 원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사물간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사물과 말의 관계에서 기존의 언어관은 대상이라는 원본이 있기에 그 원본을 말로써 재현하는 과정에서 위계질서가 생겨나는 반면, 말을 대상과의 관계에서 떼어내어 씨니피앙과 씨니피에의 관계로 환원한 쏘쒸르의 언어관에서는 비재현적 차이에 의해 의미화가 이뤄진다. 요컨대, 푸꼬와 마그리뜨는 ‘닮음’이 재현적 위계질서이고 ‘비슷함’이 비재현적 평등관계라는 데 서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늘은 분명 낮임에도 나무를 경계로 한 지상은 어둠속에 있”(127면)는 「빛의 제국」에서 밝은 하늘과 어두운 지상은 서로 다르되 어떤 위계를 이루지는 않는 비재현적 평등관계로 해석된다.

 

그림을 보면서 재식과 나는 완전히 같지도 않지만,전혀 다른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재식의 세계는 뒤집어진 나의 세계이며, 나의 세계 역시 뒤집어진 재식의 세계였다.(…) 재식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을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재식이가 죽을 필요도 없다. 이제야 우리는 겨우 만난 것이다.(131~32면)

 

작가는 결국 한국 가족의 전근대적 위계질서와 서구중심적인 근대적 위계질서라는 양자가 재현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다르지 않음을 암시하며, 그런 질곡에서 벗어나는 발상을 쏘쒸르와 푸꼬와 마그리뜨가 제시하는 비재현적 평등관계에서 찾는 듯하다. 그렇기에 보편적 미의 기준을 거론한 인용문의 의도된 뜻은 서구중심의 보편주의나 ‘우리 식대로 살자’는 편협한 지역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것이다. 게다가, 화자가 뉴스를 통해 여러 차례 듣게 되는 김일성의 사망소식은 ‘우리 식대로 살자’는 노선이 더이상 설자리가 없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볼 때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정교한 작품이다. 그 내용도 모든 위계질서의 틀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이니만큼 얼핏 나무랄 데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쏘쒸르에서 푸꼬에 이르는 (후기)구조주의가 현실을 언어와 관념에 맞추고 나아가 후자로써 전자를 대체하는 환원주의적 성격을 지녔음을 간과하는 듯하다.‘재식의 세계는 뒤집어진 나의 세계이되, 나의 세계는 뒤집어진 재식의 세계가 아닌’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다르되 평등하다’(different but equal)는 관념은 ‘평등하되 따로’(equalbut separate)라는 사실상의 차별주의에 활용될 소지가 있으며, ‘선진 서구 식으로 살자’는 꼴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3

 

김연수의 세번째 장편 『꾿빠이, 이상』(문학동네 2001)은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이나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1954년」처럼 작가의 의도를 일단 사줄 경우 형식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은 작품이다. 또한 가상적 현실을 다루면서도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과는 달리 한국문학의 맥락에 확실히 접속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한국문학 최고의 수수께끼 작가 이상(李箱)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야말로 한국문학사에 족적을 남기고자 하는 김연수의 야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기본발상은 이상의 생애와 작품에 어떤 불확실한 지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진짜(원본)와 가짜(위본)의 문제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그가 실증적인 연구 끝에 찾아낸 것은 두 가지이다. 이상의 임종 당시 병상을 지킨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떴다는 이상의 데스마스크(death mask)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의 시 「오감도 16호 실화」이다. 이상의 이런 수수께끼를 세 명의 인물이 각각의 시점(視點)에서 조명하는 구성도 주목할 만하다. 첫번째 이야기 ‘데드마스크’의 화자로 등장하는 잡지사 기사 김연화는 서혁수라는 사기꾼 같은 인물이 자기의 형인 서혁민한테서 물려받았다는 이상의 데스마스크와 형의 수기 『이상을 찾아서』를 공개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이상의 진짜 데스마스크를 찾았다는 오보를 하게 된다. 두번째 이야기 ‘잃어버린 꽃’의 화자 서혁민은 이상의 문학과 삶을 모방하는 데 평생을 바친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하루야마 유키오 연구에 평생을 바치는 와타나베로부터 하루야마가 갖고 있었다는 이상의 원고를 받지 못하자 자신이 직접 「오감도 16호 실화」를 작성하고 토오꾜오(東京)의 병원에서 자살한다. 세번째 이야기 ‘새’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재미교포 연구자인 피터 주가 이상의 유실된 원고 「오감도 16호 실화」의 진위문제를 놓고 동료 연구자인 권진희, 김태익과 우여곡절의 사건을 벌이는 이야기이다.

이런 복잡한 변수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해나가는 김연수의 저력은 놀라운 바 있다. 하지만 소설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진위 여부를 진실과 거짓, 원본과 위본,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알쏭달쏭해지는 지점까지 몰아갈 필요가 있는데, 그럴수록 인물과 사건의 개연성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서혁민은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과 같은 보르헤스적 작품에 어울리는 인물이지 실증적인 외관을 갖추려는 이 소설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다. 또한 김연화와 정희의 사랑 문제라든지 이중삼중으로 꼬여 있는 피터 주의 정체성 문제도 극의 미묘함과 복잡성을 높이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으로 느껴진다. 요컨대, 이런 작위적인 요소를 덜어내 인물과 사건의 개연성을 높이든지 아니면 아예 보르헤스처럼 한층 더 추상화해 진위 여부를 확실하게 지적 유희의 게임으로 만들어야 한다.

좀더 심각한 문제는 사실(진실)과 진리의 서로 다른 차원이 제대로 사유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의 핵심주제랄 수 있는 문학작품에서의 진리 문제가 혼란스럽게 처리된다는 것이다. 가령, 김연화가 자신이 본 데스마스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할 수 없는 심경을 이상 문학의 진위 문제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다음 대목을 보라.

 

“문제는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는 것이죠. 보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 문학을 두고 최재서와 김문집이 각각 다르게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상과 관련해서는 열정이나 논리를 뛰어넘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진짜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이고 믿기 때문에 가짜인 것이죠.”(83면)

 

별개의 두 문제가 있다. 하나는 서혁수가 김연화에게 보여준 이상의 데스마스크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진실의 문제이다. 또하나는 최재서와 김문집이 이상 문학에 대해 내린 평가인데, 이것은 문학작품에서의 진리 문제에 닿아 있다. 이 구절이 야기하는 혼란은 첫째, 어떤 물건의 진품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해서 문학작품의 평가 문제처럼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가 진짜 아니면 가짜라는 것을 부인하는 순간 주관적 경험론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둘째, 최재서와 김문집이 각각 다르게 평한 이상 문학의 가치평가는 평가자의 “열정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차원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평가자의 주관적 믿음 여부로 환원될 수는 없다.“진짜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이라는 논리는 해묵은 상대주의 진리관의 변종일 따름이며, 다만 이것이 신역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에 편승하여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다. 물론 반드시 김연화를 작가 김연수와 동일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 내에서 이 대목과 뚜렷이 구분되는 다른 진리관이 피력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연수의 두번째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 실린 연작들은 전작들과 너무도 달라서, 소설집 해설을 쓴 비평가는 “전혀 김연수답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4. 정선태 「빵집 불빛에 기대 연필로 그린 기억의 풍경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283면.]이라는 귀띔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격적인 형식과 문체로 소설쓰기를 계속해온 작가가 본격적인 다음 작품을 쓰기 전에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소품 정도로 평가하는 데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 연작이 기존의 작품들과 판이하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김연수가 이 소설집을 내기 직전에 『꾿빠이, 이상』을 썼다는 사실이다. 양자가 어떠한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나, 문체와 방법론에서 극히 대조적인 성향의 작품들인 것이다. 연작 단편들이 그의 앞세대 한국작가들에 젖줄을 대고 있다면, 후자는 보르헤스, 움베르또 에꼬(Umberto Eco),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줄리언 반즈(Julian Barnes) 같은 서구의 주요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발상과 기법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반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Flaubert’s Parrot,1984)가 이 장편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며, 따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 수록된 9편의 단편들은 수준이 고른 편인데, 언어구사가 정치하고 짜임새에 빈틈이 없으며, 인물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공감과 무정하고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균형을 이룬다. 이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제한다면 범박하게 말해서 모든 작품들이 리얼리즘적인 예술이라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은 전라도 출신의 한 가족을 할퀴고 지나간 광주항쟁의 깊은 상처의 결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광주항쟁이 터지던 어름 어머니가 마흔의 나이에 임신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화자의 가족은 아버지가 대척지라고 말한 경상도의 한 소도시로 이사가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그들 가족은 표준어 사용을 철저히 지키는 등 힘겨운 노력을 통해 그곳 토박이들의 전라도 사람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을 서서히 극복한다. 작가는 이 가족이 설움과 상처를 추스르면서 뿌리내리는 정착과정을 경상도 사투리가 두 자매에게 살갑게 들리는 변화로 표현한다. 경상도 토박이들한테 깽깽이라고 불릴 때의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우리는 제법 경상도 가시나로 자라고 있었다”(53면)라는 대목이 그렇다. 하지만 평민당이 발족하고 김대중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면서 사정은 급변한다. 화자의 아버지가 김대중한테 후원금을 냈다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 이들 가족은 다시 한번 지역감정이라는 무서운 칼날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어린 화자가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윤리선생의 발작적인 폭력에 휘둘리는 장면은 광주를 진압한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작품의 말미는 화자가 어릴 때의 기억을 통해 이 두번째 상처를 치유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화자는 아버지와 시립도서관에 갔을 때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가 신문만 뒤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광주항쟁에 관한 스크랩을 하면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윤리선생이 자신에게 가한 폭력을 용서한다.

김연수가 광주항쟁과 지역감정이라는 무거운 정치적 주제를 이렇게 잔잔하면서도 균형있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이미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1954년」에서 연마한 정치적 감각이 한몫했을 것이다. 현실을 보는 관점의 면에서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 더 성숙되고 온당하다. 하지만 그 대신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1954년」이 보여준 지적 유희와 애매함의 매력은 상당부분 사라졌다. 이 연작 단편들 가운데 또하나의 명편으로 꼽을 수 있는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역시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미국의 송어낚시』의 생태주의적 주제를 한국적 맥락에서 제대로 소화하고 솜씨있게 처리한 실감있는 작품이라 칭찬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제한된 범위 바깥으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는 듯한 느낌이다. 달리 말하면, 전작들의 두드러진 약점 가운데 하나가 텍스트 내의 균열이라면, 이 연작들의 문제는 어떤 균열도 없이 마무리된 거의 완벽한 텍스트라는 데 있다. 이는 작가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모험을 펼치기보다 기억에 의존하여 1980년대 김천이라는 소도시의 삶을 실감나게 되살리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느껴지는 실감과 훈훈함은 값진 성취임에 틀림없지만 혹시 이것이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실험적인 도전과 모험을 저당잡히고 획득한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의구심이 생긴다.

김연수의 최근작인 장편 『사랑이라니, 선영아』(작가정신 2003)가 2000년대 젊은이들의 사랑의 방식을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어법을 빌려 발랄한 해학과 가벼운 냉소로 다룸으로써 무라까미 하루끼의 영향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것은 주목에 값한다. 현재 김연수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미학적인 문제는 『스무 살』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단편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자택일적 괴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이다. 『스무 살』의 「작가 후기」에서 “내게는 현실로서 1980년대가 있었고 그림자로서 1990년대가 있었던 셈이었다”(292면)고 말하는 김연수에게 2000년대는 과연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그가 최근에 계간 『파라21』에 1930년대를 다루는 장편연재를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의 종횡무진한 예술적 투혼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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