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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국이라는 우리의 난제

 

변화하는 한미관계와 노무현 독트린의 운명

 

 

강태호 姜泰浩

한겨레신문 기자, 통일팀장. 주요 논문으로 「파병, 북핵 그리고 한미동맹」 등이 있음. kankan1@hani.co.kr

 

 

1. 문제제기

 

코이즈미와 차베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한미FTA와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한 찬·반론자들의 요구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될 것이냐, 일본의 코이즈미 쥰이찌로오(小泉純一郞)의 길을 따를 것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노대통령이 코이즈미가 되길 거부한 것은 분명하다. 노대통령은 코이즈미처럼 한미동맹의 신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차베스의 길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노무현이 차베스의 길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특히 일부 한미FTA비판론자들의 주장처럼 한미FTA가 아니라 한일FTA를 우선적으로 추진했어야 한다는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2005년 3월부터 독도문제, 역사교과서 왜곡과 망언들, 코이즈미의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참배가 잇따르면서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2004년 12월 일본 이부스끼(指宿) 한일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2005년 높은 수준의 한일FTA체결을 목표로 한다는 데 합의했지만, 상황이 나쁘게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왜 노대통령이 한일FTA를 먼저 추진하지 않았는지 비난하는 것은 FTA만 보고 그것을 둘러싼 현실은 보지 않는 것이다.

 

한미관계의 현재와 미래

한미FTA와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둘러싼 소모적이고 때로는 혼란스런 찬반논쟁에서 잠시 벗어나 사태를 보고 싶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는 탈냉전의 변화하는 정세에서 우리는 지금 미국(정확히 말하면 제국을 꿈꾸며 일방주의 외교를 일삼는 부시행정부)과 어떤 수준에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이다. 이런 인식 위에서 외교안보적 현안인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경제통상 문제인 한미FTA문제를 다룰 때 주의할 점이 있다. 두 사안은 서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다. 특히 한미관계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미FTA추진을 중국에 대항하는 한미동맹의 강화로 보는 것은 독자적 영역의 논리와 배경이 존재하는 ‘경제의 문제’를 ‘동맹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한미관계는 한미동맹보다 훨씬 포괄적인 상위 개념이다.

2006년 1월 개최된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한미 외무장관 회담에서의 ‘합의’와 2월 한미FTA협상개시를 둘러싼 평가는 결국 한미관계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문제다. 이 두 가지 사안은 한미관계를 좌우한다. 그러나 좀더 크게 보면 한미관계, 좀더 구체적으로 한미동맹관계는 동북아라는 공간과 탈냉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있으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한미관계의 상호작용은 동북아라는 시간과 공간의 축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라는 공간에는 탈냉전, 경제적 상호의존성 심화, 문화적 동질감 확산이라는 큰 흐름이 존재한다. 지역협력·통합의 가능성이다. 이와 동시에 노무현정부의 지난 3년여 기간만 보더라도 갈등과 긴장국면이 연속되거나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북핵문제와 거듭되는 북미의 대립, 중국의 부상과 미중의 갈등과 협력, 일본의 보수우경화와 ‘보통국가’론, 역내 국가들간 영토 및 역사 분쟁 등 한일, 중일 관계 악화와 민족주의 충돌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한미관계로 범위를 좁혀도 남북관계의 변화라는 한반도의 현실, 동맹에 대한 양쪽 내부의 인식 변화에 따른 새로운 요구들이 분출하고 충돌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옛 냉전질서의 붕괴를 상징하지만 새로운 질서의 수립은 지체되고 있다. 그 사이엔 갈등과 불안이 존재한다. 특히 2001년 부시행정부, 2003년 노무현정부 들어서 탈냉전과 새로운 위협에 대응한 동맹의 강화라는 모순된 두 흐름이 그 폭과 속도를 더해가며 충돌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한미FTA공식협상은 그 한가운데 있다.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나 동북아 질서의 재편과 한미관계의 변화 속에서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한미FTA를 바라봐야지 그 역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미관계의 핵심축이라고 할 한미동맹의 재편·조정에는 미국의 필요와 한국의 요구가 같이 존재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다. 또 동맹의 갈등과 동요를 초래한 배경에는 범세계적 탈냉전과 한반도 냉전 간의 괴리라는 객관적 상황이 존재한다. 예컨대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미국의 외교를 보는 두 나라 국민의 인식엔 커다란 불일치가 있다. 현실은 복잡하다. 전환기적 국면의 동북아 공간에서 어떤 정책적 선택들이 가능했는가라는 현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실제적인 흐름에 근거한 내재적 접근과 비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동북아 공간에서 한미관계를 볼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미국을 역외국가로만 볼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는 현실의 역관계에서 미국을 배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북아 안에 미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북아나 한반도의 문제가 미국을 배제한 채 해결될 수 있다거나, 미국을 배제하면 동북아 지역협력이 이루어진다는 인식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다.

 

이중의 위협

노무현정부 출범 전부터 노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을 입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서동만(徐東晩)은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면서 북핵문제에 ‘올인’하다가 거꾸로 한미관계에 대해 종합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노무현정부가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한미관계가 북핵문제에 덜미를 잡혔다”고 표현한 그는 노무현정부가“(전략적 유연성과 한미FTA등) 한미관계에서 양보한 댓가로 북핵문제에서 어떤 양보를 얻어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1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에서 보면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평가일 수 있다. 북핵문제에 ‘올인’한 것을 잘못이라고 보는 듯한데, 한반도의 현실에서 그것이 ‘올인’하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문제인가?

노무현정부는 처음부터 두개의 칼날 사이에 있었다. 동맹을 무시하는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와 북한의 핵개발 사이에 있었으니, 동맹으로부터의 위협과 동맹에 대한 위협이라는 안과 밖으로부터의 ‘이중의 위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노무현정부 출범 전부터 주한미군 감축의사를 비쳤다. 일방적 동맹관계 재편과 주한미군 감축, 그리고 인권문제를 포함한 대북정책 비판 등은 동맹으로부터의 위협이라 할 만했다. 노대통령 취임 초에 나온 이라크 파병 요구와 북폭론이 그 대표적인 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기 하루 전이었다. 2005년 2월 10일 북한 외무성 성명의 핵보유 발언과 2006년 7월 5일 미사일 동시다발 발사를 비롯해 플루토늄 추출로 드러난 핵무장력 강화와 핵실험설, 간간이 지속된 미사일 발사실험 등 핵과 미사일은 북한이 한묶음으로 내세운 카드였고, 노무현정부에는 계속되는 위협이었다. 핵과 인권문제 등은 북한과 미국에는 서로 협상용 카드가 될지 몰라도, 노무현정부에는 딜레마였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용인할 수도 없고, 정권붕괴를 포함한 미국의 군사력 사용 또한 거부해야 했기 때문이다.2 서동만은 노무현정부가 북핵에 ‘올인’했다고 하지만, 북핵이 노무현정부의 대외정책을 ‘올아웃’시켰다고 봐야 한다.

백낙청(白樂晴)이 지적한 것처럼“지식인의 담론은 정권이 책임질 대목과 누가 해도 힘든 대목을 식별하는 정교한 비판이 되어야 한다”.3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FTA문제에서 노무현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정교한 비판’이 되어야 한다. 사실 이 정권이 책임질 대목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쏟아져나왔다는 생각이다. 특히 한미FTA공식협상에 대한 비판과 반론은 넘쳐날 정도다.

이 글은 그런 비판이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누가 해도 힘든 대목’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데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난과 반대에 앞서 노무현정부가 어떤 상황에 있었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판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권이 책임질 대목보다는 누가 해도 힘든 대목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정교한 비판’을 지향하지만 지식인의 반쪽 담론에 머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글이 그런 올바른 담론을 만들어가기 위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전략적 유연성 문제

 

동맹의 재편—일방적 요구와 갈등 그리고 조정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 한미는 어떤 합의를 했는가? 이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맹의 재편을 놓고 미국과 한국이 각각 어떻게 접근했는가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미 국무장관이 2006년 1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한 제1차 ‘한미동맹 동반자관계를 위한 전략대화’는 노무현정부 들어 3년여 동안 진행된 동맹재편의 과정이 일단락됐음을 보여준다.4 이 과정은 노무현정부에게는 ‘안보의 IMF’라 할 만큼 혹독한 것이었다. 김대중(金大中)정부가 IMF경제위기에서 신자유주의를 거부하지 못했듯이, 노무현정부도 동맹을 거부하지 않고 동맹의 일방적 ‘위협’앞에서 비슷한 궤적을 따라갔다고 비판할 수 있다.5 그러나 한국이 두손 들고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균형적 실용외교의 양면성과 모호성

미국의 동맹재편 요구에 대응하고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라는 국정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노무현정부가 취한 외교정책 기조는 ‘균형적 실용외교’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는 균형적 실용외교를 이렇게 설명한다. “균형적 외교란 ‘가치와 국익’ ‘동맹과 다자협력’ ‘세계화와 지역화’ ‘국가와 국가’(수평적·협력적 관계) 간의 균형을 의미하며, 실용주의 외교란 한반도 평화와 안정과 같이 설정된 국가안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술선택에서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 즉 복잡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뒤얽혀 있는 국제환경에서 국가이익 증대를 위해 외교정책에서 실용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굳이 해석한다면 균형은 양자택일이 우리의 국익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담고 있으며, 유연성이란 전략적 판단의 유보와 모호성도 때때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실용외교에서는 양자택일의 편가르기를 피할 수 있다. 여기엔 양자동맹과 다자안보가 어느 수준에서는 양립 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 미국과의 동맹이냐, 중국과의 협력이냐는 모순될 수 있지만 반드시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정부는 이 ‘균형적 실용외교’의 바탕 위에서 한편으로는 동맹관계를 재조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동시에 한일, 한중 관계를 전면적인 협력적 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키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는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에서 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균형적 실용외교에 입각한 자주국방 추진은 미국에게는 동맹훼손으로, 국내 보수세력에게는 반미로 공격받았다. 진보진영은 또한 그들대로 전통적인 부국강병론으로 보이는 이 자주국방이 한반도의 군축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박정희식 자주국방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중국 포위를 겨냥한 한미동맹 강화는 동북아 다자안보로 이어질 수 없으며 한중간의 협력적 동반자관계와도 모순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노무현정부의 균형적 실용외교가 동북아균형자론과 한미동맹 ‘강화’사이의 모순을 회피하는 장치로 작용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동맹을 거부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이 존재하지 않는 한, 또 동맹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단계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경주 정상회담—북핵, 동맹 그리고 남북관계

2005년 6월 한미 워싱턴 정상회담은 노무현 외교의 분수령이었다. 북핵, 동맹 그리고 남북관계를 동시에 풀어가는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상회담은 부시행정부 2기에 들어서자마자 2월 10일 북한이 외무성 성명으로 6자회담 불참 통보와 함께 핵보유를 언급함으로써 제기된 북핵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었다.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재확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6월 17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정동영(鄭東泳) 통일부장관의 면담이 이뤄졌다. 이는 결과적으로 4차 6자회담 재개와 2차 핵위기 이래로 노무현정부 들어 지체됐던 남북대화를 전면 복원하는 계기가 됐다.

뻬이징 6자회담에서뿐 아니라 9·19 공동성명이 합의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한국은 북미관계를 이어주는 중심적 역할을 했다. 워싱턴 정상회담은 이를 보여준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사전 정지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앞서 2004년 11월 ‘북한 주장도 일리가 있다’는 이른바 LA발언에서 시작해 칠레 산띠아고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북핵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맡겠다고 다짐했고, 부시 대통령의 동의를 얻었다. 200만kW대북송전의 ‘중대제안’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워싱턴 정상회담은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노대통령의 동북아균형자론 등으로 불협화음을 내던 한미동맹관계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균형적 실용외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균형보다는 동맹의 강화 쪽으로 치우친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 후 한미관계가“매우 특별하고 굳건하며 중요한 전략적 동맹”(unique, strong, important, strategic alliance)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은 “한미동맹은 우리가 균형자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기본토대”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균형자론을 철회한 것은 아니다. 이는 2006년 1월 워싱턴에서 열린 첫 한미 외무장관급 전략대화에서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절충하는 과정을 다시 거쳤다. 노대통령은 회담 뒤“한두 가지 작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작계5029’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두 정상은 이를 장관급 차원에서 절충하고 협의한다는 데 합의했다.6

6월의 한미 정상회담이 ‘동맹’에 치우쳤다면 11월의 경주 정상회담은 다자안보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균형’을 보여준다. 이른바 한미동맹과 동북아 다자안보의 보완적 병행발전이다. 이는 2005년 부산 APEC회의를 계기로 열린 11월 17일 경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외교적 합의에는 등급이 있는데, 그중 ‘선언’은 최상위급의 비중을 지닌다. 한미 정상은 경주회담 뒤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부시 대통령은 이 선언에서 ‘6자회담이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로 발전할 가능성’에 동의했다. 이는 6·10 워싱턴 정상회담의 합의가 바탕이 됐지만 9·19 뻬이징 공동성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부시 대통령의 동의는 9·19 공동성명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도 있다. 미국은 이미 8월의 미중 차관급 고위(전략)대화에서 북핵과 평화체제 등 한반도 장래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경주선언에서의 다자안보에 대한 동의는 미국 역시 한반도의 탈냉전 과정을 내다보고 한미·미일 동맹의 보완 차원에서 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이 동북아균형자론 등 이 지역의 새로운 협력을 추구하는 노무현정부의 정책과 접점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정상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데 공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역시 9·19 공동성명에 담겨 있는 내용이지만 두 나라 정상, 특히 부시 대통령이 직접 이를 확인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공동선언은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이 6자회담을 ‘상호보강’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9·19 공동성명의 일반적 해석인 ‘핵 해결 먼저, 평화체제 협의 나중’보다 적극적인 의미부여였다.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동맹·동반자 관계

2006년 1월 19일 워싱턴에서 열린한미 장관급 전략대화 뒤에 나온 공동성명은 한달 뒤 공식 합의된 한미FTA협상추진 발표로 인해 그 실체가 왜곡되어온 측면이 있다. 이 공동성명에서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관한 내용은 두개의 문장에 담겨 있다.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세계군사전략 변화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자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존중한다.”

이종석(李鍾奭) 통일부장관은 지난 2월 국회에서“(공동성명은) 한반도가 동북아 발진기지로 사용될 수 없다는 분명한 입장에서 만들어졌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정부는“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며 양국의 입장을 병렬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어떤 성명이나 발표에서 입장의 병렬은 합의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또 반기문 장관과 라이스 장관의 이 장관급 전략대화는 위 사항에 대해 ‘합의’했다고 발표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관하여 양국 정부의 양해사항을 아래와 같이 확인하였다”고만 밝혔을 따름이다.

물론 주한미군 주력의 평택 이전 및 ‘신속기동군’전환이 진행되는 마당에 두번째 문장은 무의미하다는 비판이 있다. 주한미군이 더는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는 ‘붙박이군’이 아니라, 신속기동군으로 중국과 대만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기타 분쟁지역에 투입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를 추인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미국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면 합의가 있든 없든 미국은 자기 뜻대로 할 것이다. 오히려 두번째 문장이 있어 신속기동군의 활동반경은 제약을 받거나 적어도 한국정부가 그에 대해 반대할 수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정부의 그런 입장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니 스스로 제약을 수용한 것이다. 비판자들이 논거로 삼는 현실적인 역관계에서 보더라도, 한국이 합의해준 게 아니라 미국이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3. 노무현 독트린과 동북아시대

 

평화번영과 동북아중심국가

노무현정부가 출범하면서 내놓은 대북정책과 외교전략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화해협력 단계와 평화체제구축 단계 등을 설정한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의 기조와 방향을 계승하면서 화해협력을 넘어서는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특징은 남북협력의 범위를 한반도에서 동북아 공간으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평화의 문제도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 차원의 냉전해체로 확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냉전해소 등 남북한 평화번영정책이 동북아중심국가(동북아경제중심)론과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냉전해소 및 남북 화해협력을 그 자체로서뿐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차원의 지역협력, 나아가 다자안보적 질서를 통해 발전시켜나가겠다는 뜻이다.

이런 국정목표가 정책으로서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노대통령이 2004년 5월 탄핵국면에서 벗어난 뒤 이라크 파병문제를 마무리짓고 하반기 들어 본격적인 외교장정에 나서면서부터다. 이 시기 그가 내놓은 대외전략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북핵해결의 주도적 역할을 통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외교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분배냐 성장이냐가 아니라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을 통해 동반성장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전자는 2005년 2월의 동북아균형자론과 이른바 ‘대담한 제안’으로서 경수로사업의 포기 및 200만kW대북송전 구상(이른바 안중근플랜)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후자는 2004년 12월에는 한일FTA로 추진되다가 2005년 하반기에 들어서 한미FTA추진 합의로 드러났다.

 

2004년 하반기 외교장정과 노무현구상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하반기 4개월에 걸쳐 모두 3개 대륙 11개 국가를 상대로 대장정의 외교에 나섰다. 11월 12일부터 12월 8일까지 23일 동안 남미 3개국, 칠레 산띠아고 APEC정상회의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한미 정상회담을 거쳐 일시 귀국한 뒤 라오스 비엔띠앙에서 열린 ‘ASEAN+3(한·중·일)’정상회의에 참석한 다음 영국, 폴란드, 프랑스 등 유럽 3개국을 차례로 순방하는 숨가쁜 일정이었다. 또 그에 앞서 9월엔 러시아, 카자흐스탄, 10월엔 인도와 베트남 방문이 있었다.

11월 13일 LA연설에서 시작해 12월 6일 프랑스 쏘르본느대학 연설에 이르기까지 노대통령의 외교독트린은 6자회담을 통한 평화적·외교적인 북핵문제 해결, 한국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동의, 북한의 핵포기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 제공이었다. ‘북한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면서 ‘북핵문제 해법은 미국의 대북위협 포기’라는 다소 도발적 발언으로 시작된 LA연설은 11월 20일 APEC한미·한중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한국의 북핵문제 해결 주도론으로서 미국과 중국의 동의를 얻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 정상회담에 대해 미 행정부 관리의 말을 빌려“두 정상은 공통인식을 찾아냈다”고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대선 승리 이후 첫 국제회의인 APEC회의에서 동맹국들과의 협력 쪽으로 기울었다.

노대통령의 핵심 메씨지는 외교장정의 마지막 행선지 프랑스 쏘르본느대학에서 행한 연설 ‘유럽통합과 동북아시대’에 담겨 있다.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위험을 회피하려는 소극적인 차원의 정책이 아니라 동북아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적극적인 노력입니다. 북핵문제를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LA연설에서 쏘르본느대학 연설로 이어지는 노무현구상은 핵문제 해결의 주도적 역할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핵심요소로 하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것이다. 2005년 9·19 뻬이징 공동성명은 이러한 구상이 낳은 결실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프랑스역할론과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

쏘르본느대학 연설에서 노대통령이 염두에 둔 것은 EU와 프랑스다. “EU는 ‘평화와 번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이며, 유럽은 통합을 통해 제국주의시대의 약육강식·극단대립을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며,“과거사의 앙금이 채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북아에 또다시 배타적 국수주의가 등장할지 모르는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에”동북아에도 이러한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전쟁의 고통을 받은 국가이면서도 독일을 포용하는 도덕적 결단으로 과거를 청산했으며, 강대국임에도 이웃나라에 불안감을 주지 않으면서 유럽통합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강대국은 아니지만 동아시아에서 프랑스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7 2005년 2월 25일 취임 2주년을 맞아 국회에서 한 국정연설을 비롯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 등으로 이어진 연설에서 불쑥 튀어나온 동북아균형자론의 원형은 쏘르본느대학 연설에서의 프랑스역할론이다.

노대통령은 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을 중요한 국정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12월 3일 런던시장 주최 만찬에서“한국은 좀더 성숙한 시장경제를 통해 한단계 더 도약해나가고자 한다”고 언급한 데서도 드러나지만 더욱 적극적인 시장개방 방침은 11월말 ‘ASEAN+3’정상회의 등 아시아국가들과의 회담에서 제시됐다. 11월 29일 유도요노(S. B. Yudhoyono) 인도네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그는“대외개방과 적극적 무역확대 전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전략으로 채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12월 17일 이부스끼 한일 정상회담은 이런 흐름 속에 있다. 두 정상은“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FTA협상을 시작해 내년중에 타결하기로 의견일치”를 봤다. 또 12월 6일 빠리 동포간담회에서는“한국경제가 너무 미국식 이론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데 대해 약간은 걱정하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은 EU통합 같은 동북아 공동체의 맥락에서 한일FTA등 아시아국가들과의 협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프랑스역할론이 동북아균형자론으로 이어졌다면, 이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은 2005년 1월 1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선진경제론으로 드러났다. 정태인(鄭泰仁) 전 국민경제비서관의 말에 따른다면 초기에 노대통령이 추구했던 대외개방은 국내의 노사정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미FTA는 외부의 일방적 충격에 의한 국내 산업재편으로 가는 것이다. 노무현정부의 자주국방이 박정희식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분명치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선진경제론’또는 ‘선진한국’은 박정희식 근대화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실제로 선진경제론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이념적으로 무슨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라는 발언에서 시작해 2005년 6월의 대연정 제안까지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 시기 노대통령이 추구한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과 동반성장 전략은 박정희식 근대화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언론들이 대통령이 경제에 ‘올인’했다고 치켜세운 이 회견에서 노대통령은“써비스산업 육성과 개방형 통상국가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서“선진경제의 토대를 확실히해 광복 60주년인 올해를 선진한국으로 가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개방형 통상국가 전략, 써비스산업 육성, 선진경제 등은 그뒤 한일FTA가 아닌 한미FTA추진에 그대로 적용됐다. 그럼에도 2005년 초까지만 해도 노무현정부가 추진한 협력의 무대는 동북아였고, 그 방향은 유럽통합에서의 프랑스를 모델로 삼은 동아시아 지역통합과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이었다.

 

 

4. 마무리하며

 

김대중정부의 남북 화해협력은 6·15공동선언에서 언급된 것처럼 ‘민족공동체의 균형발전’에 머물러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경의·동해선 연결을 계기로 ‘철의 씰크로드’라는 큰 틀에서 남북관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외연의 확장에 불과하며 물류적 관점에서 남북협력을 중국과 러시아 등 대륙으로의 진출로 보는, 상대적으로 ‘단선적인’인식에 그친 것이다. 이에 반해 노무현정부는 남북 화해협력을 평화와 번영의 개념으로 확대발전시키면서 민족공동체의 균형발전을 넘어 동북아중심국가 전략 위에서 파악함으로써 남북관계와 주변국가의 협력을 상호연계시키는 입체적 관점을 보여주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유럽통합처럼 동북아에도 공생의 질서가 실현되는 꿈을 언급했다. 그는“부산에서 빠리행 기차표를 사서 평양 신의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날을 앞당길 것”을 선언했다. 노대통령이 2004년 하반기 외교장정에서 제시한 ‘노무현 독트린’은 그 꿈을 국제무대에서 펼쳐 보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2005년의 외교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개방적 통상국가 전략과 선진경제론에 이은 한미FTA공식협상과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한 2006년 1월의 ‘한미동맹 동반자관계를 위한 전략대화’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은 동북아시대의 지역협력이라기보다는 한미동맹 강화로의 후퇴로 평가할 만하다. 쏘르본느대학 연설의 프랑스역할론은 어디로 갔는가? 2005년 노대통령이 보여준 것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과의 대서양연합에 입각해 유럽통합에 제동을 건 영국의 행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05년의 외교행보는 노무현 독트린의 수정으로 봐야 하는가?

유럽과 동북아의 조건은 판이하다. 이를 무시한다 해도 동북아에서프랑스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유럽통합은 거대 독일에 대한 견제와 프랑스·독일의 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동북아에서 한국이 프랑스가 되려면 독일 같은 일본이 필요하다. 프랑스 등 주변국들이 독일통일을 인정하는 대신, 독일은 그들의 우려를 받아들여 프랑스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동서통일과 유럽통합의 동시병행 전략을 택했다. 가해와 피해의 갈등관계는 미래지향적 협력을 통해 화해로 갈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일 비판에서 자주 독일의 예를 드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2004년 12월 이부스끼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일관계를 그러한 방향으로 진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2005년 3월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이 ‘타께시마(竹島)의 날’을 제정하는 조례안을 상정하고, 주한일본대사의 독도발언을 거쳐 한국정부의 강경대응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 속에서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2005년 3월 17일 이른바 ‘대일독트린’으로 불리는 NSC상임위가 발표한 성명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제2의 한반도 침탈행위” “대한민국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규정했고, 3월 23일 대통령은 대국민 편지에서 일본과의“각박한 외교전쟁”을 언급했다.

2005년 3월 노무현정부의 대일독트린은 동북아시대의 비전을 제시한 노무현 독트린과 충돌한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 독트린의 수정이라기보다는 좌절로 봐야 할 것이다. 일본이 독일처럼 과거사를 반성하고 지역협력의 외교노선을 추진하지 않는 한, 한국이 프랑스의 역할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에서 핵보유를 언급하면서 6자회담의 무기한 불참을 선언했다. 요꼬따 메구미(橫田めぐみ)의 가짜 유골 의혹을 부풀리며 대북제재 움직임을 보이던 일본은 강경대응의 또다른 명분을 찾았다.

2005년 6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타난 한미동맹 강화라는 노대통령의 선택은 긴박한 핵위기와 타협하기 어려운 일본과의 ‘외교전쟁’속에서 내려진 것이다. 핵심은 한미동맹·동반자관계의 강화를 통한 핵문제 해결이다. 그 연장선에 9·19 공동성명이 있는 것이며, 11월 경주 한미 정상회담의 ‘한미동맹과 한반도 평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미동맹 및 협력관계의 강화가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아시아 협력,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이라는 방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같은 시기인 2005년 11월 후 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방문에서 한중 정상은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심화 발전시켜나가기로 했다. 또 한국은 중국과의 교역규모 1천억 달러 국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에 대한 배려로서 MES(시장경제지위)를 부여했다. 한편에서는 한미 경주선언을, 그에 앞서서는 경제·통상·외교·안보 등 7개 분야에서 협력을 망라한 한중 공동성명을 채택한 것이다.

동북아 질서를 전망할 때 중국의 부상과 영향력 확대는 핵심변수다. 그럼에도 앞으로 일정기간은 미국의 패권적 우위가 지속된다고 본다면 역내 힘의 축은 미일동맹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미중간 갈등과 협력의 구도가 한편에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선 미국을 대리하는 일본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예상된다. 이런 구도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동맹의 재편은 그러한 방향성 위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존의 ‘한·미·일’삼각구도를 복원해 미국의 패권구도에 편승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미국이 볼 때 한일 역사문제는 이 삼각구도 형성의 장애물이다. 노대통령은 일본과의 각박한 외교전쟁을 선언했고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서 보여주었듯이 미일동맹과 대중관계에서 양자택일을 회피하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다. 노대통령은 동북아균형자론이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 있음을 분명히했지만, 과거처럼 해양 대 대륙의 대결구도로 가는 것은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일동맹을 통한 중국봉쇄엔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더라도 한중일의 협력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 거기서 머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핵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론이 한계에 부딪힌 것만은 분명하다.

일본과 중국의 패권적 경쟁양상이 지속되고, 일본이 미국의 중국 견제를 대리하면서 중일갈등이 지속되는 한, 노무현정부의 동북아 협력은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한국이 이런 이중의 갈등구도를 나서서 풀 수는 없다. 중일간의 갈등을 푸는 것은 두 나라의 일이다. 게다가 북핵문제는 여전히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노무현정부가 추진해온 동북아균형자론과 동북아시대의 비전이 동맹의 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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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겨레 선진대안포럼 대토론회 중 서동만의 발언, 『한겨레』 2006년 3월 28일.
  2. 물론 대화국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 들어 북핵대화의 시작이며 중국이 당사국이자 중재자로서 나선 2003년 4월 23일의 뻬이징 3자회담은 핵문제를 둘러싼 군사적 대립과 미사일 발사 위기라는 숨가쁜 상황 속에서 이뤄진 타협의 결과였다. 6자회담의 협상국면도 북미간의 근본적 불신으로 긴박해진 대치국면에서의 숨고르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백낙청 「곱셈의 정치는 가능할까」, 『창비주간논평』(magazine.changbi.com) 2006년 6월 6일.
  4. 정부는 2004년 7월 미국과 용산기지 이전합의서(UA: 포괄협정/IA: 이행합의서) 및 연합토지관리계획(LPP) 개정합의서를 타결하고, 8월에 합의서에 가서명한 뒤 10월에 정식 서명했다. 그리고 12월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또 주한미군 12,500명을 2004년부터 2008년까지 3단계에 걸쳐 감축하기로 합의했다. 1단계로 미2여단과 일부 전투부대 및 군사임무전환 관련부대 등 5,000여명을 2004년 말까지 감축했다. 2단계로 2005년 3,000명, 2006년 2,000명으로 구분하여 2년간 5,000명을 감축하기로 했다. 3단계로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지원부대를 중심으로 2,500명을 감축할 예정이다.
  5. 주한미군의 일방적 감축통보가 2차 북핵위기의 와중에, 그것도 한국에 대한 이라크 추가파병 요구와 함께 나왔던 것을 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얼마나 ‘동맹의 상식’을 무시한, 때로는 위협적인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6. 정부는 작계5029가 전시상황과는 구분되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준전시상태로 규정하는 것이기에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한국의 관할권 행사를 분명히하는 방향에서 협의를 진행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5027의 경우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관련해 재검토돼야 한다. 한국군의 작전계획이 미군의 극동아시아 작전계획의 일부인 5027을 쓰고 있고, 모든 한국군 부대의 전시작전계획은 이를 수행하기 위한 세부계획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는 이 5027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5027을 그대로 둘 경우 한국 대통령의 전시작전통제권 행사는미국이 세운 계획을 대신 수행해주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7. 이와 관련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한국은 강대국이 아닙니다. 한때 식민지배를 당했고 아직도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에서 프랑스와 같은 역할을 하고자 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 역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고, 해를 끼친 일도 없었습니다. 주변국 모두로부터 어떤 경계의 대상이 아닙니다. (…)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시대에 침략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고, 그후 지금까지도 주변국가의 깊은 불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동북아의 질서를 주도하려 한다면 주변국들이 불안해할 우려가 있습니다. 중화주의가 패권주의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불안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한국의 주도적 역할과 선택이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입니다.”